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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 29. 23세 때 일찍이 XX잡지에서 선정한 세계 톱모델 순위에 이름을 올린 일본인 모델로 수려한 외모, 완벽한 비율과 더불어 과거의 화려한 경력 등으로 성인 모델로 데뷔하자마자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10세부터 아역모델로 청소년 잡지에 데뷔해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일본의 대표적이고 독보적인 모델.


오이카와 토오루를 포털에 검색하면 가장 처음 뜨는 프로필이다. 물론 오이카와 본인이 적은 것은 아니고, 회사에서 그런 걸 따로 관리하는 부서가 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에 이건 또 무슨 무례인가 싶어 실눈을 뜨고 지켜봤더니 대뜸 리포터는 그걸 읊었다. 다 읽고서 이야, 하는 우스운 감탄사를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린다. 벌써부터 흥미가 떨어진 오이카와는 애써 웃으며 꿰고 있던 팔짱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어때요?”

뭐가 말입니까?”

오이카와 씨 프로필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이쪽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러 능구렁이 같은 리포터라고 매니저가 처음 인터뷰를 만류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뭐 얼마나 대단하고 치밀한 인터뷰를 준비해왔나 솔직히 궁금한 마음도 있었는데, 이젠 모든 호기심이 팍 소리를 내곤 터져버렸다. 오이카와가 부러 우스운 소리를 했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할까요?”

, 그건 팬미팅에서 하시는 게 좋겠네요.”



노골적으로 비꼬는 말에 오이카와가 오른쪽 눈썹을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기껏 귀한 시간 내서 만나줬더니 이렇게 무례할 줄이야. 스물아홉 살에 데뷔 십구 년차가 된 오이카와도 사석에서 언제나 예의를 지킨다. 인터뷰를 하겠다는 건지 사람 신경을 살살 긁어서 기사가 될 만한 이슈거리를 건지겠다고 온 건지 도무지 남자의 목적을 알 수가 없다.


일본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를 모르는 사람은 아주 나이가 많거나 어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오이카와 스스로 그런 자부심을 가지는 건 딱히 아니었는데, 사실이 그랬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모자까지 쓴 채 바깥에 나가도 오 분이면 들켰다. 파파라치도 붙고 어딜 가든 사람들이 와르르 따라다녔다. 나름의 신념으로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방송에도 나가지 않는 모델 하나가 가진 파급력은 어지간한 배우나 가수보다 컸다. 인기도 인기지만 자연스럽게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눈앞의 남자도 그런 부류일지 몰랐다.


그러나 오이카와도 이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스무 해였다. 벽이 가파르고 살아남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이 업계에서 꾸준히 노력만으로 성장세를 올렸다. 단 한 번도 추락한 일이 없어 이십대의 흔한 스캔들이나 가십거리도 없었다. 오이카와도, 매니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업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사람이란 뜻이었다.


오이카와는 날선 눈으로 그를 살피면서, 그러나 그가 묻는 황당무계한 질문들에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말투에서 최대한 정성을 담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도록 하면서 실제로는 그리 열심히 답변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은 모조리 눈치로 피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는 건 저쪽이다. 오이카와는 아주 비싼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저번 달 ○○잡지 표지모델 하셨죠?”



이윽고 꽤 불안한 표정을 하고 리포터가 서둘러 물었다. 오이카와가 민감해할 문제들만 골라 질문했는데 돌아오는 대답들이 죄다 써먹을 데 없는 것들뿐이라, 시간 내에 잡지에 실을 만한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오이카와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표지모델이 스가와라 코우시인 거 아십니까? 그 왜, 반 년 전쯤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요.”

그런가요. 들어본 적은 없는데.”

