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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세미데이(10/3) 기념... 짧은 글.

※ 해피엔딩은 아니고요 시라부가 혼자 삽질하는 내용입니다.

 

 

 

 

 

 

시라부가 교토의 신사에 온 것은 오늘로 꼭 스무 번째였다. 왜 하필이면 멀고 먼 교토여야 했느냐 물으면 사실 명확한 대답이랄 게 없었다. 사람들이 기원冀願하기 위해 방문하는 신사란 것은 일본에서 아주 흔한 것이다. 스무 살이 된 직후 독립한 시라부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도쿄에도 신사는 많았다. 도쿄와 교토는 신칸센으로 약 두 시간, 시라부가 애용하는 고속버스로는 아홉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왜 교토여야 했을까. 신사 입구에 우뚝 서있는 빨간 도리이鳥居를 바라보고 시라부는 그 질문에 묵음했다.

 

시라부가 도쿄에 살기 전, 그러니까 아직 미야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때에도 시라부는 종종 신사를 방문했다. 그러니까 시라부가 딱 열아홉 살이 되었던 해의 3월부터 시라부는 매달 교토를 오가고 있었던 셈이다. 고등학생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딱히 시라부를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용돈을 받아 신칸센을 타고 다녔다. 훨씬 빠르고 편한 방법이었으나, 사실 시라부는 교토까지 가는 아홉 시간의 버스 안을 더 좋아했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던 것은 3월의 중순으로 막 벚꽃이 흐드러지던 계절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 신사에. 교토를 방문한 것은 그보다 더 전의 일이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때가 몹시 더운 여름이었다는 것과, 지금과 다르게 시라부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때에는 지금 시라부가 매달 이곳을 방문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뿐이었다. 시라부는 얕게 숨을 뱉었다. 이제 궁금한 것은 하나다. 이곳에 더 이상 오지 않게 될 때는 도대체 언제쯤일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시라부는 이곳을 드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른 아침 신사는 한적했다. 시라부는 신사까지 이어지는 돌길을 걸었다. 저번 달에는 비가 내려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쾌청하다. 손에 무언가 들 것이 없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라부는 빈손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우거진 나무 그림자들을 밟으면 시원한 순풍이 몰려와 목덜미를 감쌌으니 그리 더운 날씨는 아니었음에도 시라부는 이곳에만 오면 온몸에 미지근한 땀을 흘렸다.

 

그는 그다지 영혼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무형의 것들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속으로 조롱했으나, 요즘 시라부는 그들의 심정을 슬금슬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의 생각과 두뇌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시라부가 생활고를 겪고 있다거나 학업이 어려워 좌절하고 있다는 둥의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민감하고, 이따금씩은 유령처럼 나타나 시라부의 밤잠을 훼방 놓기도 하는 아주 귀찮은 종류의 것이었다. 시라부는 그것이 없어졌으면 했다. 그래서 벌써 스무 달째 이 신사를 방문하고 있지만 역시나 효험은 없었다. 신도 사람의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포기할 법도 했지만 그럼에도 시라부가 끊임없이 이곳에 나타나는 것은 약간 미련 같은 지리멸렬한 감정 때문이었다.

 

댕그렁, 종이 울렸다. 시라부는 그 앞에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사락,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 끝을 건드리고 사라졌다. 시라부는 눈을 감고 자신을 비웃고 있을 이곳의 주인에게 소원을 빌었다. 이뤄지지 않을 기원이란 것을 시라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게서 그 사람을 지워주세요.

