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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2016년 7월 10일(1부), 2016년 12월 31일(2부)에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티스토리에 공개된 부분은 1부의 1, 2화 부분으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 자세한 사항은 관련 공지를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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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풍 고전AU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 여장 요소가 있습니다.

 

 

 

 

 

 

 

 

 

 

제국력 2449, 대륙의 중심에 자리를 잡은 연가(孌佳)국은 북서지방을 다스리던 철례(鐵禮)를 무너뜨리고 대륙을 통일한다. 14대 오이카와 황제가 연가의 패권을 쥐고 북방 정벌을 시작한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주변의 제후국까지 모두 흡수한 연가는 무력 흡수에 대한 반발을 줄이고자 각 국의 왕후들을 위해 황궁의 별 터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만일 그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다섯 살이 되는 해에 황궁으로 불러들여 그 자손들을 교육케 했다. 사실상 볼모나 다름이 없었지만 나라를 잃은 망국의 왕후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뱃속에 든 아이가 불행하게도 아들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달이 없는 그믐밤, 빈곤한 티만 겨우 벗은 낡은 기와집에서 생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집의 식솔이라곤 전쟁 포로로 길을 떠나던 날, 지아비의 부탁으로 딸려온 유모 하나와 본래 장군이었던 자의 여식 둘뿐이었다. 산통이 밤새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 낡은 기와집을 찾는 것은 불길하게 울어대는 까마귀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가 타는 목소리가 커졌다. 입에 재갈을 문 채 스가와라 나오코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마지막 비명이 터지고 나오코는 허물어지듯 눈을 감았다. 유모가 들어 올린 붉은 빛의 살덩이는 손을 뻗어 만질 수조차 없었다. 제발, 남자 아이가 아니기를. 까무룩 깊은 잠에 빠지며 나오코가 마지막으로 빌었던 소원은 결국, 아이에겐 닿지 못했다.

 

 

 

 

 

 

 

아름다운 그림은 행주님(@0320_HQ)

 

애별리고

愛別離苦

오이카와 × 스가와라

w. Ryria

 

 

 

 

 

 

 

 

 

 

 

 

 

연가의 수도 서월주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축제라도 벌이듯 집집마다 연가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깃을 달았다. 대륙 곳곳에서 찾아온 상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덩달아 신이 나 떼를 지어 다니며 떠들기 바쁜 동네 꼬마들부터 이른 시간에 산책을 나온 귀족 아가씨, 무늬가 수려한 도포를 휘날리며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도련님들까지, 오일장이 열리는 날보다 더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들떠 있는 것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쿠로,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잘 붙잡고 있어.”

허허, 누가 할 소릴.”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황궁이 개방되는 딱 하루, 이제 막 성인이 될 황제 적생의 17세 생일, 그리고 성인식이 거행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리는 이제껏 본 적 없던 화려한 색채들로 물결을 이뤘다. 황궁 방문에 잔뜩 들뜬 사람들의 때 이른 치장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다른 의미로 들떴다. 다섯 살 때 황궁으로 불려가 단 한 번도 세상 밖을 구경해본 적이 없는 터라 오늘의 의미가 남달랐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스가와라는 호위인 쿠로오와 함께 황궁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맑게 갠 하늘, 구름조차 없는 화창한 푸른색에 절로 가슴이 벅찼다. 높디높은 황궁 담벽으로 가려진 진왕산맥의 푸른 공기도 전에 맡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황궁이 개방된 오늘, 스가와라에게 주어진 이 단 하루는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봐, 코우시. 신난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해.”

,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애도 아니고……. 쿠로오는 말끝을 흐렸다. 분명히 스가와라의 귀에도 들렸을 테지만 오늘은 모른 척했다. 고작 담벼락 하나로 나뉘어있는 세상일 뿐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스가와라는 쿠로오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흥정하는 소리, 호객하는 소리들로 북적이는 장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수도에서 가장 큰 대장간 조합의 판매대에는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이는 검들이, 그리고 바로 옆 장신구 가게에는 그것에 어울리는 색색의 검집 끈 등의 장식들이 놓여 있었다. 눈을 빛내며 달려들려던 스가와라는 쿠로오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아가씨, 본인 신분도 좀 생각하셔야죠?”

네 거라고 핑계대면 되잖아.”

저런 곳은 귀족 아가씨들이 드나들긴 험악하다고.”

그럼 부부인 척은 어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애초에 스가와라를 완벽하게 말릴 방법 따위 없다는 것을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맑게 웃으며 대장간을 향해 팔랑팔랑 뛰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곤 쿠로오도 그 뒤를 따랐다.

 

대장간 특유의 쇠 냄새, 망치질로 단련된 우락부락한 사내들만 우글우글한 곳에 난데없이 나타난 보랏빛 옷의 아가씨는 그곳만의 드센 분위기를 한순간에 잠재울 만큼 그 존재감이 강했다. 판매에 열을 올리던 주인도, 붉게 달궈진 쇳덩이를 내리치던 대장간 잡부도, 그 옆에서 장신구를 팔던 아주머니도,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밝게 빛나는 그 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너 눈에 엄청 띈다고.”

 

 

가까이 다가온 쿠로오가 뒤에서 귓속말을 했다. 그러건 말건 스가와라는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들의 유려한 모양새에 감탄하기 바빴다. 가까이 다가온 대장간 주인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말씨로 물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테츠로, 어때요?”

 

 

. 갑자기 튀어나온 존댓말이며 이름에 쿠로오는 헛기침을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쿠로오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망울에 쿠로오는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 아니 뭐.”

길이가 좀 긴 것은 없나요? 보시다시피 키가 커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쿠로오를 대신해 스가와라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마침 바다 건너 서쪽에서 모셔온 좋은 물건이 있다며 주인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따졌다.

 

 

무슨 속셈이야.”

날 바꿀 때 되지 않았어?”

내 검은 아직 멀쩡해.”

이 참에 하나 더 장만해. 내가 살게.”

너 또,”

아저씨! 죄송해요! 긴 것은 괜찮고 소태도 정도의 짧은 칼이 필요하다네요!”

!”

 

 

결국 상체 길이 정도의 짧은 검을 하나 구매했다. 쿠로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대장간 주인은 부러운 눈치로 스가와라 몰래 좋으시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당장에라도 환불하고 저 망나니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오늘이니까. 쿠로오는 하는 수 없이 벌써 삼십 보는 앞서 간 스가와라의 뒤를 쫓았다.

 

스가와라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다. 건강하게 태어난 망국 철례의 마지막 왕자였다. 그러나 그는 내내 여자로 자랐다. 연가의 유일무이한 황제 적생 오이카와 토오루의 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코우시! 적당히 하고 가야 돼. 황궁 사람들은 성인식 필참이라고.”

 

 

쿠로오는 그런 스가와라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그의 호위 무사였다. 어릴 적부터 같이 나고 자랐으며 자연스럽게 스가와라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딱 셋뿐이다. 쿠로오와 쿠로오의 어머니, 그리고 스가와라의 유모였던 사람. 스가와라의 어머니는 그를 낳던 날 돌아가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라 그리운지도 모르겠다며 웃던 얼굴을 쿠로오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코우시?”

