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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 이선희 - 여우비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 헤이님(@ej_3267)의 인어AU 그림을 보고 쓴 글입니다.
아름다운 카셈 연성해주신 헤이님께 드립니다8///8
비늘무덤 上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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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도로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탁 트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과 만나는 곳의 바닷물은 몸서리치게 진했다. 파묻히듯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나는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사장에 파도가 느리게 부서지고 있다. 눈부신 풍경에 나는 잠깐 숨을 멈추고 그것들의 화음을 감상했다. 바다에 오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차량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마침 알맞은 뉴스거리가 나왔다. 48년 만에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멸종 어류로 분류된 향유고래 인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본래 깊은 심해에서만 서식하기로 알려진 데다, 이미 마지막 개체가 수명을 다했다는 학계의 의견이 있은 이후로는 아예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생물로 여겨졌던 터라 이번 발견으로 세간이 떠들썩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인어가 자주 출몰한다지만 어째선지 시야에 보이는 것은 무리를 지은 갈매기뿐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 나는 유모에게 인어에 대한 전설 같은 것을 종종 들으며 자랐다. 유모는 사십 대 중반의 여자로, 웃는 얼굴이 유난히 다정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랐다고 했다. 열세 살쯤이었나,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나섰다가 해초에 발목이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홀연히 나타난 인어가 그녀를 뭍으로 데려다놓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었다는 얘기를 그녀는 틈만 나면 떠들었다. 그 덕에 나는 그녀의 레퍼토리쯤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늘 같은 방식으로 인어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직 어렸던 내가 판단할 방법은 없지만, 그녀는 꽤 굳게 그것들을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어는 말예요, 비늘무덤에서 태어난대요. 사람이 죽으면 묻히는 데가 무덤인데 그런 것에서 태어난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죠? 사실 그 무덤이라는 이름도 사람이 지은 말이지만요. 아무튼, 거기서 태어난 어린 인어는 비늘무덤의 비늘을 먹고 자라서 성체가 된대요. 성체가 되기 전까지 인어에게 필요한 식사는 비늘로 끝인 셈이지요. 그렇게 성체가 되고 나면 비늘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대요, 마치 할 일을 다 마쳤다는 것처럼. 신기하지 않아요? 본 적 있냐고요? 그걸 어떻게 봐요. 비늘무덤은 아주 깊은 심해에 가라앉아있어서 볼 수가 없어요. 거기서 인어가 태어난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도련님.
그녀에게 인어의 이야기는 신화였다. 어릴 때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지만 그것도 수십 번을 반복해서 들으니 잡음 섞인 레코드판 같아졌다. 그 해 겨울 유모는 사직서를 내고 우리 집과 작별했다. 그녀는 바닷가로 갈 거라는 이야기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사라졌다. 그 때문에 더 이상 그녀로부터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상념에 잠겨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사이 삼십 분을 더 달린 차는 자갈이 깔린 주차장 위에 멈춰 섰다. 나는 창가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세우고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키는 작지만 잘 정돈된 예쁜 나무들 사이로 근사한 별장이 보였다. 차문이 열렸다. 자갈 위에 발을 딛고 서자마자 바닷가 특유의 물비린내가 훅 끼친다.
뒤로도 차량이 줄줄이 들어왔다. 척 보기엔 이 별장에서 대규모의 연회라도 있는가 싶지만, 단출하게 설명하자면 이 행렬은 카와니시 가家의 여름휴가를 위한 것이었다. 정계 곳곳에 뻗쳐있는 가문의 사람들끼리 사이를 돈독히 유지하자는 빛 좋은 핑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아버지가 그들을 편리하게 감시하기 위함이란 것을 이제는 나도 알게 되었다. 특정한 목적을 띤 이상 휴가가 즐거울 리 없었다. 나에게 이 의미 없는 휴가는 학원을 빠질 수 있는 구실이란 것 외엔 이로운 점이 하나도 없었다. 고작 일주일, 일상에서는 빠르게만 흐르던 시계의 초침은 이곳에 들어온 이후부터 거짓말처럼 직직 늘어졌다.