 

 

 

시라부?”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시라부는 눈을 번쩍 떴다. 두 해 동안 스무 번을 이곳에 다녀간 시라부의 정성이 갸륵했기 때문일까, 혹여 진짜 신이 내려온 것은 아닌지 시라부는 고개를 들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 나무들이 우는 소리, 제법 을씨년스러운 아침의 신사에 어우러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시라부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해를 건너 다시 만난 인연이었다. 시라부는 그대로 수면 아래를 향해 가라앉는 상어가 된다.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시라부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망각의 기원

시라부 켄지로 × 세미 에이타

w. Ryria

 

 

 

 

 

 

정오 즈음의 기온 거리는 사람으로 붐볐다. 교토는 꽤 유명한 관광지라 특히 주말이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라부는 원래 신사를 방문하고 나서 바로 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가곤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발이 묶였다. 교토라면 수두룩하게 와봤지만 그는 신사로 가는 길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세미에겐 지도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여행을 온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치곤 감상이 시시했다. 시라부는 담담한 표정으로 세미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지나쳐가려는 시라부를 붙잡은 것은 세미였다. 이곳엔 어쩐 일이야? 본인이 이 신사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미는 물었다. 목소리가 두근두근하다. 여전히 세미는 환했다. 환하고 맑았는데 너무 맑아서 속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시라부는 미간을 구기고 세미를 쳐냈다. 그랬더니 그는 뾰족한 눈을 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여전히 귀여운 맛이 없어.

 

세미는 오랜만에 타지에서 만난 옛 후배를 보고 꽤 들뜬 것 같았다. 그는 굳은 표정의 시라부를 끌고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신사를 나왔다. 이번엔 시라부는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뭐가 먹고 싶으냐는 질문에 배가 고프지 않다고,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는 충고 같은 말에 남 일에 여전히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뚱하게 대답했다. 세미는 그 말에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남이라니, 이런 곳에서 후배를 만나는 게 쉬운 우연이야? 시라부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세미가 이끈 식당은 평범한 가정식을 팔고 있는 작은 가게로 다른 유명한 식당에 비해 사람이 적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세미는 그대로 주문을 마쳤다. 시라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세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라부를 잘 알고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잘 먹고 먹지 못하는지, 어디에 알레르기가 있는지조차 전부 꿰고 있었다. 비단 시라부에 한한 친절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다정한 세미 에이타에게는 그게 그저 습관이었을 뿐이다.

 

 

어디 살아?”

도쿄요.”

거기서 여기까지 왔어? ?”

……그냥.”

아무튼 만나니까 반갑네. 언제 돌아가?”

오늘요. 전 하나도 안 반가워요.”

 

 

그건 진짜였다. 그러나 세미는 그저 장난인줄로만 안다. 시라부는 도자기 그릇에 담긴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휘적휘적했다. 다른 일이 있다고 거짓말이라도 둘러댈 걸 그랬다. 그러나 시라부는 시간을 되감더라도 똑같은 결과에 놓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라부가 세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음에 한해서였다. 시라부는 그것 말고 세미를 속이는 데에 영 서툴렀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

학교 다녀요.”

여행 차 온 거? 아직 방학도 아닌데.”

소원 빌러 왔어요.”

, 소원? 귀여운 구석이 있네, 켄지로.”

이름 부르지 마세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방금 말 취소. 여전히 안 귀여워.”

 

 

선배는, 뭐하고, 지내요? 입술에서 띄엄띄엄 뱉고 싶은 말이 맴돌았다. 그것을 한참 입안에서 동글동글 굴리다가 시라부는 결국 삼켜냈다. 커다랗고 벅찬 무언가가 목구멍 너머를 타고 내려간다. 식도로 내려갈 것이 기도로 흘러갔는지 호흡이 갑갑했다. 시라부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말이 없던 세미는 그것을 보고 눈에 걱정을 주렁주렁 단다.

 

 

감기?”

아니요.”

 

 

식사가 나왔다. 시라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먹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마땅한 준비도 없이 만난 선배의 존재는 시라부가 들고 버텨내기엔 버거운 것이었다. 너무 거대하다. 온 세상의 바다를 모아 구를 만들면 혹시 그와 같은 무게가 되지 않을까 시라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젓가락으로 밥을 떴다. 무언가 먹을 것이 들어갈 여유도 없었지만 시라부는 억지로 먹었다. 먹어도 체할 것이고 먹지 않아도 체할 것이다. 그렇다면 먹고 후회하는 게 나았다.