 

 

쿠로오가 잠깐 옛 기억들에 잠겨있던 사이, 스가와라는 쿠로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오전의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스가와라의 긴 회색 머리칼이 은빛으로 빛났다.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장신구들로 꾸미지 않아도 풍성했다. 귀 뒤쪽부터 얇게 땋아 내린 한 가닥 머리는 가지런히 내려와 스가와라의 가슴께에 놓였다. 은색 자수가 수놓인 보라색의 옷에는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스가와라는 이런 시장 통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리 기품 있게 행동하지도, 조신하게 걷지도 않았지만 특유의 맑은 느낌은 그가 가지는 고유의 분위기였다. 장사꾼을 상대로 재치 있게 건네는 흥정도, 뛰어다니다가 그와 부딪친 동네 꼬마에게 보여주는 해사한 미소도 모두 그런 것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가게 앞에서 스가와라가 멈췄다. 금방 자신에게 드리우는 옅은 그림자를 느끼고 스가와라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쿠로오, 이것 봐. 하나 사서 같이 먹,”

 

 

쿠로오가 있을 왼쪽을 돌아보며 스가와라가 말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의 일렁임에 스가와라의 눈가에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코끝에서 새끼손가락만큼 떨어진 곳에 빛을 받은 금색 눈동자가 깜빡였다. 어디선가 맡은 적 있는 고급스러운 향기도 함께 흘렀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던 스가와라가 뒤늦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주는 거?”

…….”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 됐네.”

 

 

남자가 빙긋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경단 세 개가 예쁘게 꽂혀있는 나무막대를 집어 든다. 그제야 조금 놀란 얼굴로 스가와라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을 마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바람에 결국 제 것은 사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뒤를 따라붙는 이름 모를 남자 한 명을 얻었다.

 

 

아가씨는 황궁 사람이야?”

 

 

낯선 사람이 말을 걸 때에는 항상 신중하라고 쿠로오가 자주 말했었다.

 

 

? 옷차림 보니까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 이거 한 입 먹을래?”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마치 원래 알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가 무서워 스가와라는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워낙 인파가 많아 그래봤자 속도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일단 쿠로오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먼저 처음 들렀던 대장간으로 갈 생각이었다. 쿠로오도 스가와라를 찾고 있을 게 분명했고, 적당한 장소가 그곳이란 건 그 역시 직감적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아가씨 혹시 벙어리야? 대답 좀 해줘, 나 혼자 얘기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만에 하나 목소리를 들킬지도 모르니 항상 말을 아끼라던 쿠로오의 말이 떠올랐다. 악의가 없다면 이 사람은 그저 성격 좋은 부잣집 도련님일지도 몰랐지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요새에서 살아가는 스가와라에게는 쿠로오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칼날 그 자체였다.

 

 

이크.”

 

 

바쁘게 걷던 중에 뒤를 쫓아오던 남자에게 팔을 잡혔다. 뒤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스가와라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본 정면에는 감색 철릭을 두른 남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황궁의 사람들이다. 지금 성인식 준비로 한창 바쁠 텐데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연가의 문장이 은으로 수놓인 청색 건을 두르고 있다. 황실의 사람을 호위하는 무관들에게 주어지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인물들의 등장에 스가와라는 빤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들의 걸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챘다.

 

 

, 아니 도련님!”

 

 

우렁찬 목소리가 장터에 깔렸다.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들이 조성하는 위압감에 바짝 얼어있었다. 여전히 붙잡은 스가와라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등 뒤의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벌써 잡혔군.”

……!”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안 봐도 뻔해.”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또 탈주를 하십니까?”

탈주라니? 정당하게 허락을 받은 일이라고.”

당장 돌아가셔야 합니다.”

 

 

스가와라는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등 뒤의 남자는, 그냥 듣기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차림은 일반 귀족집의 아들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눈앞에 있는 무관의 차림도 그랬고, 그를 찾기 위해 수행원이 넷이나 이 장터를 돌아다녔다는 것도 그의 신분이 보통 귀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그보다 이 분은?”

나한테 경단 사준 아가씨.”

 

 

몇 마디 주고받던 그들의 화제가 스가와라를 향했다. 여전히 붙잡혀 올라간 팔이 그제야 저렸다. 스가와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댁이 어디십니까?”

?”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아뇨. 일행이 있어서…….”

뭐야, 아가씨 벙어리 아니잖아?”

그 입 다물, 조용히 계세요.”

 

 

대꾸 한 마디 했다가 스가와라는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무관의 말로 다시 시작된 가벼운 말다툼을 틈타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붙잡힌 팔이 그제야 걸렸다. 남자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스가와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스가!”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한참을 헤맨 건지 숨이 벅찬 쿠로오가 달려와 스가와라의 옆에 섰다. 항상 평온하던 그 특유의 표정도 지금 스가와라를 둘러싼 묘한 상황에 조금 굳어져 있었다. 슬쩍 스가와라를 뒤로 물리고 쿠로오는 눈앞에 선 낯선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폐를 끼쳤습니다.”

아니, 별로.”

 

 

당연하다는 듯 남자가 쿠로오를 하대한다. 쿠로오는 꽤 깊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예상외의 인물의 등장에 남자가 미세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스가와라는 서둘러 쿠로오를 잡아끌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다가, 스가와라는 뒤늦게야 눈앞의 낯선 남자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이름이 뭐야?”

 

 

산뜻하던 아까의 목소리와 다르게 낮게 깔린 음이 묘하게 권위적이다. 쿠로오가 스가라고 부른 것에 흥미가 생긴 듯 보였다. 스가와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쿠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쿠로오는 남자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는 온전히 스가와라에게 결정권을 넘긴 듯 했다.

 

 

그만하고 가시죠.”

 

 

스가와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무관이 남자의 시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가와라는 다시 그를 향해 목례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쿠로오를 붙들고 뒤돌아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스가와라는 뒤통수에 꽂히는 예민한 시선을 그대로 느꼈다.

 

 

 

 

 

 

 

*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몰라. 시장 구경하고 있었는데 멋대로 따라왔어.”

 

 

황궁으로 돌아온 스가와라는 곧장 거처로 돌아갔다. 시장 바닥을 돌아다녀 먼지가 묻은 옷이 당장 처리가 힘들 만큼 더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또 한바탕 쿠로오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어쨌든 계속 걸어 다녔던 터라 잠시 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보아하니 보통 사람은 아니던데. 황실 소속이라고.”

그건 나도 알아…….”

황실과 관련된 핏줄의 남자라면, 황제가 모조리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니…….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늘의 주인공인 황자 정도인가.”

하지만 오늘이 당장 성인식인데, 그런 중요한 사람이 시장 바닥을 돌아다닐 리는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

 

 

먼지를 뒤집어쓴 회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주며 쿠로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따로 시종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도 연가의 녹을 받는 사람이라 정체를 숨겨야 하는 스가와라에게 쿠로오만큼 편한 존재가 없었다. 그 탓에 스가와라의 온갖 수발을 다 들고 있지만, 쿠로오는 불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아가씨, 너무 눈에 띈다고.”

미안.”

걸음은 또 빨라서 잠깐 한눈팔면 없어져서는. 애도 아니고 말야.”

미안하다니까.”

그래도, 별 일 없어서 다행이야.”

