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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기반이지만 현재(+미래)날조가 심각합니다...

 

 

 

 

 

 

스무 살, 세미 에이타.

 

 

나는 아주 게으른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밖이 너무 더운 탓에 주로 집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것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내가 잠에 드는 시각은 주로 새벽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렇게 게을러진 나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를 가고, 수업을 듣다가 부지런하게 부 활동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일찍 잠에 드는 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머저리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간만에 나는 아침 아홉 시에 기상했다. 카와니시는 여덟 시에 깼고, 그 한 시간 동안 방바닥을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녔다. 나는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 그런 것을 잘 듣는 것은 아닌데, 카와니시가 내 침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내 내 손가락이며 머리카락을 자꾸 만지작거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퀭한 눈으로 하지 말라고 잠결에 중얼거렸더니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코앞에 카와니시의 얼굴이 덩그러니 있었다. 덕분에 확 잠이 달아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일어나서 나는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침대 아래 바닥에 앉아있는 카와니시를 보고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뭐랄까, 게으른 주인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애완견 같은……. 이게 아니고, 아무튼 나는 직감했다. 카와니시가 미야기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는 강제로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아침부터 뭘 먹기는 싫어서 카와니시에게 간단하게 어제 먹었던 반찬들을 내주었다. 그는 왜 선배는 먹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매일 점심이 되어야 일어나던 내가 아침밥을 먹을 수 있을 리 없다. 더워서 입맛이 없다고 대충 둘러대고 나는 곧장 소파에 늘어졌다.

 

 

선배는 뭐해요?”

 

 

카와니시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고 나는 공복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퍼 넣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카와니시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잠시 그 말의 의중을 고민해보다가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아이스크림 먹는데.”

……아니, 말고.”

너 머리 좀 컸다고 나한테 막 반말한다?”

누가 아이스크림 먹는 거 몰라서 물어봐요?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요.”

 

 

카와니시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 괜히 주눅이 들어 나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아무래도 카와니시는 반년 새에 많은 일을 겪은 게 분명하다. 사춘기가 다시 왔나?

 

 

아니 그럼 그렇게 물어보든지.”

……삐졌어요?”

너 너무 선배를 막 대하는 것 같다?”

선배 앞에선 자꾸 말이 헛나와서 그래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카와니시는 말을 멎었다. 손바닥으로 제 뒷목을 만지작거린다. 대답하기 곤란한 때에 카와니시가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수저를 쪽쪽 빨았다. 묘한 기시감이 든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만 잘하는 카와니시는 유독 내 앞에서 말실수를 한다고 했다. 글쎄, 저게 말실수인지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카와니시의 본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선배, 요즘은 뭐하고 지내요.”

 

 

질문이 잽싸게 정정되었다. 그것에 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별 거 안하는데.”

설마 매일 이러고 살아요?”

이러고 산다니, 뭔가 부정적이야.”

 

 

카와니시가 질색을 했다. 나는 그게 뭐가 대수냐고 대꾸했다. 카와니시야 한창 부지런할 고등학생이지만, 나는 벌써 반복되는 일상에 푹 고아져버린 백숙 같은 어른이 되었다.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카와니시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먹였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먹기는 잘 받아먹는다.

 

 

,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요.”

밖에 나가고 싶어?”

지금은 좀 그래요.”

 

 

내 물음에 카와니시가 힐끗 베란다 밖을 바라본다. 이글이글 내리쬐는 태양에 불타오르고 있는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그늘이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오늘의 하늘은 구름 한 점조차 없는 모양이다. 이따 저녁에는 또 몰라도, 한창 해가 뜨기 시작한 지금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실제로 나는 불과 며칠 전에 아르바이트를 구해보겠다고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핑핑 정신이 아찔해져서는 곧장 집으로 돌아온 전적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싹싹 긁어먹고 나는 도로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웠다. 그런 나를 보고 카와니시는 먹고 바로 누우면 소화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다. 독립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잔소리다. 싫은 것도 오랫동안 떨어져있으면 정이 든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카와니시에게 말했다.

