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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세미] 러브레터

Ryria 2016. 8. 6. 14:11

 

※ 원작기반 + 캐붕 주의...

 

 

 

 

 

 

 

사건의 발단은 카와니시가 같은 학년의 여자애에게 고백을 받은 일이었다. 카와니시는 그 전에도 종종 러브레터 따위를 받았던 터라 사실 면전에 대고 고백을 받았다는 것이 그리 신선한 일은 아니었는데, 문제는 카와니시가 그 여자애의 마음을 거절했으며, 그 거절의 말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였다는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거절당한 여자애는 그 자리에서 와앙 울어버렸고, 그 때문에 2학년 여자애들 사이에서 카와니시는 사람 마음을 칼 같이 잘라내는 매정한 인간이라느니, 혹은 한 사람만 바라볼 줄 아는 순애보라느니 하는 우스운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일은 당연히 배구부에까지 알려졌고이 일을 퍼다 나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늘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카와니시에 대한 부러움의 시선으로 시작된 것이 어느새 카와니시의 그 분찾기 대회로 홀랑 바뀌어 있었다. 나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입부 이후로 꾸준히 이름 모를 그녀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던 카와니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장난은 제법 잘 쳐도 카와니시는 꽤 낯을 가려서, 도대체 어떤 여인이 저 목석같은 녀석의 마음을 홀랑 빼앗아갔는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편지야?”

 

 

텐도가 소리를 질렀다. 카와니시의 캐비닛 속, 가방에 들어있던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다들 아닌 척 우르르 카와니시 근처로 몰려들었다. 이런 반응쯤 이제 시시하다는 듯 카와니시가 묵묵히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옆에서 힐끗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텐도가 장난스럽게 묻는다. 이번에도 거절이야? 카와니시는 차마 선배라 무시하지 못하고 연애할 생각 없어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웃으며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옷을 갈아입고 캐비닛을 닫으려던 카와니시가 우뚝 손을 멈춘다. 느린 동작으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민망해 나는 장난스럽게 웃다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카와니시는 경기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의 늘 같은 표정이라 도대체 의중을 알 수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의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쩐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린 것 같아 혼자 찝찝해졌다. 텐도가 카와니시의 등을 크게 두드리며 좋을 때라고 농담을 건네고 나서야 나도 민망하게 따라 웃었다. 왁자지껄했던 탈의실을 하나둘 나간다. 나도 옷을 후딱 갈아입고 캐비닛을 닫았다. 옆에 망부석처럼 서있던 카와니시를 못 본 체하고 시라부의 등을 밀치며 탈의실을 나가려 했다. 등 뒤에서 예민한 바늘 끝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따끔했다.

 

 

있어요.”

 

 

나에게 하는 얘긴가 싶어서 뒤를 돌았을 때 카와니시는 이미 나를 앞질러 갔다. 휭 하고 사라지는 어깨를 붙잡고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도망치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걸음을 우뚝 멈춘 나를 부른 건 시라부였다. 뭐해요. 나는 예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시라부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그때부터였다, 카와니시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러브레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카와니시는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특이한 애였다. 아무 조건도 없이 무심코 카와니시를 떠올리면 늘 무념한 표정, 은근한 장난기, 차분하게 내려앉아 어딘가 보살핌 받는 느낌을 주는 단조로운 목소리 같은 것들이 줄줄 나열된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특징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카와니시가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척이 없었다. 그러니까, 주위에 조금 둔감한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카와니시는 어느새 불쑥불쑥 내 뒤에 나타나곤 했다. 부실이나 탈의실에서 그 때문에 놀라 까무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혹시 상처 받을까봐 티를 내진 못했다. 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퉁을 놓지만 카와니시는 늘 그렇듯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내게 대꾸를 했다. 세미 선배, 선배가 둔해빠졌단 생각은 안 해요? 비스듬하게 웃는 입 꼬리와 말투가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웃으며 카와니시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너 임마, 내가 주전은 아니어도 훈련은 열심히 한다고. 그러자 카와니시는 침묵했다. 시라부나 텐도와 있을 땐 말대꾸만 잘하던 녀석은 내 앞에서는 이따금씩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종종 내가 최근 그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따져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카와니시는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서로가 던지는 농담이, 나누는 대화가, 함께 있는 공기가 불편한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 차이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내가 카와니시와 서먹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카와니시도 나도 그렇게 모난 성격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둥글둥글 누구와도 잘 지내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와 내가 어색해지는 순간은 딱 그때뿐이다. 카와니시와 내가 단 둘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존재했을 때, 그래서 나는 늘 카와니시와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 애썼다.