 

 

쿠로오는 망국 철례의 왕가를 수호하던 무관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한 뒤에 태어난 목숨이 어째서 아직까지 그 대의를 잇고 있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다.

 

 

, 다 됐다.”

 

 

갈아입은 옷과 어울리는 다홍색 끈으로 리본까지 매고 쿠로오는 다시 허리춤에 검을 찼다. 흐리게 보이는 거울 앞에 앉아 스가와라는 이제 눈앞의 낯선 자신에게 어색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제 처지를 떠올리곤 비죽 웃음을 흘렸다.

 

황궁 안은 평소와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진중하고 웅장한 느낌이 드는 건물의 외관과 다르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우아한 차림의 사람들은 마치 이곳이 야외 무도장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곳곳에 설치된 대형 깃발들이 붉은 파도처럼 울렁였다. 연회를 준비하는 백색 옷의 무희들도, 정갈한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황궁의 관리들도, 붉은 철릭을 차려 입은 황궁의 수호자들도 저마다 조금씩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전의 바로 앞, 넓게 펼쳐진 돌바닥 위에 붉은 비단이 수놓듯 깔려있다. 연가의 미래를 이끌 차기 황제, 열일곱이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대외에 나서지 않았던 신비로운 인물을 보기 위해 인파가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일반 관중들을 제지하기 위한 무관들의 선 뒤로 두툼한 방석과 상이 깔린 귀빈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상아색의 술병과 잔, 자리마다 한 명씩 붙어 있는 황궁의 나인들은 평소와 다르게 연한 하늘색의 옷으로 꾸몄다.

 

누가 봐도 즐거운 연회의 장이었다. 특별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는 황궁에 수도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 저마다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행사장에 발을 디딘 이후부터 스가와라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스가와라를 포함해 패전국의 왕후,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황궁 안의 사람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리한 감시를 위한 것이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공개되는 이러한 행사의 귀빈석에 그들의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그저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가와라에게는 이런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더구나, 혹시라도 오늘 시장에서 만났던 황실의 사람과 마주친다면 이름을 알려달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제게 어떤 호통이 내릴지 몰랐다.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연했다. 스가와라 홀로 굳은 얼굴로 방석 위에 앉아있었다. 쿠로오는 호위 무관의 신분이라 조금 떨어진 뒤에 서있어야 했다. 스가와라는 자꾸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을 풀어주고 싶어 마주치는 내내 쿠로오는 스가와라를 향해 웃어주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해가 조금 기울었다. 그림자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웅장한 관악기의 소리가 귀를 때렸다. 무언가 시작된다는 신호에 군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정전의 꼭대기, 가장 높은 장소를 덮고 있던 붉은 천이 걷히고 연가의 황제, 비로소 대륙의 패권을 쥔 진정한 지배자가 금빛 옷으로 몸을 두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환호가 터졌다.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 일제히 일어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귀빈석의 사람들, 웅장하기 그지없는 등장에 경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 자가 연가의 황제, 철례를 멸망으로 몰고 간 장본인,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수. 스가와라는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한 제국의 오랜 원을 이룩한 황제의 풍채는 과연, 평범한 인간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스가와라. 너무 긴장했어.”

 

 

등 뒤로 다가온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금방 시선을 떨어뜨린 스가와라가 고개만 끄덕였다.

 

황제의 짧은 연설이 끝난 직후 정전의 굳게 닫혀있던 문이 뱀처럼 열렸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오늘 성인식의 주인공의 얼굴은 면류에 달린 산호 구슬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훤칠한 키에 진한 갈색 머리카락, 금색으로 수놓은 붉은 용포자락은 옅게 불어오는 바람에 은은히 흩날렸다.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간 멎었다. 고요함을 지난 정적 뒤로 불어온 바람에 그가 쓴 면류의 구슬자락들이 여리게 흔들린다. 그 그림자 아래에 숨어있던, 이 나라의 단 하나뿐인 적통 황자의 갈색 눈동자는 자신을 우러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스가와라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도대체 그 아가씨가 누군데 이 중요한 시간에 저보고 그 아가씨를 찾아오라는 겁니까?”

처음 만난 궁 밖의 사람이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아가씨가 여기에 올지 어떻게 알아요?”

반드시 올 거야. 그 아가씨, 분명 황궁의 사람이거든.”

그러면 굳이 오늘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안 돼. 오늘이어야 돼. 날 봤을 때 아가씨 표정이 몹시 궁금하다고.”

 

 

악취미. 이와이즈미가 씹어뱉은 말이었다. 오이카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친구 같다지만 너무 막말하는 것 아니냐고. 이와이즈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장터에서 만난 회색 머리 아가씨는 대충 보더라도 제 상관과의 만남을 썩 달갑게 여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흔한 차림의 아가씨가 아니기도 했을 뿐더러 호위까지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오이카와의 말대로 그녀가 이 황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 걸 짐작할 순 있었지만,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을 막무가내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와이즈미는 습관처럼 인상을 썼다.

 

 

아무튼, 식 끝나기 전까지 찾아서 데려와. , 그 옆에 붙어 다니는 호위는 빼고.”

그 아가씨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겁니까?”

누가? 내가?”

그럼 여기 황자님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오이카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관심이라면 관심이지. 오이카와는 매끈하게 빠진 턱 언저리를 쓰다듬다가 말을 멎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와이즈미가 옆에 놓인 면관을 오이카와에게 건넸다. 오이카와는 옆으로 빗어 내린 갈색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면관을 썼다. 산호 구슬이 부딪치며 매끄러운 소리를 냈다. 구슬의 무게가 무게인지라 벌써부터 목 뒤가 뻐근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 걸.”

 

 

빙긋 웃는 얼굴로 대꾸하고 오이카와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도포가 묵직하게 일렁였다.

 

이와이즈미는 결국 홀로 넓은 장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오이카와는 그녀는 분명 황궁 안의 사람이라, 귀빈석으로 마련한 자리들을 뒤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귀빈석 규모만도 혼자 다니기엔 부담스러울 크기여서 대뜸 한숨부터 나왔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비단 방석 위에 앉은 여자들을 살폈지만 정작 이와이즈미 본인은 그녀를 찾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제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그녀의 표정은 명백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제 주인이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여성에 대한 예의가 조금 부족한 사람임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료하게 장내를 돌던 중 이와이즈미는 결국 뜻밖의 발견을 했다. 그때 회색 머리 아가씨와 함께 있던 키 큰 호위 무사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쓸데없이 좋은 눈썰미를 탓하며 이와이즈미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먼저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너머로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이와이즈미를 꿰뚫는다. 그러나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로 이와이즈미는 옆을 살폈다. 다홍색 리본으로 예쁘게 묶어낸 구불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을 확인하고서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제 주인 되시는 분이 아가씨를 모셔와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

누군지 이미 알고 계신 눈치군요.”

 

 

말없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는 무거운 눈 끝에는 묘하게 날이 서있다. 아까도 그랬지만 유난히 경계가 심한 것 같다. 침묵을 동의로 이해하고 이와이즈미는 예의 회색 머리 아가씨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자니 그녀가 누군지를 몰라 이와이즈미는 아가씨, 하고 그녀를 불렀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그녀가 돌아본다.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한 얼굴로 이와이즈미가 양해를 구했다.