 

 

타이치, 엄마 같아.”

 

 

선풍기가 돌돌 돌아간다. 좀 낡은 거라 시끄러운 소음이 났다. 내 말에 바닥에 앉아있던 카와니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그 시선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랑곳 않고 카와니시가 누워있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카와니시의 얼굴을 밀어냈다.

 

 

, 뭐야?”

좋아해요, 선배.”

 

 

, 또다. 카와니시의 기습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타이밍에 나를 훅 찌르곤 했다. 앞뒤 맥락 다 잘라먹고 뜬금없이 좋아한다느니 갑자기 제 속마음 털어놓는 버릇은 여전히 변하질 않았다. 그런 때면 당황스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건너로 카와니시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치, …….”

키스해도 돼요?”

, 무슨 소리야. 미쳤어?”

어른 되면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너 아직 미성년자거든? , 저리 안 치워?”

좀 봐줘요.”

 

 

다짜고짜 카와니시가 내 팔뚝을 잡고 끌어당겼다. 세상에 키스를 누가 이렇게 낭만 없게 하냐고? 나는 차마 저항할 생각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카와니시의 냄새가 났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 빠르게 떨어진다. 나는 세상 풍파 다 겪은 얼굴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얄밉게 웃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하네요, 선배.”

!!”

 

 

나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와니시의 등판에 발길질을 해댔다.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는 좋다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프다면서 내 다리를 재빠르게 붙잡고 카와니시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작년의 여름도 이렇게나 더웠다. 꼭 여름을 닮아 타오르듯 뜨거웠던 우리는 내 기억의 저편에 조각처럼 콕콕 박혀있었다. 그리고 올해엔 조금 더 자란 카와니시가 훌쩍 다가와 내 머리맡을 맴도는 여름의 태양처럼 나를 찾아왔다. 나는 우리가 신기했다.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거의 반년을 남처럼 살았던 우리가, 다시 그날의 우리처럼 아직도 이 자리에 남아있음이 아주 낯설었다.

 

 

 

 

 

성년의 경계 下

우리가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리고 가장 처절했던 시절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선배는 배구를 그만뒀다.

 

무릎 외에 외상은 없어서 퇴원은 빨랐지만 선배는 한동안 다리에 깁스를 해야 했다. 걱정스럽게 괜찮으냐고 묻는 내 말에 선배는 이런 것쯤 한 달만 지나면 다 낫는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의 무릎이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란 사실은 나 말고도 배구부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었다. 자동차의 시커먼 바퀴가 밟고 지나간 선배의 오른쪽 무릎은 아예 으깨졌다. 수술이 필요했고, 뼈가 붙고 나서도 꾸준한 재활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선배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선배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선배는 나에게 사귀자 했고, 나는 그토록 기다렸던 대답을 들었으나 얼굴을 보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다. 선배는 한동안 이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방과 후에 바로 부 활동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만나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나는 틈만 나면 선배에게 찾아갔다. 지금은 그가 가장 힘들 시기다.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선배는 부실에 들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좀이 쑤신다며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고 이따금씩 체육관을 찾았다. 그런 날이면 텐도 선배나 내가 주로 선배의 곁에 붙어있었다. 선배는 눈에 띄기 싫다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남들 훈련하는 걸 가만히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신경 쓰여 내내 힐끗거렸고, 그러다가 날아오는 공을 보지 못해 뒤통수에 맞거나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잔소리와,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 아릿한 통증과, 선배의 웃음소리가 내게 날아와 박히곤 했다. 또 그랬다. 정신이 저만치 날아가 버린다.

 

 

타이치, 여기.”

감사합니다.”

 

 

혹여 땀 냄새가 날까 나는 선배와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앉았다. 선배는 내게 드링크와 수건을 건넸다.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땀방울을 털어내고 그대로 수건을 머리 위에 걸쳐두었다. 옆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

?”

괜찮아요?”

