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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가스가스가(222) 팔로워 이벤트 답례글입니다. 사스가님께 드려요♥
※ 오이스가쿠로가 동거하는 이야기입니다. 삼각이지만 연인보다는 가볍고 친구보다는 묵직한 느낌의 관계입니다.
※ 편의상 '오이스가쿠로'로 작성했지만 우위성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유례없는 폭염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다. 월세가 싼 대신 관리비며 냉방비가 그대로 나가는 좁은 자취방에서 덩치 큰 남자 셋이 옹기종기 살다보면 ‘더워 죽겠다’같은 소리가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이제 막 6월의 초순을 지난 초여름,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기를 벌써 며칠 째였다. 더우면 찬물로 샤워를 하라는 스가와라의 말에 수도세가 더 나오겠다며 쿠로오는 낄낄거렸다. 그 말엔 오이카와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찬물로 밤새 땀에 젖은 온몸을 씻어내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서 오이카와는 까무룩 밀려드는 졸음도 떨쳐내고 샤워부터 했다. 축축하게 젖어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머리카락 위에 흰 수건을 얹어두고 이불과 사람이 엉켜 늘어져있는 거실로 나왔을 때에야 오이카와는 그곳에 스가와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기를 탈탈 털면서 오이카와는 발끝으로 쿠로오를 툭툭 건드렸다.
“코우시 또 안 들어왔어?”
잠에 빠진 쿠로오에게서는 대답이 없다. 학기말이라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라고 툴툴거리던 쿠로오는 아마도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 들었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눈을 들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우드락 뭉텅이를 바라보았다. 본래 커다란 판이었을 그것은 칼로 예쁘게 오려져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쿠로오는 저것 때문에 요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었다.
“안 들어온단 얘기도 없었는데. 쿠로쨩? 코우시 연락 없었어?”
“……걔 안 들어오는 거 하루 이틀이냐. 신나게 과제하다가 지금쯤 과방에서 자고 있겠지 뭐.”
“너도 코우시도 도대체 뭘 하는데 그래?”
쿠로오는 건축학, 스가와라는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는 흔한 공대생들이다. 방세 좀 아껴보자고 이 좁은 방에 거대한 남정네 셋이 함께 살기 시작한 게 불과 4개월째인데, 저 두 사람은 특정한 시기가 되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했다. 그렇게 바쁘냐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쿠로오는 버석하게 마른 미소를 지으며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고, 스가와라는 그것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렇게 되면 과제가 더 늘어나는 거 아니냐고, 끔찍한 소리 말라며 쿠로오의 등판을 힘차게 후려쳤었다. 오이카와는 그들과는 좀 먼 학과에 다니고 있는 터라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오래지 않은 기간 그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쪽 학과 교수들이 변태가 틀림없음을 확신했다.
오이카와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틈에 쿠로오는 푹 젖은 물귀신처럼 흐느적거리며 욕실로 갔다. 거울 너머로 힐끗 쿠로오를 바라본 오이카와는 짧게 혀를 찼다. 확실히 처음 동거하기 시작한 4개월 전보다 좀 마른 것 같다. 끼니 거르기는 기본, 수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어깨뼈의 마디가 도드라졌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말리며 중얼거렸다.
“코우시, 밥은 먹었으려나.”
그렇게 힘든 걸 하려면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 할 텐데. 쿠로오나 오이카와에 비해 유난히 작고 마른 스가와라는 다른 두 사람보다도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굶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더불어 식사까지 엉망이라 저러다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한 적도 있었다. 까맣게 암전된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짧게 문자를 보냈다. 점심 먹을래? 아침을 먹기엔 좀 늦은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점심 식사를 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스가와라에게 더 이상 삼시세끼의 구별은 의미가 없을 것이리라.
“코우시랑 점심, 어때?”
“오늘?”
“응. 안 들어온 걸 보면 또 밤새 아무것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너는 잘 챙겨 먹잖아.”
“오이카와 씨가 쏘는 겁니까? 그러면 감사히 먹지.”
“닥쳐줄래요?”
“근데 얘 전화 안 받는데.”