 

세미는 당분간 말이 없었다. 대신 서둘러 그릇을 비우는 시라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노골적일 만큼 명확해서 시라부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숨길 줄을 모른다. 눈치도 없는 데다 쓸데없이 오지랖은 넓어서 사람을 곧잘 신경 쓰이게 했다. , 시라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것에 세미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 없어?”

그만 보고 밥이나 먹어요.”

미안.”

사과하란 말이 아니고.”

, 알아.”

 

 

세미가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웃었다. 시라부는 눈을 질끈 감고 밭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세미가 젓가락을 든다. 시라부는 그 정수리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래서, 무슨 소원 빌었는데?”

그걸 내가 왜 알려줘요?”

나도 소원 빌러 왔는데.”

 

 

궁금하지 않다. 시라부는 어느새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적막이 내려앉는다. 매일 같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치고는 세미와 할 만한 대화가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세미는 어느 정도 시라부의 심중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저 밥을 먹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오사카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밥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기온 거리를 걷다가 세미는 묻지도 않은 말을 불쑥 꺼냈다. 시라부는 그가 떠들고 있는 게 둘 사이를 에운 고요를 물리치고 싶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세미는 원체 시끄러운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에도 텐도와 함께 이리저리 날아다녔던 이력이 있었다.

 

 

그 친구는 어디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 삼일 째거든. 개인 여행이야. 나는 교토, 걔는 고베.”

친한 사람인가 봐요.”

너는 혼자 왔어?”

 

 

세미가 되물었다. 시라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세미는 신나서 웃었다. 그럼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들뜬 목소리로 묻는 말에 시라부는 세미를 팩 쏘아보았다. 저는 도쿄로 돌아갈 거예요. 시라부가 못을 박았다. 나도 오늘 오사카로 돌아갈 거야. 세미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여 시라부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같이 있어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조차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한낱 인간일 뿐인 시라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라부는 세미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과거형으로 되짚을 수 있는 것엔 시라부가 신사를 다니게 된 것이 한몫 했다. 이제 몸속을 선명하게 뛰고 있는 혈류보단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찌꺼기일 감정이었다. 묵묵히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이골이 난 시라부에게 그런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세미가 졸업하고 나서는 사실 후련했다. 더 이상 얼굴을 보자마자 속에서 멀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그 외면에 홀로 상처 받은 얼굴을 하는 세미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시라부는 믿었다. 시라부가 신사를 다니게 된 것은 세미가 졸업을 한 이후, 눈에서 멀어졌지만 마음에선 더 커져만 가던 세미의 존재를 눈치 채고 나서부터였다.

 

시라부는 세미를 있는 힘껏 싫어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세미에게 구차한 제 심정을 들킬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미는 주전도 빼앗아간 건방진 후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좋아함이 자신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쯤 시라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멍청한 마음은 곧잘 설렜다. 시라부를 고문하고 있는 것은 세미가 아니라 시라부 자신이었다. 표현하지도 못할 맘을 어쩌다 먹어서, 하필이면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했다. 아예 기대를 말자고 끊임없이 차오르는 마음을 죽인 지 삼 년째, 생각도 못한 타지에서 세미를 만난 시라부는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티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세미는 눈치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도 결코 시라부를 알지 못할 것이었다.

 

 

다른 애들이랑은 연락해?”

가끔요.”

교토 오니까 옛날 생각난다.”

 

 

세미가 꺼낸 말에 시라부는 걸음을 멈췄다. 오후의 기온 거리는 사람이 득시글했다. 세미는 우뚝 멈춰 서서 시라부를 돌아본다. 시라부는 시선을 둘 곳을 잃었다. 정처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무리를 따르다가 겨우 과자 가게 간판에서 눈동자가 멈췄다. 세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다가온다. 시라부는 아찔한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 안 나? 교토 왔던 거.”

……누굴 바보로 알아요? 기억하고 있어요.”

뭐야, 근데 왜 그래?”

 

 

교토는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에서 여름방학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학여행을 온 장소다. 졸업을 앞둔 세미와 학교 밖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쾌쾌한 먼지에 쌓여 묻힌 곳이었다. 시라부가 가장 오랫동안 세미를 담았던 곳이기도 했다. 시라부는 그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미가 어떤 옷을 입었고, 무슨 말을 했고, 누구와 붙어 다녔고,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외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교토의 거리, 그리고 이따금씩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던 세미는 시라부가 봤던 중에 가장 빛났던 풍경이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선배.”

