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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가장 철없을 나이에 만나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진득하게 사랑하다가 헤어진 연인을 딱 일 년 뒤에, 집 근처도 아니고 동네 편의점도 아니고 시내의 레스토랑이라든지 카페라든지, 하다못해 횡단보도 건너편도 아니고 비행기로 장장 열 시간을 넘게 날아와야 하는 이 머나먼 타지에서 만나는 게, 정말로 우연이 아닐 수 있을까.


유학을 간다고는 했다. 그러나 어디라고는 듣지 못했다. 한참 냉전기에 둘 사이를 어떻게든 이어보려 안간힘을 썼던 이와이즈미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어디로 유학을 갔는지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질인지 스가와라를 만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눈앞에 스가와라 코우시를 두고도 유치한 감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모르는 척 지나쳐야 할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유들유들하게 인사를 해야 할지후자가 좀 더 오이카와의 성향에 맞는 일이었지만퍼뜩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런 오이카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스가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러더니 특유의 싱그러운 웃음까지 지어 보인다. 오이카와는 금세 저게 가짜라는 걸 알아챘다. 스가와라가 편안한 대인관계를 위해 늘 희생시키던 게 바로 미소였다. 오이카와도 이제, 아주 낯설고 먼 타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자신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는, 스가와라의 단단한 다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괜히 울컥했다.



……여기 있는 줄은 몰랐어.”

그렇구나.”



시시한 대답이다. 일말의 관심도 사라진 냉정한 태도였다. 스가와라라면 그럴 수 있다.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누구와도 거리를 두지 않았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관계란 필요에 의해 성립하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일이었다. 지난 8년 동안의 오이카와에겐,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믿고 있지만.



이런 데서 다 만나고, 신기한 우연이네.”



역시 스가와라는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다. 오이카와가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행?”

.”

좋겠네.”



오이카와는 침묵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얀 입김을 몽글몽글 피워낸 스가와라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느리게 발걸음을 직직 끌며 걷는다. 오이카와의 경험상 저것은 스가와라가 무언가를 갈등하거나 고민하고 있음을 뜻했다. 오이카와는 더 주저하지 않고 스가와라를 붙들었다.



……새로 만나는 사람이야?”



그러나 언제나 목소리는 맘과 같지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고도 스스로 아차 했다. 스가와라는 색이 연한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이카와의 팔뚝을 걷어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예전처럼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변한 과거의 연인에게 오이카와가 받은 충격은 생각보다 거셌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채로 그를 만난 것 역시 그 충격에 크게 한 몫 했으리라.



즐거운 여행해. 좋은 추억 많이 쌓아서 돌아가고.”



빙긋 웃는 입 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스가와라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홋카이도의 칼바람을 연상케 했다.

 






파리지앵 랩소디

오이카와 토오루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자박자박, 타박타박. 가볍게 끌리는 걸음소리 위로 좀 더 무거운 운동화의 발자국 소리가 덧입혀졌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마치 눈처럼 소리가 쌓였다. 어느덧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왜 따라와?”



결국 스가와라가 등을 돌리고 물었다. 몇 발자국 뒤에서 스가와라의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걷던 오이카와가 걸음을 멈추고 버릇처럼 뒷목을 문질렀다.



유감스럽게도 숙소가 이 방향이거든.”

……, 그래?”



그는 처음 만났던 때와 다름없이 유들유들했다. 웃기도 퍽 잘 웃고, 당황하면 쓸데없는 농담 따위를 했다. 오이카와는 위기에 별로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물론 8년 동안 만나면서 제법 진지한 모습도 종종 보긴 했지만, 역시 드문 일이다. 아마 지금의 상황도 그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가와라는 그렇지 않았다. 스가와라에겐 아주 심각하고, 고질적이고, 슬프고, 우스운 사태였다.