 

 

선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는 옆에 있는 내가 아니라 주황빛 코트 위에 떨어진 땀방울, 중앙을 가르는 네트, 바쁘게 뒹굴고 있는 공들 따위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 위로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만 내려 선배의 다리를 보았다. 깁스는 이미 푼 후였다. 그러나 교복 바지 아래, 다리를 감싸고 있을 하얀 붕대가 눈에 아른거렸다. 선배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괜한 걸 물어봤다는 뒤늦은 후회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을 리가 없다.

 

 

괜찮아.”

 

 

내 사고의 흐름을 부정하는 대답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선배가 내게 해주는 대답이라기보다는 선배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주문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모든 것이 열기로 뜨끈한 이곳, 유일하게 홀로 건조한 선배는 덩그러니 무언가에 갇혀 있다. 그곳은 나도 들어갈 수 없는 빼곡한 가시덤불 성이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차라리 좋아. 이제 공부에만 집중해야지.”

…….”

타이치,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뛰어줘.”

선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얘기를 꺼내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퍼뜩 두려움이 들었던 탓이다. 선배는 나를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내 대답에 싱겁게 웃었다. 그 웃음에 가려진 것들을 선배는 내게조차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선배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부실을 방문했다. 훈련을 구경하고 싶다는 게 핑계였지만 나는 곧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주가 지났을 때 선배의 캐비닛 안, 그리 많지 않은 선배의 짐들이 말끔하게 치워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선배는 더 이상 부실에 오지 않았다.

 

그 날 훈련을 마치고 늦게까지 부실에 홀로 남아, 나는 그 캐비닛에 대고 차마 선배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철제 사물함이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선배가 없는 배구를 내가 열심히 할 수 있을까요.”

 

 

선배가 어른이 되기 전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 나는 그 뜨거운 하늘이 아주 미웠다.

 

 

 

 

 

* * *

 

 

 

 

 

스무 살, 세미 에이타.

 

 

내가 집 밖으로 나온 것은 해가 다 지고 난 후의 늦은 시각이었다. 오늘은 폭염주의보가 내렸으므로 카와니시와 나는 본격적인 외출은 내일부터 시작하자고 협상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만 있자니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나는 그를 끌고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걸어서 오 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녁 아홉 시, 우리는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들고 왔다.

 

나는 맥주를 샀다. 술을 그리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적당히 먹을 줄 알았다. 카와니시는 약간 동경하는 눈으로 내 맥주 캔을 바라보았고,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미성년자에게 알코올을 먹일 수는 없다. 대신 아쉬운 표정을 하는 카와니시에게 그 몫의 콜라를 쥐어주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앉아서 과자를 뜯었다. 그리고 눈을 깜짝 할 새에 는 맥주 한 캔을 말끔히 비웠다. 카와니시는 주저 없이 맥주를 털어 넣는 나를 신선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홀짝, 콜라를 한 모금 머금고 카와니시가 말했다.

 

 

괜찮아요?”

뭐가?”

선배 주량이요.”

별 걱정을 다 한다, .”

아뇨, 여기 선배랑 저 둘뿐이잖아요.”

 

 

고등학생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다. 나는 왁왁 소리를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장난인 줄 알았지만 표정이 한없이 진지하다. 나는 서둘러 캔을 내려놓고 과자를 한 입에 우겨넣었다. 바른생활 운동 소년인 너보다 절대 먼저 잠들지 않겠다고 나는 굳게 다짐을 했다. 카와니시가 살풋 웃는다.

 

 

선배는 제가 여기 온 게 싫은가 봐요.”

 

 

그 말은 좀 의외였다. 카와니시는 꽤 저돌적으로 구는 편이라 내가 많이 애를 먹었는데, 올해의 카와니시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카운터를 날리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어딘가 풀이 죽은 느낌이다. 표현하자면 비밀이 많아진 것 같았다.

 

 

아니 뭐……, 싫지는 않아. 말동무 생겨서 꽤 즐겁기도 하고.”

