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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기반의 이야기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고갑니다.
※ 교통사고와 관련해 민감한 소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8_8
스무 살, 세미 에이타.
아무 연락도 없이 카와니시가 불쑥 내가 사는 원룸에 찾아왔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나는 잠시 우뚝 서서 미야기와 도쿄 사이의 거리를 숫자로 가늠해보았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올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카와니시가, 연락도 없이 혼자 나타날 만한 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우두커니 현관에 서있었고,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고 서있던 카와니시는 슬쩍 매고 있던 백팩을 내렸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그 말 그대로였다. 졸업식 때 보고 못 봤으니 약 반 년만이다. 그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내가 듣기엔 꽤 낯설어진 것들이었다.
“저 여기서 며칠만 지내도 돼요?”
당황해서 멍청하게 서있는 내게 카와니시는 늘 그렇듯 평온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슬며시 밀고 멋대로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옆집 사는 이웃을 방문하는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그 등에 나 혼자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카와니시가 운동화를 벗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나는 우선 황급히 방바닥에 널브러져있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치웠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카와니시가 수건을 걸고 있는 내게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나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두 개 들어있었다.
“저 가출했어요.”
카와니시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나는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넣었다. 소파에 앉지도 않고 제자리에 서서 카와니시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한 발언을 해놓고 홀로 평화로운 그 표정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미쳤어? 빨리 안 돌아가?”
“싫어요.”
카와니시가 강하게 말했다.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와니시가 여름처럼 성큼 다가왔다. 먼 길을 달려와 가까워진 옷깃에서 푹 젖은 내가 났다. 카와니시는 나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그러안고 내 어깨에 폭 얼굴을 묻었다. 약간 울먹이는 소리가 났다.
“싫어요…….”
늘 어른스럽던 카와니시는 일 년 사이에 조금 더 어려져 있었다. 나는 아이처럼 내게 들러붙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달그락, 컵에 얼음이 담겼다. 잘 달인 따뜻한 녹차를 그 위에 부었다. 각진 얼음의 가장자리가 녹아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나는 힐끔 소파에 앉은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그는 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얕게 한숨을 내쉬고 나는 차를 내왔다.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컵을 카와니시에게 건넸다. 싱겁게 받아들고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카와니시가 그래도 짐이라고 챙겨온 것은 백팩에 든 옷 몇 벌과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방학을 맞아 도쿄로 여행이라도 온 차림새는 분명히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스무 살을 반 년 앞둔 미성년의 끝자락에 난데없는 가출이라니. 이유가 감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카와니시가 차가운 녹차를 홀짝 마셨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키 더 컸다?”
“조금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훨씬 더 높아진 것 같아.”
“선배가 줄어든 게 아닐까요.”
“뭐 이 자식아?”
카와니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벌컥 화를 내고 나도 장난스럽게 따라 웃었다. 내가 졸업한 후, 도쿄로 이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다. 오랜만에 만나 하는 대화가 예전과 그리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속내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꾹 닫고 있다. 긴 공백 사이에 제법 두꺼운 벽이 생겼다. 나는 어쩐지 그가 불안해졌다.
성년의 경계 上
우리가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리고 가장 처절했던 시절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해가 일찍 떨어졌다. 학교는 텅 비어있었다.
안에서는 생각보다 차분한 대화가 오고갔다. 교무실이라고 방음이 잘 되는 것은 아니라 나는 원치 않아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늘 쾌활하게 웃던 사람은 비장하고 차분해졌다. 어렴풋이 학업이라든지 성적이라든지, 시시콜콜한 얘기도 들렸다. 나는 창틀에 기대고 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교정을 바라보았다. 째깍째깍, 상담실 안에 있는 시계 초침소리가 훤히 들렸다. 시간은 지루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제 배구는 끝나지 않았어요. 끝이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그것을 듣고 나는 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속으로 삼 초를 셌더니 마침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바닥에 발을 딛고 똑바로 섰다. 상담실을 나오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친 선배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다시 문이 닫히는 찰나 나는 선배보다 한참 뒤에 앉아있던 교사의 표정을 보았다. 모르는 척, 나는 느리게 걷는 선배 옆으로 바싹 붙었다.
