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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5월 6일 치유온에 발간될 신간의 미리보기입니다.
※ 소프트 느와르, 잔혹한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르륵, 은행의 기계가 돈을 세는 소리가 들렸다. 말끔하게 떨어지는 소리에 새색시처럼 가슴 한 구석이 두근두근했다. 오늘 들어왔을 정규 월급에 근근이 벌어두었던 일당들을 모두 더하면 오늘 하루쯤은 옥탑방 평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어도 양심에 찔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의 화면 위로 몇 가지 숫자들이 둥실 떠올랐다. 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아껴가며 모은 돈은 이제 적은 액수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봤자 작고 형편없는 집 한 채 마련하기도 버거웠지만.
들뜨고 지친 발걸음에 녹슨 나뭇잎이 밟혀 부스러졌다. 어느새 낙엽이 지는 계절이다.
푸르게 빛나던 여름의 풀잎들은 하늘에 물들어 빛깔을 잃었다. 누렇게 뜬 나무들을 대신해 가을의 하늘이 높고 청명하게 반짝였다. 이따금씩 아스팔트의 열기를 잊게 만드는 바람도 선들선들했다. 여름 내내 찌든 더위가 겨우 한 꺼풀 벗겨진 초가을의 어느 날, 산등성이에 걸린 태양빛을 바라보고 오늘은 빨래를 하면 잘 마르겠다, 쿠로오 테츠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오늘 언제 퇴근이더라. 가벼운 마음으로 은행을 나서며 쿠로오는 생각했다. 한창 일하는 중이라 휴대폰 확인이 어려울 텐데, 잠깐 쉬는 시간에라도 보겠지 생각하며 쿠로오는 그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몇 시에 끝나? 고기 먹자. 바쁜 시간이라 역시나 대답은 없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쿠로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은행을 나오니 시내의 복작복작한 풍경 너머로 높이 솟은 언덕이 보인다. 그곳은 마치 부락처럼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였다. 쿠로오 테츠로의 집은 저곳 가장 꼭대기, 밤이 되면 야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낡은 연립주택의 옥탑방이었다.
스가와라에게 답장이 왔다. 술은 내가 가지고 갈게. 쿠로오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있는 마을
쿠로오 테츠로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쿠로오 테츠로에겐 부모님이 없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고아원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그의 부모였고 형제였다. 고아원은 그렇게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족함 없이 살았다. 이곳에 단출하게 자리를 잡은 모든 사람들이 쿠로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으므로, 사실 진짜 가족 같은 건 쿠로오에게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쿠로오는 어렸지만 만족할 줄 알았다. 원장은 그런 쿠로오에게 지혜롭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가족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이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쿠로오가 자발적으로 베일에 싸인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아니고, 그의 부모를 안다며 고아원을 방문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부모와 아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은 원장실에서 선생님과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엿듣고 싶어 문 위에 귀를 대고 있던 쿠로오를 담당 선생님이 쫓아내는 바람에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쿠로오를 입양으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곳 고아원에서도 종종 입양되어 고아원을 떠나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게 쿠로오 본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누굴까. 멀찌감치 보았던 그들은 나이가 좀 지긋한 남성과 여성, 누가 봐도 단란한 가정이었다. 아이는 없었지만.
그들은 두 번 더 고아원을 방문했다. 절차도 있고, 쿠로오 본인의 의견도 중요하단다. 그들은 그 두 번의 방문 동안 쿠로오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로 그의 친부모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외국에 있고, 당장 쿠로오를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올 동안 자신들이 어린 쿠로오를 찾아 돌봐주겠다며 수소문 끝에 이곳을 찾아낸 거랬다. 쿠로오는 그들의 다정한 분위기에 녹아들어가 손쉽게 수긍했다. 한참 입양을 망설이던 끝에 그는 마침내 그들의 가정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떠나던 날 조촐하게 파티가 있었다. 쿠로오 테츠로의 창창한 앞날을 기원하면서, 작별 인사를 위해 원장이 마련한 자리였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엔 결국 꼴사납게 울음을 터뜨렸다. 원장 선생님이 달래주고, 함께 있었던 모든 아이들이 쿠로오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한 곳이다. 그러나 쿠로오는 더 안락한 보금자리를 위해 이곳을 나서야 했다.