 

 

다만, 카와니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방향이 서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것치고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아요.”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까 당황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일단은, 너랑 나랑은 예전에……. 그러니까, 연애 같은 걸 하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나는 전혀 모르겠다 이거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내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너의 의중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애매한 우리의 관계가 반년을 건너뛰었음에도 여전한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할지, 아니면 그런 네가 어색하기만 한 내게 물음표를 던져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생일 시절 마지막으로 너와 보낸 여름과 겨울, 그 짧은 계절의 변화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너는 아직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걸까?

 

 

……별로 다른 이유는 없어요.”

…….”

그냥 선배가 생각나서 왔어요.”

……간지러운 소리는 잘도 하네.”

 

 

우리 아직도 그런 얘기할 사이야? 우스갯소리로 묻는 말에 카와니시는 조금 날카롭게 되물었다.

 

 

선배는 벌써 혼자 끝냈나 봐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탔다. 나는 나를 뚫을 기세인 그 시선을 피해 맥주 한 캔을 더 땄다. 시원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며칠 굶은 사람마냥 그걸 마구 들이켰다.

 

 

선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와니시에게 말려들 것 같아서 그랬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아니……, 보고 싶기야 했지.”

……누가 들어도 거짓말 같은데요, 그거.”

내 진심을 왜 네가 판단하냐!”

연락 한 번도 안 해줬잖아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랑 다르게 말문이 턱 막혔다.

 

 

기다리라고 그래서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번을 안 해줬잖아.”

 

 

카와니시는 아주 평온한 표정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카와니시는 말로 나를 실컷 두들기고 있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연락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어차피 변명밖에 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사실 잊고 있었다고 하자니 지금도 좀 뾰로통한 저 얼굴이 입이 두 배는 튀어나와서 나랑 말도 한 마디 안 섞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카와니시에게 연락하지 못한 것,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모두 지우고 지냈던 것, 나는 그저 모르고 싶었을 뿐이다. 작년의 여름은 내게 폭풍과도 같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나를 가장 좋아해주었던 사람과 함께 했고, 동시에 나는 그것들을 한순간에 모두 잃어야 했다. 카와니시는 나와 가장 가까웠고, 동시에 내 일상과도 아주 밀접하게 닿아있었다. 나는 배구를 했던 나를 모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엔 카와니시를 마주하는 게 늘 힘들었다.

 

언제나 공을 만지고, 코트를 밟고, 딱 그 순간뿐인 경기를 이끌어가는 카와니시를 보면서 자괴감조차 들지 않았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겉으로 티는 못 내더라도 나 역시 사람인지라 당시에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나를 좋아하는 카와니시를 질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 나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청춘의 일부를, 내가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그 당시의 너를.

 

 

……됐어요, 선배 탓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내 표정을 관찰하던 카와니시가 말했다. 나는 뾰족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실컷 할 말 다 해놓고 마무리가 좀 그렇다, .”

그래서 제가 직접 왔잖아요.”

…….”

이제 답을 들려줘요. , 더 기다려야 해요?”

 

 

카와니시의 물음은 아주 담백했다. 나는 그 이듬해, 나의 졸업식에서 뚝뚝 눈물을 흘렸던 카와니시를 떠올렸다. 안 그럴 것 같았던 카와니시가 나에게 안겨와 나도 따라 엉엉 울었던, 그렇게 같이 울면서 우리가 마주했던 약속을 나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카와니시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 * *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선배, 주말에 뭐해요?”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질문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체육관에서 만나던 건 이제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늘 주말 연습을 빠졌다. 그리고 선배를 만났다. 만나서도 그다지 하는 일은 없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고, 나는 선배에게 공부는 잘 되고 있느냐고 묻고, 선배는 내게 연습은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배가 내게 배구에 대해서 묻는 걸 그리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대답은 피했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서 맛있는 거나 먹을래?”

다리는 괜찮아요?”

걷는 정도로는 문제없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시간을 정했다. 선배는 손쉽게 그러자 했다.