“과방 어디 있는지 알잖아? 데려와, 수업 가기 전에 먹고 들어가게.”
라져. 쿠로오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오이카와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쿠로오의 우드락더미가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어 어젯밤에는 하는 수 없이 바닥에 탁상을 펴고 과제를 했다. 눈이 뻐근하니 오늘은 안경이다.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뿔테 안경을 끼고 오이카와는 운동화 뒤축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었다. 그의 등 뒤에서 쿠로오의 인사말이 들린다. 이따 보자, 오이카와는 싱겁게 대꾸했다.
* * *
스가와라는 고통 받고 있었다. 망할 팀 프로젝트가 나온 5월의 중순부터 말이다.
3학년에 재학 중인 스가와라는 운이 없게도 졸업을 앞둔 선배 둘과 같은 조가 되었다. 아무리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는, 학교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는 사람들이라지만 조금의 양심은 있을 거라고 믿었던 일말의 희망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취업 준비를 한다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게 어느덧 한 달이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 스가와라는 수업 시간에 마주치는 그들에게 우리도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하니 제발 시간 좀 내달라고, 가능한 한 자기가 맞추겠다며 애원했지만 애초에 말로 통할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스가와라에게 모든 것을 미루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덕분에 마감일을 딱 삼 일 앞둔 스가와라는 세 명 분량의 학기말 프로젝트를 홀로 끌어가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자신이 처한 상세한 상황과 함께 여러 증빙자료를 붙여 제출할 생각이었다. 에프를 맞고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있는 졸업이 와르르 무너져버렸으면, 스가와라는 그렇게 간절히 빌었다.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잠깐 눈을 붙인 건 30분 남짓, 해가 지고, 새벽이 오고, 다시 동이 틀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위장은 텅 비어있었다. 스가와라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이마가 평평한 곳에 닿으니 거짓말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일주일 내에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생활 패턴이 아주 망가져버렸다.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 영향으로 온몸이 쿡쿡 쑤셨다.
겨우 코드를 완성하고, 이제는 결과로 그래프만 뽑아 보고서를 작성하면 끝이었다. 좀 눈을 붙일까 했더니 하필 오늘은 또 3교시에 수업이 있었다. 종강은 언제 하는 건지, 스가와라는 가방을 챙기면서 느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눈앞이 휘청거린다. 잠을 못 자면 사람 몸이 이렇게나 망가진다는 것을 이번 학기에 절실히 깨달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느냐면, 스가와라는 지금이 무슨 수업인지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무려 강의실을 잘못 찾았다. 오늘도 일이 아주 안 풀리는 날이 분명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아채고 스가와라는 다시 강의실을 나와 혹여 늦을까 발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가와라는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는 망할 프로젝트 팀원을 만났다. 스가와라는 순간 발을 멈추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부족한 잠이나 잘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수업이야 다음에도 있지만, 이미 스트레스가 왕창 쌓여 예민해진 스가와라는 당장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구나 이른 아침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재수도 없고 싸가지도 없는 선배라니.
스가와라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피곤으로 무거워진 발걸음을 부러 직직 끌고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 고생을 하게 만든 장본인을 지금 마주친다면 이성을 붙들고 있을 자신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도 나쁘고 게으른데다, 무책임한 그는 심지어 눈치까지 없었다. 일부러 시선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정면으로 걷는 스가와라를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붙잡아 세워놓고 황당한 인사를 건넸다. 차마 겉으로 티내지 못하고 스가와라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뱉었다.
“여, 스가와라! 수업 가는 길?”
알면 묻질 말던가. 스가와라가 인상을 썼다. 선배고 뭐고 지금 누구 비위를 맞춰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 우리 프로젝트 말인데. 보고서 양식이 올라왔더라고? 결과만 나오면 보고서는 내가 쓸게.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커피 한 잔 사줄게. 지금 내려갈래? 아니면 이따가?”