나는 꽤 명망 있는 재벌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위로는 형이 둘, 누나가 하나 있다. 덕분에 유치원도, 학교도 부잣집 자제들만 간다는 곳으로 입학했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 대한 가족들의 호의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말 한 마디가 근래에 와서야 뼈저리게 느껴졌다.
눈에 띄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아.
내 친엄마는 지금 이곳에 없다. 그녀는 나를 낳았지만 내가 유치원에 가던 해 가문에서 추방되었다. 본래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란 것이 그들이 자랑스럽게 둘러댄 핑계였다. 그녀는 스물 둘에 열여섯 살이 더 많은 아버지와 만났다. 엄마는 술집 창부였다. 이름에 걸맞게 겉은 번지르르해도 그녀의 속은 썩은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차마 아들마저 내치지는 못하고 아버지는 나를 거뒀다. 조건은 하나였다. 다시는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생모와 이별했다. 이젠 얼굴조차 기억에서 흐려졌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이 집 가솔들의 입에 종종 오르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듣고 싶은 이야기의 지저분한 전말을 모두 꿰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상처였는데, 바보처럼 살아야 내가 산다는 말이 요즘은 제법 이해가 갔다. 나는 매일같이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죽 그렇게 살아왔지만, 나는 더욱 나를 숨겼다.
머리는 좋은 편이었으나 성적은 일부러 낮게 받아갔다. 내게도 제법 따뜻하게 웃어주는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은 그런 내 성적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내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 내게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적당히만 하라는 협박으로 들렸다. 그러나 나는 아이답게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이 집에서 나는 적당히 공부도 할 줄 알고 온순하며, 거절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애였다. 그런 내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이 집안의 모두를 보며 나는 메마른 채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인 척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살았다. 그래,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를 닮아 아주 약은 사람이었다.
웃음을 가장한 어른들의 대화는 그리 재미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얘기를 엿듣기에도 부족한 화제였다. 나는 지루함을 못 견디고 몰래 별장을 나왔다. 이곳에 있을 때엔 누구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가 저물기 전에만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 그걸로 내가 할 일은 끝이었다.
나는 서둘러 바닷가로 나섰다. 잘게 깔린 자갈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파도의 흰 거품을 보자마자 꽉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아까 차에서 보았던 하얀 모래사장은 아니었지만 자갈이 깔린 위로 듬성듬성 솟아나온 바위들이 썩 맘에 들었다. 개운한 바다냄새,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물빛, 바닥에 깔린 자갈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파도소리가 온몸을 쥐고 흔든다. 입고 온 얇은 옷이 바다 특유의 짠 향기를 흠뻑 머금었다.
나는 자갈밭 위를 느긋하게 걸었다. 물을 머금은 돌들이 잘게 부딪치는 소리가 매끄러웠다. 기분도 좀 내고 싶어 뒷짐을 졌다. 바닷가 가장 가까이에 파도가 부서지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지평선을 바라보고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 인적이 없다. 이따금씩 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만 아득했다. 늘 소음 속에서 살았던 나는 슬쩍 눈을 감아보았다. 편안하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머언 바다에 커다란 고래를 보았다. 너무 멀어 검은 그것이 거대한 고래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장 바위 위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고래가 등으로 물을 뿜으며 헤엄을 쳤다. 반쯤 튀어 올랐다가 쏟아지듯 수면 아래로 잠수한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던 고래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에 나는 숨을 멈췄다. 고래의 움직임에 파도소리가 불규칙하게 어그러졌다. 나는 물에 젖어 바위가 미끄러운 것도 모르고 주위를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향연을 구경했다. 고래가 한 번 더 날아오른다. 이번엔 나를 바라본 정면이었다.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는 작은 눈으로, 그것은 나를 제 시선 속에 완벽하게 가둔 것만 같았다. 나는 멍하니 고래를 바라보다가, 밀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짐과 동시에 바닷물 아래로 추락했다.