 

텐도가 특종이라며 부리나케 달려온다. 일찍 와서 옷을 갈아입고 부실 정리를 하고 있던 나는 그의 격한 반응에 건성으로 대꾸해주었다. 카와니시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어떤 여학생과 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에 힐끗 카와니시의 캐비닛을 바라보았다. 곧 부활동을 위해 그가 이곳에 올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방에는 러브레터가 들어있을까? 나는 호기심에 텐도에게 물었다.

 

 

예뻐?”

얼굴은 잘 못 봤는데, 긴 생머리가 찰랑찰랑.”

, 네 이상형 아니냐?”

 

 

나는 그렇게 말하곤 키득거렸다. 텐도는 워낙 이런 종류의 가십에는 행동이 빠른 사람이라, 카와니시가 오면 열심히 그녀의 정체에 대해 추궁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사실 학교에 다니다보면 이성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일은 아주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 주인공이 카와니시라서 조금 특별한 일이 되는 것 같다. 또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흥분해서는, 나는 잔뜩 신이 난 텐도를 보고 짧게 혀를 찼다.

 

시라부와 카와니시가 동시에 들어왔다. 가벼운 인사가 오고갔다. 텐도는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 빠른 카와니시가 모를 리 없다. 애써 피하며 캐비닛 앞에 섰다. 나는 힐끗 카와니시의 가방을 쳐다본다. 텐도가 기다렸단 듯 본격적으로 카와니시를 추궁했다. 요 근처에서 얘기하고 있던 여자애는 누구냐고 혹시 소문의 그 분이냐고, 텐도는 한껏 깐족거리며 웃었다. 카와니시는 잠깐 멍청하게 서 있다가,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대꾸를 했다. 표정이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은근히 강력한 부정이 담겨 있다. 나는 실실 웃음이 났다. 텐도의 질문에 발끈하는 카와니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네 그 분은 누구야? 궁금해 죽겠다고!”

……도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한 건데요?”

 

 

카와니시가 해괴한 표정을 했다. 나는 슬쩍 다가가 카와니시를 쿡 찔렀다. 나도 좀 궁금하긴 한데. 입 꼬리를 비스듬하게 당겨 웃으며 나도 그를 추궁하는 일에 동참했다. 카와니시가 질색을 했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뺨을 긁적이는 카와니시의 입에서 그 분에 대한 이야기가 최초로 튀어나왔다.

 

 

……키는 좀 크고요, 보기보다 힘이 좀 세고……. 은근히 성격도 있어요.”

 

 

나와 텐도는 아주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카와니시의 말을 경청했다. 아닌 척 내심 궁금해 하던 시라부도 어느새 내 옆이었다. 카와니시가 힐끗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부실 천장으로 금세 시선을 옮겼다. 내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좀 사납게 생겼어요.”