에이, 업계에서 깨나 유명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요. 그 사람 때문에 이번 달 잡지 매출이 확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다. 오이카와가 입 안의 연한 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개새끼. 당장에 멱살을 잡고 안경이 날아가도록 귀뺨을 갈겨주고 싶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저한테 무슨 소릴 듣고 싶은 건가요, 리포터님은?”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나이도 동갑인 라이벌이 등장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헛웃음이 다 났다. 그것도 질문이라고. 반 년 전 데뷔했으면 업계에서는 이제 갓 알 깨고 나온 병아리인데, 라이벌? 라이버얼? 감히 데뷔 십구 년차 대선배랑 이제 막 발 들인 신참이랑 라이벌?


, 오이카와가 가볍게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원통형 녹음기가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리포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고작 잡지 판매 부수 가지고 이름도 모르는 모델이랑 라이벌이니 뭐니 엮어서 재미도 감동도 없는 헤드라인 뽑으시려는 것 같은데, 그럴 바엔 이렇게 고상하게 앉아 인터뷰나 하는 것보단 다른 기자들처럼 제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또 알아요? 오이카와 토오루, 길거리에서 담배꽁초 버리다 과태료 물어, 뭐 이런 재미있는 기사 뽑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갑한 실내를 걸어 나왔다. 인터뷰 내내 뭐 씹은 표정으로 구석에 서있던 매니저가 오이카와를 대신해 몹쓸 소리들을 중얼거렸다. 등 뒤에서 리포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차에 타자마자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낮은 목소리로 쌍욕을 내뱉었다.



개새끼가, 어디서 감히.”



등받이를 밀어 오이카와는 길게 몸을 눕혔다.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낸 뒤 당장 저 망할 리포터의 소속 잡지사에 컴플레인을 넣으려다 말았다. 그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찰거머리 같은 파파라치들보다 앉은 자리에서 특종 내지는 기사가 날 만큼 자극적인 인터뷰를 실으려는 저런 작자들이 더 넌덜머리가 났다. 저 쓰레기 같은 인간의 뒤통수를 갈겨줄 방법이 없어 오이카와는 애먼 손가락만 씹었다. 운전을 하던 매니저가 힐끗 오이카와의 눈치를 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번에 얘기했던 자선행사용 화보 말인데, 일정 잡혔어.”

단독 아니지?”

. 자선활동 참여하는 모델이랑 배우 여럿이 같이 찍어. 너는 좀 특별 케이스라 같이 찍는 파트너도 있긴 하지만.”

파트너? 다 같이 찍는 게 아니고?”



한 달 전쯤에 급하게 연락이 왔었다. 태풍으로 인해 집과 재산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수재민들을 위한 자선 모금 행사가 잡혔는데 원활한 홍보를 위해 잡지에 화보를 싣고 방송으로도 참여를 유도할 예정이라고, 그러니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오이카와 씨가 참여해주면 더 없이 좋을 거라고. 오이카와는 별 생각 없이 오케이 했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좋은 일을 굳이 잘라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참여 인원이 상당히 많다고는 들었다. 화보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의상이나 메이크업도 수수할 테고, 톱모델 오이카와는 어딜 가나 눈에 띄겠지만 대인원이 한꺼번에 촬영한다면 그럴 것도 없으려니 했다. 단독 화보가 잡힐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네가 워낙 유명 인사여야 말이지. 너는 단독도 있어.”



매니저는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이카와가 난감하게 웃는다. 잡지에 실릴 화보를 찍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예정을 벗어나는 일에는 조금씩이라도 동요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파트너가 있다니, 오이카와가 가장 꺼려하는 일이었다.



누군데, 그 파트너가?”



상대가 누구든 배려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호흡을 맞추는 것도 사진 한 장 찍는 거라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찍는 것보다 훨씬 공이 들었다. 수백 장을 찍어도 마음에 차는 것이 나오지 않으면 긴 시간을 들여 다시 찍어야 한다. 느낌이 맞는 상대라면 수월하게 끝나겠지만, 오이카와라고 다른 모델들과 모두 어울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최근 막 뜨기 시작하는 신예라던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오이카와는 잠깐 동안 그의 말을 곱씹어본다. 스가와라 코우시, 최근 막 뜨기 시작하는 신예라던데. 스가와라 코우시. 스가와라, 코우시.