요 근래 기분이 내내 가라앉아있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야쿠를 불러 기분 전환에 나름 성공했는데, 이렇게 예기치 못할 폭풍에 휘말릴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이카와가 파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여행이야 사귈 때부터 스가와라가 늘 입에 달고 살던 것들이라, 오이카와 혼자 궁상맞은 추억이나 쌓으러 온 것까지야 좋았겠으나, 파리가 그렇게 좁아터진 동네도 아니고 길 한복판에서 딱 마주칠 줄이야. 난감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스가와라는 슬금슬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을까. 그와 마주치기 직전까지도 멍청한 표정으로 과거의 그를 떠올렸던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래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평소답지 않게 제자리에 우뚝 얼어버렸던 자신을. 모를 것이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유난히 무관심했다. 그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방도는 없으나, 지금이라고 별로 달라진 것은 없을 것이었다.



잘 지냈어?”



등 뒤에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아까보다 좀 더 멀어진 목소리였다. 딴엔 배려랍시고 한참 뒤에서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겹치는 발걸음 소리가 스가와라는 못내 불편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길로 갈까. 고민은 했지만 선뜻 걸음이 나서지 않는다.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이었다.



……그럭저럭.”

얼굴은 좀 괜찮아 보이네.”



내 얼굴을 대체 네가 언제 살펴봤다고. 그렇게 쏘아붙이려다 스가와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참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는 상대들에게 늘 다정하게 굴었지만, 그는 늘 선을 긋곤 했다. 그런 것에 있어서는 스가와라보다 능숙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늘 농담을 했다. 그는 아닌 척했지만 그 농담 같은 것들에는 언제나 악의가 담겨있다. 사람이 듣고 정곡을 찔릴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한다든지, 교묘하게 사람의 기분을 비트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스가와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같은 반,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 비슷한 부류임을 확인한 후로, 오이카와는 그 악의로 끈질기게 스가와라를 쫓았다.


오히려 사귀고 나서부터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는 늘 무관심했다. 일 년이 지날 때까지도 스가와라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무엇을 먹지 못하는지 몰랐다. 먼저 사귀자고 한 쪽은 스가와라였으니 묵묵히 감내했다.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코우시.”



스가와라가 걸음을 빨리했다. 습관처럼 발을 직직 끌던 것도 멎었다. 오이카와가 느리게 따라붙는다. 그는 늘 여유로웠다. 관계에 조급했던 것은 언제나 스가와라였다.



그렇게 싫으면.”

…….”

내가 기다렸다 갈게. 먼저 들어가.”



길가에 서서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 좋은 눈치로 스가와라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안 듯했다. 스가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까지,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달려와서야 벅찬 숨을 골랐다.


대체 뭘 위해서 다시 만난 걸까. 남은 거라곤 이따금씩 성냥불에 태워 없애도 좋을 구질구질한 기억들뿐인 걸.


솔직히 말하면 도망칠 것도 없었다. 스가와라와 오이카와는 서로에게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런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물어선 안 됐다. 물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이제는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무엇으로부터. 아마도 일 년 사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고, 문득 과거의 그를 떠올린 스가와라 자신으로부터일 것이다.


한참이나 기분을 추스르고 스가와라는 아파트 문을 열었다. 가로로 긴 철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했다. 계단을 밟아 오르는 내내 속이 급격하게 차가워진다. 오늘 잠에는 들겠지만, 내일 아침에 깨면 분명 배가 아플 거라고 짐작했다.


우울이 잠식하는 시간,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만나선 안 됐다. 빛이 강한 곳에는 언제나 가장 짙은 그림자가 지는 법이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살아온 길, 가정환경, 성격이나 외모부터 교우관계, 성적, 진로 등을 포함해 모든 것이 판이했다. 사람의 내면을 평가하는 기준을 아주 간소화해 부정과 긍정으로 나눈다면, 오이카와는 중간에서 조금 긍정의 방향으로 기울어진 사람이었고 스가와라는 부정의 극단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종종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버릇처럼 스스로의 목을 부여잡고 끝도 보이지 않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고자 숨을 참고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을 놓곤 했다. 스가와라는 그럴 때마다 악을 썼다. 그만 내버려두라고.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굳이 위로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일 년을 꼬박 심해 속에 갇힌 스가와라를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이듬해 그마저도 관뒀다.