 

 

문장에 담긴 의미는 그리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카와니시의 뺨이 약간 상기된 것을 알아차렸다. 텐도가 옆에서 팡팡 카와니시의 등을 두드렸다. 좀 솔직해지라는 둥 텐도가 쓸데없는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카와니시의 표정이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나는 간신히 입 끝을 끌어당겨 따라 웃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나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부실을 나왔다. 진짜 소변이 마려웠던 것은 아니고, 또 피하고 싶은 상황에 마주칠까봐 그랬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내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카와니시에게는 조금 그랬다. 이유가 뭘까? 나는 카와니시와 둘이 있을 때 공간을 채우는 어색한 침묵이 죽도록 싫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체육관 앞을 서성이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는 워낙 넓어서 이 학교의 학생이라 하더라도 1학년의 경우 길을 헤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오도가도 못 하고 제자리를 맴맴 돌기에 드넓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미아일 거라 생각하고 나는 슬슬 여학생에게 접근했다. 세 발자국 정도 다가갔을 때, 나는 그녀가 아마도 텐도가 말한 카와니시의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한 꺼풀씩 열리듯 흔들리는 긴 생머리가 어쩐지 그래보였다. 인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예쁘장하게 생겼다. 흑발과 어울리는 뽀얀 피부에 새카만 동공이 꼭 인형 같았다. 적당히 사납게생긴 것도 같다. 그녀가 걸음을 옮긴다. 아마도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타이치 녀석, 눈 되게 높잖아?”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가요?”

 

 

등 뒤에서 불쑥 빼죽한 코가 튀어나왔다. 불시의 습격을 받은 나는 펄쩍 뛰었고, 뒤에 서있던 카와니시의 얼굴에 뒤통수를 박았다. 아찔한 비명이 나온다. 풀썩 주저앉는 그림자에 나는 잔뜩 당황해서 소리쳤다.

 

 

, 타이치? 너 내가 기척 좀 내라고 몇 번을……!”

……계속 불렀는데 무시한 건 선배거든요.”

, 그랬었나! 어쨌든, , 괜찮아?”

안 괜찮아요. 선배 뒤통수 되게 단단하네요.”

너 지금 농담이, 허억. 타이치, 코피!”

.”

 

 

당황, 당황, 그리고 또 당황. 당황의 연속이었다. 나는 혹시 휴지가 없을까 주머니를 마구 뒤졌고 카와니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코를 가렸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카와니시를 끌고 양호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견딜 수 없는 민망함과 미안함에 내내 카와니시에게 말을 걸었다. 아프진 않은지, 혹시 뼈가 부러진 건 아닌지, 피가 안 멈추는데 이러다가 응급실 실려 가는 건 아닌지 오만 걱정들을 와다다 쏟아냈다. 양호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피는 멎었다.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리 아프진 않다니 뼈에도 이상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겨우 좀 진정이 되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 카와니시를 앉히고 철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또 출혈이 있을지 모르니 좀 더 쉰 후에 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사이에 선생님마저 자리를 비운다. 삽시에 고요해진 주변 공기가 나는 또 다시 불편해졌다.

 

 

……선배 되게 말 많네요.”

거 시비냐?”

아뇨, 오늘처럼 말 많이 하시는 거 처음 본 것 같아서요.”

 

 

그랬던가. 나는 잠깐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은 아니지만, 평소 카와니시와 둘이 있었던 때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까 그건 누구 얘기에요?”

뭐가.

눈이 높다는 거요.”

, 그거.”

그 여자애랑 아는 사이에요?”

 

 

그 물음엔 좀 당황했다. 코를 만지작거리며 카와니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뺨을 긁적이다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카와니시가 먼저 선수를 쳤다.

 

 

혹시 선배, 텐도 선배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건 아니죠?”

…….”

오는 뭐가 오입니까.”

 

 

너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내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텐도 말에는 곧잘 웃어주면서 나랑 있을 때는 저 목석같은 얼굴이 도무지 펴질 생각을 않는다. 그것에 조금 꽁해져서 나는 무릎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제발 텐도 선배 말은 믿지 말아주세요.”

장난이지, 장난. 텐도 성격 알잖아?”

선배가 하는 말은 장난으로 안 들려서요.”