 

 

 

여름도 끝물이고, 이제는 제법 바람도 선선해서 밖을 돌아다니는 일도 못할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차고 불쾌지수가 한껏 올라가고, 그런 날은 지났다. 그러나 선배와 나는 거리에서 늘 한 뼘 정도는 떨어져 걸었다. 식당이든 카페든 가게에 들어가 가장 구석자리를 꿰고 앉아서야 우리는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했다. 나와 있을 때에는 늘 웃는 얼굴인 선배가, 나는 바보 같게도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입시에 대한 얘기를 툴툴거리며 털어놓았다. 선배는 그래도 공부는 제법 잘하는 편이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새롭게 학업을 시작하는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하루 종일 앉아 펜만 붙잡고 있으려니 엉덩이가 다 아프다고 했다. 나는 선배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정 안 되겠으면 나를 불러달라고 대답했다. 밤공기가 제법 시원하니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내게 선배는 스스럼없이 빙긋 웃었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작은 플라스틱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선배와 나는 근처 공원을 거닐었다. 조금 오래 걸어 다닌 것 같아 나는 내내 선배의 무릎을 힐끔 쳐다보았다.

 

 

너 자꾸 어딜 보냐.”

…….”

 

 

선배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려던 건 아닌데 시선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선배가 씩 웃는다.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은 안 돼. 우린 너무 어려.”

……저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농담인데 뭘 그렇게 질색을 하느냐고 선배가 웃었다.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전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선배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은 없어서 그것을 명확한 말로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자꾸 만지고 싶고, 곁에 있고 싶고,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 하는 것은 분명 내가 선배를 생각보다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느릿느릿 걷다가 우리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선배의 신발 끈이 어지럽게 풀려 있었다. 선배는 허리를 굽히고 운동화를 고쳐 신었다. 나는 툭 불거진 선배의 뒷목을 말끄러미 보았다. 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하게 드러난 목선에 나는 정말이지 속수무책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나는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괜한 얘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타이치?”

 

 

온몸의 감각 세포가 과할 정도로 반응하고 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선배를 보았다. 뺨이 붉어졌다며 선배가 나를 놀렸다. 내 다리 위에 올려놓은 선배의 손을 은근슬쩍 잡았다. 선배는 내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줄 아는 것 같다. 뾰족하게 솟은 두 눈에 걱정을 주렁주렁 달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아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충동적으로 선배의 뒷목을 감싸 당겼다. 혹시 꼴사납게 이가 부딪칠까봐 고개도 살짝 꺾었다. 시야에 선배의 두 눈이 가득 들어오는 찰나, 나는 김이 팍 새버렸다.

 

 

……뭐해요, 선배?”

,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지금 딱 타이밍이었다고요. 왜 막고 그래요, 사람 민망하게.”

어쭈, 타이밍은 너 혼자 잡냐?”

 

 

쓸데없이 손이 빠른 선배는 잽싸게 손바닥을 올려 내 입을 틀어막았다. 선배는 아주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나도 나대로 당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어서 별로 위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와 나 사이에 미적지근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붉어진 뺨을 진정시키느라 혼이 났다. 내게 핏대를 세우던 선배도 옆에서는 말이 없었다. 아아, 젠장. 말도 못하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타이치.”

……왜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선배는 아닌 것 같아.”

 

 

맥락 없는 흐름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턱을 숙이고 제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만 빤히 바라보는 선배의 표정에 나는 금세 착잡해졌다. 나와는 다르게 선배는 표정이 상대적으로 읽기 쉽다. 드러내는 것에 익숙한 선배는 웃는 것 말고는 숨길 줄 몰랐다. 그 얼굴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선배가 내게 사귀자고 얘기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의외로 침착했다. 나는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사실 네가 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타이치.”

……선배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어야만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해요?”

 

 

나는 선배를 응시했다. 고개만 숙이고 있던 선배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부담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를 원했다. 선배는 경기를 읽는데 탁월한 눈을 지녔지만, 사랑 받는 것에는 서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배구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다고 그게 진심이 아닐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는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선배가 좋아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나를 끊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결국 선을 그어야 했다.

 

 

하지만 선배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저, 내게 사귀자던 선배의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만을 바랐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그 고백이 사고 이후 모든 것을 강제로 바꿔야만 했던 선배의 눈 먼 선택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그저 내가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기다릴게요, 그게 언제가 되던.”