간혹 연락하라던 고아원 선생님들의 말을, 쿠로오는 실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쿠로오와 함께 고아원을 나설 때까지도 상냥했다. 쿠로오의 짐을 챙겨 자동차에 싣고, 뒷좌석에 태운 후 자동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이미 고속도로로 접어든 후였다.
아씨, 얼굴에 경련 날 것 같아.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두툼한 손으로 뺨을 매만지면서 투덜거렸다. 말미에 나온 욕설에 쿠로오는 움찔했다. 고아원에서 그렇게나 다정스럽게 웃던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 대신 싸늘한 냉기가 어렸다. 백미러로 보이는 눈빛이 서슬 퍼렇게 쿠로오를 노려본다. 쿠로오는 단박에 겁을 집어먹고 사색이 되었다. 슬금슬금 피하는 기색을 보이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짜증을 냈다.
얌전히 있으렴. 난 어린애는 패고 싶지 않거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머릿속이 황망해져서 두 눈에 울음이 왈칵 차올랐다. 어디로 가는 건지 행선지조차 알 수 없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쿠로오는 급한 대로 뒷좌석의 문손잡이를 쥐었다. 덜컥덜컥, 잠겨있어 열리지 않는다.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기엔 쿠로오는 어렸다. 소리가 들리자 앞좌석에서 묵직한 막대가 날아들었다.
다행이 맞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소리와 당혹스러운 상황에 쿠로오의 사고는 꽝꽝 얼어버렸다. 남자가 속도를 올린다.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자동차는 빨라지고 있었다.
뛰어내릴 테면 뛰어내려 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쿠로오는 뒷좌석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고아원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들이 쿠로오 부모님의 지인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왜 고아원을 몇 번씩이나 방문까지 하면서, 쿠로오를 데려가려고 한 걸까.
눈치 챘어야 했다. 쿠로오에겐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 따라서 그들이 해주었던 ‘부모’에 대한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공포에 잠식되어 입을 틀어막고 흐느껴 울던 쿠로오는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자동차의 진동이 멈추고 누군가가 등을 툭툭 건드리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낯선 동네다. 잡지나 신문에서 보던 대도시의 풍경은 분명 아니었다. 쿠로오는 멍청하게 쭈그리고 앉아 주위를 살핀다. 열린 문 사이로 쿠로오를 노려보던 남자가 성을 냈다.
빨리 안 내리고 뭐해?
뒷덜미가 잡혀 쿠로오는 질질 끌려갔다. 어떤 건물로 들어간다. 쿠로오에겐 높은 계단을 몇 층이나 옷을 잡힌 채로 올랐다. 옥상까지 다다르니 작은 컨테이너 박스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쇠기둥을 지지대로 세우고 불투명한 비닐로 대충 둘러놓은 공간이었다. 남자는 불도 켜지지 않은 문 안으로 끌고 온 쿠로오를 집어던졌다. 저항도 못하고 몇 바퀴 차가운 바닥을 구른 쿠로오는 짧게 신음했다. 시멘트 바닥에 마구 긁힌 맨살을 보듬기도 전에 머리채가 잡혔다.
야, 이거 뭔지 아냐. 너 글씨는 읽을 수 있지?
쿠로오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이 팔락거렸다. 그러나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쿠로오는 글을 안다. 쓸 줄도 알고 읽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이 캄캄했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시야로 들어오는 것은 새카만 망망대해였다. 쿠로오가 대답이 없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쿠로오의 뺨을 툭툭 두들겼다.
