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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집 밖에 나가지를 않아 빨랫감은 많지 않았다. 작은 바구니에 세탁이 필요한 옷가지와 양말 따위를 담아 스가와라는 문을 나섰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날이 그리 맑지는 않았지만,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나이 든 빛이 든다. 스가와라는 어깨로 지탱하던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면서 스가와라가 놀란 소리를 냈다.
“진짜야?”
수화기 너머 듣고 있던 야쿠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대꾸했다.
─알고 찾아온 것 같진 않고, 그냥 관광 차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 같아.
“걔가 너한테 그렇게 물어봤어? 나 아느냐고?”
스가와라가 걸을 때마다 바구니가 앞뒤로 흔들린다. 전화를 받다가 스가와라는 기가 차서 웃었다. 파리가 생각보다 큰 동네가 아니란 것엔 동의하지만─관광지로 유명한 중심지만 따지자면─하필 이곳에 온 오이카와가 어제 만난 사람이 스가와라였고, 오늘 만난 사람이 야쿠인 건 대체 무슨 빌어먹을 우연인가. 징그럽게 운명으로 묶인 사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야쿠를 먼 발치에서 딱 한 번 봤다. 그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몰랐을 테고, 아마도 그 좋은 기억력으로 스가와라 옆에 있던 야쿠의 얼굴을 생각해낸 것이 틀림없다.
그래, 루브르 박물관은 안 그래도 여행지로 유명한 파리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세계 최대의 관광지였으니까. 파리에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한 오이카와가 그곳에 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운 나쁘게 전날 그가 야쿠를 보았고, 오늘 박물관에서 또 야쿠를 만난 것뿐이었다.
뒷문을 열고 나가면 언덕이 보인다. 돌로 만든 계단을 밟아 오르면 꼭대기엔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나타났다. 길을 건너면 곧장 빨래방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돌계단을 향해 걸었다. 걷다가, 문득 오이카와가 넌지시 물었던 게 떠올랐다.
새로 만나는 사람이야?
“……미친 거 아니야?”
─뭘 또 그렇게까지.
어차피 눈치 빠른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와 대화하면서 야쿠가 그의 새로운 애인이 아니란 것은 알았을 거였다. 그러니까 박물관에서 야쿠를 알아보고 말도 걸었을 테지. 그래도 울컥 화가 난다. 좀생이처럼 이런 일로 신경질을 부리고 싶진 않았는데. 스가와라는 길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무튼, 이미 오이카와랑 만났다는 거지? 놀랍네, 좀.
야쿠는 얼떨떨해보였다. 아마 그는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스가와라의 연락처나 주소를 알려주지 않고 자기 명함을 건넸던 것이다. 스가와라가 갑자기 오이카와를 만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오이카와와 헤어진 이후 스가와라와 가장 가까이서 지냈던 야쿠라면 상상이 가능했을 테니까.
“연락처를 줬다고?”
─어어. 나는 또 너랑 못 만난 줄 알고. 혹시 너 찾으러 온 건 아닐까 싶어서 일단 내 명함 줬어.
“아무튼 고마워.”
─괜찮은 거지?
아스팔트 위 하얗게 새겨진 횡단보도를 건너 스가와라는 투명한 유리문 앞에 섰다. 휴대폰을 뺨에 대고서 한참을 생각했다. 괜찮은 거지? 묻는 야쿠의 목소리엔 걱정이 그득하게 묻어있었다. 글쎄, 괜찮은 걸까. 스가와라는 이번엔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답이 말끔하게 나오질 않았다. 잠깐 침묵을 지키는 사이 야쿠가 한 번 더 묻는다.
─코우시?
“……나 빨래방 왔어.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스가와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껐다. 야쿠라면 그런 일로 다시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어떤 연락이든 모른 척하기 위해 스가와라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유리문을 민다. 아직 채 해가 저물기 전이라 빨래방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바구니를 의자 옆에 대충 내려놓았다. 코트를 벗기는 귀찮아서 두툼한 소매를 억지로 둘둘 말았다. 열심히 걷어 올렸지만 가까스로 손목의 불룩 튀어나온 뼈만 드러났다. 스가와라는 세탁기 뚜껑을 열고 빨랫감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아버리고 동전을 넣었다. 우웅,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뚜껑 안쪽에 물이 차오르고, 슬슬 거품이 끼었다.