어라, 내가 그렇게 진지한 캐릭터였나.”

그게 아니고.”

 

 

이번엔 카와니시가 먼저 침묵했다.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린다. 그의 미간이 약간 꿈틀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신선한 반응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카와니시를 보았다. 팔을 뻗어 뒷목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미 선배.”

?”

……이제 그만 가죠.”

 

 

뜸을 들이는 게 조금 수상하다. 뭔가 말 못할 고민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괜한 오지랖일지 모른다. 그게 연애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사람 마음에 대고 이렇다 저렇다 논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가 내가 아끼는 후배라면 더욱 그렇다. 호기심은 불쑥 고개를 들지만 나는 그것을 억눌렀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요즘의 카와니시는 분명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코트로 돌아와서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카와니시와 충돌한 일을 설명하고, 양호실에 가서 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해명을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 이후는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종종 카와니시를 힐끗 바라보았다. 부지런히 땀을 흘리고 있는 그는 이미 머릿속에 잡념을 완전히 지워버린 듯 했다.

 

 

 

 

 

*

 

 

 

 

 

카와니시의 은밀한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주 웃긴 일이지만연애담은 그의 진심을 담은 부정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냥 여자애의 고백을 합리적으로 거절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였음을 카와니시는 강하게 어필했고, 그럼 네가 말한 그 분에 대한 얘기는 뭐냐는 텐도의 항변에 카와니시는 아주 시니컬하게 이상형이요.’라고 대답했다. 그 일로 제일 들떴던 텐도와 열심히 텐도를 추종하던 고시키는 풀이 좀 죽었다. 나는 구석에서 배시시 웃고만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말 없는 거 맞느냐고 다시 묻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느냐는 내 질문에 있다고 아주 솔직담백하게 대꾸했던 게 고작 얼마 전이다.

 

아무튼 그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 다시 모든 게 일상이었다. 방과 후에 부실에서 만나 인사를 건네고,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훈련을 하며 함께 땀을 흘렸다.

 

방과 후에는 보통 내가 가장 먼저 부실에 도착한다. 그 뒤로 텐도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우시지마와 레온, 그리고 카와니시와 시라부는 둘이 묶어 한 세트인 것처럼 늘 함께 부실에 온다. 오늘도 역시 내가 제일 먼저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옆자리의 캐비닛이 훤히 열려있었다. 어쩐 일로 카와니시가 시라부도 버리고 혼자 부실에 온 모양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리고 내 캐비닛을 열었다. 열면서 힐끗 카와니시의 캐비닛 안을 살폈다.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언젠가 보았던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그때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아 나는 고개를 빼고 가방 안을 노려보았다. 카와니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편지봉투가 공책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나는 등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잠잠한 것이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팔을 뻗어 편지를 꺼냈다.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여학생들에게 받은 연애편지라 생각하니 뭔가 비죽 웃음이 났다. 카와니시, 이 배부른 자식. 나는 편지를 들고, 카와니시가 왜 인기가 많은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훤칠하게 큰 키에 무뚝뚝해보여도 꽤 감성적인 면도 있고, 장난스럽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도 제법 차릴 줄 안다. 얼굴도 인기가 없는 것이 이상할 얼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괜찮은데 말이지. 남의 편지를 읽는 취미는 없어 나는 편지봉투를 고이 가방에 넣어주었다. 혹시라도 텐도에게 걸리지 않도록 안 보이게 그림자 속으로 잘 밀어 넣는 세심함도 보여줬다.

 

체육관으로 먼저 이동하려고 나는 등을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기척도 없이 다가온 카와니시가 내 등 뒤에 바짝 서있었다. 나는 놀라서 까무러쳤다. 꽥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물러서다가 이번엔 캐비닛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코가 찡했다. 격통에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여적 아무 말이 없는 카와니시의 눈치를 살폈다.

 

 

, 기척 좀 내라고…….”