“아직 안 갔네?”
“같이 가려고요.”
선배가 말갛게 웃었다. 나는 선배의 가지런한 속눈썹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색이 연한 눈썹 끝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드러난 선배의 이마를 슬쩍 건드렸다. 왁, 놀라서 선배가 뒷걸음질 쳤다. 가볍게 내 손등을 밀치는 손가락도, 반듯한 이마도 뽀송뽀송했다. 늘 땀에 푹 젖어있던 앞머리도 오늘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상담을 이유로 하루 종일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배, 주말에 뭐해요.”
“쉬지 않을까? 자율 연습이긴 한데 이번 주는 좀 지쳐서.”
“시내에 체육관 리모델링 끝났대요. 갈래요?”
나는 농담 던지듯 무료한 목소리로 물었다. 힐끔 나를 바라보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선배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넌 지치지도 않냐, 그렇게 움직이고도.”
“아직 젊으니까요.”
“잘났다, 진짜.”
“일요일에 나와요. 공 가지고 갈게요.”
“왜, 인마. 쉴 때는 좀 쉬고 그래야지.”
그러게, 왜일까. 연습이 하고 싶었다면 학교 체육관에 가면 될 일이다. 말이 자율연습이지 그곳에는 배구에 미친 사람들이 많아서 일요일에도 체육관은 늘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고민에 빠졌다. 거리도 학교가 더 가깝다. 시설이야 리모델링한 체육관이 더 좋긴 하겠지만, 날도 쌀쌀한데 부득이 거기까지 가야 할 이유가 그다지 없었다. 나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무신경하게 선배를 향해 툭 던졌다.
“선배가 주는 토스 치고 싶어요.”
선배가 우뚝 멈춰 섰다. 한 발자국 더 가서 나도 멈췄다. 어깨를 돌려 선배를 바라본다. 둘 사이에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배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늘 같은 표정으로 선배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만 달싹이던 선배가 금세 방긋 웃었다.
“그래, 좋아.”
그렇게 말하고 선배는 나를 훌쩍 앞질러 갔다. 나는 천천히 그 발자국을 따라 밟았다. 주눅 들지 않는 든든한 등에 어쩐지 나는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메웠던 침묵의 의미를,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 날은 세미 에이타가 시라부에게 주전 세터의 자리를 넘겨주던 날이었다.
* * *
스무 살, 세미 에이타.
익숙한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 뒤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난간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날이 더워서 핸드폰도 쉽게 뜨거워진다. 아침에 샤워했는데, 또 땀을 흘리긴 싫어서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뜨렸다. 금세 신호음이 뚝 끊겼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세미 선배? 어쩐 일이에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나는 퍽 섭섭한 목소리로 답했다.
“선배가 후배한테 뭔 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냐.”
― ……선배 저한테 그렇게 관심 있지 않잖아요?
“윽……, 아무튼 한 마디도 안 져.”
― 무슨 일인데요.
일 년이 더 지났다고 시라부의 귀염성은 제로에 수렴했다―원래도 없었지만―.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미야기로 돌아와 학교에 들르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엿한 삼학년이 되어 배구부를 이끌고 있을 시라부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운을 뗐다.
“음, 그게 말이지.”
― 혹시 카와니시가 선배 집에 있다든가 하는 소린 아니겠죠?
“……너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 그 미친 자식이 거길 갔어요? 도쿄를?
“어, 어……. 그렇게 됐네. 나도 자세한 건 못 들어서 잘 모르겠어.”
수화기 건너편의 시라부에게서 잔잔하게 끓는 분노가 느껴졌다. 카와니시는 아마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불쑥 도쿄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듯한데, 시라부에게 물어보자니 좀 그랬다. 한참 말이 없던 수화기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는 그가 제법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 ……알았어요. 감독님한테 얘기할게요. 그러면 아마 그 자식 부모님 귀에도 들어가겠죠? 적당히 구슬려서 역까지만 데려다줘요. 그 이후엔 선배가 신경 쓸 일 없을 거예요.