 

 

또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 무슨 일로…….”

제 주인께서 아가씨를 뵙고자 하십니다.”

, 하지만 지금은.”

식이 끝나기 전까지 모셔오라는 명입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백지장이 되었다. 긴장을 풀어주고자 이와이즈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면서 손가락을 얹은 그녀가 이와이즈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는 내내 그 뒤에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도와달라는 눈빛이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 오이카와 황자의 명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호위는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뒤따라오려는 무관에게 이와이즈미가 냉정하게 말했다.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반발하려던 그를 제지한 것은 아가씨의 손짓이었다.

 

 

괜찮아. 금방 다녀올게.”

 

 

그녀는 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이즈미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

 

 

 

 

 

 

 

 

스가와라는 이와이즈미의 안내에 따라 황궁의 중앙에 위치한 전연궁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진작부터 눈치 챈 이와이즈미가 조금이나마 그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계속 말을 걸어주곤 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순진해 빠진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매번 오이카와의 생각을 읽어보지만 결국엔 그의 돌발행동은 막은 적이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뺨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혹시 황자님께서 무례하게 굴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예에.”

미안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시종일관 정중한 이와이즈미의 태도에 스가와라도 그에 대한 경계는 조금 푼 터였다.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스가와라가 손사래를 쳤다. 이런 과분한 대접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만 계세요.”

 

 

스가와라의 불안이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임을 짐작한 이와이즈미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안을 덜어줄 수 없다면 최소한 불편하게 하지는 않으려는 의도였다. 이와이즈미가 방문을 열려는 찰나 벌컥 열린 문 사이로 낮에 보았던 남자가 들이닥쳤다. 면관은 벗고 있었지만 금색 자수가 수놓인 붉은 도포는 눈앞의 그가 바로 오늘, 17세의 생일을 맞아 성인식을 올린 연가의 유일무이한 적통 후계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미안, 미안.”

 

 

오이카와가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이와이즈미는 스가와라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 좁지 않은 방 안에 기어코 둘만 남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스가와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눈앞에 두고 오이카와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와 도포자락을 한 번 휘날리더니 스가와라에게 묻는다.

 

 

어땠어?”

……?”

봤잖아, 내 성인식.”

 

 

보다가 말았는데.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스가와라는 얼버무렸다. 고개는 여전히 들지도 못한 채였다. 오이카와가 스가와라의 얼굴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해 뒤로 물러서려던 스가와라가 제 치맛자락을 밟아 뒤로 휘청했다.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받친 오이카와가 슬쩍 웃는다.

 

 

보기보다 무겁네.”

 

 

그 말에 스가와라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놀랐어?”

예에…….”

뭐야, 반응이 시큰둥하네. 나 없는 동안 이와이즈미한테 동화된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적극적으로 놀라줘도 되잖아. 아가씨는 내가 만난 첫 번째 황실 밖의 사람이라고.”

 

 

놀라기는 했다만, 그 전부터 어느 정도 그의 신분을 짐작은 하고 있던 터라 충격은 덜했다. 스가와라는 억지로라도 놀란 척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스가와라가 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아가씨 이름이 뭐야?”

 

 

오이카와가 장난스럽게 묻는다. 연가의 제 일 황자라고 그의 이름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스가와라가 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알려줘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스가와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역시 황궁 사람이잖아. 아까는 왜 그렇게 피했어?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피한 것은 아니고, 쿠로오가 낯선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해서…….”

쿠로오라면 아까 그 호위 무사?”

 

 

이번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오이카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경고 아닌 경고를 해주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스가와라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무슨……?”

내가 여태까지 내내 황실에만 박혀 있어서, 밖에 나간 적이 없거든. 네가 안내해줘, 코우시.”

하지만 저도 바깥에 나가본 건 오늘이 처음인걸요.”

황궁 안쪽 만이어도 좋아. 충분히 넓잖아?”

그건 이와이즈미 씨한테 시키셔도…….”

부탁, 들어준다며?”

들어드린다고 한 적 없습니다.”

뭐야. 매정하잖아.”

 

 

저도 모르게 평소에 쿠로오를 대하던 버릇이 나왔다. 실망한 표정의 오이카와에게 스가와라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가늘게 땋은 스가와라의 회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오이카와가 다시 웃었다.

 

 

그럼 허락하는 걸로 알고 있지. 나중에 따로 사람을 보낼게. 내가 오늘은 좀 바빠서. 이와쨩.”

 

 

처음 듣는 괴상한 호칭에 스가와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금방 한층 험악해진 표정의 이와이즈미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조심해서 가, 코우시. 나중에 또 보자.”

 

 

스가와라를 향해 건네는 웃음에 악의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조금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잊어야 했다. 이곳에 스가와라가 진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는 쿠로오 외엔 없었다. 황궁에서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오이카와라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스가와라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으니까.

 

 

좀 무례할 땐 있어도 좋은 분입니다.”

 

 

이와이즈미의 뒤를 쫓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어 우직한 뒷모습을 보았다. 검은색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흐르는 청색 건은 주인을 닮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 분보다 높은 사람은 딱 한 분뿐이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래 보여도 황자님은 외로움이 많아요. 무리한 부탁이더라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스가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세상에 오로지 혼자뿐일 저 고독한 자리 위에 앉은 사람에게도 이렇게 믿을 만한 사람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오이카와는 현 황제와는 분위기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은근하게 풍기는 기품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장난기 많은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말에 따르면 오이카와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고. 성인식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면 비로소 자신을 가두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좋아하던 그 얼굴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전연궁을 나오면서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그게 과연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잠시 물러서서 지켜볼 가치는 있을 것이라고, 스가와라는 그렇게 믿었다.

 

 

 

 

 

 

 

 

*

 

 

 

 

 

 

 

 

달이 떴다. 속이 꽉찬 보름달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스가와라는 창가에 무릎을 대고 앉아 어둠에 먹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멀리 보면 금빛 장식과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높디높은 황궁의 벽이 보인다. 이제 다시, 저곳 너머의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 한없이 가깝지만 스가와라에게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그곳은 진정한 사람의 땅이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쿠로오가 멋대로 창문을 닫는다. 스가와라가 볼멘소리를 했다. 치렁치렁한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며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곤 쿠로오가 대충 대꾸했다.

 

 

감기 걸린다.”

너 아직도 삐져있지?”

왜 멀쩡한 사람을 속 좁은 노인네 취급을 하는 건데?”

노인네 취급한 적은 없는데.”

 

 

아무튼 한 마디도 안 져. 쿠로오가 구석에 개어둔 이불을 펼친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니까, 스가와라의 만류에도 쿠로오는 꿈쩍을 않는다.

 

낮의 일로 쿠로오는 아직까지 기분이 썩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스가와라의 설명에도 그는 여전히 찝찝하다고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쿠로오의 행동과 생각들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는 호위 무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가와라의 신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있잖아, 쿠로오.”

 

 

창문 밑에 쪼그리고 앉아 스가와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

 

 

부지런히 스가와라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쿠로오의 손이 멈췄다. 스가와라의 질문의 의도를 읽지 못하거나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불안정한 생활, 언제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그저 조용히 살아야만 하는 처지에 대한 회의가 깃들어 있었다.