으득, 스가와라는 이를 갈았다.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단 한 톨의 미안한 감정도 없었다. 나는 선배고 너는 후배니 네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분명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당히 부려먹고, 적당히 얼러서 적당히 얹혀 가면 그만이라는 그의 속물근성에 스가와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선뜻 보고서를 쓰겠다고 하는 이유는 뻔하다. 조교가 올려준 보고서 양식 가장 뒤쪽에 팀원들의 프로젝트 기여도를 작성하는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이미 다 했어요. 밤새 그거 붙들고 하느라 이 모양이고.”
“그, 그래? 보고서도 다 쓴 거야?”
“네, 물론이죠. 신경 하나 안 쓰고 꽤 큰 프로젝트 하나가 끝났으니 아주 행복하시겠어요. 졸업 준비는 잘 하고 계세요? 어제도 술 마시고 제 동기 집에서 진상 부렸다고 들었는데.”
스가와라가 생긋 웃는다. 피곤한 낯이었지만 스가와라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를 마주보고 있던 선배란 작자는 점점 얼굴이 파래졌다.
“졸업 준비며 취업 때문에 아─주 바쁘다고 프로젝트 미팅 한 번 안하고 저한테 다 떠넘기시더니 벌써 취직 하셨나 봐요. 보고서 양식 보셨으면 마지막 페이지에 조원 기여도 작성하는 부분 있는 거 아시죠? 아이템 찾는 것부터 기획, 타임라인 짜는 거, 코딩 및 제작, 보고서 작성까지 싹 다 제가 했으니 그건 그렇게 두고, 선배 두 분은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졸업하느라 바빠서 후배한테 다 떠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
“너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냐? 이번에 취업 안 되면 부모님 볼 낯도 없다고 내가 양해 좀 부탁한다고,”
“부탁? 부─탁이요? 명령이 아니고? 나는 일절 손대지 않을 생각이지만 내 학점은 네가 책임져다오, 하고 둘이 손잡고 내뺀 주제에 뭐, 양해? 부탁? 제가 삼인 프로젝트 혼자 다 하느라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딴에는 졸업반이라고 선배들 전공 수업 하나 듣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프로젝트가 이것만 있는 줄 알아요? 이번 주 마감만 세 개에요. 누구는 잠도 못 자고 지들이 미뤄놓은 똥 치우고 있는데 어딜 가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어요, 이 씨발 새끼야?”
학기말, 공학관 건물에는 이른 시간부터 유난히 사람이 많다. 기말 언저리에 폭탄처럼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말 프로젝트와 과제들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로비에서 밤을 꼴딱 지새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관총으로 갈기는 것 마냥 넋이 나간 선배에게 와구와구 쏟아내던 스가와라는 결국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빽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그 우렁찬 목소리는 공학관의 넓디넓은 로비를 그득하게 울렸고,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스가와라는 씩씩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계속해서 쌓인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배고픔에서 비롯된 예민함은 결국 제 주제도 모르는 뻔뻔한 작자 때문에 화산 폭발하듯 펑펑 터져 나왔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주위에 은근슬쩍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앞에 서있는 선배는 안 그래도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프리라이더였는지 숙덕이는 목소리 중에는 그를 겨냥한 목소리도 분명히 있었다.
“뭐, 뭐? 무슨 새끼?”
멍청하게 자리에 굳어있던 그는 저 사람 또 저래, 하는 군중의 목소리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덩치도 스가와라보다 배는 좋은데다 그는 그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가와라는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몸도 정신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될 대로 되라 싶었다. 이러다가 몇 대 맞으면 경찰서 가서 합의금이나 뜯어낼 생각도 속으로는 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다시 말해줘요? 씨발 새끼요, 씨발.”
두툼한 손바닥이 스가와라의 어깨를 밀쳤다. 귓등을 때리는 욕설은 덤이었다. 피로가 누적된 몸뚱이는 쉽게 뒤로 밀렸다. 중심을 잡지 못해 다리가 꼬였고,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었다. 넘어진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스가와라는 뒤늦게 두 팔을 휘저었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팔뚝이 등 뒤의 무언가에 툭 걸렸다. 동시에 스가와라의 눈앞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바닥으로 꺼지려던 어깨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 치는 건 곤란한데요.”
