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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장보기' 키워드로 시린님이 주신 리퀘글입니다.
※ 성년의 경계 뒷이야기이지만 읽지 않으셔도 무방한.. 듯 합니다.
집을 옮기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귀찮고 힘겨운 일이었다. 그까짓 것에 뭐 본질까지 댈까 싶어도 인생에서 이사는 횟수를 줄일수록 유리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둘이 살기에는 집이 좁아 결국 이사를 선택해야 했다. 접근성이 좋고 둘이 살아도 안락할 만큼 넓어야 하며, 주변에 편의시설을 충분히 갖추었지만 가격이 싼 방은, 단점이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뿐이다. 이사하게 된 집은 5층 꼭대기 가장 구석에 있어 햇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사실 아주 사소한 불편이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옛날 생각하고 이 정도쯤이야, 하고 우습게 본 게 죄라면 죄였다.
세미는 방 안에 커다란 박스를 내려놓았다. 쿵, 제법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자 등이 뻐근하다. 세미는 주먹으로 콩콩 등을 두드렸다. 전에 살던 집보다는 훨씬 넓어진 마룻바닥에 부지런히 옮겨둔 짐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세미는 속으로 좌절했다. 오늘은 아마 대충 정리만 하고 잠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저 많은 양을 한꺼번에 정돈한다면 세미는 당장 내일이라도 몸져누울 터였다.
“선배, 잠깐만요.”
등 뒤로 카와니시가 들어왔다. 세미가 들고 온 것과 같은 크기의 박스를 두 개나 쌓아 안고 있었다. 세미는 냉큼 옆으로 비켜주었다. 끄응, 힘겨운 소리를 내며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내려놓았다. 조금 후련한 한숨을 내쉬고 나서 카와니시가 세미를 바라보고 묻는다.
“다 옮겼죠?”
흰색 티셔츠가 땀으로 범벅이다. 무거운 것을 쉴 새 없이 나르느라 핏줄이 툭 불거진 팔뚝이며 잔뜩 근육이 선 목 근처가 땀으로 흥건했다. 카와니시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만 끄덕인 세미는 한참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느새 조금 더 커버려서 이제는 완전히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세미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카와니시의 손바닥이 세미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라 머리통도 축축하다. 세미가 화들짝 놀랐다.
“정리하기 전에 씻어야겠네요. 선배 먼저 씻어요.”
다정하게 웃는 얼굴에 세미는 대답도 없이 팩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뻣뻣한 걸음걸이로 욕실로 단번에 들어간 세미는 문을 세게 닫았다. 맞은편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새빨갛다. 비단 이사를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세미는 스스로 생각했다.
“저 자식, 언제 저렇게 잘생겨진 건데?”
이건 반칙이야. 수도꼭지를 열고 세미가 투덜거렸다. 시원한 물줄기가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카와니시는 졸업하자마자 세미를 따라 도쿄로 올라왔다. 예전에도 며칠 묵었다 간 적이 있어 처음에는 굳이 이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여행과 동거는 완벽하게 달랐다. 세미의 짐에 더해 카와니시의 짐도 늘었다. 빨래를 널 곳이 없어 허공에 밧줄을 치고 그 위에 집게를 걸 정도였다. 혼자 살 때에는 그렇게 작다고 느낀 적 없던 세미의 집이 카와니시가 들어온 이후 가득 차다 못해 흘러 넘쳤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이사를 결정했다. 그게 하필이면 무더운 여름의 시작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카와니시를 미야기로 돌려보낸 이후로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딱 하루, 겨우 바닥에 깔린 냉기가 녹을 날씨가 되었을 때 카와니시로부터 문자가 왔다. 졸업식이 언제라는 단출한 글이었다. 세미는 마침 다른 일이 겹쳐 결국 카와니시의 졸업식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카와니시가 도쿄로 올라왔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초인종부터 누르는 것은 어째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미가 요 근래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그러나 카와니시가 그 짧은 사이에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말투도 세미를 대하는 태도도 그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그럼에도 카와니시는 예전보다 좀 더 부드러웠고, 또 단단했다.
땀에 젖은 웃통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세미는 샤워기를 들었다. 찬물이 콜콜 쏟아졌지만 딱히 보일러를 틀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필요 이상으로 몸이 달았다.
다시 피는 계절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넌 지치지도 않냐?”
세미의 질문에 카와니시는 옷을 개키던 손을 멈추고 침대를 바라보았다. 찬물을 대충 끼얹고 나오자마자 세미는 옷을 꿰어 입고 곧장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새로 사서 도톰한 이불 위에 딱 붙어서 세미는 카와니시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보고 카와니시가 픽 웃었다.
