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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카게스가 엽서 그려주신 시린님 헌정글입니다.








 

카게야마가 어릴 때부터 살았던 동네에는 자그마한 신사가 있었다. 그에게 신이란 너무 어렵고 복잡한 존재였으므로, 신사의 기원이라든지 신사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이라든지, 카게야마는 그런 것들엔 영 흥미가 없었다. 다만 신사를 방문하는 것 자체는 좋아했다. 적당히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키가 큰 나무와 수풀이 적당히 우거져 공기가 맑았으며 신사 뒤쪽으로 난 좁은 산책길은 등나무가 흐드러져있어 로드워크하기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신사를 한 바퀴 돌고 오면 땀방울이 이슬에 섞여 콧잔등에 맺히곤 했다. 여름에도 유난히 선선했던 그곳의 맑은 공기를 카게야마는 기꺼워했었다.


자라고 난 뒤에도 틈만 나면 카게야마는 신사를 찾았다. 어린 날부터 꾸준히 그래왔으니 카게야마의 부모님은 그가 진짜 신이라도 모시는 줄 알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일찍이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던 때에도, 사소한 부상으로 마음이 흐트러져있을 때에도, 경기에서 이기거나 지고 난 뒤에도 어김없이 신사를 다녀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는 가끔 신사에 다녀온 카게야마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래서 신을 보았니?’



카게야마의 대답은 늘 아니오.’였다. 그녀가 기대한 대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카게야마의 시무룩한 답변에 말없이 빙긋 미소만 지었으니 그리 불만족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맹목적으로 신을 믿을 법한 나이는 지났는데도산타도 믿지 않은 지 꽤 되었으니종종 같은 질문을 하는 어머니께 언제는 카게야마가 먼저 물은 적도 있다. 진짜 신이 있어서, 그러니 제게 그렇게 묻는 건가요? 아주 조금 설레는 마음을 부둥켜안은 목소리에 그녀는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신은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


카게야마에게 그 신사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고,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었을 뿐이다. 신이 있고 없고는 카게야마가 신사를 다니는 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랬으니 어머니의 애매모호한 답변에, 그날 밤 신을 믿습니다.’하고 세 번 복창한 뒤 잠에 든 일도 카게야마에겐 대수가 아니었다.


5월은 등나무 꽃이 활짝 피는 때다. 딱히 알레르기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무로 얼기설기 꿴 쉼터의 아래로 우수수 떨어진 보랏빛 꽃잎들엔 괜히 코가 간지러웠다. 색이 어두운 운동복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그림자를 띄운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어 우거진 이파리 사이를 햇빛이 점점이 물들인 어느 날이었다.


축제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없는 날 신사는 늘 한적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 신사에 다다라 형식적으로 기도 한 번 올리고, 마침 사람도 없고 날씨도 좋으니 그냥 가기 아쉬워 등나무 길의 끝까지 다녀오려 마음을 먹었다. 등나무 길은 아주 좁아서 한 사람이 걷는 데에도 폭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카게야마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느지막이 걸어야 했다. 날이 청명한 늦봄답게 새는 지저귀고 슬슬 새파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이는 풍경이 제법 멋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등나무 잎과 함께 담뿍 자란 꽃잎들이 퍽 예쁜 소리를 냈다.


등나무 길 끝에는 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낡은 표지판이 꽂혀있다. 누군가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도 줄지어 놓여있었다. 카게야마는 언뜻, 신이 있다면 아마 그곳이 거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돌탑을 쌓는 행위는 무언가 기원하고 싶은 사람들의 수단이었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이곳까지 방문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주기적으로 신사를 다녀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지간히 꿰고 있었으므로, 카게야마는 낯선 뒷모습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그려보았다. 다가가는 발걸음에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뒤를 돌아본다. 걸치고 있는 유카타를 제외하곤 온통 흰빛이었다. 햇빛을 막고 있는 수풀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 끝이 물빛처럼 반짝반짝했다.


카게야마는 홀린 듯 물었다.



……진짜 신이에요?’



반만 돌아 눈길로만 카게야마를 바라보던 그가 제 앞으로 툭 던져진 엉뚱한 질문에 금세 해사하게 웃었다.



, 들켰네.’



정말, 정말로 신이 있었다.

 







같은 소원을 빌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푸하하하하하하하!”



한때한나절뿐이었지만카게야마에게 신이었던 사람은 이제 그 이야기만 하면 배꼽을 빼고 웃는다.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카게야마와 다르게 스가와라는 소탈한 면이 있어서 어딜 가든 특유의 밝은 웃음을 거리낌 없이 꺼내놓곤 했다. 카게야마는 문득 꺼낸 옛날 얘기에 스가와라가 박장대소하는 것을 보고 그 이야기는 하지 말 걸, 뒤늦은 후회에 얼굴을 붉혔다.