……?”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는 오이카와에게 로드 매니저는 못을 박듯 또렷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 코우시. 오이카와에게서 대꾸가 없으니 매니저가 백미러로 힐끔 곁눈질을 한다. 오이카와가 대뜸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 뭔데, 걔는?”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갑, 반년 전 데뷔해서 눈부신 성공을 이룩한 신예 모델. 다른 때라면 알지 못했던 프로필이 머릿속에 스치듯 흘러갔다. 기분 나쁜 인터뷰에서 들었던 그 이름을, 오이카와는 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재수가 옴 붙었다.

 






런웨이

오이카와 토오루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스가와라 코우시. 반년 전 SNS에 올라온 웹 화보로 데뷔. 그 데뷔 화보로 단번에 대중, 특히 젊은 층의 이목을 확 끌어당겨 무섭게 부상 중인 유망주. 그 뒤 짧은 시간 안에 첫 잡지 표지모델 자리를 꿰차면서 또래 모델들의 새로운 경쟁자로 자리매김 중…….


그러니까 운이 좋아서 떴다 이거다. 하지만 확실히 운만으로 가능한 성과는 아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대충 그 정도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웹상에서 특히 유명했다. 아직 숫자가 적긴 하지만 어엿한 팬덤도 있었다. 기본 프로필에 나와 있는 신장은 174cm. 모델을 하기엔 키가 조금 작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화보를 모아둔 블로그 게시물을 눌렀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예치고 화보가 꽤 많았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면서 오이카와는 빤히 사진들을 훑었다. 확실히, 단번에 유망주로 등장할 만한 페이스였다. 그러니까 얼굴보다는 그 얼굴에서 오는 분위기가.



백색에 가까운 무채색의 머리카락, 창백한 유리를 덧댄 것 같은 피부, 유일하게 색채를 띄고 있는 것은 연갈색의 눈동자와 복숭아빛 입술뿐이다. 명암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조명이 없어도 홀로 빛날 것처럼 반짝이는 존재감을 지녔다. 오묘하게 뜬 눈꺼풀과 기다랗게 뻗은 색 연한 속눈썹, 빛깔 없는 동공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모양은 사람보단 꼭 인형 같았다. 굵게 말린 머리카락 위로 쏟아지는 면사포, 그 위를 강렬하게 장식하고 있는 새빨간 장미꽃과 줄기는 마치 가시 면류관을 연상케 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어깨 위로 뼈가 툭 불거져있다. 핏줄조차 흔적도 없는 도자기 같은 몸, 그러나 단단하게 올라온 쇄골을 보고 오이카와는 내심 감탄한다.


독보적인 컨셉이긴 하네.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엔 소년과 청년 사이 특유의 청량감 있는 화보를, 성인이 된 이후에는 댄디하고 강한 듯 부드러운 컨셉의 화보를 주로 찍었다. 가끔 쇼에 나가면 어차피 특색 있는 컨셉은 다 해볼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오이카와의 사진은 모두 무난한 게 대다수였다. 오이카와를 전속모델로 두고 있는 유명 남성 의류브랜드도 정장이나 포멀한 의상이 중심이다. 여성에게는 이상형으로, 남성에게는 이상향으로 꼽히는 이유도 오이카와가 밟은 전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 완벽히 다른 극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몽환적인 느낌의 사진들에서 단박에 알 수 있듯 그는 중성적이거나 인외적인 느낌을 살려 작업했다. 머리에 그의 머리카락을 닮은 흰 사슴뿔을 올린다든지, 인간보다는 인류 초월적인 존재 같은 느낌을 주는 화보들이 많았다. 아마 그런 독특한 컨셉들로 마니아층이 형성되면서 대중 잡지에도 진출한 게 분명했다. 인정한다. 그가 주는 기묘하고 몽롱한 인상은 확실히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매니저나 재수 없는 리포터의 말대로 꽤 유명한 스가와라의 존재를 오이카와가 몰랐던 것은 그 여섯 달 동안 공석이든 사석이든 그를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리 언급된 이름은 아니었으니, 아마도 스가와라 코우시란 사람은 두문불출하며 자기가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조금 답답한 노승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오이카와와 파트너라고. 특별한 컨셉 없이 무난한 의상에 무난한 메이크업, 무난한 헤어로 찍는 자선행사 홍보용 화보에, 오이카와 토오루와 스가와라 코우시가.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뭘 그렇게 읽는 거야?”