스가와라는 의자에 앉은 채로 뱅뱅 돌아가는 세탁기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를 만난 뒤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차라리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텅 빈 머릿속에 텅 빈 눈으로 담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헤어졌더라, 우리.
…….
마침내는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한동안 잊은 듯 지냈던 옛 연인의 기억이 불을 지핀 듯 화드득 타오르는 것을 보니 이미 틀렸다 싶었다. 스가와라는 무릎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손바닥의 땀구멍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건조기에 넣어 대충 마른 빨래를 도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엉망으로 엉킨 빨래들이 꼭 지금 스가와라의 머릿속 같다. 복잡하긴 하지만 풀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던 탓인지 간만에 보는 얼굴에 뜻밖의 반가움도 들었다. 그러나 친구보다 멀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감정이었다.
신경 쓰지 말자.
스가와라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곧장 빨래방을 나가 노을빛에 붉게 물든 보도블록 위를 걸었다.
신경 쓰지 말자 다짐한 게 바로 오 분 전이다. 아니, 오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스가와라는 습관처럼 미간을 구겼다. 딱히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지금 당장 스가와라가 처한 상황이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오이카와는 오이카와대로 황당한 표정이었다. 스가와라의 옆집 대문 앞에 멀뚱히 서서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은색 열쇠가 아니었다면 스가와라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한바탕 쏟아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만 쫓아다니라고.
오이카와는 그런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퍽 억울한 얼굴을 했다.
“너 여기 살아?”
“그렇지만 네가 지금 복도를 가로막고 있어서 안타깝게 갈 수가 없네.”
“허.”
스가와라는 태연하게 바구니를 안고 그를 향해 걸었다. 오이카와가 슬쩍 몸을 물려 길을 비켜준다. 문을 열 생각은 않고 열쇠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걸 보니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스가와라를 만났으니까. 스가와라는 뾰로통한 얼굴로 거침없이 제 집 문을 열었다.
“……괜히 오해하지 마.”
“무슨 오해? 우리 사이에 그럴 게 남았어?”
“여전하네. 빨래하고 와?”
“어. 들어갈 거니까 말 그만 시켜.”
“열흘이야.”
오이카와가 못내 웃는다. 스가와라는 텅 빈 방안만 뚫어져라 들여다보면서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좀 불편해도 참아줘.”
그러고 보니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오랜만에 여행객이 온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그게 하필 오이카와였고? 이걸 그저 우연으로 치부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오이카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 운명의 장난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마트는 오른쪽으로 나가서 계단 올라가면 바로 보여.”
스가와라가 곁눈으로 오이카와를 흘기곤 대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힐 때까지 오이카와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십 초 정도 지난 후에야 옆방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스가와라는 바구니를 든 채로 방 중앙에 언 듯 섰다. 고요한 실내로 벽 너머의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렸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8년을 사귀었던 연인이,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나타났다. 그것도 바로 옆방에.
파리지앵 랩소디
오이카와 토오루 × 스가와라 코우시
w. Ryria
스가와라 코우시는 학교에서 꽤 유명했다. 전 학년을 통틀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가 소위 말하는 양아치라든지, 비행청소년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가와라는 선생님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할 만큼 바른생활을 실천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단지 그래서 유명한 것은 아니고, 스가와라 코우시가 유명해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집안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잘나가는 중소기업 CEO로 또래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 동경해본 적 있을 법한 화려한 집안 내력을 가졌다. 스가와라는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미숙한 시기와 질투도 한 몸에 받았다. 그에게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하는 혹자들에게는 속된 말로 물주였다.
오이카와는 셋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스가와라에게 무관심했다. 이름이야 하도 주변에서 떠들어대니 알게 될 수밖에 없고, 얼굴도 일학년 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다. 딱 그 뿐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스가와라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애써 엮일 필요 없다고 오이카와는 판단했다.
스가와라는 첫인상이 그리 강렬한 사람은 아니었다. 연한 머리색,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와 둥글둥글 웃는 선한 인상은 확실히 그냥 지나치기 쉬운 종류의 것이었다. 얼굴로 치자면 오이카와가 훨씬 화려했다. 상대적으로 수수한 스가와라는 그러나 이학년이 되어서 반에서 가장 돋보였다.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학년 때도 그랬으니까. 반 석차는 늘 일등이었고, 하얗고 마른 주제에 운동도 제법 악착같이 했고,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섞였다. 스가와라는 아주 이상적인 학생이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그가 이상했다.
