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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 더 탔으면 멀미했을 거야.
비행기 타면서 멀미한다는 놈 처음 봤다, 인마.
난 진심이라고?
요금 많이 나와, 끊어.
뚝 전화가 끊겼다. 오이카와는 한참 꺼진 휴대폰 액정을 노려보다가 주머니에 구기듯 휴대폰을 꽂아 넣었다. 역사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두고 지루하게 시간을 때운 게 어느덧 한 시간째였다.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다가 캐리어에 발이 닿았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것을 화들짝 놀라 가까스로 붙들고 오이카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괴고 바깥을 둘러보다가, 다 비어버린 컵을 그대로 둔 채 다시 길을 나선다.
아직 체크인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리어를 그대로 끌고 다닐 수는 없어 숙소에 맡겨두려는 속셈이었다. 간편한 짐만 들고 인근 지하철역이나 마트 같은 것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근처를 한 바퀴 돌면 시간이 되겠지. 타달타달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퍽 요란하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다행이 길치가 아니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도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쏘다니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가본 길이라면 지도가 없어도 척척 찾아다녔다. 그래도 외국이고, 처음 방문하는 곳이라고 지도를 꼼꼼하게 살피며 10분 정도를 걸어 숙소가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녹색 페인트로 칠한 철문 안에 아파트 몇 개가 넓게 서있었다. 오이카와는 두리번거리다가 아파트 입구에 작게 지어진 붉은 지붕의 간이 집을 발견한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가 닫힌 문 위로 똑똑 노크를 했다. 잠시 후에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나이는 사십 중후반, 갈색 머리카락의 동양인 여자였다. 그녀는 아마도 오이카와 고모의 지인으로, 파리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까딱했다. 잠깐 눈을 끔벅이며 오이카와를 살피던 그녀가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오늘 온다고는 들었는데, 굉장히 일찍 오셨군요.”
일본어였다. 살짝 어눌한 발음이긴 했지만. 오이카와가 멋쩍게 뒷목을 문지르며 웃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던 그녀가 신발을 주섬주섬 신고 나왔다. 손에는 오이카와가 머물 방의 키가 들려있다.
“이름이, 오이카와였나. 맞죠? 방은 이쪽이고 보다시피 아파트라 따로 조식은 없어요. 방안에 간단한 취사도구들은 모두 있으니 직접 해먹어도 좋고.”
“예에.”
“열흘 머물다 갈 거죠? 빨래는 아파트 뒤쪽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코인빨래방이 나와요. 거기 사용하시면 되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방안 게시판에 있으니 편안하게 사용해요.”
“감사합니다.”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 방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선뜻 오이카와를 방까지 안내해주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흠이긴 했지만, 3층 정도야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기는 데에 큰 무리는 없으니 됐다. 크게 낡거나 고급스럽거나 하지도 않은, 지나치게 평범한 아파트였다. 딱 열흘 정도 머물기에 적당했다. 파리에서, 열흘. 적지 않은 시간이다.
“화장실도 있는데, 여긴 배수시설이 잘 안 되어있어요. 그러니 샤워부스 사용할 때는 주의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는 게 있다면 바로 나한테 물어보고. 만약 내가 자리에 없다면 옆방 학생한테 물어봐도 괜찮아요. 그 친구도 일본 사람이거든. 요즘 크리스마스 시즌 방학이라 한가할 테니까.”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까지 건네주고, 주변 편의시설을 서툴게 적어놓은 지도까지 손에 쥐어준 뒤 그녀는 방을 나갔다. 그제야 좀 사방이 고요해진다. 방 한가운데 놓인 캐리어와 함께 덩그러니 서있던 오이카와는 가장 먼저 휴대폰을 꺼내 와이파이를 켰다. 길지 않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잠시 기다린다.
캐리어는 그대로 세워두고 오이카와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말끔하게 정돈되어있던 이불이 밀려 조금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렴 어떠랴. 비행시간 내내 그토록 바라던 인터넷이 드디어 연결되었음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걸. 기분이 묘했다. 여행이야 종종 다녔지만, 이렇게 먼 타국까지 오는 것은 처음이다. 열세 시간의 비행이 그렇게 힘든 것인지도, 처음 알았다.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이나 프랑스나 스위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파리. 이곳은 대학교에 다니던 때에 언제나 와보고 싶었던 꿈과 로망의 장소였다. 한창 불같은 연애를 했던 시절, 그 왜,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본 적 있는 연인과의 버킷리스트 같은 거였다. 시작이 그랬으니 홀로 불현듯 날아와 돌아다니기엔 조금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파리는 분명 예쁘지만 열흘씩이나 박혀있기엔 좀 아쉬운 곳이라며 잔소리를 퍼붓던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글쎄, 역시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부지런을 떨고 싶어 여행을 온 게 아니니까 말이다.