입과 코로 쉴 새 없이 짠 바닷물이 들어왔다. 다리를 휘적거려도 닿는 것은 발에 채는 수초 조각들이 전부였다. 나는 질끈 감은 두 눈을 떴다. 헤엄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저 멀리 고래의 그림자가 보인다. 바닷물이 뿌옇게 흐려진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코앞까지 다가온 그림자가 나를 가리는 것은 끝내 보지 못했다.
* * *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환청인가 싶을 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잠든 새에 들은 목소리가 꿈속의 것이었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물에 갇힌 사람처럼 허우적대다가 반짝 눈을 떴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등이 배긴다 했더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자갈밭 위였다. 바로 곁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아직 바닷가인가. 나는 팔을 뻗어보았다. 하늘에 어슴푸레하게 붉은 빛이 깔렸다. 노을이 지는 시각인 모양이다. 새털구름이 무리지어 지나간다. 나는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야.”
기척 없이 들린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덩이뼈가 자갈에 부딪쳐 찌릿했다. 짧게 신음하고 나는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아무것도 없다. 물에 빠졌다가 건져져서 귀가 이상해진 걸까. 물을 많이 먹은 귀는 이명을 잘 듣는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괜찮아?”
그런 나를 비웃듯이 훨씬 명확한 발음이 나를 때렸다. 나는 조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물속에 발가벗은 어린애가 머리만 내밀고 있다. 그는 꼭 내 또래로 보였다. 그제야 나는 막힌 숨을 토하듯 뱉어냈다. 입가로 미지근한 바닷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에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다시 정면을 보았다. 내 시야에 밟힌 그 애는 또렷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당황한 티를 내자 그 애는 긴장하지 말라고 나를 달래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넌 누구야?”
배시시 웃는 얼굴에 대고 나는 물었다. 그랬더니 맑게 웃고 있던 그 애의 표정이 금세 난감해졌다. 나처럼 이곳에 몰래 내려와 물놀이를 하던 애인가? 이곳은 인적이 아주 드문 작은 바닷가였지만, 근처에 별장도 있는데 사람 사는 집 한 채도 없으랴 싶었다. 나는 팔을 짚고 일어섰다.
“왜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어?”
“물이 좋거든. 난 뭍으론 못 나가.”
그 애는 수면이 책상이라도 되는 양 그 위에 팔을 괴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애를 보았다. 바람이 휭하니 불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몸이 좀 으슬으슬했다.
“네가 구해준 거야?”
“응. 고래가 막 울더라고.”
“고래는 아까도 울었는데.”
“물속에서 들었어.”
“물속에서?”
나는 그렇게 되물으면서 그 애를 향해 자갈길을 걸었다. 자박자박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물러섰다. 잠깐 머뭇대던 나는 신발을 벗었다. 이미 홀딱 젖어 별 의미가 없는 행위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거 기분이라도 내보고 싶었다. 양말까지 벗어 구석에 가지런히 두고 나는 조금 더 걸었다. 규칙적으로 물러났다가 밀려오는 바닷물이 발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가 가까워지니 그 애는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저, 집에 안 가? 곧 해가 질 거야.”
“너는?”
“응?”
“너는 집이 어디야? 이 근처에 살아?”
그 애는 한참이나 대답을 못 했다. 나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슬쩍 자갈밭 위에 앉았다. 엉덩이가 조금 배겼다. 바닷물에 휩쓸린 모래들이 바지 안으로 마구 들어왔다. 일어서고 나면 자글자글한 자국이 허벅지에 남을 것이었다.
“대답,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는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닫았다. 어쨌든 나를 구해준 은인을 재촉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무엇보다 이곳에 온 이후로부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입에 풀칠을 하고 있던 내게, 그 애는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마다 사람들은 말 못할 사정쯤 하나씩 안고 산다. 내게는 내 가족이 그런 것이었다. 저 애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었다.
“네 옆으로 가도 돼?”