?”

쿠키 먹을래요?”

 

 

시라부의 시선이 멈춘 과자 가게 간판은 그러니까, 그 옛날 놀러왔던 교토에서 함께 방문했던 낡은 가게의 것이었다. 시라부는 그제야 시선을 확 끌어당긴 그 무엇의 정체를 파악했다. 세미의 등을 밀어 시라부는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은 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가득한, 부드럽고 고소한 쿠키를 파는 전통 과자 가게였다.

 

시라부가 플라스틱 통을 세미에게 건넸다. 예쁜 녹색 가루가 가득 묻은 동전만 한 크기의 쿠키가 담겨있었다. 기념품? 웃으며 묻는 말에 시라부는 대뜸 미간을 구기고 말했다. 사줘요. 세미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잘난 후배님 위해 이 정도쯤이야, 하고 세미가 쉽게도 말한다. 시라부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세미가 쿠키를 카운터에 들고 가 계산했다. 가지고 와서 도로 시라부에게 건넨다. , 선물. 매끄럽게 짓는 웃음은 여전히 자연스럽다. 신사에 불던 다정한 바람을 진흙으로 빚어내면 꼭 세미의 얼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한 반응에도 끝까지 웃어주던 선배는 여전히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다.

 

 

……고맙다곤 안 할 거예요.”

기대도 안 했다, 얌마.”

내가 받아야 할 걸 받은 것뿐이에요.”

?”

선배.”

 

 

세미 에이타는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 년이나 지나 흐려진 추억 속 장소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세미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미는 시라부가 같은 가게에서 똑같은 과자를 사준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알고 있기에 시라부는 세미를 책망할 마음이 없었다. 스스로가 빚어낸 증오의 화살은 결국 세미가 아니라 시라부 자신을 향하고 있다. 원망해야 할 것은 이 마음의 탑을 세운 과거의 시라부였다.

 

 

저는 이만 갈게요.”

 

 

시라부가 세미를 바라보고 말했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시라부를 마주보던 세미는 금세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시라부의 뒤를 조급하게 따라붙는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시라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세미가 붙잡는다. 등을 돌아 다시 마주친 눈빛에는 무언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선배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런 표정 그만둬주실래요.”

무슨 일 있어?”

즐거운 여행하세요.”

켄지로.”

…….”

……나중에 또 보자.”

 

 

시라부는 세미의 손을 걷어냈다. 그리고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이번에 쫓아오는 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만지작거리던 플라스틱 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다 차마 그러진 못했다. 아마도 시라부의 등을 바라보며,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로 멍하니 거리 위에 서있을 세미를 상상했다. 괜히 만났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잊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신이란 작자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끄집어낸 게 틀림없었다. 세미를 만나게 해달라고 빈 적은 없었다. 세미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지 않았다.

 

세미와 헤어지고 시라부는 곧장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시간의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렸다. 초조하다. 그러나 아홉 시간의 여정이 지나면 시라부는 이곳의 기억을 모조리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서둘러 잠에 들었다. 오늘의 영향인지 꿈속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의 세미를 만났다.

 

눈을 떴을 때 시라부는 석양을 보았다. 붉은 빛에 노릇하게 익고 있는 구름에 대고 시라부는 무거운 독백을 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기원은 이루어졌으나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는 것은 일말의 후회뿐이다. 그것마저 견디기가 힘들어 전보다 더 지독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시라부는 미련한 짓을 거듭했다.

 

세미 에이타를 잊게 해주세요.

 

망각을 향한 기원은 설 자리를 잃었다.

 

 

 

 

 

*

 

 

제가 시라세미를 쓸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놀라움)

소재 던져주신 치아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해요 아카님.

스아실 세미 편도 구상하긴 했는데 쓸 일은 없을 것 같구... 셈이도 삽질하고 있을 것 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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