또래 친구들이 겪을 법한 나름대로의 고민이나 짜증이 그에겐 전혀 없어보였다. 언성을 높여 소리를 친 적도, 장난으로라도 다른 누군가를 친 적도 없었다. 매일 같은 얼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조물주가 스가와라라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스가와라는 매일 같은, 웃는 얼굴이었다.
쟤는 보살이야?
오이카와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말, 그게 아마도 스가와라와의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을 거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스가와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예리하고 민감한 감각기관들로 그를 살폈지만 이렇다 할 만큼 특징적인 것은 없었다. 그 애는 그냥 성적이 좋고, 운동도 잘하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존재였다. 위화감은 딱 한 군데에서 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늘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 그런 위화감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 주위의 사람들은 그 웃음에 동화되어갔다.
특이한 애였다. 무관심이 호기심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주변을 채운 무리들은 그리 좋은 애들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스가와라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모여든, 철저하게 실리에 의해 움직이는 족속이었다. 그걸 머리 좋은 스가와라가 모를 리 없었다. 모를 리 없는데, 그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그에겐 화가 없는 걸까. 너무 속이 좋고 착해서 남한테 짜증부릴 일이 전혀 없는 것일까. 상대의 무례하고 상식 없는 말과 행동들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줄 수 있을 만큼 성격이 무른 걸까. 그렇다면 스가와라는 사람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있는 성인聖仁의 현신일 것이다. 그럴 리 없었다. 스가와라는 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참 기이한 광경이었다. 무리의 중심에 선 스가와라는 사실 변두리에 숨어있었다. 그 예쁘고 상냥한 웃음을 무기로 스가와라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벽을 쌓은 것이다.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한 스가와라는 사실 그런 것들엔 크게 욕망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그럼 대체 그 애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스가와라는 종종 아팠다. 다른 데는 다 괜찮은데 어릴 때부터 꾸준히 앓아왔던 복통이 만성적으로 자리를 잡은 탓이라고 그랬다. 보통 시험이 끝난 직후에 스가와라는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보건실에 가곤 했으니 꽤 주기적이고 고질적인 병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다만 걔는 결석도 조퇴도 한 적 없다. 아직 열여덟 살, 아픈 걸 핑계로 학교를 빠져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애들이 한 반에 한둘씩은 있는 나이였다. 그런데 스가와라는 무려 선생님의 조퇴 권유까지 거절한 전적이 있다.
모든 걸 다 가진 완벽한 스가와라 코우시가 가장 의식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건 상담을 이유로 그 애의 부모님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오이카와는 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므로 겉으로 다정해 보이는 단란한 가정의 속내를 바로 꿰뚫었다. 스가와라 덕분이었다. 그 애의 표정이 평소보다 경직되어있었다는 건, 아마도 오이카와밖에 알지 못했으리라.
오이카와는 심부름 때문에 교무실에 왔고, 그 때문에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을 나서는 그 애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파짓, 뭐가 튀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어느 때보다 얼어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애의 해사한 미소가 꽁꽁 언 고드름처럼 뾰족해진 것을 눈치 챘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인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부모님과 함께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상담실에서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오이카와는 모른다. 다만 그때부터 어렴풋이 깨달았다. 스가와라는 튼튼한 철제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다. 예쁜 모양을 하고 예쁜 색의 깃털로 온몸을 치장했으며, 그에 걸맞은 예쁜 음성으로 노래하는 새였다. 세상에서 두려울 것 없이 모든 걸 다 가진 스가와라가 가장 의식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부모님이었다. 부친과 모친, 어느 쪽인지는 알 바가 아니다.
재벌가에서는 후계 양성을 위해 엄격하게 자손을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스가와라는 엄격한 가르침에 저렇게 위축된 것이 아니다. 언뜻 보았던 그 애의 얼굴에서 드러난 감정은 분명 공포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학우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학교 모든 선생님들의─심지어는 수위 아저씨까지─사랑을 독차지하는 그 애가 부모에게 공포를 가질 만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체육복을 늘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 걔가 결벽적인 면을 가졌을 수도 있다. 여름에는 하복으로 반팔 셔츠를 입었으니 딱히 자기 몸을 숨기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거다. 아니, 오이카와는 한 번도 스가와라의 드러난 팔뚝을 보려 한 적이 없다.