그 애가 내게 물었다. 물에 머리만 내밀고 서서 그 애는 나를 향해 청량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그를 마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그 애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내가 놀랄 타이밍을 놓친 그 짧은 찰나 물에 길이라도 난 듯 매끄러운 곡선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그 애는 불쑥 내 발 밑에서 고개를 들었다. 물에 푹 젖은 얼굴이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탄성을 질렀다.
그 애의 하반신에는 다리가 없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저물고 있는 노을을 받아 통통한 하반신의 비늘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눈부시다. 그게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자갈밭 위에 늘어지듯 놓여, 바닷물이 밀려오고 나갈 때마다 앞뒤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지느러미도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애 몸에 붙어있는 수천, 수만 개의 비늘이 제각기 다른 색으로 물든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애를 보았다. 자갈밭에 팔을 짚고 나를 보던 그 애는 눈이 아프도록 웃었다.
유모의 말대로 인어는 실재했다. 나는 그 날, 아주 아름다운 인어를 보았다.
* * *
인어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알았다. 사람과 닮았어도 구강이나 성대의 구조가 달라 인간의 언어를 하기는 힘들 것이라던 학계의 이론을 완벽하게 부순 것이다.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인어라는 생물과 세미는 많이 달랐다. 다른 인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세미는 사람을 좋아했다. 낚시를 하다가 바닷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다니는 것이 그의 취미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럼 너를 본 사람도 많겠다는 내 말에 세미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위험한 생물이라서, 그들이 기절했을 때 얼른 뭍으로 건져놓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뜬다고 했다. 멀리 바위 뒤에 숨어서 그가 멀쩡하게 걸어서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했다. 인어는 심해에서 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했다.
세미는 햇수로 치면 일곱 살이었다. 나와 외형은 다를 바 없었지만 인어들은 성장이 훨씬 빠르다고 했다. 십 년을 채우고 나면 그들은 성체가 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늙지 않고 평생을 바다에서 살게 된단다. 문득 인어가 인간을 닮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무심코 던진 내 질문에 세미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가 아닐까?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세미를 만난 이후로 매일 아침마다 바닷가를 찾았다. 해가 고꾸라져 하늘이 붉게 변할 때까지 딱딱한 자갈밭 위에서 그와 수다를 떨었다. 그는 잘 웃을 줄 알아서 내게도 웃는 법을 가르쳤다. 어색하고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는 내게 세미는 웃는 게 더 예쁘다고 다정하게 나를 쓰다듬었다. 엄마 같았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내게 해준 것은 이곳에 나를 버리고 떠난 것뿐인데,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도 엄마에게 이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미의 비늘은 아침에는 연한 분홍색이었다가, 해가 머리 꼭대기에 다다르면 금색으로 변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처음 봤을 때처럼 오색으로 빛나다가, 내가 돌아가고 난 이후 깊은 바다 속에선 아주 진한 파란색으로 바뀐다고 했다. 나는 미끄덩한 그것을 만져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장난을 치겠다고 세미가 지느러미를 퍼덕인 까닭이다. 바닷물에 섞인 수초 조각이 잔뜩 튀어 얼굴에 덕지덕지 묻었지만 나는 세미를 따라 웃었다. 그와 내가 나누는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잡담에 불과했지만, 나는 어른들의 재미없는 얘기를 듣던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
“그럼 카와니시는 엄청 부자야?”
“내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그게 그거 아냐?”
“달라. 내 위로는 형제가 셋이나 더 있거든.”
자갈밭 위에 나란히 앉아 파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 안에 갇힌 물은 곧장 하얗게 부서지다가 누가 당기기라도 하는 듯 매끄럽게 밀려났다. 나는 물속에서 자갈 하나를 들었다. 회색일색인 이곳에도 눈에 띄는 하얀 돌멩이는 있었다. 그것은 물을 함빡 머금고 반짝였다.
“인간은 복잡하네.”
“너는 가족이 있어?”
“아니. 인어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야.”
“외롭겠다.”
“심심하지는 않아. 바다 속은 아주 넓고 거대해서 정말 많은 것들이 있거든.”