그가 스가와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스가와라에게도 오이카와는 미지의 세계였다. 언뜻 보면 가장 평범함에 가까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는 언제나 무리의 중심이었다. 무리의 중심이었음에도 스가와라가 넋을 놓고 있을 때면 거짓말처럼 변두리로 벗어나 스가와라의 발자국 위를 배회했다. 특이한 애였다. 그게 오이카와에 대한 스가와라의 첫인상이었다.


의외로 함께 있으니 도움이 됐다. 상성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고분고분했다.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이해하고 싶지 않아하는 고집은 있었지만, 스가와라에겐 굳이 그러지 않았다. 결국 오이카와의 그 점이, 스가와라로 하여금 이별을 고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스가와라는 그대로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불을 켜지 않아 암실처럼 어두운 실내에 연한 형광등 불빛만 반딧불처럼 떠돌았다.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내일 잠에서 깨고 나면 스트레스성 복통을 호소할 거라 예측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스가와라는 아마도 오늘 새벽이 다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거였다.






 

*






 

오이카와는 씻고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스가와라의 생각으로 분주했다. 정확히는 어제 저녁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스가와라의 곁에 있던 키 작은 남자. 언뜻 보았을 때에는 스가와라와 동년배이거나 그보다 좀 더 어려 보였다. 어제 스가와라에게 넌지시 물었던 것처럼 그가 스가와라의 새 애인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오이카와는 어제 그렇게 물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예민하다. 특히 대인관계에서의 역치가 아주 낮아 외부의 자극에 민감한 주제에 그는 제 속에 쌓인 것을 드러내는 데에는 영 요령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간의 경험으로 어제 오이카와가 무심코 던진 질문에 스가와라가 된통 관자놀이를 후려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는 오이카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부드럽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 삼자가 봤더라면 제 죄를 뉘우치지도 못할 만큼 다정한 태도로 말했을 뿐이다. 다만 일순 칠흑 같은 그 동공으로부터 오이카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망했다. 온통 머릿속이 그 생각뿐이었다. 여행 첫날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조식 거리를 사올 생각이었는데, 스가와라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한참을 그 거리 위에 덩그러니 잠겨있던 탓에 결국 오이카와는 곧장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빈속으로 간단하게 짐만 챙겨 방을 나선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내내 오이카와는 생각에 잠겼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고민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그게 호재든 악재든 빠르게 훌훌 털어내는 낙천적 성격이 장점인 사람이었다. 자꾸만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 것은 스가와라를 만나면서부터 생긴 일종의 강박이었다. 사소한 것까지 메모하는 습관도 들였지만 그것은 반 년 전부터 그만둬버렸다. 이별을 고하고 훌쩍 떠나버린 스가와라에게 던지는 나름대로의 항변이었다. 8년이나 연애하면서 스가와라에 대해 알게 되고 그가 가진 배경을 이해하면서 얻은 수완이었으나, 헤어지고 나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원래 머리가 좋았다. 굳이 메모하거나, 섬세하게 기억하거나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파트 근처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바게트가 먹고 싶었지만 당장 손질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방에 돌아오는 길에 사올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빵집은 손님이 붐빈다. 불어를 할 줄 모르니 영어를 썼다. 낯선 동양의 이방인에게도 주인은 웃으며 빵과 잔돈을 건넸다.


아파트에서 가까운 역은 두 개였다. 하나는 Belleville, 다른 하나는 Colonel Fabien역이다. 오이카와의 아파트는 그 중간에 위치했다. 오이카와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Belleville역은 2호선과 11호선의 환승역이므로, 갈 수 있는 곳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다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으며 오이카와는 힘차게 걸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스가와라에 대한 생각으로 너덜너덜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그가 여행을 망치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장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시청역에 내려서 강변을 조금 걷기로 했다. 다행이 날씨가 우중충하지는 않았다. 이따금씩 구름 위로 해가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좋은 징조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말끔하게 먹어치운 샌드위치 봉투를 크로스백에 구겨 넣고 오이카와는 지하철을 탔다.