이거 숫자거든. 네 아빠가 빌려가서 떼먹은 돈이야.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그때부터 쿠로오의 입에서 엉망으로 흐트러진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뭘 잘못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야만 살 것 같았다. 쿠로오는 더 눈물도 나오지 않는 얼굴로 꺽꺽거리며 울었다. 남자가 귀찮은 듯 귀를 후볐다.
무슨 배짱으로 성도 안 바꿨어, 쿠로오 군? 덕분에 찾는 건 좀 수월했지만.
이빨이 저들끼리 딱딱 부딪쳤다. 소리가 듣기 껄끄러웠는지 남자의 억센 손이 쿠로오의 정수리를 꽉 눌렀다. 엎드린 채로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쿠로오가 입을 다물고 줄줄 울었다. 그는 쿠로오를 억누른 채로 말을 이었다.
네가 골라. 지금 당장 배를 열어서 네 장기를 팔아줄까, 아니면 살아서 일할래.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쿠로오 같이 어린애를 다루는 데에 그보다 더 적합한 협박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쿠로오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살려주세요. 뭐든 다 할게요. 잘못한 게 없었음에도 쿠로오는 손이 닳도록 그에게 빌었다. 한 가닥 자비를 바랐다.
잠시 후 남자는 방을 나갔다. 삽시에 고요해진 방 안에서 쿠로오는 울음을 삼키고 손등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아직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난생 처음 겪는 괴기한 경험에 모든 감각이 바짝 마비된 것만 같았다. 고아원에서 나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뒤늦게 긴장이 풀려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것 말고는, 쿠로오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가와라를 만난 건 그곳에서였다.
쿠로오는 뒤늦게 시멘트 바닥 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금세 경계를 풀었다. 왜냐하면 그는 쿠로오와 또래, 혹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애는 가장 구석, 먼지가 쌓인 시멘트 바닥 위에 쭈그리고 앉아 죽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쿠로오가 훌쩍이며 유심히 그를 살핀다. 죽은 건지 누군가 만들어놓은 인형인지 헷갈릴 만큼 그 애는 움직임이 없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빛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눈동자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애의 눈 밑이 퉁퉁 부어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애도 어디선가 나타난 수상한 사람들에게 납치되듯 끌려와 이곳에 감금된 것이 틀림없다. 쿠로오는 아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뒷목이 오싹해져서는 정수리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걔는 또래였지만 또래 같지 않았다. 고아원에 있던 쿠로오 또래의 친구들은, 적어도 저렇게 창백하지 않았다.
쿠로오는 엉금엉금 기어 그와 반대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릎을 모아서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악몽 같은 일에 쿠로오는 계속 오늘 하루의 일을 되감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갇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역시 이름 모를 또래의 소년 하나와 함께.
스가와라는 쿠로오와 함께 갇힌 삼일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에 풀이라도 발라놓은 건지 쿠로오가 넌지시 말을 걸어도 스가와라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쿠로오는 어느새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도가 되었다. 스가와라에게서 대답이 없어도 고요한 어둠의 적막이 싫어 책을 읽듯 아무런 말이나 읊조리곤 했다.
매일 같은 얼굴의 남자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이나 빵, 음료 같은 게 전부였는데 스가와라는 낮 동안 그것들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몫을 챙겨두었다가 그의 발치에 놔두고 잠이 들면 그제야 스가와라는 무언가를 먹는 듯했다. 매일 아침엔 그의 발밑이 깨끗했다.