봤어요?”

 

 

카와니시의 무표정이 나를 갈긴다.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어 당황한 눈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저번에 보았던 표정 변화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장난을 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안 봤어. 미안해.”

…….”

보려던 건 아니고 가방에 있어서……. 저번에 봤던 거랑 똑같은 것 같아서. , 그리고 그렇게 보이게 두면 텐도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잘 안 보이게 넣는다는 게……. 진짜로 안 봤어, 진짜야.”

 

 

표정이 확 풀리지 않는다. 나는 슬슬 겁이 났다. 이유가 뭐가 됐든 허락도 없이 가방을 뒤졌으니 사실 어떤 것도 변명이 되질 않았다. 바싹 얼어붙은 분위기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쯤이면 시끌벅적하게 텐도가 나타나야 하는데, 꼭 이런 때에만 문이 잠잠하다.

 

 

야아, 미안해. 근데 진짜로 안 봤어. 정말이야.”

……그럼 그걸로 됐어요. 괜찮아요.”

 

 

힐끔 눈만 들어 카와니시의 얼굴을 살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괜찮다고 하니 그걸로 된 걸까? 나는 우물쭈물 대다가 내 캐비닛을 닫고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카와니시는 내내 자리에서 침묵했다.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려 카와니시의 등을 바라보았다. 보려던 것은 아닌데,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져있었다.

 

그 날의 연습에는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계속 아까의 일이 신경이 쓰여 나는 내내 카와니시의 표정만 살폈다. 훈련에 들어가고 나서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괜히 걱정이 되었다. 집중하지 못하는 나만 구르고 넘어지고 공에 맞고, 아무튼 온갖 수난을 다 겪었다. 안 그러던 애가 왜 그러느냐고 코치님께 호되게 혼이 났다. 잠깐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구석에 앉아 땀방울이 떨어지는 주황빛 코트를 감상했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폈다. 컨디션도 컨디션이고, 뒤처지는 것은 싫지만 아마 오늘 내 연습은 이걸로 끝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릎을 당겨 앉아 나는 물끄러미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그 표정 뒤에 무언가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아 속으로 혼자 심란했다. 아까의 난감한 상황이 또 떠올라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구겼다. 뒤늦게 후회해봐야 이미 일어난 일이다. 모르는 척 능숙하게 카와니시에게 말을 거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아니면 다시 한 번 그 일은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 할까. 카와니시는 그래도 내가 선배라고 아무 말 못하고 넘어가려는 것 같은데, 이럴 때일수록 좀 더 확실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겨우 좀 친해진 것 같았는데 말짱 도루묵이 됐다.

 

이마에 차갑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내 머리통에 들이밀어진 노란색 드링크를 보았다. 그보다 조금 더 멀리,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흰 수건으로 뺨을 닦고 있는 손가락이 마냥 느리게만 보였다. 나는 멍청하게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카와니시가 말했다.

 

 

뭐해요.”

…….”

엥 같은 소리하네. 뭐해요, 바보 같이 앉아서.”

 

 

나는 영문을 모르고 드링크를 받아들었다. 아까 잠깐 움직이다 내내 앉아서 쉰 나는 그리 힘든 것도 없고, 땀도 많이 흘리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내게 준 것이니 나는 뚜껑을 열었다. 내 앞에 서서 카와니시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내 발 끝에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카와니시의 얼굴은 한참 멀리도 있었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카와니시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괜찮다니까, 진짜로.”

……미안.”

 

 

나는 눈치를 봤다. 한 풀 꺾인 내가 이제 안쓰럽기까지 했는지 카와니시가 털썩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에 남아있는 열기가 훅 끼쳤다. 옅게 땀 냄새도 뱄다. 괜히 목이 타는 것 같아 나는 드링크를 벌컥벌컥 마셨다. 식도가 뜨끈하고 배 언저리가 근질근질했다.