 

 

나는 아까보다 조심스럽게 선배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둥근 턱이 내 어깨에 닿는다. 귓가에 선배의 머리카락이 바람처럼 날아와 흔들렸다. , 또다. 눈앞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 * *

 

 

 

 

 

스무 살, 세미 에이타.

 

 

카와니시는 우리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도쿄에만 머물기엔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카와니시의 짐은 애초에 옷 몇 벌이 전부였기 때문에 가방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이제 그늘에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기도 하는 여름의 끝자락에, 카와니시는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가 갑자기 떠나간다.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일곱 날이 꼭 꿈만 같아 여전히 머릿속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기차역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카와니시의 뒤를 따랐다. 함께 역까지 가는 동안 나는 미야기로 돌아가서 카와니시가 겪을 일들을 점쟁이처럼 줄줄 읊어보았다. 슬슬 그게 피부로 닿기는 하는 모양인지 카와니시는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돌아가자마자 일주일간 연습에 무단으로 빠진 벌을 톡톡히 몸으로 때워야 할 것이라고 카와니시는 우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 등을 두드려주며 웃었다. 자업자득이야. 칼 같이 잘라 말하는 내게 카와니시는 이제 제법 어리광도 부릴 줄 알았다.

 

역 근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기차 시간이 다가올수록 카와니시는 내게 더 달라붙었다. 더운 날씨에 따끈해진 살이 땀으로 치덕치덕했지만 나도 딱히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카와니시는 헤어지기 싫다고, 내 졸업식 때처럼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번엔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내가 미야기로 가겠노라고 그를 달랬다. 내 약속을 전혀 못 믿겠다던 카와니시도 이제는 조금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플랫폼에서 음료수와 쿠키를 샀다. 가는 길에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나는 카와니시에게 봉투를 쥐어주었다. 작별이 가까워온다. 카와니시는 내내 아쉬운 듯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마지막 대회잖아. 얼른 가서 부지런히 준비해야지.”

……응원해줄 거예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들어왔다. 간만에 산뜻하게 바람이 불었다. 자리에 앉은 카와니시를 창 너머에서 바라보며 올해 무더운 여름을 뚫고 네가 내게 왔음을 또렷하게 망막에 새겼다. 두렵고 끔찍한 기억들로 치부하고 케케묵은 흙더미로 쌓아두었던 내 미성년의 나날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네가 있었음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기차가 떠난다. 거짓말처럼 그 해의 여름은 끝이 났다.

 

 

 

 

 

* * *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온 세상이 분홍색이었다. 전에 없던 이른 개화였다. 벚꽃이 유난히 흐드러지던 날엔 선배의 졸업식이 있었다.

 

발걸음이 직직 늘어졌다. 결국 선배에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마지막이 성큼 다가와 버렸다. 선배는 졸업하고 난 뒤에 도쿄로 간다고 했다. 선배가 곤란한 표정을 할까봐 자세한 주소를 묻지는 못했다. 때가 되면 선배가 내게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헤어지자고 한 적은 없었지만 선배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내 속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교정은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교문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나오는 가장 큰 벚나무 앞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나는 잠깐 자리에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 아는 얼굴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아는 선배들은 모두 체육관에 있을 것이다. 발걸음을 돌려 그곳을 향해 걷는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우울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내 도망치고 싶어 했던 그곳에, 세미 선배는 결국 도달했을까.

 

나는 결국 체육관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후에 선배들에게 호되게 잔소리를 듣겠지만 체육관 안에서 선배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잠자코 밖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모두와 작별을 마친 선배들이 나오면, 교정을 나서기 직전 졸업을 축하한다고 웃어줄 작정이었다. 나는 과연 선배의 졸업도 축하해줄 수 있을까? 대회가 끝나고 방학 내내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선배가 없는 학교를, 선배가 없는 체육관을, 선배가 없는 나를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낼 수 없었던 탓이다. 헤어짐을 앞두고 선배는 내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리고 그런 선배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좀처럼 감이 오질 않았다. 비현실적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나는 여전히 막연한 꿈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이 분주했다. 셔터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이곳에 멈춘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느린 시간을 거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도착한 것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들을 보고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빠르게 눈을 움직여 선배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금세 참담해졌다.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그 사진에 선배는 없었다. 선배가 없는 선배의 졸업식이었다. 그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생각보다 내가 선배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침울하게 서있었다. 이대로 교문 앞에 서서 선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할 요량으로 나는 어서 자리를 옮기려 했다.