루브르는 유명 관광지라 일찍 가지 않으면 사람의 지옥을 경험할 거라고, 우리 중 파리 여행의 선두주자였던 하나마키가 언질을 주었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지만, 어제 스가와라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일도 까맣게 잊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다른 때야 당장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부터 걸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일본이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음침한 애였다. 그 애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을지도 모를 얘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늘 상냥한 웃음으로 속내를 감추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사람들의 머리꼭대기에 앉곤 했다. 부유한 집안, 아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그 애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씀씀이가 좋기로 유명했다.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것이 무작정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정의감이 투철했던 당시의 오이카와에겐 그게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를 잘 만나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건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없이 그것들을 뿌리며 사람들을 유린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믿었다.


완벽한 억측이었다. 스가와라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했기에 가능했던, 어린 날 오이카와의 과오였다. 물론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스가와라에게 한 적은 없지만 그는 눈치 하난 오이카와보다 한 수 위였으므로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내색하지 않았다. 스가와라가 그런 것으로 오이카와를 힐난할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그때 즈음엔 알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의 아버지는 일본 유명 중소기업의 CEO. 경제 위기를 거뜬히 이겨낸, 기반이 튼튼한 회사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것엔 통 관심이 없던 오이카와조차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으니 그의 아버지는 인망이 두터운 경영자가 확실했다. 그러나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스가와라의 강박적인 성격이 무조건 그들의 탓일까 깊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만,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의 성격도 그의 유전자도, 그가 자라온 성장배경도 모조리 그의 부모 손에서 탄생했으니, 스가와라가 늘 지니고 사는 마음의 멍 역시 그들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해도 속단이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똑똑했다. 말랐지만 몸이 날렵해서 운동도 제법 잘했다. 교우관계도 원만하고누구든 중소기업 CEO의 아들과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을 테니성적도 좋아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종종 오갔다. 그 애는 타인의 시선에선 완벽에 가까운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랬다. 그 허울 좋은 껍데기 속에 든 게 텅 빈 깡통 같은 돌멩이였다는 것은, 오이카와만이 유일하게 알았다.


그 애는 습관처럼 웃었다. 눈썹을 조금 내리고 눈꼬리를 예쁘게 말고, 윗잇몸이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정말이지 일말의 가식조차 보이지 않아서, 오이카와는 그가 아주 재수 없는 사람이지만서도 상냥하게 웃는 얼굴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건 일종의 방어였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을 평범하게 만들고 싶어서 스가와라가 외부에 쳐놓은 바리게이트였다. 친구들에게 비싼 선물을 하는 것도, 종종 분식집으로 몰려가 맛있는 군것질들을 한 턱에 쏘는 것도 자신의 재력과 집안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스가와라를 지켜본 지 고작 네 달 만에, 그건 스가와라가 제 부모에게 자신의 원만한 교우관계를 드러내놓고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단 것을 오이카와는 알아차렸다.


그래, 스가와라의 모든 행동의 범위는 그의 부모에게 맞춰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스가와라는 영악했지만 지금보단 어렸으므로 허술한 면이 분명 있었다. 그에게 성적과 친구들, 갈등 없는 학교생활은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트로피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 그 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부모님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구나 생각해서 자신의 어디에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조금 의외인 이유였다. 오이카와는 그가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훈장을 달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등학교 또래의 학생들이라면 부모나 주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특히 강했다. 스가와라가 독특한 거였다. 그 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묘했다.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면서 방심하고 있으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 스가와라는 언제나 오이카와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스가와라는 투명한 듯 안개가 가득 낀 바닷가 같았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건 고작 빙산의 일각이었다.




오이카와는 바다 위에 뜬 빙산 같은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앞에 섰다. 날이 썩 춥지는 않았지만 종종걸음으로 오이카와는 안으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뮤지엄 패스가 있었기 때문에 따로 표를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들고 온 펜으로 패스를 개시하고 곧바로 입장 줄에 섰다. 입장하자마자 박물관내 지도를 펼쳐들고 오이카와는 걸었다. 계단을 오르니 저 끝에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다. 지도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라고 적혀 있었다.