학대? 가정 폭력? 오이카와는 아직 어렸으므로 거기까지밖에─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은 아니었으니까─생각이 닿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직 어린 스가와라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엔 탐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애의 어두운 이면을 홀로 알고 있다는 자만심 탓이었다. 그 호기심이 스가와라 코우시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할 일 없어?”
“아니.”
“근데 왜 쫓아와?”
그 사이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딱히 노골적으로 노려본 것도 아닌데 미묘하게 오이카와를 의식하고 피하는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스가와라는 역시 눈치가 대단히 빠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오이카와는 더 조심스럽게 스가와라를 관찰했다. 양쪽 다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타입이었으므로 서로의 간격은 완벽했다. 더 다가가서도 안 되고, 더 물러나서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오이카와는 그때쯤 느끼고 있었다.
스가와라와 직접 부딪친 것은 어느 날의 청소 시간이었다. 혼자서 종이가 제법 쌓여 묵직한 재활용 박스를 들고 가기에 계속 신경을 쓰다가, 가느다란 팔뚝을 떠올리고 오이카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눈치가 빠른 만큼 감각도 예민해서, 오이카와는 본관 뒤편 쓰레기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스가와라에게 미행을 들켰다. 걔는 과연, 생긴 건 두부처럼 허여멀겋고 말랑말랑한데 속내는 발톱을 숨긴 맹수였다.
“처음 본다.”
“뭘?”
“너 짜증내는 거.”
오이카와는 그러고 배시시 웃었다.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스가와라가 대번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우뚝 서서 한참 오이카와를 노려보던 스가와라가 이내 등을 돌렸다. 더 상대해봐야 건질 게 없다는 걸 일찍이 안 모양이다.
“이러면 기분 좀 후련해?”
“자꾸 무슨 소리야? 네 일 안 해?”
“맨날 혼자 쓰레기 버리러 가는 거, 괜히 신경 쓰였거든.”
모두에게 상냥하기로 유명한 학교의 대표 모범생이, 오이카와에게만은 그러지 않는다. 남들 눈엔 이상하게 보여도 오이카와는 퍽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봐도 너, 사람 사이에 섞여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진 않으니까.”
“너 나 알아?”
이번엔 오이카와가 멈췄다. 평소 교실에서 듣던 목소리와는 많이 다르다. 미묘하게 뒤틀린 음성에 오이카와는 픽 웃었다.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던 많은 이들 중에서 스가와라가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한 번 잘 보이겠다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상냥함을 강요하는 그들보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 같은 사람을 더 껄끄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우리 학교에서 너 모르는 사람도 있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는 감히 상상이 안 가는데,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남들처럼 굴어.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 잘난 척하지 말고.”
“딱히 목적은 없어.”
가시가 콕콕 박힌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오이카와가 툭 답을 던졌다.
“그냥, 좀 외로워보여서.”
그 말엔 스가와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차다는 웃음이다. 오이카와는 괜히 멋쩍어 뒷목을 문질렀다. 둘 다 걸음은 멈춘 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있는 게 민망해서 오이카와는 한달음에 그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스가와라가 더 빨랐다. 예민한 목소리엔 대못이 박혀있다.
“난 어지간하면 사람 싫어하지 않는데.”
묵직한 상자를 잠시 발치에 내려두고 오이카와를 돌아보는 그 애의 표정은 누구에게나 그랬듯 해사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그 상냥한 웃음에서 분명한 적의를 느꼈다.
“너는 좀 싫다. 재수 없어.”
오이카와는 제자리에 굳었다. 보통이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스가와라는 생각보다 훨씬 날선 사람이었다. 허리를 숙여 상자를 단단히 끌어안고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스가와라의 뒷모습을 오이카와는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뒤늦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저것 봐, 다 가식이잖아.”
그렇게 샐샐 웃고 다니는 거 다 거짓말이었잖아.