“뭔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냐……. 타이치는 내가 잘 달래서 돌려보낼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좀만 기다려봐.”
― 선배는 괜찮아요?
그 물음에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엉.”
― 대답은 참 쉽네요. 아무튼 알았어요. 저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요.
뚝 전화가 끊겼다. 요 싸가지 없는 자식. 액정에 대고 나는 구시렁댔다. 동시에 물소리도 끊겼다. 조금 뒤에 카와니시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거실로 나왔다. 나와 다르게 꾸준히 운동을 해왔던 터라 작년보다 몸집이 좀 더 커진 것 같다. 다짜고짜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으면 분명 카와니시는 유들유들하게 대답을 피해갈 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밥부터 먹기로 결정했다.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는 카와니시에게, 나는 바지를 갈아입으며 물었다.
“마트 갈래? 반찬거리가 없어.”
카와니시는 아닌 척 투덜거렸다. 기껏 샤워까지 하고 누워있을 생각을 했더니 도로 이 더운 밖을 다녀야한다고 불만이 많다. 그럼 굶을 거냐는 내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스물이 되어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도 카와니시가 이렇게 어렸나 싶다.
여차저차 옷을 챙겨 입고 더운 아스팔트 위를 달려 마트에 도달했다. 다행이 원룸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었다. 카트를 끌고 느긋하게 걸어다니며 뭘 먹을지에 대해 카와니시와 토론을 했다. 이왕 도쿄까지 온 거, 직접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내 당찬 포부에 카와니시가 옅게 웃었다. 뭐 먹고 싶어? 내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싱겁고 두루뭉술했다. 선배가 먹고 싶은 거요.
오랜만에 만나 생긴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처음엔 좀 떨어져 걷다가, 나중에는 어깨를 마주대고 카트를 끌었다. 할 얘깃거리는 다양했다. 꽤 오래 떨어져있던 탓에 서로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주절주절 많기도 했다. 이 참에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 할 것 같아 나는 이것저것 카트에 담았다. 도와주는 척하더니, 카와니시가 슬쩍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야, 무거워. 치워.”
“거짓말하지 마요. 이 정도로 무겁다고 할 선배가 아닌 거 다 아는데.”
“빨리 안 치워?”
“……알았어요.”
눈을 홉뜨고 보니 카와니시가 슬쩍 손을 내렸다. 멋쩍은 표정이 신선하고 좀 귀여워보여서 웃음을 터뜨린 나를 카와니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해 카트에 감자를 담았다. 감자는 마법의 재료다. 무엇을 만들어 먹어도 다 맛있다.
“좀 마른 것 같아요.”
카트를 끌고 있는 내 팔뚝을 쥐더니 카와니시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운동을 안 하니까.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운동 안하고도 지낼 만해요? 카와니시가 불쑥 던진 질문에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렇게 묻는 저의를 짐작할 수 없어 나는 조금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낼 만해야지.”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고요.”
“그럼 뭔데. 또 너한테 토스 올려달라고?”
“재밌겠네요, 그거.”
대화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제야 내내 얼굴을 굳히고 있던 카와니시가 빙긋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아 마트 안은 시원했는데, 이상하게 진땀이 났다.
* * *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미야기 공공 체육관에는 주말 아침부터 사람이 붐빈다. 리모델링으로 샤워 시설도 확충했고, 낡은 코트도 새로 깔았다. 낡아서 자물쇠걸이가 뜯겨나간 개인 사물함도 새 것으로 바꿨다. 덕분에 찾는 사람이 늘었다. 여러 종목을 가르치는 강의 프로그램도 생겼고, 그것 말고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대형 코트도 하나 더 신설했다. 가장 붐볐던 때는 역시 리모델링 직후의 주말이었다. 사람 손을 타 새로 바꾼 것들도 슬슬 몸에 익어갈 때 즈음엔 늘 같은 사람들만 보이곤 했다.