정신을 차린 스가와라는 까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눈두덩이 위로 미열이 오르는 것을 깨닫고, 스가와라의 시야를 까맣게 가리고 있는 것이 쿠로오의 손바닥임을 알았다. 조금 마음이 놓여 스가와라는 아예 쿠로오에게 등을 기댔다. 묵직하게 무게가 실리자 쿠로오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안 괜찮다는데 어쩔 거요? 합의 안 해줄 건데.”
“미, 밀기만 했는데 무슨! 이 새끼가 먼저 시작했다고!”
“뭔 새끼?”
쿠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스가와라가 팔을 올려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환하게 시야가 트였다. 확장된 동공으로 들어온 빛은 너무 밝았다. 인상을 쓰고 스가와라는 눈앞의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리 작은 체구는 아니어도 같은 신장에 비해 체중이 좀 덜 나가는데다 근육이 잘 붙는 몸도 아니어서 솔직히 만만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는데, 타이밍 좋게 나타난 쿠로오 테츠로는 그가 쉽게 볼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김이 새버렸다. 그는 더 이상 스가와라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눈앞이 휘청했다. 수면 부족은 무서운 것이었다. 허공에 아지랑이가 피더니 순식간에 무릎이 꺾였다. 쿠로오가 말릴 새도 없이 스가와라는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그 덕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밀친 것과는 사실 하등 관계가 없긴 했지만, 뭐 주목 받기에는 딱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어지러움에 스가와라는 손을 뻗었다. 쿠로오에게 좀 일으켜달라는 무언의 요청이었다.
“스가쨩!”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의 안면이 팍 굳어졌다. 이 발랄하고도 대책 없이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스가와라는 쿠로오를 올려보았다.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 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뭐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다쳤어? 병원 갈까? 아니면 약국이라도,”
“호들갑 그만 떨고 일으켜줘.”
“세─상에, 얼굴 좀 봐! 왜 이렇게 됐어, 누가 그런 거야!”
“뭐 이 자식아?”
그 말을 끝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번쩍 둘러멨다. 훅 높아진 높이 탓에 당황한 스가와라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온갖 시끄러운 난리를 치며 건물 밖으로 휭하니 사라져버렸다. 아직은 한가로워야 할 오전 시간, 건물의 로비는 간만에 복작복작해졌다. 쿠로오는 느긋하게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눈앞에 서있는 퉁퉁한 사내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뭐, 저 녀석이 함부로 남한테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그럴 녀석은 아닌데.”
쿠로오가 먼저 운을 뗐다. 당황한 얼굴로 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가방끈을 고쳐 메고 쿠로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량한 후배 등에 빨대 꽂고 피 빨아먹을 생각하지 말고, 선배면 선배답게 자기 살 길은 알아서 찾으셔야지.”
싸늘하게 얼어버린 로비의 공기를 헤치고 쿠로오는 등을 돌렸다. 바깥은 날이 좋았다. 햇빛이 쨍쨍해서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를 업고 간 오이카와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쿠로오는 짧게 혀를 찼다.
* * *
수업도 빼먹고 점심마저 건너뛰고 잠부터 자야겠다며 스가와라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주섬주섬 이불을 깔고 푹신한 그 위에 몸을 누인 스가와라는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팔목을 쥐고 흔들며 밥 먹고 자라고, 마치 지금 당장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마치 죽을 사람을 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스가와라는 짜증을 부리며 빨리 학교나 가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뒤이어 집에 발을 들인 쿠로오의 손에는 하필 근처에서 산 죽이 들려 있었다. 반쯤 둘의 강요로 스가와라는 들어가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했다.
“그래도 좀 살 것 같네.”
배고픔이 가셨다. 허기가 사라지니 식곤증이 몰려왔다. 몸이 흐물흐물했다. 스가와라는 먹자마자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 위를 뒹굴고 다녔다. 모처럼 셋이 있으니 간만에 에어컨 좀 틀어보자고 쿠로오는 리모컨을 들었다.
“그 망할 자식, 걔지? 졸업 핑계대고 너한테 다 떠넘기고 튄 놈.”
“어, 맞아.”
“개새끼.”