*
재수 없다는 말엔 좀 빈정이 상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또 뭐야. 오이카와는 나름대로 호감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온몸에 철벽을 두른 스가와라에게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질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사람 면전에 대고 대뜸 싫다고. 누군 좋은 줄 알아? 오이카와는 틈만 나면 그 일을 떠올리며 구시렁거렸다.
그 이후로 오이카와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잘해줄 정도로 오이카와는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항상 그 주위에는 동급생들이 몰려있었지만 스가와라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종종 오이카와를 경계하는 시선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것마저 아예 사라졌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라는 인간에게 흥미를 잃은 것이다.
오이카와는 오이카와대로, 스가와라는 스가와라대로 각자의 생활을 했다. 같은 반이라는 단체가 아니라면 이미 접점이랄 게 없는 시시한 관계였다.
그날따라 스가와라는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신경 쓰려고 쓴 게 아니라, 척 봐도 안색이 창백했다. 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긴 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가와라의 상태를 인지한 사람은 오이카와 한 명뿐인 것 같았다.
전에도 그랬다시피 스가와라는 한 번 눈길이 가면 자꾸 보게 되는 것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 그날 오이카와는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을 못했다. 원체 땀이 나는 체질은 아닌 모양인지 안색은 파리한데 드러난 이마가 뽀송뽀송하다. 억지로 뜬 눈에는 쌓인 피로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척 봐도 얌전히 조퇴를 한다든지 할 것 같진 않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오늘은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오이카와는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평소보다 밝다. 높아진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어 조물주가 담청색 염료를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반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슬슬 스가와라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다. 저 정도면 오기였다. 오죽하면 오이카와가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모를까.
날은 무더웠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몇은 열사병으로 쓰러졌으리라. 오후가 되니 푸른 하늘에 하얗게 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햇빛을 가리기는 역부족이었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체육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 오이카와의 신경은 온통 스가와라에게 쏠려있었다. 땀도 나지 않는 이마를 자꾸 손등으로 훔치는 것을 보니 저도 제 상태를 알고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저 정도면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져도 좋으련만, 이 무더운 날씨에 준비운동부터 달리기까지 스가와라는 모두 해냈다. 쓸데없었다. 저렇게까지 몸을 축낼 이유가 없다. 학교 수업이란 게 다 그렇다. 적당히 꾀를 부린다고 따라가지 못할 리 없었다. 더구나 머리 좋은 스가와라라면 무엇이 더 합리적인 선택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였다.
걔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였다. 딱 한 번 스치듯 보았던 그의 부모님 때문일 것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작 열여덟 살 먹은 어린애가 아득바득 기를 쓰고 있다. 오이카와는 관자놀이를 흐른 땀을 소매로 훔쳤다.
마침내는 일이 터졌다. 수업 종료를 오 분 남기고 스가와라가 모래 운동장 위로 푹 고꾸라졌다. 내내 스가와라를 주시하고 있던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 품에 안긴 공도 내다버리고 달렸다. 무더위에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좀 지쳐보였다. 뒤늦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오이카와는 어떤 사명감을 느끼고서 스가와라의 겨드랑이 사이로 어깨를 밀어 넣었다. 무릎을 펴자 가벼운 몸이 쉽게 딸려와 붙었다.
스가와라는 정신이 없어보였다. 손바닥으로 배를 움켜쥐고 눈을 통 못 뜨는 게 아무래도 만성 복통이 틀림없었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아도 된다고 한 마디 말해줄 사람도 곁에 없는 걸까. 계단을 오르고 기다란 복도를 걸어 보건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오이카와는 쉴 새 없이 생각했다.
보건실에 담당 선생님은 자리를 비운 채였다. 어딜 부딪쳐서 다친 것도 아니고, 평범한 감기 같은 것도 아니라 무슨 약을 먹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허둥지둥하다가 오이카와는 일단 스가와라를 침대에 눕혔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서랍장 위에 찜질팩이 보였다. 배가 아플 때에는 찜질팩으로 복부를 따뜻하게 해주면 효과가 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다. 오이카와는 당장 그걸 가져와 콘센트에 장치를 연결했다. 크기도 썩 크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다. 전원을 켜고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스가와라의 복부 위에 팩을 올려놓았다. 그 바람에 스가와라가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떴다.
“……됐으니까 이만 가.”