, 정말 그때 어엄청 웃겼는데. 웃음 참느라 혼났어.”

……그만 웃으시면 안 될까요.”

네가 먼저 날 웃겼잖아!”



스가와라는 검지 끝으로 찔끔 샌 눈물을 닦았다. 꺽꺽대며 웃더니 목이 마른지 테이블 위의 커피를 벌컥벌컥 잘도 들이켠다. 카게야마는 금세 속이 타버렸다. 무슨 복을 누리자고 하필 그 이야기를 꺼냈을까. 아니, 의미를 부여하자면 카게야마와 스가와라가 만난 처음의 기억이었으니 꽤 뜻깊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저렇게까지 웃을 필요가 있는가.



아하하, 정말 재밌었지. 덩치는 산만해서 날 보자마자 대뜸 신이세요?’라니.”



스가와라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작정하고 당시 카게야마의 표정을 흉내 냈다. 그랬던가. 저렇게 웃긴 표정이었던가. 나름대로 동심을 되살려 던진 회심의 질문이었는데. 저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스가와라의 대찬 웃음소리로 말이 끊긴 탓에 원래 하려던 말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웃을게. 하지만 너무 귀엽잖아.”



카게야마는 그날의 일을 계기로 스가와라를 만났다. 마치 정말 신인 양 인자한 웃음을 짓고 돌탑 앞에 터줏대감처럼 서서, 운동복 차림으로 얼이 나가있는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보던 스가와라는 한술 더 떠 소원이 있어 왔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하필이면 믿는 사람에게 신이 나타난다.’던 어머니의 말을 귀에 담아둔 때라 도무지 스가와라의 존재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이 카게야마에게는 정말로 특별한 소원이 없었으므로 속내까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드러내놓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혹자는하도 웃어서 얼굴이 새빨개진 눈앞의 사람을 포함해서카게야마를 바보 같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스가와라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적당히 이른 시간, 등나무와 수풀이 흐드러져 이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오묘한 풍경에 섞여 아침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눈에는 영락없는 이었다. 그가 무슨 신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신사에 정말로 신이 있었으니 그동안 믿지 않은 것을 사과라도 해야 하나, 찰나의 순간에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스가와라는 눈이 부셨다.


스가와라는 훗날 그때 카게야마의 감정을 첫눈에 반한 것이라고 정리해버렸다. 지금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마침 카게야마를 온통 둘러싼 꽃잎들 때문에 코도 간지럽고 눈앞도 아찔했으니, 뜻밖의 만남에 심장이 무턱대고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그건 스가와라 씨도 잘못이 있다고요.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런 거짓말을 해요?”

믿을 줄을 몰랐지. 보통 사람이라면 뭐야, 저 황당한 인간은……? 하고 불신의 눈초리로 보지 않았을까? , 아니지. 날더러 신이냐고 물어본 시점부터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신년을 맞이해 스가와라와 충동적으로 떠난 기차여행의 끝물인데, 영 분위기가 잡히질 않는다. 눈도 많이 온다는 북쪽을 향했고, 실제로 기차를 타는 내내 하얀 설원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와 다른 의미로 들떠 도무지 말을 꺼낼 틈을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똥차게 준비했는데. 카게야마는 코트 주머니 속에 담긴 작은 상자를 떠올렸다.



그래서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낸 건데?”

아니……. 올라오다 보니까 여기도 높지 않은 산에 신사가 있다더라고요.”

가보고 싶어서?”

그냥, 그때 생각이 나기도 하고…….”



카게야마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자연스럽게 목이 타는 척 곁에 둔 컵을 들어 물을 마신다. 스가와라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다. 많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쌓일 것 같았다.



그럴까. 그때가 5월이었지? 한창 따뜻할 때였네.”



스가와라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카게야마가 꺼낸 이야기에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되새기는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빤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여전히 하얗다. 눈 같은 사람이다. 맑게 웃는 얼굴은 봄 같고, 해사한 음색에는 파란 하늘 아래 파도소리가 금세 깃들 것만 같고, 뭉게뭉게 흔들리는 잿빛 머리끝은 음영이 물든 가을의 구름 같다. 신이 아니면 어떨까. 그가 설령 사람이어도 여전히 온 계절을 담고 있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정말 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사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그렇다고 못 오를 건 없었지만 밤새 쌓인 눈으로 길이 얼어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장갑을 낀 손을 하나씩 꼭 마주잡고 조심스레 산길을 올랐다. 나뭇가지가 앙상한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인다. 지지대 삼아 나무기둥에 기대는 바람에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후두둑 눈덩이가 쏟아져 부서지기도 했다.