“졸업 못할 걸. 우리 교수님 프리라이더 엄청 싫어하시거든. 에프 맞고 취직이고 졸업이고 바이바이.”
오이카와의 손가락 끝이 스가와라의 뒤통수를 가볍게 문질렀다. 무릎을 베고 누워 스가와라는 푸스스 웃었다. 더운 여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작은 자취방 안, 시원한 이불 위를 뒹구는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간만에 편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머리 위에서 오이카와가 대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우리 코우시를 이틀이나 못 봤다고. 그것도 아침에! 코우시가 자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사랑스러운데!”
“풍년이다, 진짜. 너 사진 찍어놓고 그런 건 아니지?”
“보여줄까? 오이카와 씨의 코우시 숙면 컬렉션.”
“죽는다, 진짜.”
“그만하고 애 좀 재워라, 오이카와.”
“쿠로오도 보내줄까? 스페셜 컬렉션이야.”
“콜.”
미쳤어. 스가와라가 웃으며 말했다. 슬슬 졸음이 온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몸을 굴려 오이카와의 무릎 위에서 빠져나온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베개를 끌어안았다. 쿠로오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
“잘 거야?”
“응. 더 깨어있으면 죽을지도 몰라. 너희도 빨리 학교 가, 수업 있잖아.”
오이카와는 아쉬운 소리를 했다. 스가와라는 핑계고, 사실 수업에 가기 싫은 건 아니냐고 쿠로오는 정곡을 찔렀고 오이카와는 질색을 했다. 주위가 시끌벅적해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베개로 후렸다. 빨리 가라고. 칭얼거림이 섞인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따, 저녁에. 술이라도 먹자…….”
목소리가 한층 몽롱하게 잠겼다. 쿠로오는 가방을 챙겨들었고, 오이카와는 에어컨을 송풍으로 바꿨다. 주위와 격리되기 시작한 귓속으로 잘 자라는 둥, 이따 보자는 둥의 친근한 목소리가 멍멍하게 울렸다. 스가와라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스가와라를 혼자 방에 두고 쫓겨나듯 밖으로 나온 둘은 느린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었다. 스가와라 앞에서 오두방정을 떨던 오이카와는 한층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셋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을 뽑으라면 쿠로오는 단연 오이카와를 고를 것이었다. 아까도 쿠로오가 먼저 스가와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분명 경찰이 오는 불상사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굴 굳히고 있어봤자 소용없어. 어떻든 스가와라가 잘 처리한 것 같으니 적당히 넘어가라고.”
“괘씸하잖아. 코우시, 안 그래도 최근에 스트레스성 위염 때문에 약도 먹었는데.”
“이따 같이 술 먹으면서 좀 씹지 뭐. 괜히 나서서 스가와라 곤란하게 만들진 말고.”
“그렇게 무식한 사람은 아니네요. 그런 건 나보다 쿠로쨩이 더 하지?”
오이카와가 빙긋 웃었다. 날이 쨍쨍하다. 햇볕에 닿은 피부가 타버릴 것처럼 화끈거렸다.
셋이 함께 지낸 지 넉 달째였다. 좁아터진 방구석에 침대도 없이, 대충 이불만 몇 장 깔아두고 건장한 청년 셋이 뒹굴며 자고, 시험 기간엔 함께 밤도 새고, 이따금씩 있는 재수 없는 사람에 대한 뒷담이라든지, 서로에 대한 격한 애정 표현─물론 대부분 오이카와가 스가와라에게 퍼붓는 애정공세지만─따위를 벌써 넉 달째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늘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푸른 하늘을 힐끗 바라본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역시, 셋이 좋지?”
*
사스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아아아... 222 팔로워 이벤트였는데 6월이 다 지나가는데 이제야 올리네요ㅜㅜㅜ
건네주신 썰들 셋 다 너무 좋아서 진짜 다 써드리고 싶었는데 근래에 너무 바쁘게 살고 있어서ㅠㅠ 제가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소재를 골랐습니다.
뭘 써도 다 길어지는 병이 있어서ㅠㅠㅠ 짧은 에피소드만 썼는데 맘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참여 감사드립니다 ㅠwㅠ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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