세미 선배와 둘이 자율 연습이 있는 주말에는 이곳 체육관에서 둘만의 배구를 했다. 배구가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처음엔 좀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세미 선배 특유의 친화력과 시라토리자와의 명성을 이용해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런 민망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이었기 때문에, 선배와 나는 그들과 함께 연습 경기도 하고, 직접 코치도 받으며 훈련했다. 해가 바뀔 때 다니기 시작했으니 이곳에 나온 지도 벌써 반년을 채웠다. 별 생각 없이 선배에게 제안했던 비밀 훈련은 제법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선배도 나도, 이 무더운 여름에도 훈련을 빠지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는 둘 다 훌쩍 성장해 있었다. 프로 선수는 아니더라도 더 경험이 많은 성인들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웠다. 기술적인 면 말고도 심리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방법이나, 순간적으로 좀 더 유리한 코스를 선택해 스파이크를 치는 요령 따위도 제법 알게 되었다. 세미 선배도 얼굴이 좋았다. 특히 오롯이 자신의 토스를 올릴 수 있는 연습 경기 동안에는 말간 얼굴에 생기가 가득 돌곤 했다.
그 즈음해서 나는 좀 다른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선배와 붙어있으면서, 내가 선배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후배가 선배를 보는 것과는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감정의 후폭풍을 겪어야 할 일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 했던 것처럼 나에게 그 감정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종종 속으로 나를 칭찬하곤 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타인들과 섞여 공을 만지는 선배의 얼굴이 가장 행복해 보일 때, 나는 그를 이곳에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연습 경기는 주로 졌다. 어른들은 확실히 체격도, 노하우도 남달랐다. 그러나 세미 선배도 나도 칭찬은 많이 받았다. 센스도 있고 힘도 좋다고 선배는 그곳의 어른들에게 꽤 인기 있는 세터가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까지 땀 냄새 밴 체육관을 달리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선배와 나는 체육관을 나왔다. 나는 늘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선배는 조금 더 나중에 젖은 머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선배의 머리카락은 딱 내 코끝에 닿곤 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솔솔 샴푸 향기가 나면 나는 걷다가 무심코 넋을 놓았다.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선배의 옆얼굴을 감상하는 것이 어느새 내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재밌는 것 같아, 훈련. 같이 하길 잘했어. 정규 연습 시간엔 좀 버겁지만.”
“확실히 성인들이라 다른가 봐요. 좀처럼 이기기가 쉽지 않네요.”
“아무래도 우리보단 경험이 많으니까. 하지만 타이치 너도 제법 잘하고 있는 걸? 내년이 기대돼.”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선배가 씩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괜히 부끄러워져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할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나는 슬쩍 입을 열었다. 뭐 먹을래요? 말을 얼버무리며 묻는 말에 선배가 맑게 대꾸했다.
“타이치 네가 먹고 싶은 거.”
“메밀 소바는 어때요.”
“좋지, 날도 더운데.”
걸음이 직직 끌렸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탓도 분명히 있었다.
세미 에이타는 여름 같다. 곁에 있으면 살이 뜨겁게 그을리고, 싫지 않은 땀 냄새가 훅 끼쳤다. 한여름을 그득히 채우는 매미소리처럼 활기찬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가 먹먹해졌다. 오감이 온통 그를 향해 있어서, 때로는 정신이 아주 멀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타이치, 앞에 전봇대!”
딱, 하고 단단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진짜 눈앞에 별이 떨어졌다. 나는 이마를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핑 도는 통증에 이마 위를 더듬어보았더니 무언가 불룩 솟아있다. 나는 그것이 내 몸 안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선배의 흔적 같다고 느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앞도 못 보고 걸어? 너 이거 혹 된다? 안 아파?”
“……안 아플 리가 없잖아요.”
“그러게 잘 좀 보고 다니지, 애도 아니고 칠칠치 못하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스팔트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머리털 끝까지 오르는 열에는 나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괜히 울컥해서 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선배의 발끝을 노려보았다.
“어쭈, 이게 누굴 탓해.”
“선배 때문이잖아요.”
“야, 내가 아무리 못 잡아줬다지만.”
“좋아해요.”
“그래도 그렇게, 어?”
“제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속에서 무언가가 바글바글 끓는다. 기찻길도 없는데 귓가에서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손을 뻗어 선배의 팔뚝을 잡았다. 나는 간절하게,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무지 부끄러워서 고개는 들 수 없었다.