쿠로오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이곳을 드나드는 남자들이 그를 ‘스가와라’라고 부른 덕분이었다. 생긴 것도 험악한 남자들에게 스가와라는 아랑곳 않고 시퍼런 눈으로 분노를 내비쳤다. 그때마다 쿠로오는 혹여 저 마르고 작은 애가 손찌검을 당하진 않을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날카로운 긴장감을 지켜보았다. 다행이 그것을 어린아이의 치기 정도로 여긴 남자들은 콧방귀를 뀌곤 도로 방을 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쪽은 언제나 쿠로오였고, 스가와라는 같은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로 벽만 보았다. 저 애도 어지간히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쿠로오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생각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쿠로오가 이곳에 갇힌 지 나흘 째 되던 날에 발생했다. 쿠로오는 여느 때처럼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스가와라 쪽을 확인했다. 어제 저녁으로 남자들이 던져주고 간 도시락과 물을 야무지게도 먹었다.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있던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자리엔 스가와라도 없었다. 쿠로오는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는 온기라곤 없다. 스가와라는 이곳에 없었다.
쿠로오는 덜컥 무서워졌다. 도망쳤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이곳에 잡혀온 첫날 쿠로오는 남자들에게서 들었던 말을 조금씩 되살려본다. 일하기 싫으면 돈을 갚기 위해서 장기를 꺼내갈 거라고 그들은 으름장을 놓았었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정작 쿠로오와 스가와라는 한 마디 말조차 섞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었기 때문에 견딘 것이다. 무사하길. 아무 일도 없길. 쿠로오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속으로 내내 빌었다.
남자들이 나타난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틈으로 하얗고 작은 무언가가 내동댕이쳐졌다. 곧장 덩치 큰 남자들 셋이 와르르 밀려들어왔다. 쿠로오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달달 떨고 있는 그것은 분명 스가와라였다. 얼굴이 공포로 짓눌려 엉망이다. 쿠로오는 사지가 떨리는 걸 감지했다.
손바닥에서 스가와라의 흰 머리카락 한 움큼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남자가 다짜고짜 바닥에 엎어진 스가와라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아픈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쿠로오는 입 대신 귀를 막았다.
자꾸 어딜 도망치려고 하는 거야, 갈 데도 없는 애새끼가.
스가와라는 그 작고 어린 몸으로 혹독한 폭력을 견뎠다. 남자들은 잔인할 만큼 스가와라를 두들겼다. 온몸에 울긋불긋 피멍이 들고 피부 곳곳이 터지고 찢어져 작은 몸뚱어리는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스가와라는 더 이상 기력이 남은 것 같지 않았다.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 간간이 발가락만 움찔댔다. 더는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잔악한 장면을 덜덜 떨면서 지켜보던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문도 모른 채로, 씩씩대는 남자의 구둣발 아래로 달려가 스가와라 대신 싹싹 빌었다.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 제발요.
남자의 발끝이 쿠로오를 겨냥한다. 쿠로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스가와라에게 가해졌던 무자비한 폭행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것 같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쿠로오는 컨테이너 박스를 나서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쿠로오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뒤늦게 쿠로오의 등 뒤에서 괴로운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가 흐느끼고 있었다. 쿠로오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바닥에 고꾸라진 스가와라를 똑바로 눕혔다. 맨살이 흙먼지와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되었다. 닦을 것도 없고 갈아입을 것도 없고 치료할 만한 약 같은 것도 없었다. 쿠로오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가늘게 떨고 있는 스가와라의 어깻죽지를 보았다.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덜컥 다시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라서 쿠로오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불시에 날아들지도 모를 폭력이 두려워 쿠로오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구둣발이나 주먹질 대신 바닥에 떨어진 것은 검은색 봉투였다.
잘 돌봐, 같은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남자가 두고 간 봉투에는 반창고와 붕대, 바를 수 있는 약과 젖은 수건이 단출하게 담겨있었다. 쿠로오는 훌쩍 코를 먹고서는 봉투를 뒤적였다.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꺼내 팔뚝에 걸고 돌아서서 스가와라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앙상하게 마른 몸 위로 흉한 자국이 덕지덕지 묻었다. 아프지 않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 없어 쿠로오는 수건으로 스가와라의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스가와라는 오만상을 했다. 먼지와 피를 닦아내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처 위에 약을 짜서 발랐다. 그러던 중 스가와라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미안. 조금만 참아.