머릿속에서 감정이 부서진다. 이제 그만 잊어도 좋을 구질구질한 기억이 자꾸 불쑥 튀어나와 뒤통수를 갈기는 바람에 눈 밑이 시큰해졌다. 오이카와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커튼을 쳤다. 아직 높게 뜬 햇빛에 작은 방안이 금세 환해진다. 그대로 잠시 고민하다가, 오이카와는 열쇠만 챙기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손가락으로 뒤축을 정돈하고 앞코를 바닥에 콩콩 찧는다. 아직 짐도 풀지 않았지만 역시, 아무렴 어떠랴.
파리지앵 랩소디
오이카와 토오루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와글와글, 파리의 중심지는 유명한 관광명소라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다. 특히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의 투명 피라미드 근처는 경악할 만큼 붐볐다. 시끄럽고 복잡한 곳은 딱 질색인 스가와라 코우시는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한눈에 보이는 건물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앉고 보니 비둘기도 사람만큼 많았다. 초조하게 시계를 본다. 이곳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이나 규칙 따위에 강박적일 만큼 엄격한 스가와라는 약속 시간이 일 분만 지나도 사지가 떨리곤 했다. 프랑스로 온 이후엔 스가와라를 손에 쥐고 통제하려는 사람이 없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어릴 적부터 버릇을 들인 탓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야쿠 모리스케는 그런 스가와라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만나 그리 인연이 길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는 스가와라를 이해할 줄 알았다. 겉으로는 상냥해도 의외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구석이 많아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늘 기피했던 스가와라에게 선뜻 먼저 다가온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종종 사람이 고플 때면 그를 찾는다. 본인이 원할 때만 찾으니 이기적이라며 등을 돌릴 법도 한데 야쿠는 그러지 않았다. 성격이야 판이하지만 야쿠 역시 스가와라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불쑥 내밀어진 손바닥을 보고 스가와라가 정신을 차렸다. 키도 작은 게 사람 찾는 데에는 도가 터서, 스가와라가 어디에 처박혀있든 야쿠는 곧바로 찾아낸다. 숨을 곳이며 갈 곳이 너무 뻔해 헤맬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 야쿠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야쿠의 주변엔 언제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야쿠는 스가와라의 많은 것을 알았다. 스가와라는 친구가 없는 만큼 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데, 스가와라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일이 빠질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스가와라 8년 연애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건 부모님이나 형제들도 모를 만큼 은밀한 사생활이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지금 일본에 있을 고등학교 동창 몇이 다였다. 프랑스에서는 아마 야쿠가 유일할 것이다.
“점심 먹기 애매한데. 어떻게 할래?”
“난 아무거나 좋아.”
“네가 불렀잖아. 메뉴는 스가와라가 골라.”
“……오리엔탈 샐러드랑 딸기 타르트, 어때.”
“지인짜 안 어울리는 거 먹네.”
야쿠는 뭐든 잘 먹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그러지 못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 주로 먹던 근사한 음식들은 대부분 아직도 입에 대기 어려웠다. 프랑스에 온 이후로는 그런 음식들을 접할 일이 없어 차라리 나았다. 크루아상, 바게트 샌드위치, 시리얼이나 단출한 샐러드. 스가와라가 주로 먹는 음식들이다.
어울리지 않는 항목은 하나다. 딸기 타르트.
“그냥 오늘은 좀 단 게 끌려.”
“불멸의 캡사이신 전도사께서 어쩐 일로?”
……먹는 건 하나 더 있다. 집 찬장에 늘 쟁여두는 마파두부.
“내가 살게.”