그렇구나. 너의 세계는 좁지 않구나. 나는 손쉽게 납득했다.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내가 이토록 현실에 염증이 생긴 것은 전부 내 세상이 아주 작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미가 부러웠다. 저 넓은 바다를 온통 제 집처럼 넘나들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카와니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예쁜 산호바위가 있어. 가볼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잡히지 않는 파도를 쥐느라 분주한 내 손을 꼭 마주잡고,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예쁜 비늘과 같은 영롱한 눈빛으로.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겁도 났다. 예전에 책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인어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사라진다.
한참 만에 세미는 딱 내 몸만 한 나무토막 하나와 다 헤진 가죽 끈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었고, 세미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나를 태우고 갈 조각배라고 대답했다. 이게 무슨 배야. 나는 엉망으로 웃었고, 세미는 이해한다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조각배 위에 발을 올렸다.
십오 분 정도 바다 위를 흘렀다. 세미는 수면에 머리를 내놓고 나를 보며 헤엄쳤다. 며칠 그와 함께 있었던 탓에 그게 세미에게 썩 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구태여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미를 만나서 즐겁고, 그 애 역시도 나와 있는 시간이 행복한 것이다. 나는 미안한 얼굴을 하는 대신에 세미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에 정성껏 대답해주었다.
도착한 곳은 바다 위에 우뚝 솟아있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산호바위라고 하더니 수면 아래에 작은 풀들이 솟아있었다. 섬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작은 자리 위에 세미와 나는 나란히 앉아 지평선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면 방금 떠나온 바닷가가 보였다. 여전히 저곳엔 파도가 치고 있지만, 이곳은 놀라울 만큼 가지런했다.
“어때, 여기서 보니까 또 다르지?”
세미는 의기양양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자갈밭 위에 앉아 보던 지평선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빛의 바다는 정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의 장관이었다.
“카와니시, 놀라긴 아직 일러.”
“……뭐가 더 있단 말야?”
나는 그쯤에서 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보고 씩 웃던 세미가 폴짝 뛰어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세미가 사라진 바다 밑을 바라보았다. 깊이도 깊이지만,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색이 짙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다시 떠오르길 기다리다가, 물보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거대한 그림자에 질색을 하고 물러섰다. 마침 세미가 올라와 고개를 내민다. 동시에 조금 앞에서 아주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공중에 떠올랐던 고래가 폭포처럼 다시 바다 속으로 잠긴다. 바닷물이 잘게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그것을 막을 생각도 않고 고래가 사라진 바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물에 빠진 걸 내게 알려준 고래야.”
내가 앉은 바위에 머리를 기댄 채 세미가 말했다. 몸의 절반은 아직 바다 안에 잠겨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고래가 한 번 더 뛰어올랐다. 그 거대한 몸뚱이 위에 점처럼 박힌 가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주 같은 그 눈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다시 한 번 물이 잔뜩 튄다. 그 고래는 수면 위로 지느러미를 휘적휘적 흔들어주고 곧 사라졌다. 얼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 얼었고, 세미는 그런 나를 보고 쿡쿡 웃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래.”
“……진짜야?”
대답 대신 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저렇게 커다란 고래를 이 정도로 가까이서 보고, 심지어 옆에는 인어도 있어서 그 고래가 내게 건넨 말을 통역도 해줬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직접 겪고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꼭 동화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는 벅찬 기분으로 세미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아주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세미는 아이 같았다. 내가 웃는 것에 기뻐하고, 내가 행복해하는 것에 함께 웃어주곤 했다. 그 애는 슬픔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산 것 같이 반짝였다. 늘 우중충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였다. 세미는 아주 눈이 부셨다. 처음 봤을 때에도 그랬지만, 너무나 예쁘게 반짝여서 나조차도 희게 물들 것만 같았다.
인어는 책이나 학술자료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사람을 동경해서 사람의 말을 배웠고, 사람을 사랑해서 제가 아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존재들 같았다. 아니, 다른 인어들은 몰라도 세미는 그랬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그 아이는 내게 천사였다.