매니저가 묻는다. 앉은 채로 메이크업을 받던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질문에 묵음으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촬영 당일까지 스가와라 코우시에 대해 공부했다. 이름 그대로 공부였다. 스가와라가 찍은 화보나 그의 프로필은 기본이고 여태껏 그가 해왔던 인터뷰 내역들까지 모두 훑었다. 매니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으면, ‘스가와라는 워낙 독특한 모델이고 어차피 둘이 찍을 거면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게 좋으니까.’라는 핑계를 댔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조금 흥미도 생겼다. 모델이라는 같은 직종을 공유하고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오이카와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성격도 그럴까? 정식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인터뷰 자료가 없어 판단이 서질 않았다. 대충 어떤 사람일 것 같다, 그렇게 짐작만 할 뿐이다.


고도의 신비주의? 그건 아니다. 그저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뿐이다, 모델 주제에.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묘한 기대감으로 기다리던 자선행사 홍보용 화보 촬영 당일, 오이카와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촬영장에 도착했다. 단독화보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일정엔 스가와라 코우시와의 촬영도 끼어있었다. 부지런히 촬영장에 도착한 이후 오이카와는 곧장 촬영에 들어갔다. 어차피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진 않아서 마음 편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자선행사 홍보용이니까, 로고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고 하트 모양의 부드러운 쿠션을 들고서 싱그럽게 웃으면 되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빨리 끝나진 않는다. 잡지에 실을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긴 해야 하니까.


한창 촬영 중에 촬영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온 모양이다. 그 누구란, 오이카와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곧 휴식시간이다. 힐끔 문 쪽을 바라보려던 오이카와는 시선을 고치고 마무리 작업까지 무사히 끝냈다.


휴식을 틈타 오이카와는 재빠르게 스가와라 코우시를 찾았다. 완벽히 초면이었지만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유난히 색이 연한 머리꼭지가 부지런히 촬영장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인이니 감독 및 스태프들에게 잘 보이는 게 좋다고 매니저에게 들었는지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모양새가 어딘가 짠했다. 오이카와는 이온음료를 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눈이 마주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 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이덴티티 같은 허여멀건 머리카락이 아니면 그가 화보 속의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실물은 훨씬 평범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는 또래 모델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인 스가와라 코우시의 민낯은 평소 그의 이미지와는 완벽하게 반대였다.


기대가 컸는데.


오이카와는 실망한 것을 드러내지 않고 스가와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얼떨결에 마주 인사했다.


하기야 자선행사 홍보용 화보인데 대체 뭘 기대했단 말인가. 이런 특수한 목적을 가진 화보에서 평소 스가와라가 즐겨 찍는 컨셉을 볼 수 있을 리 없다.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했었고. 사진에서 보았던,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위를 덮고 있는 지나치게 평범한 복장, 화장기가 거의 없는 수수한 얼굴에서는 역시 화보에서 보았던 그 분위기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이카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커플룩처럼 갖춰 입은 똑같은 티셔츠, 튀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의 청바지, 마찬가지로 화장기 없는 얼굴. 스가와라와 똑같다. 그 역시 놀라지 않았을까. 오이카와도 다른 화보에선 지금보다 분명 더 화려했을 것이다.


괜히 웃음이 났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준비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 멀찍이서 그를 관찰했다. 뭔가 특별한 만남 같은 걸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바보 같이.