 

 

에이타, 찾아?”

……?”

두고 온 게 있다고 잠깐 교실에 갔어. 아직 있을 거야, 가봐.”

 

 

텐도 선배가 애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멍청하게 그를 마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고 곧장 방향을 돌렸다. 내가 선배를 찾고 있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이 온통 분홍색이다. 그것을 올려다보고, 나는 다시 생각에 침몰되기 시작했다.

 

선배, 졸업 축하해요. 그 한 마디를 할 용기가 없었다.

 

숨 가쁘게 계단을 올랐다. 선배의 반에 다다라서야 나는 힐끔 창문 건너편을 확인했다. 선배는 자기 책상 앞에 서있었다.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 이상했다. 그러니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도 아닌 그 등을 보고 속이 울컥했다.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어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선배가 놀라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멈췄다. 선배의 등 뒤, 푸른색이어야 하는 하늘이 무지갯빛으로 알록달록했다. 나는 불현 듯 현기증을 느끼곤 무작정 선배를 향해 걸었다.

 

 

여기까지 올라왔어? 사토리가 알려줬겠네. 어차피 곧 내려가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지 왜 여기까지,”

선배.”

 

 

선배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나를 발견하고 그는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선배가 부러웠다. 나를 보고 그렇게 웃을 수 있어서 바보 같게도 질투가 났다. 나는 무너지듯 선배에게 매달렸다. 나보다 한 뼘 낮은 어깨를 양팔에 가득 담고, 나는 선배를 빈틈없이 그러안았다. 이제 더 이상 선배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타이치?”

……가지 말아요.”

 

 

내 고백에 선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려달라고 했을 때에도, 선배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그리고 내게 사귀자 했던 때에도, 다시 시간을 건너 선배가 나를 다시 밀어냈을 때에도 밋밋했던 눈가가 금세 시큰해졌다. 나는 선배를 품고 소리죽여 울었다. 이유도 모르고 굵게 방울진 눈물이 뚝뚝 떨어져 선배의 어깨 위를 적셨다.

 

 

, 타이치, 혹시 울어?”

……졸업하지 말아요, 선배.”

아니 잠깐만, 그건 좀 무리라고.”

안 가면 안 돼요?”

 

 

눈을 따라 목소리도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선배는 내 팔을 걷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내 등판만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제 보니 완전 어린애네.”

 

 

선배가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선배가 나를 피해 달아날까 선배를 붙잡는 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곧 그 목소리의 끝도 옅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배가 훌쩍 코를 먹었다. 고개를 조금 숙여 선배는 내 어깨 언저리에 두 눈을 감췄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타이치.”

 

 

나는 기다리겠다 말했다. 그게 언제가 되던 기다릴 수 있다고, 나보다 한 살이나 많은 선배를 어른스럽게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나는 조금 침울한 기분으로 선배의 마지막 약속을 귀에 담았다.

 

 

우리 어른이 돼서 만나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선배가 서있는 그 경계의 위에, 내가 서게 될 날을 그렸다. 하늘이 여전히 분홍색이었다.

 

우리, 어른이 돼서 만나자.

 

 

 

 

 

성년의 경계 fin.

 

 

 

 

 

- 더 이상 늘리면 답이 없을 것 같아 적은 분량에 뭉뚱그려 넣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결말이 났습니다. 시작도 끝도 애매하게 되어버렸네요.

- 여름, 약속, 서툰 청춘, 울먹임, 끝자락을 키워드로 썼습니다. 제가 담으려고 노력한 것들이 무사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지만 마무리를 보니 아무래도 무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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