* * *
휴가 기간은 일주일뿐이었다. 세미와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는 별장으로 돌아와 가져온 달력에 빨간색으로 가위표시를 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날을 나는 헤아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날을 세다가, 덜컥 헤어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침 일찍 나가 세미를 만날 생각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밤에 잠이 안 왔다. 결국 나는 뜬 눈으로 그 무서운 밤을 꼴딱 새워버렸다.
동이 트자마자 나는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바닷가로 향했다. 걸음이 자꾸만 축축 처졌지만 걷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일 분 일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진다.
세미도 내 말을 듣고 퍽 아쉬운 표정을 했다. 그래도 웃으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는 도대체 그 애가 내게 고마울 일이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그 애도 나랑 같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바위 옆 자갈밭 위에 앉아 세미와 나는 마지막으로 대화를 했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세미는 내게 집이 어디 있느냐 물었고, 나는 대강 주소를 말해줬다. 세미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역시 모르겠다며 배시시 웃었다. 모르니까 찾아갈 수 없겠지. 세미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있잖아, 세미.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인어는 정말 무덤에서 태어나?”
문득 생긴 호기심에 던진 질문이었다. 세미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금방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덤은 사람이 죽으면 묻히는 곳 아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속으로 유모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픽 바람 빠지는 내 웃음소리를 듣고 세미는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인어에게도 수명이 있어. 인어가 죽으면 몸에서 비늘이 다 떨어져나가는데, 그게 한곳에 쌓여서 조그만 언덕이 생기긴 하거든. 그게 무덤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그럼 무덤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응, 인어가 죽으면 무덤이 생기는 거지.”
뭐야, 완전 반대였잖아. 나는 싱겁게 웃었다. 괜히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무덤에서 생명이 태어날 리 없다. 무덤은 죽은 것이 묻히는 곳이었다.
“세미.”
“응?”
“너는 얼마나 살 수 있어?”
나는 세미를 보지 않고 물었다. 그 애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가볍게 달싹였다. 글쎄. 한참 만에 겨우 열린 입술 사이로 말끝이 엉겨 흐려졌다. 나는 세미의 손을 꼭 쥐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운을 띄웠다.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 나랑 같이.”
내 목소리에 세미는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그래, 하고 우렁찬 대답이 뒤를 따랐다. 나는 슬픈 얼굴로 그를 따라 웃었다. 오늘 헤어지면, 아마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세미가 살아야 할 곳은 아주 넓은 바다라서, 육지에 발이 묶인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세미에게 말했다.
“다시 올게. 내가 꼭 다시 만나러 올게.”
나는 팔을 뻗어 세미를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옅은 비린내가 났다. 귀 뒤에 있는 아가미가 심장이 뛰듯 뻐끔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세미의 뒷목을 쓸었다. 하늘에는 듬성듬성 구름이 떠다녔다. 나는 하늘도 비치지 않는 진한 물을 바라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타이치, 이거.”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자갈밭을 딛고 일어섰고, 세미는 여전히 물 위에 사뿐히 앉아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내게 건넨 것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것은 동전 크기의 작은 비늘 한 조각이었다. 동글동글 예쁜 모양의 비늘이 마치 온 세상의 빛깔을 한껏 머금은 듯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애써 웃었다. 이별 선물이었다.
“예쁘네.”
억지로 올리고 있는 입 꼬리가 멋대로 씰룩였다. 근육이 마비라도 된 듯 광대뼈 근처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고마워.”
나는 등을 돌렸다. 두어 발자국 가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세미는 늘 거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열 발자국을 가서 울음이 터졌다. 헤어지기 싫다. 나를 나로 봐주는 소중한 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이 같은 고집이었다. 나는 더 이상 뒤를 돌지 못했다. 우는 꼴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었음이 그 까닭이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타고 온 차 위에 몸을 실었다. 별장을 빠져나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기까지 나는 한순간도 바닷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림자 한 점 보이지 않는 인적 없는 작은 바닷가, 나는 저곳에 있었다.