“선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넋이 나가요.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폭죽마냥 불쑥불쑥 내 머릿속에 터져서는 아무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요, 선배가요.”
“야…….”
“그러니까 책임져요. 나 좀 어떻게 해봐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나는 안 그런 척했다. 눈만 들어 선배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배에게 와장창 쏟아낸 뒤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일단 밥부터 먹을래?”
그게 선배의 대답이었다.
* * *
스무 살, 세미 에이타.
“선배, 요리 되게 못하네요.”
“시, 시끄러워.”
먼 길 왔다고 기껏 밥까지 손수 차려줬더니, 그릇 싹싹 긁어먹고 하는 말이 영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요리에 그리 능숙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못 먹을 걸 만들진 않는다. 빈 그릇을 휙 치우면서 나는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렸다. 개수대에 빈 그릇들을 넣어놓고 고무장갑을 들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카와니시가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며 나를 밀쳤다. 고무장갑도 뺏어간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도를 열자 물이 나왔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이 씻겨나간다. 수세미에 세제를 짜고, 능숙하게 거품을 냈다. 그릇들 부시는 소리가 사박사박 들렸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진 왜 온 거야?”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대뜸 물어보았다. 이 정도면 타이밍이 적당했다.
“후배가 선배 집에 놀러오는 게 뭐 어때서요.”
“그렇게 놀러올 만한 거리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묵묵히 설거지만 했다.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더니 고집이라도 부리듯 고개를 팩 돌려버린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마치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것처럼 열심히 그릇을 닦는다. 그릇과 수세미를 쥔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올라왔다. 저러다가 그릇 다 깰 것 같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돌려 거실로 가면서 카와니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닦아서 잘 널어놔.”
원룸이라 따로 방은 없다. 조그맣게 돌출된 부엌에 2인용 소파와 텔레비전, 나 하나 딱 들어가면 가득 차는 작은 침대가 다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선풍기가 탈탈탈 돌아가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카와니시가 더울까봐 나는 그것의 머리를 부엌에 두었다. 해가 기울어 푸르스름하게 밤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열대야의 시작이었다.
무료하게 채널만 돌리던 내 옆에 설거지를 마친 카와니시가 다가왔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풍기 헤드를 소파로 돌리고, 맨바닥에 풀썩 앉는다. 파묻히듯 소파에 기댄 카와니시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나도 달리 입을 열진 않았다. 텔레비전 불빛만 현란하게 번쩍거렸다.
“선배.”
“왜.”
“보고 싶었어요.”
“…….”
카와니시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 위에 박아놓고 나누는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대화였다. 나는 침묵했다.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너에게 네가 원하는 답을 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카와니시도 잠자코 있었다. 채널을 하나 더 돌렸다. 옛날 구닥다리 로맨스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저 아직도 선배가 좋아요.”
툭, 카와니시의 머리통이 내 무릎에 닿았다. 삐죽한 머리카락이 피부를 쿡쿡 찔러 간지러웠다. 나는 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는가 싶더니 카와니시가 팔을 뻗어 내 다리를 꽉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털었다. 귀찮다는 듯 카와니시가 툭 불거진 무릎 뼈 위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선배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
“대답 안 해줘요?”
“타이치.”
내 다리에 기댄 채로 카와니시는 입을 다물었다. 내 부름에 그저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고르다가 채널을 하나 더 돌렸다. 여행사 광고가 나왔다.
“……네가 여기 왜 왔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네가 원하는 대답을 결코 해주지 않겠다.”
“……이거 흉터, 안 없어진대요?”
어쭈, 이거 말 돌리는 거 봐라. 답지 않게 긴장하는 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다 터졌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나는 발가락으로 카와니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랬더니 하지 말라고 성화다. 나는 소파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카와니시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여러 빛깔로 명멸하는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대꾸했다.
“아마 평생 안 없어지겠지?”