오이카와가 의자를 끌어와 앉는 걸 보고 스가와라가 톡 매운 소리를 했다. 됐다는 것치곤 여전히 안색이 별로다. 오이카와가 대꾸했다.
“선생님 오실 때까진 있을게.”
“어차피 자주 이래서 잠깐 쉬면 괜찮아져.”
“자주 그러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냐?”
오이카와가 다리를 꼬았다. 스가와라는 천장을 바라보고 납작하게 누워서 눈으로만 오이카와를 힐끔 바라보았다. 땡땡이 치고 좋지, 뭐. 오이카와가 실없이 덧붙인 말에 스가와라는 포기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거 봐, 내가 너 외로워보인댔지.”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좋다 싫다 얘기도 못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니까 몸이 축나는 거 아냐.”
스가와라가 어쩐 일로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렇게 착한 척 열심히 해도 사실 알아주는 사람 별로 없어. 생략된 뒷말은 목 안에서만 웅얼거렸다. 팔짱을 끼고 찜질팩의 온도를 약하게 조절한 오이카와가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한참이나 더 있다가 스가와라가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오이카와를 노려보는 눈에는 저번처럼 적의가 어렸다. 그러나 거기엔 분노와 치기도 한데 뒤섞여있었다.
“나한테 신경 좀 꺼줄래.”
“끄고 있었어. 네가 수업 시간에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았으면,”
“네가 왜 날 데리고 와.”
“…….”
“너 말고도 다른 사람 많았을 텐데.”
신경 쓰지 않았다는 네 말이 거짓말인 거 알고 있어. 스가와라는 그 말을 돌려서 하고 있었다. 빤히 스가와라의 얼굴을 쳐다보던 오이카와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그 성깔을 어떻게 죽이고 살았대. 스가와라가 대뜸 발끈한다.
“저번엔 미안했어. 네 말대로 재수 없게 아는 척했지.”
이유는 모르겠다. 스가와라에게 대번에 퇴짜를 맞았는데 모르는 척해도 될 걸 자꾸 신경 쓰는 게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스가와라는 이미 오이카와의 눈에 들었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시선 끝에 걸리는 게 어쩌면 호기심에서 출발한 연민이나 동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얘기를 하면 아마 이 자리에서 스가와라 발에 명치를 채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딱히 오이카와는 스스로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가와라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짜증나니까 지금은 눈앞에서 꺼지라고, 그렇게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상대.
그게 오이카와 본인이 되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널 전부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맘 놓고 신경질 낼 수 있는 상대 하나 있으면 좋지 않겠어?”
그러니 스가와라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일찍이 포기했다. 오이카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다른 인생을 살아온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지구가 두 쪽 나는 게 쉬울 거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경계심이 많다. 특유의 청량한 분위기로 그 경계를 온통 흐려놔서 모르는 것일 뿐, 그는 자신을 통해 잇속을 챙기려는 무리를 구분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어릴 때부터, 쭉 그랬다는 뜻이다. 한창 친구를 사귀고 마음을 털어놓고 싸워도 보고 부딪쳐도 보고, 그래야 할 나이에.
“네가 뭔데?”
“…….”
“너의 뭘 믿고 내가 그래야 하는데.”
대답할 수 없다.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는 낯선 사람이다. 대뜸 다가와서 마치 자신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상대를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말문 막힌 오이카와가 대답을 머뭇거렸더니 스가와라가 지친 표정으로 드러누우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왜 그럴까. 왜. 이유를 대답할 수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무언가 답변을 주고 싶었다. 고집이자 오기였다. 오이카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냥 네가 자꾸 눈에 밟혀서.”
스가와라는 대답이 없다. 지그시 내리감은 눈꺼풀은 미동도 없이 정지했다. 멈춘 시간 위에 잠시 머물던 오이카와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할까 말까. 듣지도 않을 것 같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으니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기로 했다.
복도를 걸어 교실까지 돌아가는 길에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질문을 되짚어보았다. 네가 뭔데. 그러게, 내가 뭔데. 내가 대체 스가와라의 뭔데. 이름과 얼굴과, 반 석차나 체육 교과 시간의 우수한 정도밖에 모르는, 완벽한 제 삼자인 그 애가 대체 뭐기에.
네가 자꾸 눈에 밟혀서.
그것보다 명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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