 

스가와라의 시선이 오늘 사온 소태도에 닿는다. 투명한 광이 나는 검은색의 검집,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뻗은 모양은 스가와라가 예전부터 동경하던 종류의 것이었다. 어릴 때에는 쿠로오를 졸라 검술을 배운 적도 있었으나 그때뿐이었다. 자라면서 스가와라는 자신의 입장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것에 억눌린 욕구는 갈 곳을 잃은 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코우시.”

 

 

쿠로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스가와라는 눈만 돌려 그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스가와라를 보고 있지 않은 채였다.

 

 

세상은 아주 넓어서, 이 대륙의 너머에는 훨씬 나은 세상이 있다고 들었어.”

…….”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꼭 그곳으로 데려다줄게.”

 

 

그제야 쿠로오는 고개를 돌렸다. 옅게 웃는 입 꼬리는 언제나 보던 것과 같았다. 스가와라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같은 처지의 동료. 그의 얼굴을 보고 스가와라도 함께 웃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는 되묻고 싶었다. 너는 함께 가지 않느냐고. 쿠로오가 그 말을 꺼내기까지 수도 없이 거쳤을 생각과 고민을 알기에 스가와라는 그저 마음속에만 꾹꾹 눌러 담았다.

 

 

 

 

 

 

 

 

*

 

 

 

 

 

 

 

 

스가와라 코우시, 지금은 멸망한 철례의 마지막 남은 왕가의 혈통으로, 황궁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없고 현재는 황궁 서쪽 끝에 있는 거처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와이즈미가 읊어주는 내용을 오이카와는 건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확실히 별다른 정보도 없는 것을 보면 연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톨이가 맞는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비죽 마른 웃음을 흘렸다.

 

 

괜찮네, 적국에 홀로 남은 공주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철례라면 마지막까지 버티던 나라잖아, 연가 다음으로 장성했던.”

그렇죠.”

갑자기 나라가 사라졌으니 반발심을 가진 반역분자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철례의 마지막 공주가 이 나라의 차기 황후가 된다면 괜찮지 않겠어?”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제 폐하가 듣는다면 경을 칠 발언이다. 단 하루, 대화 몇 마디 나눈 여인에게, 아무리 장난이어도 황후의 자리를 입에 올리는 것은 충분히 오이카와의 빈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 안 될 것도 없잖아.”

그렇게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

황궁의 다른 미인들에 비해서 그렇게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닌데요.”

넌 봤어?”

무엇을 말입니까?”

그 애, 처음 봤을 땐 마냥 부끄럼 많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아냐. 제 할 말은 하고 보는 여장부라고.”

……상상이 되질 않는군요.”

그렇지? 제법 귀엽잖아. 이 나라 누구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 이와쨩 빼고.”

그 징그러운 호칭 좀 버리시면 안 됩니까.”

 

 

오이카와는 즐거워보였다. 그녀의 신분은 어찌되었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걱정도 앞섰지만 이와이즈미는 일단,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꽤 오랜 시간동안 그의 옆을 지키면서 오늘 만큼 행복한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갔다. 비로소 혼자가 된 오이카와는 얼굴에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커다랗게 뜬 달을 보면서 아까 스가와라의 회색빛 머리카락에 닿았던 손가락을 괜히 문질렀다. 황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보았던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보다, 억세고 구불거리던 머릿결의 촉감이 오이카와의 손에 더 깊게 남았다.

 

 

출발이 좋은 걸.”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달에 닿을 듯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처음 세상 밖을 구경한 날, 우연치고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녀를 만났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어. 오이카와는 기분 좋게 웃었다.

 

 

 

 

 

 

 

 

 

*

 

 

 

 

 

 

 

 

평소에 입던 무관복을 벗고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도포로 갈아입은 카게야마는 수도 남동쪽, 다른 장소와 다르게 밤이 되면 활기를 띄는 홍등가 가장 끝에 위치한 보행객주를 찾았다. 객주의 안으로 들어선 카게야마는 곧장 행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는 행수의 자리를 보며 카게야마는 혀를 찼다. 조금 늦은 걸까. 행수의 자리 뒤로 드리워진 붉은 커튼을 걷어, 가려진 검은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마치 비밀의 방이 열리듯 작은 나무문이 열린다. 허리를 숙이고 카게야마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엷은 횃불들이 일렁이는 내부는 어두웠다. 카게야마는 낡은 나무 바닥이 꺼지지 않도록 가벼운 걸음으로 좁은 복도를 걸었다. 이윽고 바람이 통하는 커다란 공동에 도달한 카게야마는 곧장 차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쪽 무릎만 세워 고개를 숙였다.

 

 

늦었구나.”

 

 

한 눈에 봐도 나이가 적지 않은 늙은이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세월만큼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과거 한 국가의 정사를 도맡았던 위대한 통치자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나무 복도의 끝, 넓은 공동의 양 옆에는 붉은 빛의 투명한 발이 쳐져 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두툼한 방석이 하나도 비어있질 않은 것을 보면 오늘의 모임에는 단 한 명의 결석자도 없는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수도에서 두 번째로 큰 이 객주의 지하에는 꽤 커다란 규모의 자객 집단이 터를 잡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청부를 위한 집단은 아니었다. 객주, 자객 집단, 그리고 다시 그 뒤에 잠자코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거 철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모인 결사단이었다. 객주는, 그런 결사단의 재정적 기반을 위해 만들어진 눈속임에 불과했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사케이.”

 

 

노인의 부름에 그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도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수집하는 젊은 남자였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성인식이 있던 오늘, 시장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와 다르게 표정은 약간 어둡다. 카게야마는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느 때와 같이 장터에 모인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던 도중, 저는 우연히 과거 영광의 철례를 이끌었던 왕가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좌중이 웅성거렸다. 이럴 수가, 하는 기쁨의 감탄도 튀어나왔다. 17년 전, 철례가 멸망하고 연가국에 귀속되면서부터 그들의 본거지에 잡혀간 철례 왕가의 유일한 혈족 스가와라 나오코, 혹은 그녀가 낳은 자손들에 대한 이야기인 듯 했다. 카게야마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돌아가신 왕후 마마의 마지막 핏줄은, 아리따운 공주님이셨습니다.”

확실한가?”

 

 

다시 무겁게 공기가 내려앉는다. 수 년 동안 찾아 헤맸으나 결국엔 어디서도 흔적을 볼 수 없었던 왕가의 핏줄이 결국은, 사내가 아니라 계집이었다. 중앙에 앉은 흰 수염 노인의 입에서도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다시 일어설 왕국의 영광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정통성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17년 전 세상을 떠난 왕후가 남긴 마지막 혈족을 찾아야 했다. 카게야마가 황궁에 들어간 지도 2년째,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카게야마는 그 마지막 혈족이란 자는 왕가의 정통성을 이어 받을 수 없는 몸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으나 기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 어찌…….”

 

 

노인의 오른쪽에 앉은 남자가 근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긴 노인은 금세 다시 말문을 텄다.

 

 

카게야마.”

.”

황궁에서 아가씨를 찾아라. 여태껏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것을 보면, 황궁 내에서도 특히 인적이 드문 곳에 계실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모셔 와라.”

…….”