 

 

보기보다 소심하네요, 선배.”

소심의 문제가 아니지, 이건.”

내가 괜찮다니까요.”

그러게…….”

아 거 참, 신경 쓰이게.”

 

 

카와니시가 불쑥 짜증을 냈다. 나는 그것에 화들짝 놀라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툭 튀어나온 말인지 카와니시도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언제나 나른했던 눈매에 다 드러나게 당황함이 섞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을 열심히 헤집었다. 그러나 내게 그런 말주변이 있을 리 없었다. 저 멀리서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텐도가 예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와 함께 침묵하던 카와니시는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내게 말했다.

 

 

그거 어차피 선배 거예요.”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요.”

 

 

카와니시는 빠르게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등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텐도가 가까워졌다. 나는 카와니시에게 들은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짧은 말을 듣고도 나는 한참이나 의미를 헤집어야 했다. 훌쩍 다가온 텐도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수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타 군, 괜찮아? 얼굴이 빨개.”

 

 

 

 

 

*

 

 

 

 

 

나는 카와니시의 말을 두 가지로 해석했다. 말 그대로 누군가가 내게 쓴 편지를 어떠한 경로로 카와니시가 습득했다는 것이 첫 번째고, 그것이 카와니시가 내게 쓴 편지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아무리 생각을 되감아보아도 후자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사실 전자여도 뭔가 이상하다. 그냥 당사자에게 직접 되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날 이후로 카와니시가 은근히 나를 피했기 때문에 나는 결국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전에는 없었던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얼굴은 볼 수 있지만 아무것도 닿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런 두꺼운 벽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벽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나뿐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와니시는 늘 똑같이 나를 대하는데, 그 편지의 일 때문에 내가 괜히 그를 멀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후자의 의미면 또 어떠랴. 후배가 선배에게 편지 쓰는 것이 낯간지러운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리 이상하게 여겨질 일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러나 하나의 질문에 답이 막히고 만다. 카와니시는 왜 내게 그 편지를 주지 않았고, 여전히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 질문에 번번이 패배했다.

 

비가 죽죽 내리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몸도 무겁고 공기도 습해서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 기온이 높지 않았음에도 땀이 찬 팔뚝에 열기가 화끈하게 올라왔다. 발길이 축축 쳐져서 귀가는 아무래도 내가 꼴찌인가 싶었다. 느릿느릿 샤워를 마치고 부실로 돌아왔다. 캐비닛 앞에 멀뚱히 서서 가지런히 적힌 내 이름을 보다가, 힐끗 시선만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굳게 닫힌 문이 어쩐지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는 내 캐비닛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당황했지만 다행이 이번엔 어디에 부딪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휙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주 낯익은, 동시에 낯선 얼굴이 들어왔다.

 

 

…….”

……, 뭐 두고 갔어?”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깥에 빗소리가 선명하게 깔린다. 나는 부실을 가득 채운 민망함을 지우려 밝게 물었다. 잠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와니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산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도 안 마주치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구석에 있던 장우산을 들고 휭 등을 돌리는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 카와니시.”

 

 

대답 없이 고개만 돌린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홰홰 내저었고, 잠시 머뭇거리던 카와니시는 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이 징그러운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카와니시가 부실을 완전히 나가고 나면 좀 나아질까? 온도와 습도가 한데 섞인, 이 불쾌한 끈적거림이 없어질까? 단박에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카와니시를 향해 돌진했다. 조금 열렸던 문이 굉음을 내며 닫힌다. 철제문을 제법 세게 눌러 닫은 손바닥이 뜨끈해졌다. 카와니시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내려다본다. 그 나른한 두 눈에 당황함이 뚝뚝 묻어났다.

 

 

…….”

……왜요?”