내 대답을 끝으로 카와니시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결국 카와니시도 내가 원하는 대답은 끝까지 숨길 생각인 모양이다. 안 그렇게 생겨서 카와니시는 고집이 나보다 더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나는 카와니시의 뒤통수를 따가울 만큼 째려보았다. 늘 혼자 바닥을 뒹굴던 자취방 안에 간만에 기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 * *
열여덟 살, 카와니시 타이치.
선배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그 사건은 내가 선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발생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구립 체육관에서 함께 배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은 체육관 근처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간단하게 햄버거로 때웠다. 날이 너무 더워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선배를 배려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선배에게 명확한 대답을 끝내 듣지 못했다. 선배는 그저 내게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나도 네가 좋지만, 그래도 이런 것에 신중하지 못하면 언젠가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그랬다. 선배는 이런 일엔 쓸데없이 신중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선배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별로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선배가 나를 남다르게 대한다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늘 같은 일상이었다. 둘만의 비밀 훈련도 계속되었다. 무더운 여름의 끝물, 더위에 지쳤던 탓인지 나는 아주 안일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갔다. 동급생들을 만나고, 수업을 듣고, 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으러 갔고 쉬는 시간엔 매점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다. 일과가 끝나면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부실로 향했다. 벌써 두 해를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시라부와 함께 부실에 들어갔을 때 그 위화감을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우선 선배들이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건가 싶었지만 굳게 닫힌 캐비닛 뚜껑을 보고 나는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시라부를 따라 태연하게 내 캐비닛을 열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닫고, 다시 부실을 나와 체육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는 내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세미 선배가 결석했다. 부 활동만 빠진 게 아니라 아예 학교를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좀 더 나중에 텐도 선배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부스럭, 손에 들린 검은색 비닐봉투가 울었다. 날이 더워 과일이 달다며 복숭아 하나를 더 얹어주던 과일 가게 아주머니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러다가, 다시 눈앞이 아득해진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바라보았다. 조바심이 나서 패이지도 않는 단단한 바닥을 발끝으로 쿵쿵 찧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문 옆에 가지런히 박힌 하얀 플라스틱 문패에는 선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긴장한 어깨를 들키지 않으려 두어 번 두드리고 나는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다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오른쪽 무릎을 자동차 바퀴가 밟고 지나갔단다. 무거운 발걸음을 직직 끌면서 나는 오만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어느새 다다른 곳은 선배의 앞이었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시야는 여전히 캄캄했다. 눈앞이 절벽인 것 같았다. 모든 걸 내리누르고 나는 선배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인사를 건네야 했다.
“어제 너 안 와서 좀 섭섭했다.”
“죄송해요.”
“그럴 것까지야.”
선배는 달라진 게 없었다. 늘 입고 있던 흰색 티셔츠 대신 헐렁한 병원 옷을 입고 있다는 것 빼고는 여전했다. 고작 이틀을 못 봤을 뿐인데 목 언저리에 무언가 단단한 게 걸렸다. 나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팔을 뻗어 들고 있던 과일봉투를 건넸다. 날이 더워 과일이 달다는 과일 가게 아주머니의 말을 인용해 덧붙였다. 선배는 맑게 웃었다. 반대로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내게서 과일봉투를 받아드는 손을 나는 가만히 말아 쥐었다. 선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타이치.”
“……네.”
“표정이 왜 그래?”
“제 얼굴이 뭐 어때서요.”
“아니, 딱 봐도 쓸데 하나 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얼굴이라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는 내 손을 꽉 붙잡아주었다. 나는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올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얇은 담요가 덮인 선배의 다리 위에 나는 푹 얼굴을 묻었다.
“많이 놀랐지.”
“…….”
“미안해.”
“선배가 왜 사과하는데요?”
담요에 말문이 막혀 웅얼거리는 내 머리를 선배는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선배도 더는 내게 아무 말도 않았다. 나는, 그러기 싫었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선배한테 호되게 혼날 것 같은 생각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때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옆에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타이치.”
세미 선배는 그런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사귈까?”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토록 간절했던 대답에 나는 벼랑 끝으로 낙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단정했음에도, 나는 그것에 깃든 심정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참담해졌다.
우리에게 가장 처절한 여름이 찾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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