우리에겐 어쨌든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노인의 마지막 말이,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카게야마는 보다 단호한 의지로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

 

 

 

 

 

스가와라의 일상은 단순했다. 남들보다 조금 이른 아침,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이 지평선 끝에 걸린 듯 남아있을 때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면 금방 쿠로오가 나타났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나면 스가와라는 탁상 앞 방석에 앉아 어제 읽던 책을 읽거나, 간밤에 꾸었던 꿈을 기록하곤 했다. 만약 읽을 책이 떨어지면 쿠로오나 점심 즈음에 들르는 시종 아이에게 부탁해 서가에서 책을 빌려온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아침 해가 뜨고 다시 붉은 석양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스가와라는 방 안에서 책만 읽었다.

 

때로는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와 근처를 거닐기도 하지만, 황궁 뒤편 산 어귀에 위치한 스가와라의 집 주변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울창한 숲만 있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소리도, 시장에서 들었던 왁자지껄한 소음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고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이곳을 좋아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흙바닥을 걷다가 우연히 이곳에 찾아든 새들의 지저귐을 감상하기도 좋았다. 누구의 방문도 없었다. 매일 두 번씩 들르는 시종과 항상 스가와라의 옆을 지키는 쿠로오 말고는, 이곳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스가와라의 하루에는 조금 다른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스가와라에게 연가의 차기 황제인 오이카와 토오루의 방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내겠다던 말과는 다르게 그는 매일 스가와라의 처소를 방문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두 번째에는 누군가의 시선에 잘못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걸음을 말렸으나 스가와라는 요 며칠 동안 그러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그 고집만큼은 황소보다 더 했다.

 

심지어 그는 스가와라를 찾을 때 호위도 대동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와이즈미를 데리고 다니라는 스가와라의 부탁에도 잔소리꾼이 있으면 산책을 여유롭게 즐길 수 없다며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결국 백기를 든 스가와라는 벌써 며칠 째 그의 저녁 산책에 강제 동원되어 황궁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궁은 생각보다 넓고, 아름다운 장소가 많았다. 울창한 숲만이 전부였던 스가와라의 세계에는 웅장한 크기의 전각, 물결이 잔잔한 호수 위에 뜬 달빛, 그 위에 뜬 예쁘게 다듬어진 정자 같은 것들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감옥의 창살과 같다고만 생각했던 성벽 길을 따라 난 돌길을 걷고 있으면 소담한 꽃들이 발밑에서 피어나곤 했다. 황궁 안내를 부탁한다던 오이카와는 오히려 새장 안에 홀로 갇혀 지내던 스가와라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애썼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읽던 책의 종이 위로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든 붉은 빛이 수를 놓았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지평선 너머로 타오르듯 붉어진 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울창하게 진 뒤쪽 숲에는 어느덧 검푸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가 올 때가 되었다. 스가와라는 책을 덮고 탁상 위에 엎드렸다. 붉은색을 한껏 머금은 회색 머리카락이 뺨으로 쏟아져 내렸다. 즐거운 일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하얀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탁상 위를 톡, , 두드렸다.

 

그러다가, 스가와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붉게 물든 뺨이 석양의 탓만은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았으나 스가와라는 금방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이 기다려지는 사람은 비단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단 것을. 스가와라는 양손으로 달아오른 두 뺨을 매만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얼굴을 얼른 감추고 스가와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이 쿠로오인 것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뻔했다. 스가와라는 얕은 기침으로 얼버무렸다. 눈치 빠른 쿠로오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너무한 거 아냐?”

?”

너 방금 한숨 쉬었지?”

내가 언제? 그런 적 없어.”

너랑 본 게 17년이야.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아?”

미안해.”

 

 

스가와라는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빈정대던 쿠로오도 따라 웃었으나 가늘게 뜬 눈에는 스가와라를 향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덮었던 책을 다시 피고서는 죄 없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스가와라에게 쿠로오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뭐가.”

뭐겠어.”

 

 

스가와라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쿠로오가 던지는 질문의 의도를 머리 좋은 스가와라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모르고 싶었다. 요 근래 스가와라는 가장 기분 좋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자는 너한테 어느 정도 진심이 있는 모양이던데.”

, 갑자기 무슨 말을.”

알고 있잖아.”

…… 장난인지 진심인지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스가와라가 삐죽였다. 쿠로오가 탄식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너는 진심이어서는 안 돼.”

…… .”

그건 알고 있지?”

 

 

쿠로오의 말에 스가와라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지평선 너머로 허리를 숙이던 태양은 어느덧 사라져 푸르스름한 어둠이 사방에 깔리고 있었다. 하늘 빛깔을 따라서 붉게 타오르던 스가와라의 뺨에도 서린 한기가 어렸다.

 

쿠로오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겨우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현실을 다시 직면하기에 스가와라는 너무나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이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고개만 끄덕여도 대답이 될 텐데, 늘 이성적이었던 스가와라는 처음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쿠로오의 물음에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스가와라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두 손을 꼭 붙잡았다.

 

 

…… 뭘 또 그렇게.”

…… .”

우울해져서는 .”

 

 

쿠로오는 오히려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맞은편에 앉는다. 여전히 잠에라도 빠진 듯 감겨 있는 스가와라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쿠로오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스가와라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미안해.”

…… .”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실언했어.”

 

 

스가와라가 눈을 떴다. 사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쿠로오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언젠가 반드시 멀어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요즘 따라 유난히 들뜬 스가와라에게 누군가가 지적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쿠로오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사방이 적뿐인 이곳에서 그는 반드시 스가와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대답하면서 스가와라는 옅게 웃었다.

 

 

 

 

 

 

 

 

 

 

 

*

 

 

 

 

 

 

 

 

 

 

그날따라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스가와라를 찾았다.

 

오늘은 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스가와라는 벌컥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는 일과를 마친 후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더니, 오늘은 많이 바빴는지 옷차림도 그대로다. 스가와라는 인사 대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그냥 쉬지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하지메한테 잔소리 바가지로 듣고 왔으니 모른 척 해줘.”

 

 

오이카와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늦었으니 잠시 들어와서 이야기라도 하고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오자마자 보내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

원래 달빛 깨끗한 밤이어야 산책이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스가, 낭만이 없는 걸.”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어깨 너머로 뜬 달을 바라보았다. 둥그렇게 속이 꽉 차있던 보름달은 어느새 반으로 줄었다. 그림자 아래에 숨은 달의 반쪽이 어슴푸레하게 아른거렸다.

 

오이카와는 창가를 짚고 있던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내려오라는 의미로 다른 손을 스가와라에게 뻗는다. 스가와라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문도 있는데 꼭 창문으로 나가야 하나요?”

빨리 잡아. 나 민망해.”

 

 

아이 같은 투정에 결국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창밖으로 기우는 스가와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이카와는 그를 창문에서 내렸다. 스가와라가 흙바닥을 사뿐히 디디자마자 오이카와가 놀리듯 말을 걸었다.

 

 

여전히 무겁네.”

그러게 문으로 나간다 했잖아요.”

그런 것치고는 신발도 미리 신고 있었던 모양인데.”

 

 

스가와라가 얼굴을 붉혔다. 요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어서, 그 때마다 직접 허리를 숙여 신을 신겨주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오이카와의 뜻밖의 방문에 서둘러 아닌 척 방 안에 모셔두었던 신발을 몰래 신어두었던 것이다. 오이카와가 이러한 종류의 농을 즐기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스가와라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디를?”