“빨리 하고 쉬는 게 낫죠. 선배도 빨리 와서 정리해요. 내가 선배 거까지 정리할 순 없잖아.”
“나는 나중에.”
세미는 눈을 비비작거렸다. 땀을 한바탕 흘리고 샤워까지 마쳤더니 몸이 노곤한 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침대는 예전에 세미가 쓰던 것을 버리고 새로 샀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이사한 집은 이전에 살던 곳보다 훨씬 넓었지만 카와니시는 굳이 넓은 공간 놔두고 세미와 함께 자고 싶다며 큰 침대를 살 것을 권유했다. 작은 침대 두 개를 사는 것보다 비용적인 면에서도 유용하다고 설득하는 카와니시의 말에 세미는 홀랑 넘어가버렸다. 그때는 좀 후회했었는데, 막상 드넓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보니 세상이 아름다웠다. 뽀송뽀송한 이불에 얼굴을 부비며 세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근육통 약 사다줄까요?”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거든. 좋아서 그런 거야, 좋아서.”
“제가요?”
“말이나 못하면.”
세미가 눈을 감고 꿍얼거렸다. 상자 하나에 가득 담겨있던 제 옷을 모두 정리한 카와니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집안을 넓게 둘러본다. 다른 손으로는 배를 만지작거리는 게, 한눈에 봐도 뭔가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스무 살 운동 청년은 늘 배가 고프다.
“세미세미.”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텐도 선배가 쓰던 호칭이잖아요.”
“아니, 걔가 쓰는 말을 왜 네가 써!”
“텐도 선배는 제 졸업식 오셨거든요.”
“…….”
“선배는 안 오고.”
말끝이 어째 뾰족하다. 세미는 벌떡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카와니시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뒤끝이 있다. 본인은 단지 기억력이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그 좋은 기억력을 꺼내 들먹여서 세미를 곤란하게 만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정이 있었다니까아……, 거 되게 속좁네.”
“알았어요. 나갈래요? 마트 가서 먹을 것 좀 사오게.”
세미는 꿈지럭거리며 겨우 침대를 벗어났다. 가는 김에 필요한 것들 몽땅 사오자며 세미는 메모장을 펼쳤다. 카와니시가 필요한 것을 줄줄 읊으면 세미가 받아 적었다. 이전 집에서 있던 생필품들 중 낡은 것들은 모두 버리고 와서 생각보다 구입해야 할 게 많았다. 사람이 둘로 늘었으니 양도 두 배여야 했다. 이것저것 적다보니 예산 초과다. 그래서 점심과 저녁은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때우기로 합의를 봤다.
마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것도 여러 층으로 구성된 꽤 커다란 마트였다. 이미 자취 경험이 있는 세미가 집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따진 것이 바로 지하철역과 대형 마트의 유무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사람이 가장 양질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소고기 구워먹을까.”
“돈 아끼자면서요.”
“생각해보니 오늘 월급날이야.”
세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미 월초를 지난 날이었으므로 아마 통장에 급여가 찍혔을 터다. 사실 카와니시의 말대로 도시락을 먹어도 상관없지만 막상 마트에 오니 맛있어 보이는 게 천지에 널렸다. 붉은 조명을 받아 핏빛을 내는 고기 한 덩이를 보니 저것을 팬에 노릇하게 구워, 양념을 조금 해먹으면 아주 먹음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는 허락이라도 구하듯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세미가 그대로인 반면 카와니시는 키가 약간 더 컸기 때문에 올려다보는 높이가 더 높아졌다. 그렇게 카트를 밀며 한참을 서로 바라보던 중에 카와니시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카와니시의 귀 끝이 다홍빛이다. 그가 시선에 약한 것은 동거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고기는 내가 살게. 오늘 힘들게 이사도 했는데 든든한 거 먹어야지.”
“짐은 거의 제가 옮긴 것 같은데.”
“너 다 먹어, 너.”
세미가 툴툴거렸다. 반듯한 옆얼굴을 보고 카와니시는 비죽 웃음을 흘렸다.
카와니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도 배구를 계속했다. 공부도 힘들 법한데 그는 공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체격은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카와니시는 그러나 세미에게 먼저 배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세미가 물어보면 그제야 몇 마디 거드는 정도다. 완치됐으나 무리하게 움직이면 쉽게 어긋나고 부러지는 게 사람 뼈라, 격렬한 운동을 일절 할 수 없는 세미를 배려한 것이었다. 필요한 행위라고 세미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속이 깊고 생각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사람에 대한 배려가 몸에 익어있었다.