그제야 스가와라의 입 밖으로 새된 울음이 터졌다. 여기 잡혀 와서는 목소리도 잃은 듯 한 마디도 않던 그 애는 죽을 듯이 울었다. 죄 갈라져서 듣기 힘겨운 소리였지만 쿠로오는 묵묵히 상처 위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게 쿠로오가 처음 들었던 스가와라의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한동안 처참한 꼴로 몸살을 앓았다. 열이 나고 땀을 뻘뻘 흘리는데 대책이 없어서 쿠로오는 발만 동동 굴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바깥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수건을 깨끗하게 빨아 달랬다. 거절당하거나 뭇매를 맞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얼굴로 쉽게 쿠로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죽지 않을까 싶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거란 상상에 쿠로오는 밤낮으로 악몽을 꿨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조금씩 세월을 먹었다.
이듬해 쿠로오 테츠로와 스가와라 코우시는 조직의 말단 직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채로, 그렇게 그저 흐르고 흘렀다.
*
쿠로오는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 일찍 퇴근한다. 그가 일하는 곳이 조직 관할의 술집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낮밤이 뒤바뀌어 살았던 터라 지금의 일상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는 스가와라 역시 쿠로오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마찰도 없었다.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수면 시간을 조금 포기하면 은행 같은 공공기관에 다녀오기도 용이했고, 장을 보든 빨래를 하든, 남들 다 하는 일상생활을 하기는 더없이 좋았다.
일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쿠로오가 하는 일은 사실 그리 깔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의 술집에서 가드로 일했다. 그 술집이란 소위 말하는 매춘굴이다.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찾을 만큼 홍등가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었다. 쿠로오는 거기서 주로 취객의 난동을 막거나,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불리는 매춘부들을 감시했다.
급여는 주지만 넉넉하지 않다. 더구나 일반 회사처럼 승진이 보장된 것도 아니라 아마 평생을 말단 직원으로 살아야 할 것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진 빚은 둘째 치고, 그들은 절대 쿠로오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도망칠 궁리를 할까 그들은 종종 쿠로오가 사는 옥탑방에 들이닥쳐서는 취조하듯 두 사람을 협박하고 돌아갔다. 쿠로오는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끔찍한 나날들의 기억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긴 하지만, 스가와라와 함께라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모아 가끔 사치를 부릴 정도는 되었다. 신분증은 말소되었고, 스가와라도 쿠로오도 공식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했으나 일하다가 만난 고객의 은밀한 도움으로 위조 신분증을 얻었다. 그 신분증으로 은행 계좌를 몰래 만들어 돈을 모으고 있다. 물론 야반도주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스가와라와 낡은 옥탑을 벗어나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좀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돈이었다.
쿠로오는 나름대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나와 집도 가족도 없는 떠돌이로 살 바에야 차라리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쿠로오는 어릴 적 고아원의 원장이 했던 말을 되새기곤 한다.
‘쿠로오는 지혜롭구나.’
사람들은 쿠로오에게 손가락질할 것이다. 약한 사람들의 등골을 뽑아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것들이라고 욕을 퍼부을 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쿠로오는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람을 해치진 말자.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변명이었다. 다치지 않게 붙잡아가도 한 번 도망친 매춘부들이 어떻게 되는지 쿠로오는 모르지 않았으니까. 늘 자괴감이 들었다.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쳐야 하는 스스로가 빌어먹을 만큼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쿠로오가, 스가와라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조직에의 저항은 곧 죽음을 뜻했다.
“벌써 준비해?”
간이 테이블에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으니 스가와라가 퇴근하고 돌아왔다. 한 손에 검은 비닐봉투가 들려있다. 묵직하게 아래로 내려간 모양새는 분명 술이었다. 쿠로오가 비죽 웃었다.