글쎄. 어디가 좋을까.”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조금 뒤에 서서 걸었다. 반밖에 되지 않는 달빛도 충분히 밝았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옷소매에 묻은 흙먼지를 발견했다. 혹시 오늘 늦은 이유와 관련된 것인지 호기심이 생긴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소매에 흙이 묻었습니다.”

제대로 안 털어서 그래. 오늘 대련했거든.”

 

 

스가와라의 눈이 일순 반짝인다. 오랜만이라 어깨가 아프다며 목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는 행동에 성의는 없었지만 스가와라가 알고 있는 진짜 대련이라면 몸 여기저기가 아플 수밖에 없다. 대련은 정식 연습과 다르게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몸에 부담이 크다고 쿠로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매일 하나요?”

매일 하면 나 죽어. 진짜로.”

 

 

끔찍한 소릴 잘도 한다며 오이카와가 웃었다. 따라 웃던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흘러내린 소매 안쪽, 얇은 헝겊으로 잘 감싼 그의 팔목을 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다치셨어요?”

조금 삐었어. 대련 중엔 흔히 있는 일이야.”

하지만 무리하면 안 될 텐데요. 몸 안의 부상은 쉽게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좀 봐줄래?”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만.”

그냥 해본 말이야.”

 

 

어렸을 때, 쿠로오와 몰래 황궁을 돌아다니다가 연무장을 엿봤던 적이 있었다. 뿌옇게 날리는 흙먼지, 스가와라가 좋아하는 목재 검 날이 부딪치는 소리는 금속보다 탁했지만 박자는 보다 맑고 경쾌했다. 종종 들려오는 우렁찬 기합소리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던 기억이 떠올라 스가와라는 슬며시 웃었다. 날렵한 그림자들이 서로 엉길 때면 동경의 눈으로 그들 무리를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가와라는 상상한다. 멸망한 스가와라의 나라가, 이미 죽어 없어진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의 풍경을. 오이카와처럼 아버지의 후계를 이을 세자로 봉해져 훨씬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오이카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스가와라의 처소 뒤쪽, 좁게 난 숲길을 지나 도착한 넓은 호숫가였다. 황궁의 북쪽, 산을 등지고 있는 커다란 호수는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했다. 산의 능선과 이어지는 바위 위 지어진 허름한 정자와 그 아래로 보이는 얕은 절벽, 반쪽 달이 떠오른 잔잔한 호수의 면은 그래도 제법 잘 어울렸다.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호수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짙은 어둠이 깔린 검푸른 숲과 횃불 하나 없이 오로지 달빛만으로 빛나고 있는 호수는 꽤 절경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도 있었군요.”

처음이지? 나도 직접 온 건 처음이야.”

유명한 곳인가요?”

아니, 전혀. 그렇지만 떠도는 얘기에는 젊은 남녀가 밀회를 위해 방문하는 곳이라고 하더군.”

 

 

꺾인 갈대를 매만지며 오이카와가 대꾸했다. 스가와라는 말없이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하는 말은 족족 스가와라의 가슴에 명중했다. 스가와라는 유독 오이카와의 말에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이카와와 만난 이후 스가와라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생겼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오로지 책에 나왔던 지도로만 볼 수 있었던 황궁의 안이 사실은 스가와라의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도, 오이카와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숨어서 지내라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허름한 집에서 늘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버텼겠지.

 

 

스가?”

 

 

오이카와의 부름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숙여 스가와라의 표정을 살피던 오이카와가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 있어?”

?”

안색이 안 좋아.”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나한테는 거짓말 하지 마.”

…….”

다 보이거든.”

 

 

정말로 스가와라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저녁에 쿠로오와 나눴던 대화들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 이어졌을 뿐이다. 오이카와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끝내 그를 속여야 했다. 오이카와의 옆에서, 그와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나누며 살고 싶다는 것은 스가와라의 욕심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할 인연이다.

 

예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운 오이카와는 사뭇 진지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스가, 상냥한 사람은 거짓말을 못해.”

 

 

칭찬 아닌 칭찬에 스가와라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올곧게 스가와라를 내려다보는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얼굴에 지는 그림자의 깊이가 다르거든.”

……처음 듣는 궤변이네요.”

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 예전에 하지메가 해준 말이야.”

제가 상냥한가요?”

 

 

스가와라는 조금 자조적으로 웃었다. 놀란 얼굴로 오이카와는 침묵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스가와라가 제 어깨에 얹은 오이카와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스가와라는 상냥하지 않다. 오이카와는 이미 속고 있다. 그가 말한 그림자라는 것은 스가와라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성격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보고 들으며 자란 것이 아예 다른 두 사람은, 앞으로도 결코 섞일 수 없을 것이라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스가와라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충분히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뒤로 하고, 스가와라는 등을 돌렸다. 늦었으니 이만 내려가자는 말을 하려던 스가와라는 그러나 다시 그 목소리에 붙잡혔다.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

그래도 너는, 나에게만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다정하게 잡아준 손에 미지근한 체온이 닿는다. 몸을 돌려 스가와라는 커다란 눈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기대가 섞여있다. 사람을 읽는데 능숙한 스가와라는 그것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아주, 아주 슬픈 눈으로 오이카와를 보고 웃었다.

 

 

 

 

 

 

 

 

 

 

 

 

*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찾기 위해 황궁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물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사람의 통행이 드문 시간을 이용했지만, 이전까지 가보지 않았던 곳까지 모두 뒤졌다. 그러나 큰 소득은 없었다. 분명히 같은 황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황실에서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스가와라의 거처는 뜻밖의 인물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카게야마가 황궁에 잠입한 후에 받은 임무 중에서는 스가와라의 수색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연가 황실의 적통 후계자인 오이카와 토오루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성인식 이후 오이카와는 부쩍 홀로 다니는 일이 많아졌는데, 황실의 강압적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만으로 생각했었다. 그가 남들 몰래 만나고 있던 사람이 카게야마가 찾고 있던 스가와라 코우시일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곧 스가와라의 처소를 찾았다. 그러나 바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호위가 붙어 다니는데다 섣부르게 접근하면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생각해 당분간은 멀리서 스가와라의 일상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찾아왔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로써 스가와라의 하루는 언제나 오이카와의 방문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스가와라를 만나러 올 때에는 둘을 지키는 측근의 호위 무사도 자리를 비웠다. 아마도 편안한 만남을 위해 그들이 그렇게 명령한 듯 했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 땅에 남은 유일한 왕가의 혈족이, 적국의 황자와 밀회를 나누는 사이다. 이에 대한 보고는 잠시 미뤄도 좋을 것이라 카게야마는 판단했다.

 

오이카와와 스가와라가 향한 곳은 관리가 되지 않은 황궁의 뒤편, 인적조차 드문 드넓은 호숫가였다. 카게야마는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주시했다. 사방은 고요했으나 거리가 멀어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를 옮기는 둘을 따라 몸을 일으킨 카게야마의 등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살기가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간 카게야마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바로 뒤에서 달빛을 받은 은색 검광이 날카롭게 카게야마의 목을 겨눈다. 어둠이 깔린 청록색 숲속, 차가운 검 날 너머에 섬뜩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처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던 그의 호위 무관이었다.