피부가 하얀 건 단지 메이크업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톤이 밝았다. 모델치고는 신장이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작고 말랐다. 운동을 하긴 하는지 팔뚝에 단단한 근육이 붙어있긴 한데, 척 보니 운동을 한다고 잘 불어나는 몸은 아닌 듯했다. 한결 차분한 머리카락은 화보에서 보던 것보다 길이가 좀 더 짧다. 아마도 최근에 머리를 자른 모양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페이스에 남들보다 특별할 것 없는 몸, 무엇보다 전혀 힘을 주지 않았다. 신예라면 한창 얼굴을 알리기에 바쁠 시기인데, 그에겐 그럴 의지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초면이니 그럴 것도 없는데, 오이카와는 괜히 어이가 없어 자꾸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왔단 말이지.




오늘은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촬영이었다. 이런 건 처음일 텐데 스가와라 코우시는 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아보였다. 그건 좀 의외다.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간 얼굴은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신인의 모습이라기엔 어딘가 과했다. 속으론 당황했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뿐인가? 필시 그럴 것이다. 오이카와는 분명 프로였지만, 아직도 문득 긴장이 될 때가 있었다. 하물며 이제 막 발을 뗀 햇병아리가.


두 사람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이카와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자선행사의 타이틀 로고가 새겨진 아이보리색 니트로 갈아입었다. 스가와라도 같은 것을 입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조명 사이에서 그렇게 덩그러니 둘만 서있으려니 저절로 어색한 공기가 스몄다. 카메라를 보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이카와는 자연스럽게 헤쳐 놓은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다듬었다. 오이카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일종의 버릇이었다.


스가와라는 투명한 눈으로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 끝을 따라가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을 하면 넋을 놓는 타입인가. 분위기가 어색하면 촬영이 지연될 수밖에 없으니, 오이카와가 슬쩍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촬영은 처음이죠?”

, .”

광고용 영상도 찍을 텐데, 해본 적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아직.”

처음인 것치곤 되게 편안해보이네요.”



마지막 말엔 대답이 없다. 손가락 끝으로 턱만 매만지는데 무표정했다. 아무래도 그는 속을 알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인 것 같다. 잠시 뚱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오이카와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곧장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불편한 분위기가 드러나면 곤란하니 오이카와는 홀로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려 고군분투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리드에 곧잘 따라오긴 했다. 다만, 두 사람의 색이 워낙 판이하게 다르다보니 결과물이 생각보다 잘 안 나왔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오이카와와 손가락 한 마디 차이를 두고 붙어있는데도 명확하게 구획이 나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한 건 스가와라는 아직 긴장이 덜 풀렸다. 웃고 있어도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결과물을 확인하고서 오이카와는 고민에 빠졌다. 계속 이대로라면 끝이 안 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당장 한 마디 던지자니 선배의 꼰대짓 같아서 섣불리 말이 안 나간다. 오이카와가 힐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가 입을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는 본인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 번만 더 가요.”



조심스럽게 오이카와의 옷깃을 붙잡은 손도, 그렇게 말하며 똑바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도 제법 진지했다. 촬영이 한두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 다시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오이카와는 조금 놀랐다


스가와라는 이전보다 훨씬 능숙해졌다. 억지로 오이카와의 분위기에 맞추려하지 않고, 오히려 오이카와 쪽에서 좀 더 부드러워지도록 유도한다. 불편함과 어색함을 지우려 하는 오이카와의 과도한 동작이나 표정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시종일관 따뜻한 표정으로, 오이카와 혼자 이끌어가려던 걸 순식간에 평형을 맞춘다. 오이카와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했지만, 속은 온통 스가와라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놀랍다 이거다. 오이카와 정도의 대선배를 익숙하게 리드하는 것도 모자라 초반 촬영의 날선 분위기를 완화시킬 줄 안다. 타고 난 재능? 아니, 그것보단 훨씬 농도가 짙다.



잘하시네요.”



두 번째 촬영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앉아서 대기하는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가 다가가 음료수를 건넨다. 속속 오늘 촬영에 참여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단체촬영이니만큼 불시에 촬영이 지연될 우려도 있어서, 아마도 오늘 촬영은 꽤 길어지리라고 오이카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신예 모델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는 게 선배의 미덕이 아닐까.