머리가 없이 몸만 있는 조각상이었다. 뱃머리 같이 생긴 것 위에 당당하게 발을 딛고, 만약 팔이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깃발이라도 치켜들었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날개뼈 위로 제법 큰 날개가 양쪽에 달렸다. 오이카와는 제일 먼저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예전에 읽었던 그리스 신화를 되감아본다. 승리의 여신 니케, 여신답게 마치 신전으로 들어가는 아치형 입구 안, 가장 높은 곳에 서있었다. 그녀의 앞에 모인 관광객들은 마치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선 순례자들 같았다.


오이카와는 미술이나 조각 같은 것에는 문외한이었다. 스가와라가 건축 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이카와가 알고 있는 예술의 경계는 그가 언급했던 것들이 끝이었다. 그래도 조각상이 입은 얇은 천 같은 옷의 질감이나 옷의 주름, 날개의 섬세한 표현 같은 것들이 썩 대단해보이긴 했다. 무엇보다 강렬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오자마자 본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뜻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계단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인파 속을 시선으로 헤집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제 봤던 사람이 서있었다. 그러니까, 스가와라와 함께 있었던 조금 키가 작은 남자. 오이카와는 홀린 듯 사람들의 물결을 뚫고 그를 향해 걸었다. 혹시 인파에 휩쓸려 짐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크로스백을 손에 꼭 쥐고 오이카와는 초조하게 보폭을 늘렸다.



.”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일본어를 썼다. 그는 서양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본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이름 모를 연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잠깐 멈추고 오이카와를 돌아본다.



일본인이에요?”

예에.”

도와드릴 거라도?”



그가 씩씩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하루에도 많은 일본인을 만날 테지만, 그는 마치 오이카와가 처음인 양 반가운 얼굴을 했다.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머뭇거리던 오이카와가 승리의 여신 니케와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아요?”



그는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 다음 뱉을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한 폭 거리에서도 진폭을 높여야 겨우 들릴 만큼 주위가 산만했지만 그도 오이카와도 꼭 다른 공간에 갇힌 것처럼 고요했다.



혹시, 오이카와 씨입니까?”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오이카와는 당황한 채로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알겠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오이카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바닥을 마주잡고 가볍게 인사를 마친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야쿠 모리스케입니다. 스가와라와는 친구예요.”



스가와라는 그다지 발이 넓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깊게 마음을 나눈 사람은 손가락에 꼽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가와라의 친구라고 단언하는 이 사람, 야쿠 모리스케는 아마 그가 파리에 온 뒤로 만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같은 학교의 동기였다든지, 아니면 일본인 유학생 모임에서 만났다든지.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혹시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네.”

……스가와라가 제 얘길 해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요.”



오이카와는 그의 말투에서 야쿠가 이곳에서 만난 스가와라의 가장 친한 친구이리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제 속내를 드러내는 것엔 영 서툴러서 자기가 기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되는 사람들을 한 명씩 사귀어왔다. 일본에 있을 때는 그게 이와이즈미였고, 여기서는 야쿠 모리스케, 오이카와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야쿠가 가진 무전으로 무슨 소리가 넘어왔다. 곧이어 능숙하게 불어를 한바탕 구사한 야쿠가 오이카와에게 웃으며 말했다.



구경하세요. 다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모자랄 거라, 부지런히 다니는 게 좋을 겁니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해요, 스가와라는 만나주지 않을 테니.”



그가 건넨 것은 명함이었다. 간략하게 그의 정보만 적힌 것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명함이었음에도 그럭저럭 알아볼 만했다. 그렇게 얘기하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야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명함을 손에 쥔 채로 멍청하게 제자리에 서있었다.


그는 오이카와나 이와이즈미만큼 스가와라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신분 증명도 되지 않은 초면의 남자에게 선뜻 명함을 건넬 리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니, 무슨 의미일까. 더 되짚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야쿠는 어제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과연 스가와라는, 그에게 오이카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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