조심해요, .”



커다란 바위 하나를 넘었다. 곧장 신사의 입구가 보였다. 날이 궂어 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지, 비교적 평평한 신사의 앞뜰은 온통 하얀 눈밭이다. 발자국이라곤 바람에 흩날린 바싹 마른 나뭇잎이 낸 게 다였다. 돌로 쌓아올린 소박한 돌담 근처에 작은 동물이 달려간 흔적도 총총 남았다. 카게야마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흰빛 세상은 시간마저 멈춰있는 것처럼 고요해 자연스레 시선도 멎어버렸다.


뒤늦게 카게야마가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보다 한 뼘 앞섰던 스가와라는 마치 신사의 풍경에 담긴 한 폭의 그림처럼 소리도 없이 멈춰있다. 장갑을 낀 두 손을 가슴께 근처에서 낮게 붙잡고서 멍하니 신사를 눈에 담는 모습은 꼭 기도를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스가와라 씨.”

예쁘네.”

…….”

거기도 예뻤지? 난 겨울엔 안 가봤는데, 5월에는 등나무 꽃이 한껏 펴서.”



스가와라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면을 보고 있는 채였지만 카게야마는 퍽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지해있는 스가와라에 앞서 카게야마는 하얀 눈밭 위를 걷는다. 발자국이 꽤 깊게 남았다. 관리가 되지 않고 있거나, 너무 추운 날씨에 신사의 관리자마저 잠시 요양을 떠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다. 방수가 되는 부츠를 신어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뽀득뽀득 눈이 압축되는 소리에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안 와요?”



몇 발자국 가다가 스가와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추위 때문에 빨갛게 언 코끝이 한 번 훌쩍거렸다. 카게야마가 금세 우울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추운데 오자고 해서…….”

아니, 괜찮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괜찮아, 이 정도로는.”



성큼성큼 다가온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손을 맞잡는다. 장갑을 끼고 있어 뭉툭한 감촉이 닿을 듯 말듯 카게야마의 손바닥을 눌렀다. 잠시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붙잡고 있던 손의 장갑을 빼냈다.



. 춥잖아.”

잠깐만…….”



카게야마는 수줍은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작은 공간에서 넣어둔 무언가를 못 찾을 리도 없건만 꺼낸 손끝이 발갛게 익도록 주머니를 뒤적이던 카게야마는 뒤늦게 작은 상자를 꺼냈다. 눈치가 빠른 스가와라는 이미 카게야마의 의중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다. 카게야마는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에서 은색 반지를 꺼냈다.


혹시 추울까 스가와라에게 가까이 붙어 입김으로 호호 불며 장갑을 벗겼다. 선이 가느다랗고 마른 손에 반지를 가늠해보다가 힐끗,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또렷한 눈동자가 카게야마만 오롯이 담고 있다. 숨을 뱉을 때마다 하얗게 스러지는 입김을 베일 삼아 카게야마는 그의 손가락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웠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바람도 들지 않는 고요한 신사 앞, 눈이 내리는 소리만 자박자박 들렸다. 차가운 공기 속에 나란히 서로를 붙잡고 있는 맨손이 빨갛게 물들다가 이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카게야마는 뒤늦게 물었다.



장갑……, 다시 끼워줄게요. 춥잖아요.”

나 아직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카게야마.”



스가와라는 빙긋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의 의미를 안다. 꽤 오래 알고 지냈으니 그럴 수밖에. 스가와라를 처음 만났던, 만개한 보랏빛 꽃잎 아래에서도 그는 꼭 저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좋아해요.”

그건 알고 있어.”

……사랑해요.”

으음, 듣기는 좋지만. 그것도 이미 알고 있어. , 나도 사랑해.”

……스가와라 씨랑 평생 같이 있고 싶어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카게야마는 담백하게 말했다. 그제야 스가와라의 말문이 막힌다. 표정 변화가 미묘했다. 기쁜 듯, 수줍은 듯 추위로 붉어진 뺨 위에 홍조가 발그레 올랐다.


스가와라는 말없이 웃는다. 슬쩍 카게야마가 쥐고 있던 장갑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더니, 꽁꽁 언 손으로 카게야마를 붙잡아 천천히 신사로 다가갔다. 때마침 옅게 불어온 바람에 쏟아진 눈꽃이 머리 위로 흩날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신사 앞에서 가슴에 두 손을 소중히 모아 눈을 감는 행동에서 카게야마는 그의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기만 했다.



……이제, 소원 빌어도 될까요?”



올해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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