내 생에 가장 꿈같던 일주일, 나는 인어를 사랑했다.
* * *
고층 건물이 즐비한 시내 한복판은 자연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공기 정화에 좋다는 산세베리아나 행운목 따위를 사무실에 들여놓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리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답답하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부터 끌렀다. 셔츠의 첫 번째 단추도 풀어놓았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살기가 팍팍한 세상이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비서의 브리핑이 시작된다. 매일 같은 일과를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는 내게는 이제 나올 신물조차 없었다. 나는 완벽하게 모든 일에 적응하고 있었고, 따라서 어린 날 다녀갔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닷가 따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넥타이는 탁자 위에 집어던지고 나는 곧장 소파에 푹 기댔다. 비서의 목소리는 아나운서처럼 칼 같았지만 귀에서 죽죽 미끄러졌다. 피로에 지친 몸이 뭘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K호텔 레스토랑에 예약이 잡혀 있습니다. 따로 선물은 준비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얼마나 진한 사이라고 그런 걸 준비해.”
“사람 시켜서 간단한 선물 사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큰 형의 생일이었다. 그는 거창한 생일 파티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일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염증을 느꼈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 마주칠 일 없던 그들의 얼굴을 기념일을 핑계로 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구역질부터 났다. 나는 소파에 길게 기댄 채 천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하얀 형광등빛이 눈꺼풀을 비집고 헤엄쳤다. 이런 때면 나는 문득 내가 물속에 잠겨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 Y그룹 둘째 아가씨와 데이트가 있습니다.”
“……그건 또 뭐야?”
“저번에 선 보셨던 분이요. 이후에 한 번 더 보자고 약속까지 하셨다면서요.”
그랬던가. 절로 욕지거리가 났다. 내 출신 때문에 더 이상 뒤로 숨지 않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양지로 나오니 보이는 것은 죄다 정치뿐이다. 사교도, 연애도, 결혼도, 사업도 모두 정치의 일부였다. 나는 그 일상들에 지독하게 익숙해져있었지만 어딘가에는 결코 적응할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바다에 가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어른들의 시선 속에 갇혀 늘 공부만 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곧장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해야 했다. 가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갈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옳았다. 차츰 많은 게 사라졌다. 그 바닷가 자갈의 색깔도, 산호바위에 있던 산호들의 모양도, 심지어는 코앞에서 봤던 고래의 크기도 더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 인어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희미해진 내게 남은 것은 세미라는 이름 두 글자와, 그가 내게 건넸던 비늘 한 조각뿐이었다.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에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바깥에는 자동차며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가 와글와글했다. 나는 눈알을 굴리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호텔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퇴근 시간에 맞물린 저녁 식사 시간은 그녀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그런다고 한 번 내게 쏟아지기 시작한 아버지의 애정을 돌릴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나를 들쑤시려 했다. 사람을 시켜 늘 내 일정을 캐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감시하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했다. 요즘은 내가 묵묵부답이라 그마저도 관둔 모양이지만, 덕분에 한동안은 밤에 잠도 못 잤다. 내가 잠에 드는 때는 비가 내리는 새벽뿐이었다.
잠깐 앉아서 쉬다가 나는 도로 넥타이를 맸다. 요즘은 도대체 잠시 엉덩이 붙일 새도 없다. 그러나 불평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달리는 차 안에서 쪽잠이라도 잘 요량이었다.
* * *
카와니시 타이치, 스물일곱 살. 할아버지가 키워낸 그룹을 상속받은 현 회장의 막내아들로 다른 자녀들과 다르게 명석하고 똑똑하며 상황이나 분위기 파악에 예리한 눈을 가졌기로 유명하다. 적당히 미래를 볼 줄 알았고, 적당히 현재를 살 줄 알았다. 과묵하지만 필요한 말만으로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화술을 가졌으며, 그의 외모나 목소리에 홀린 사교계 여성들은 양손에 꼽기도 어려웠다. 전반적인 카와니시 타이치라는 사람에의 평가다. 나쁘지 않다. 다만 너무 바빠야 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룸으로 향했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에는 이미 아버지를 제외한 사람이 모두 자리해있었다. 시간으로는 아직 늦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곧장 내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상은 다 차려져 있었지만 음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리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늦게도 오고, 많이 건방져졌구나, 타이치.”