스가와라는 서둘러 야쿠의 손을 잡아끌었다. 파리 유학 생활을 스가와라보다 반 년 먼저 시작한 야쿠가 스가와라를 안내하던 평소와는 다른 일이었다. 평소와 다른 게 세 개나 있었다. 선뜻 사람 붐비는 관광지까지 와서 기다린 것, 매콤한 소스를 뿌린 스테이크가 아니라 달콤한 딸기 타르트가 메뉴인 것, 스가와라가 야쿠보다 앞장선 것. 이쯤이면 스가와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을 법도 한데 야쿠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바로, 스가와라가 이럴 때마다 야쿠를 만나는 이유였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 증세였다. 워낙 주변 환경 변화에 민감한 타입이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못 견뎌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인데다 그걸 외부로 표출할 용기는 없어―어린 시절 엄격했던 가정교육의 영향으로―늘 상냥하고 다정한 얼굴로 웃기만 하는 생활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얻은 고질병이었다. 스트레스를 외부로 표출하지 못하고 속에만 차곡차곡 쌓다가, 어느 순간 화산이 터지듯 폭주할 때가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이었다. 정신없이 바쁠 때에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방학이 되거나 쉬는 날이 오면 집에 홀로 있다 그 어둠에 왈칵 잡아먹히곤 했다. 그런 때면 스가와라는 늘 야쿠를 불렀다. 그리고 야쿠는 단 한 번도 스가와라가 요구한 만남을 거절한 일이 없었다.
너도 좀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어때.
다른 사람, 만났었다. 스가와라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던 사람. 프랑스에 오기 전 모두 정리했지만.
“크리스마스에 뭐해?”
야외 테이블에 앉기는 추워 창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가와라가 주문한 샐러드와 딸기 타르트, 야쿠가 주문한 쇼콜라 크루아상, 그리고 오렌지주스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바깥에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다녔다. 프랑스에서는 크리스마스 전후 며칠 동안이 방학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즈음 크리스마스 장식용 조명으로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에는 특히 사람이 많다. 오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스가와라가 불쑥 물은 말에 야쿠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 일본에 다녀오려고.”
“엑……. 왜?”
“작년에도 안 갔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 연하?”
“으응, 한 번은 가야지. 장거리도 이런 장거리가 없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고. 볼멘소리를 내며 투덜거리려던 스가와라는 말문을 닫았다. 야쿠도 썩 남들한테 내색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게 괜찮다는 뜻이 아니란 건 스가와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안 그래도 멀어서 자주 못 보는데, 그래서 가겠다는데 어떻게 말려.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연인들은 애틋하다. 어쩌다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날 것처럼 감격스럽고, 휴대폰으로 바다를 건너 하는 연락에는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은 간절함이 어린다. 그래서 오히려 심각하게 싸울 일이 없다고 야쿠는 그랬다.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온통 뇌가 점철되어버려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너와 나도, 조금 떨어져 있었다면. 8년을 내내 같은 학교를 다녀서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이 살고 살을 부딪치고 그렇게 고양이와 개처럼 혹은 한 쌍의 원앙처럼 서로 비비고 문지르고 섞이고 마찰하고 다투고 자그락거리고, 그렇게 빈틈없이 살지 않았더라면.
스가와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부질없는 후회다. 공항에서 비행기로 몸을 옮기며 모두 던지듯 떨쳐낸 낡은 기억들이었다. 미련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스가와라는 때때로 그것들을 엉망으로 뒤집어쓰곤 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늘 야쿠에게 잔소리를 듣지만, 스가와라 인생의 삼분지일을 함께한 사람을 내리는 눈발과 함께 녹여버리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좀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해. 너희 동기들이 맨날 너만 모임 빠진다고 나한테 성화야. 같이 있으면 좀 어때, 철은 없어도 나쁜 애들은 아닌데.”
“알지, 알지이…….”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스가와라는 유명했다. 부유하지만 부모님이 엄격한 탓에 예의도 바르고 상식도 있는 사람이라고. 혹자는 조금 비꼬는 말로 스가와라를 알람시계 내지는 시한폭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스가와라가 가진 병적인 시간에의 집착을 꼬집은 별명인데, 스가와라는 딱히 그것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보다 훨씬 더한 일도 겪었으므로. 프랑스에 온 이후로는 주변인들의 시선이나 대우가 많이 나아졌지만, 사춘기 청춘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서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불필요한 만남을 거부하고 혼자 방에 틀어박힌 게 어느덧 반년이다. 열두 달의 유학생활 중 절반을 스가와라는 혼자, 때로는 야쿠와 둘이 보낸 것이다.