 

 

……뭐하는 놈이냐, .”

 

 

검 손잡이를 쥔 카게야마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 서슬 퍼렇게 빛나는 안광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침묵을 지키며 쿠로오와 대치하던 카게야마는 빠르게 다리를 뒤로 뻗으며 아래로 발도(發刀)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상황에 거리를 둔 쿠로오가 다시 달려들고, 검은색으로 가득한 숲속에 일순간 퍼렇게 불꽃이 튀었다. 반동으로 몸을 접어 날렵하게 튀어 오른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검은 숲의 연기로 사라졌다.

 

다행이 추격은 없었다. 황궁 뒤편에 자리한 산의 능선을 따라 걷던 카게야마는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어둡긴 했지만 분명히 쿠로오 테츠로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았을 터였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카게야마는 판단했다.

 

황궁을 빠져나온 카게야마는 곧장 객주로 향했다.

 

 

 

 

 

 

 

 

 

 

*

 

 

 

 

 

 

 

 

 

쿠로오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스가와라의 뒤를 쫓던 남자의 존재에 대해 스가와라에게 알려야 할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만약 스가와라가 아닌 오이카와 황자를 쫓는 자였다면 사실 쿠로오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했지만 오이카와가 스가와라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가와라도 언제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죽을상을 했던 어제와 다르게 유난히 발랄한 얼굴의 스가와라를 보고 쿠로오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들은 스가와라가 창가로 다가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손을 뻗더니 쿠로오의 이마를 짚는다. 그러고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픈 덴 없는 것 같은데.”

안 아파.”

근데 왜 그러고 있어?”

고민이 생겨서.”

고민? 무슨 고민?”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 낯에는 그 전까지 미묘하게 서려 있던 그림자마저 가시고 없었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걸까. 축 쳐져서는 우울해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쿠로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얼굴을 매만지는 스가와라의 손을 붙잡고 창틀에 내려놓는다. 위로 솟은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쿠로오가 대답했다.

 

 

자꾸 신경 쓰이는 아가씨가 있어서 말이야.”

쿠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아니면 내 얘기야, 그거?”

 

 

동그랗게 뜬 눈이 쿠로오를 바라본다. 한 뼘이나 더 큰 쿠로오를 올려다보는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쿠로오는 창문을 닫아버리고 뒤를 돌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창문이 틀에 부딪쳐 반동으로 다시 열렸다. 하얀 손바닥에 턱을 괴고 스가와라가 다시 묻는다.

 

 

안 알려주는 거야?”

별 거 아닙니다, 아가씨.”

재미없게.”

오늘은 좀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아침부터.”

 

 

능숙하게 쿠로오가 화제를 돌렸다. 탄식 같은 한숨 뒤로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민해봐야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는 것 같아서.”

…….”

네 말대로 어차피 잠깐에 불과한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그걸로 지금 즐거우면 됐어. 더 이상 생각 안 할래.”

……그래.”

미안해하지 마, 쿠로. 어린애 같이 고집부린 건 나인 걸.”

 

 

 

쿠로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밖에 오지 않는 작은 도련님은 어느새 훌쩍 커서 생각만큼은 이미 쿠로오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애초부터 지금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쉽게 포기할 만큼 연약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스가와라가 쉽게 무너질 존재는 아니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오늘은 꽤 이른 시간에 오이카와가 찾아왔다. 이와이즈미도 함께였다. 아무래도 낮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앞에서 투덜거렸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해가 뜬 시간에 둘만의 산책도 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오이카와를 달래는 것은 온전히 스가와라의 몫이다. 그리고 제 상관의 대책 없는 행동에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쿠로오는 이와이즈미와 함께 바깥에 남았다. 오이카와와 스가와라의 만남이 잦았듯 쿠로오와 이와이즈미도 곧잘 황궁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말을 튼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쿠로오에게 이와이즈미는 어쨌든 적국의 사람이었고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분류이지만,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가 그러한 존재이듯 역시 언젠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할 입장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딱히 쿠로오를 불편해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예의 없게 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워낙 투철한 사람이라 스가와라가 아닌 쿠로오에게도 언제나 존대를 사용했다.

 

 

저기, 이와이즈미 씨.”

?”

……. 일단 이건 이와이즈미 씨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얘깁니다만.”

 

 

답지 않게 쿠로오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황궁 안에, 아가씨나 황자님을 노리는 자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어젯밤에 좀 수상한 놈을 봤거든요.”

.”

알다시피 스가와라 아가씨는 누군가의 표적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라서 혹시 몰라 하는 얘기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아가씨도 아는 얘기입니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걱정을 지우기 싫은 측근의 마음을 그도 반드시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쿠로오는 솔직한 심정으로, 부디 그들이 노리는 것이 스가와라가 아니기만 바랐다. 황궁 안의 사람이 스가와라를 감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스가와라의 정체를 의심하는 자가 있거나, 혹은 오이카와와의 관계를 눈치 챈 자가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더라도 스가와라가 주목 받는 일은 위험했다, 전자의 경우는 특히 더.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황자님 혼자 계시는 일은 없어야겠군요.”

다른 낌새는 없습니까? 스가와라 아가씨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황자님께는 정실 후보도 한 명 있다면서요.”

있지만 워낙 본인은 관심이 없어서요.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건은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께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죠.”

 

 

표정 없이 대꾸하는 말에도 묘하게 믿음이 생긴다. 이와이즈미가 가진 고유의 분위기였다. 오이카와가 늘 그와 함께 다니는 이유도 이와이즈미와 대화 몇 마디만 나눠보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무형의 것이 존재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이 땅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가장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벌컥 창문이 열리고 스가와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화들짝 놀란 쿠로오와 다르게 이와이즈미의 표정은 그리 변화가 없다. 스가와라의 뒤에서 나타난 오이카와가 흥미로운 얼굴로 쿠로오를 바라본다.

 

 

쿠로오, 이와쨩이랑 꽤 친해 보이는 걸.”

이만 가시죠. 쉬는 날이라고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당황한 쿠로오가 대꾸하기 전에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오이카와의 말을 잘랐다.

 

 

벌써? , 할 일도 없잖아.”

니시하라 씨가 기다립니다. 최근에 황자님 얼굴 뵙기 힘들다고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더군요.”

그 얘기, 스가 앞에서는 하지 말라니까.”

 

 

오이카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옆에서 말없이 웃고 있었다. 스가와라도, 쿠로오도 이와이즈미가 언급한 낯선 이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스가와라 나름대로 오이카와를 배려하는 방법이었다.

 

 

다녀오세요.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요.”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가 뺨을 긁적였다. 조금 더 머물고 싶은 아이 같은 투정이 그 눈빛에 완연히 배어있다. 저 애틋한 진심을 결국 외면해야 할 스가와라의 처지가 떠올라 쿠로오는 고개를 돌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걸음을 옮겼다. 스가와라는 그들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바깥에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스가.”

 

 

스가와라를 돌아보지 않고 쿠로오는 조용히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쿠로오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빠져든 듯, 두 사람이 사라진 돌길을 스가와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 하지 않아.”

 

 

스가와라의 무거운 답은 그보다 조금 더 뒤에 쿠로오에게 닿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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