 

 

그러나 이번엔 눈앞이 하얘졌다. 일단 저지르고는 봤는데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낭패다. 여기저기서 종소리가 댕댕 울렸다. 카와니시는 그 짧은 새에 평정을 되찾았다. 목소리에도, 그 잘난 얼굴에도 동요는 없었다. 나만 이 모양이라는 생각에 울컥 화가 났다. 나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 편지!”

…….”

내 편지 돌려줘, 카와니시!”

 

 

이게 아닌 것 같긴 한데.

 

 

원래 내 거라며.”

 

 

카와니시의 표정이 급격하게 식는다. 꿉꿉하고 뜨겁던 공기가 순식간에 냉골이 되었다. 사람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휙휙 바뀌는지 나는 처음 알았다. 덩치 산만한 녀석이 분위기 잡고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그렇게 공포스러운 일인지도 처음 깨달았다.

 

 

……버렸어요.”

?”

버렸다고요, 편지.”

, ? 내 거라며!”

세미 선배.”

 

 

카와니시가 움직인다. 움직여서 문을 짚고 있는 내 팔뚝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곤 휙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힘을 주고 있지 않아서 나는 그저 딸려갔다. 바깥의 비 내리는 소리가 먹먹해졌다. 나는 카와니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와니시도 피하지 않는다.

 

 

……이제 이름, 안 불러주시네요.”

…….”

내일 봬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부실 안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카와니시는 붙잡을 새도 없이 휭 사라졌다. 망연하게 자리에 서서 아무도 없는 문을 노려보다가, 나는 뒤늦게 그보다 더 심각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 우산 안 가져왔는데…….

 

 

 

 

 

*

 

 

 

 

 

결국 감기에 걸렸다. 편의점에서 우산이라도 샀으면 좋았을 걸, 집 별로 안 멀다고 그 빗속을 뛰어다니다가 여름 다 간 무렵에 덜컥 감기가 왔다. 코 막힘이나 기침은 그러려니 했는데, 이따금씩 눈앞이 아찔한 게 문제였다. 덕분에 하루 종일 멍했다. 수업이고 자시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정규 수업 시간이 종료되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무단으로 연습을 빠지는 것보단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결석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나는 곧장 부실로 향했다. 다리가 휘청휘청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이 내가 비틀대는 것인지, 아니면 미열 탓에 눈앞에 아지랑이가 펴서 그런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 ……. 죽겠네.”

우리 에이타 군,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죽으면 안 돼.”

등 두드리지 마, 우욱.”

 

 

뒤로 바짝 따라붙은 텐도가 등을 두들기는 바람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는지 얼굴을 디밀고 괜찮으냐고 묻는다. 빨리도 물어본다. 삐딱하게 웃으며 대꾸했더니 그래도 살만 한가보네, 하고 따라 웃는다. 아니, 죽겠어 그냥. 나는 앓는 소리를 했다.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를…….”

너 뭐라고 했냐.”

 

 

내가 주먹을 쥐고 쫓아가니 텐도가 팔랑팔랑 도망을 친다. 따라붙을 기운은 없어서 휘적휘적 허공에 팔을 저으며 뒤따라갔다. 부실 문이 열렸다가 도로 닫힌다. 에이, 나쁜 자식. 문 좀 열어주지. 속으로 불평하면서 손잡이를 쥐었는데 덜컥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카와니시였다.

 

 

……, 안녕.”

 

 

꾸벅 카와니시가 고개를 숙인다. 그게 끝이었다.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나를 휙 지나쳐간 카와니시는 곧장 체육관으로 향한다. , 젠장.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나는 터덜터덜 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 결국 세수를 했다. 찬물을 끼얹고 나니 조금 개운해져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약이라도 먹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시라부의 말에 보건실에서 해열제도 받았다. 먹고 누워서 아무것도 하질 않으니 무거워서 직직 끌리던 몸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노곤했다. 비가 한창 쏟아 부었던 하늘은 개었지만, 바닥 가까이에 짙은 습도가 남아있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건강 문제로 오늘 연습에 불참할 것 같다고 미리 말해두었으니 그건 상관이 없지만, 이럴 바엔 그냥 약 먹고 곧장 집으로 갈 걸 그랬다. 몸이 나른해져서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더니 무려 세 시간을 자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래도 한잠 자고 일어나니 훨씬 낫긴 하다.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나는 서둘러 일어섰다. 대충 짐을 챙기고 커튼을 걷었다. 근데 원래 이 늦은 시간까지 보건실이 열려있던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바로 다음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라.”