어떤 시선이든 웃는 얼굴로 감내해야 했고 혼자 견뎌야 했고, 부유층의 자제라는 이유로 모두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어야 했던 지난날의 인생을 떠올려보면, 스가와라가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된 것도 이해가 어려운 일은 그다지 아니었다.
문득 그 잘난 얼굴이 또 떠올랐다. 아주 평범했으나 또 평범하지 않았던, 무엇보다 스가와라에게는 외계인처럼 보였던 사람, 무려 8년 동안 몸도 마음도 주었던 상대, 어린 날의 상처 입은 스가와라를 무관심으로 돌보았던, 그래서 또 다른 생채기를 스스로 내게 했던 사랑하는 아니, 이제는 사랑했던 사람.
“짜증나.”
“갑자기?”
“그럴 때 있잖아.”
“그래, 그래.”
야쿠가 포크로 딸기 타르트 한구석을 잘라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스가와라에게 먹였다. 탱글탱글한 딸기가 입안에서 달콤한 소리를 내며 터진다. 씨가 바삭바삭 씹혔다. 타르트지가 딱 좋은 정도로 익어 그렇게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았다. 그 위로 오렌지주스를 부었다.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자극에 혀 밑에 침이 고인다. 우물우물 먹는 모습을 보고는 야쿠가 픽 웃었다.
“코우시, 너도 이참에 일본 다녀오는 건 어때.”
“……별로.”
“가족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을 테고, 네 동창들 많잖아.”
일본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다. 어디선가 그를 마주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일본 땅은 좁고, 특히 그중에서도 도쿄라면 더 좁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마주치는 데에는 제격인 장소였다.
“잘 다녀와. 먹을 것 좀 가져오구.”
“알겠습니다.”
야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난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스가와라를 설득하는 일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스가와라도 생긋 웃었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밖으로 나왔다. 스가와라는 이곳에 와서 술을 끊었으므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것은 산책이나 쇼핑 같은 건전한 것들뿐이었다. 야쿠는 아마 일본에 있는 연인에게 나름대로 장거리 협박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라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다. 공통 취미가 생긴 것이다. 길거리를 다니며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이따금씩 길가에서 버스킹 연주를 즐기기도 했다. 사람을 싫어하는 스가와라가 유일하게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해는 빨리 저물었다. 야쿠는 내일도 출근이어서, 들어가는 길에 마트도 들러야 하니 이만 헤어지자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쿠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우울한 상태로 방에 처박혀 땅만 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감사한 일이다.
야쿠는 지하철을 타야 했다. 파리 중심부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살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가와라의 집도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걸어갈 만했다. 지하철을 타도 상관은 없었으나 스가와라는 늘 도보를 고집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내일 출근 잘하고.”
지하철 입구에서 야쿠와 헤어졌다. 입밖으로 솔솔 하얀 입김이 샌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스가와라는 까만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넋을 놓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어둠이 깔린 구름들의 저편, 에펠탑이 조명을 밝히고 우뚝 솟아있었다. 파리에 온 이후 매일같이 보던 풍경이다. 철제 탑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냐만, 그것은 파리의 랜드 마크였으므로 이제는 좀 예뻐 보였다. 지겹도록 봐서 망막에 익숙할 만큼 새겨진 붉고 노랗고 반짝이는 그 모습은, 아직까지 낯설었다.
예전에, 약속했었는데. 네가 여유가 생기면 같이 유럽에 오자고. 어디든 좋으니, 영국이든 프랑스든 스위스든 이탈리아든, 함께 있으면 어느 오지에서 길을 잃어도 행복할 테니 꼭 함께 비행기를 타자고. 헤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너의 손을 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어쩌면 빛나는 에펠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오이카와.
스가와라의 잇새로 비죽 서툰 바람이 비어져 나왔다. 오늘따라 더 유난이다. 더 이상 아쉬울 것도 없는 관계고, 따라서 미련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났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포화 속 전쟁터 같은 지리멸렬한 사랑이었지만 그 암막 같은 연기 뒤에 가려진 것들 중엔 분명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그것들을 굳이 꺼내려 하지 않았다.
꺼내면 후회할 것 같아서.
꿈에 나올 것 같아서.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가 보고 싶은 걸 견디지 못하고 일본행 비행기를 훌쩍 타버릴 것 같아서.
그랬는데,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데도 네가 있었다.
키가 작은 신호등의 붉은 빛이 눈에 어른거렸는데,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무언가의 너머로 스가와라의 시야에 그가 들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스가와라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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