“얼른 해먹고 자야 할 것 아냐.”
이제야 아침 해가 산등성이 위로 떠올랐다. 이 시간에 바비큐 파티라니 누가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지만, 쿠로오가 사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는 반대였으므로 지금이 저녁이었다.
“배고파.”
“금방 고기 올릴게. 오늘 어땠어?”
“매번 똑같지 뭐.”
버너에 불을 켜고 불판을 올렸다. 열이 붙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쿠로오는 정육점에서 가져온 고기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치익, 듣기만 해도 군침 도는 소리였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팽개치고 나온 스가와라가 어느새 불판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스가와라는 역시 조직 소속의 펍에서 바텐더로 일한다. 쿠로오가 일하는 곳과 다르게 스가와라가 일하는 펍은 주로 조직의 은밀한 회담이나 높으신 분들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한 비밀 공간이었다. 홀에는 일반 손님들이 드나들었으니 따로 가드 부대가 필요 없을 만큼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었다.
깡패가 다 똑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여기까지 굴러온 두 사람을 가엽게 여겨 곧잘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들 중 하나에게 술을 배웠다. 마시는 것도 배우고, 만드는 것도 배웠다. 그래서 그는 미성년자일 때부터 그곳에서 일해 왔다.
“오늘 빨래 잘 마를 것 같은데.”
“그래서, 할 거야?”
“아니이. 피곤해. 그냥 잘래.”
스가와라의 접시 위에 쿠로오가 잘 익은 고기 몇 점을 얹었다. 잘 먹겠습니다. 환한 얼굴로 외치고서 스가와라는 젓가락질을 했다.
“내일도 맑을 거래. 내일 하자, 빨래.”
쿠로오의 말에 스가와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날은 흔한 게 아니었다. 빨래에는 쨍쨍한 햇볕과 적당한 산들바람이 중요했지만 그 전에 맑아야 할 것은 빨래를 할 당사자들의 상태였다. 그러니 오늘은 아무래도 어렵다. 스가와라도 스가와라였지만, 쿠로오도 제법 지쳐있었다.
“또 맞았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쿠로오는 부지런히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험악한 술집에서 가드로 일하다 보면 못 볼꼴을 하도 많이 봐서 비위가 단련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술에 떡이 된 소위 진상 고객들을 대할 때에는 꼭 무심코 휘두른 주먹질에 턱을 얻어맞곤 했다. 오늘은 운이 없었다. 새벽 내내 고함을 지르며 싸우려 엉겨 붙는 덩치 좋은 두 사람을 뜯어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규정 때문에 착용하고 있던 넥타이가 찢어져버렸다. 여분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심 좀 해.”
그건 아무래도 좀 타박하는 어투였다. 눈을 내리깔고 조그만 입으로 우물거리면서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했다. 단순한 말버릇이다. 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건 마찬가지로 이 바닥에서 꽤 오래 생활해 온 스가와라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스가와라는 코우시였다. 쿠로오가 처음 스가와라의 울음을 듣고 난 이후 일 년 만에 그의 입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품고 있는 괴로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쿠로오가 자세히 알 방도는 없었으나, 유일하게 같은 처지에 놓인 낯선 방문객에게도 마음을 여는 데에 자그마치 일 년이 걸렸으니 병이 아주 깊었구나,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쿠로오는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스가와라는 처음 쿠로오가 딱딱한 컨테이너 박스에 처박혔던 날, 너에겐 미안하지만 아주 잠깐 고마웠다고 얘기했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문이 열리고 볕과 함께 난입한 쿠로오 테츠로가 꼭 스가와라 본인을 만나러 온 사람 같았다고 했다. 그런 꿈같은 환상 따위 금세 잊어야 했지만, 그래도 네 덕에 살아야 했다고 스가와라는 이따금씩 후회하듯 읊조리곤 했다.
후회하듯. 네 어린 목숨에 기생해야만 살 수 있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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