그래서 이사를 할 때에도 세미보다 카와니시가 더 복잡했을 것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좁은 계단을 다섯 층이나 올라야 했으니 혹여 짐을 옮기다가 세미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카와니시는 이사하는 내내 세미 뒤를 바짝 붙어 다녔다. 무거운 것은 제가 먼저 들어 옮기고 세미에게는 옷 무더기가 든 박스 같은 것을 건넸다. 행동뿐인 사소함에 세미는 줄곧 행복했다. 그리고 카와니시는 여전히 입이 무거웠다.
“칫솔 세트 싼데, 사서 쟁여둘까?”
“그런 거 다 상술이에요. 필요할 때 하나씩 사서 쓰면 돼요.”
“그래도 엄청 싼데.”
“스무 개 언제 다 쓸 건데요?”
“썩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카트에 스무 개 들이 칫솔 세트가 담겼다. 카와니시는 혼자 중얼거렸지만 대놓고 세미에게 불만을 말하진 않았다. 둘이서 쓰면 더 빨리 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세미를 보고 결국에는 카와니시도 웃었다. 그는 근래에 웃는 법을 배웠는지 이제는 제법 사랑스럽게 웃을 줄 알았다.
계산대 앞에 섰다. 이것저것 주워가며 돌아다니다보니 카트에는 여러 물품들이 가득 쌓였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바코드를 지나가면 찍히는 가격들을 세미는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고기가 지나갔다. 금액이 훌쩍 뛰었다. 세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월급날인데 이 정도는 뭐 어떠랴 싶다. 카와니시 먹이는 데에 굳이 아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잔액이 부족하다는데요, 손님.”
봉투에 계산이 끝난 물건들을 주섬주섬 담는데 직원의 맑은 목소리가 귓등을 쳤다. 직원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분명히 세미가 생활비용으로 사용하는 카드다. 잠깐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던 세미가 별안간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등 뒤에 있던 카와니시가 웃었다. 웃다가 코를 먹는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아냐, 나 진짜 월급 들어왔을 텐데?”
“됐어요, 일단 내가 긁을게요.”
결국 계산은 카와니시가 했다. 세미는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카와니시 몫의 비닐봉투까지 들었다. 그마저도 카와니시의 정말 쓸데없는 고집을 못 이겨 그에게 뺏겨야 했지만 말이다.
“미안. 이따가 돈 줄게.”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져요.”
“친한 사이일수록 돈 문제는 깔끔해야 한다는 거 몰라?”
“됐고, 집에 가서 뽀뽀나 해줘요. 찐하게.”
“부끄러운 게 없어, 진짜.”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접어드니 카와니시가 슬쩍 세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세미의 얼굴이 확 달았다. 카와니시가 시선에 약하듯 세미는 불쑥 치고 들어오는 카와니시의 스킨십에 약했다. 손바닥에선 땀이 차고 온몸의 온도가 1도쯤 오른 것 같다고 세미는 생각했다. 카와니시가 힐끔 세미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이상한 생각이 뭔데.”
“선배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은 거 알아요?”
“내, 내가 언제.”
“손잡는 것도 그렇게 부끄러워요?”
“…….”
“볼 거 다 본 사이에 뭘 그렇게 내외를,”
“야!”
세미가 주먹을 치켜드니 카와니시가 홀랑 빠져나간다. 부끄러움에 세게 휘두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카와니시의 옷깃을 스쳐지나갔다. 세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한 세미의 머릿속에 언젠가 가졌던 카와니시와의 밤을 떠올렸다. 망했다 싶었다. 몇 걸음 앞서가던 카와니시가 고개를 푹 숙이고 미동도 않는 세미에게 총총 다가왔다. 허리를 구부려 세미와 눈을 맞추고, 세미의 생각을 꿰뚫고, 그리고 나서 카와니시는 훨씬 더 진지해졌다.
“에피타이저가 좋아요, 디저트가 좋아요?”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밥 먹기 전에 할래요, 먹고 나서 할래요?”
황급히 얼굴을 가리려는 세미의 팔을 붙들고 카와니시가 진득하게 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세미는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
^ㅡ^ 키워드가 함께 장보기였는데 정말 장만 보고 끝났네요..
성인이 되어서 같이 둥가둥가 사는 카셈이 보고싶었어요 근데 언제나 그렇듯...(말잇못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워드 주신 시린님도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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