 

 

부활동이 벌써 끝났는지 교복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은 카와니시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기척이 들리자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카와니시는 내 혼돈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이제 깼어요?”

카와니시,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게요.”

 

 

구겨진 신발 뒤축을 고쳐 신고 나는 카와니시 앞에 섰다. 카와니시가 따라 일어섰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은 있었지만 이번엔 좀 참았다. 덕분에 나와 카와니시 사이에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둘 다 꿈쩍을 않았다. 슬슬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나는 어색하게 카와니시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카와니시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우산 없으면 빌려 달라고 하던가요.”

네 거잖아.”

같이 가면 덧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제 분위기를 떠올려보았다. 절대적으로 덧날 상황이었다.

 

 

나 기다린 거야?”

……또 비 올지도 모르니까요.”

이야, 감격스럽네.”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앞장섰다. 선배니까, 선배답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뭔가 묘한 분위기에 저절로 어깨가 긴장을 한다. 카와니시가 큰 보폭으로 뒤따라왔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연습은 끝나고 온 거야?”

대충 둘러대고 나왔어요.”

너 그러다가 훅 간다.”

저한테는 아직 일 년 더 있으니까요.”

그 말 좀 상처인데.”

죄송.”

 

 

짤막한 대꾸에 내가 폭소를 했다. 그제야 카와니시도 조금 표정을 풀었다.

 

카와니시의 우려와 다르게 하늘은 맑았다. 비를 머금고 내내 축축했던 땅도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은연중에 흐르는 비 냄새는 그럭저럭 맡을 만했다. 카와니시와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학교를 나왔다. 갈림길에 우뚝 멈춰 서서, 나는 카와니시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선배.”

?”

선배도 졸업하겠죠.”

그렇겠지.”

그러면 내년엔 선배가 없겠네요.”

, 아쉬워?”

…….”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카와니시의 낯이 좀 어두워졌다. , 그렇게 아쉬운 일이었나, 내가 졸업하는 게. 어제는 바짝 날이 서있더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세미 선배.”

왜 자꾸 불러. 집에 안 가?”

……안 그렇게 생겨서 그렇게 눈치 없는 것도 능력이에요.”

뭐야, 이번엔 또 시비냐?”

제가 선배 좋아하고 있어요.”

 

 

지평선 너머로 꼴깍 사라진 해는 이미 없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만 반짝이던 날, 늦여름 시원한 저녁 바람이 솔솔 불어 그렇게 자고도 또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카와니시의 그 말을 듣고 도로 몽롱해졌다.

 

 

좋아해요, 선배.”

 

 

, 거짓말 같은 타이밍에 수명이 다한 가로등 불빛이 꺼졌다. 더 이상 카와니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유도 모르고 덜컥 겁을 먹었다. 까맣게 드리운 어둠 속에서 카와니시가 팔을 뻗었다. 큰 손이 바닥을 향해 떨어뜨린 내 팔을 쥐었다. 마치 내가 여기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 같았다. 그리고 마법처럼 두려움이 멎는다. 그럼에도 눈앞이 아찔한 것이 비단 내 몸에 남아있는 잔열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린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

 

 

 

 

*

 

 

 

처음부터 끝까지 눈치 없는 선배 때문에 고통 받은 카와니시에게 심심한 사과를.....

놀랍게도 뒤는 없습니다. 이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카와세미 사귀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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