감사합니다.”

사실 좀 걱정했는데, 나랑 어울릴 수 있을까 싶어서. 사진 봤거든요.”

저도 나름대로. 오이카와 씨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미남이니까요. 저는 좀 인상이 흐린 편이라 메이크업이 없으면 사실 좀.”

우와, 이렇게 훅 들어오는 칭찬 오랜만인데요.”



오이카와가 웃었다. 그걸 보고 픽 따라 웃는 모습이 어째 스물아홉 청년 같진 않다. 촬영할 때 긴장하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모습이라든지, 오이카와 옆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는 모습이라든지, 크게 의식을 안했다면 아마 오이카와는 자기보다 경험 많은 선배와 촬영 중이라는 착각까지 했을 정도다.


좀 비약을 하자면, 이미 술 한 잔 걸치고 온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


정말로 의외였다. 몽환적이고, 고혹적이기까지 한 사진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자연스럽고 털털한 모습은, 차라리 그와 지나치게 닮은 형이나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안할 만큼 낯설었다. 꾸밈없이 찍어야 하는 자선행사 화보라서 그런 건가. 연한 빛깔의 머리카락과 흰 피부, 사진에서도 보았던 투명한 눈동자 같은 것은 전혀 변한 게 없는데, 화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다. 평범하지만, 확실히 평범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오이카와가 전에 본 적 없던 청량함이었다.




단체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밤이 늦었다. 그 사이 오이카와는 쉬는 시간 틈틈이 스가와라와도 좀 친해졌다. 아무래도 또래고, 직종도 같다보니 할 말이 많은 덕이 컸다. 오이카와는 어딜 가든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라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도 했지만 촬영 내내 스가와라를 보이지 않게 챙겼다. 연예계는 인맥이 중요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스가와라를 언뜻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그는 눈치가 좋은 편이라 오이카와의 의도를 한 번에 알아챈 듯 가만히 뒤를 쫓아다녔다.


상대의 호의를 거절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다. 그럼에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인 오이카와는 전혀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많이 신기한 사람이었다.


촬영이 종료되고 난 뒤엔 다들 짐을 챙기고 인사를 하며 분주히 돌아갔다. 오이카와도 내일도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있어서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불렀다. 그가 둥그런 눈을 깜빡이며 오이카와를 바라본다.



오늘 어땠어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표정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이건……, 버릇 같은 거라서.”

강요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자주 웃어요. 웃는 게 더 잘 어울리는데.”

……그런 부끄러운 소릴 잘도 하시네요.”



스가와라가 난감하게 웃었다. 오이카와도 뒤늦게 아차 했다. 좀 가까워졌다고 저도 모르게 풀어졌던 모양이다. 사과하려던 오이카와를 막은 건 스가와라였다. 말 대신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에게 자기 휴대폰을 건넸다. 받아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스가와라를 응시했다.



연락처, 제가 알아도 될까요.”

……연락하면 나중에 같이 술 한 잔 해줘요?”

오이카와 씨는 바쁘잖아요.”

물론 안 바쁠 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감 좋잖아요?”



무슨 속셈일까. 오이카와는 슬금슬금 즐거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저 묘한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오이카와의 연락처를 요구하는 스가와라의 속은 추리하긴 버거웠지만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그의 휴대폰에 번호를 꾹꾹 눌러주면서 오이카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정갈하게 이름으로 저장된 것을 받아들고 스가와라도 따라 웃는다. 못내 헤어지기 아쉽다. 첫 만남으로 연락처도 주고받았으니 마음 먹자면 만날 기회는 무수히 많을 텐데도.



오늘 감사했어요.”



등을 돌려 걸어가던 오이카와에게 스가와라가 외치듯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만 돌려 스가와라의 표정을 확인했다. 역시나, 지나치게 평범한 얼굴이었다. 다만.



다음에 또 봬요.”



화보에서 보았던,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몽환적인 눈동자는 훨씬 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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