“일이 좀 바빠서요. 그리고 늦지는 않았습니다.”
이 집의 안주인은 가진 거라곤 돈 많은 남편밖에 없는 주제에 늘 나를 억누르려 든다. 오만한 태도로 자신이 나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려 들었다. 그런 때면 나는 언제나 웃으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은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그런 내가 아주 못마땅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내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주 한정적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아주 치열하게 살았다.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형제들을 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나를 숨기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아버지에게만 걸었던 도박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되찾아왔다. 순식간에 아버지의 관심과 열의를 내게 빼앗긴 큰 형은 그룹 소속 부품회사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고 작은 형은 해외로 떠났다. 그나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누나 정도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고 일본에 남았다.
덕분에 나는 눈치만 보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거대 그룹을 이끄는 회장의 후계자라는 자리도 만만치 않게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학창시절보다 더 치열해져야 했다. 나 스스로에게 혹독해야 했고, 개인의 감정보단 늘 그룹의 미래를 걱정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후회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쯤은 이미 미지근하게 식은 후였다. 적어도 내 길 위에 뒤로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왔다. 착석해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대리석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인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허기가 졌지만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들에게 나는 미각을 잃은 듯 했다. 차라리 혼자 먹는 게 나을 정도로 불편한 자리였다. 나는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테이블에 오가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타이치, 이번 계약 건도 잘 끝냈더구나.”
“예. 아버지 덕분에 큰 문제없이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전자회사 부사장에 너를 추천할까 하는데.”
“여보!”
대답할 새도 없었다. 부사장이라는 직함을 듣자마자 경악을 하고 그녀가 아버지에게 대꾸했다. 당장 대답할 필요가 없어져서 나는 조금 안도했다. 지금의 직급도 내겐 버거웠다. 사회적 지위는 훨씬 올라가겠지만, 직무 능력을 배우는 데에는 지금이 훨씬 더 적합했다.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큰 형의 표정도 꽤 가관이었다.
“졸업하고 일한 게 4년밖에 안 된 애에요. 부사장이라니, 타이치를 아끼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쳤다고요.”
“일한 지 4년밖에 안 된 녀석이 해외 거래 업체들과 계약을 무리 없이 척척 따내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아버지.”
나는 속으로 빙긋 웃었다. 가장 큰 권력을 쥔 자가 내 등 뒤에 버티고 서있다. 그의 총애를 받는 이상 나는 무너질 리 없었다. 두 사람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오로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런 높은 자리는 아직 제게 버겁습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나는 그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완벽한 승리였다. 능력도 좋은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니 어디 내보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후계자였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그는 내 진급에 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한 해프닝에 그쳤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더 진한 증오가 담겼다.
피로하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가장 처음 든 감상이었다. 쉬고 싶다. 근래에 내가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세면대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틀었다. 공중으로 빠져나와 매끄럽게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를 보다가 문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헤진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든 것은 색이 예쁜 작은 비늘 한 조각이었다.
세미가 내게 준 것이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일주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소중한 친구의 이별 선물이었다. 어릴 때에는 손바닥 반 만했던 게 지금은 손가락 두 마디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자랐지만, 비늘은 여전히 영롱했다. 그것은 색이 바래지 않는 기이한 보석이었다.
나는 화장실 벽에 기댔다. 타일의 시원한 촉감이 이마에 닿는다. 슬쩍 눈도 감았다.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꼭 파도와 닮았다. 불편한 자리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맥박이 점점 느려진다. 나에게 바다는 쉼이었다.
나에게 인어는, 세미는 안식이었다.
* * *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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