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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세미른 교류회에 발간된 글입니다.
*가벼운 캠퍼스 로맨스.
눈앞이 한 바퀴 핑글 돌았다. 나는 그래도 꽤 오래 살아남았다. 얼굴이 빨갛고 하얗고, 심지어는 새파랗게 질려서 테이블에 앉아있는 애들도 상당수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아 돈이 남아도는 우리 교수님은 한 학기에 한 번씩 담당 학생들을 모아 지도교수 간담회를 열었는데, 말이 간담회지 30분가량 학생들과 대강 보고용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곧바로 고기에 술을 얹으러 학교를 나왔다. 교수님은 학생들과 술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했을 뿐더러 술독에 빠져죽을 주당이었기 때문에 간담회의 마지막 풍경은 늘 이랬다.
아직 석사 1년차인 내가 교수님을 따라 이곳에 앉아있는 것은 병아리 같은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위해서였다. 근데 학생들의 안전 귀가는 얼어 죽을 당장 나부터 기절할 것 같다. 아직도 신이 나서 빛 노란 맥주를 들이켜는 교수님을 말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 일단 나라도 일어나서 지독한 알코올에 넋 나간 학생들을 집에 보내야 할 것 같아 의자를 밀고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나는 술을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팔꿈치가 휙 꺾였다. 꼴사납게 테이블 위에 뻗으려던 걸 누가 와락 붙든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더니 낯선 얼굴이 멀뚱히 서있다.
“…….”
“괜찮아요?”
나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었다. 술에 취해서 머리가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읏차, 하고 일어서서는 테이블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이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테이블 위에 늘어진 학생들을 깨우러 다녔다. 교수님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진 애들부터 하나씩 집에 보낸 뒤에 나는 슬금슬금 교수님께 다가가 이제 그만 자리를 파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아직 다들 팔팔한데 왜 그러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고, 강제로 교수님 옆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나 술 약한 거 아시면서. 포크로 소시지를 주워 입에 넣으면서 나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반도체 수업, 조교님 맞죠?”
맞은편에 아까 본 학생이 앉았다. 간담회에 참석한 학생치고 아주 멀쩡해 보인다. 반반한 얼굴로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퍽 반가운 척을 했다.
“그 수업 들어요?”
“저 기억 못하시나 봐요.”
그 수업 정원이 구십 명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나는 그냥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사람 얼굴 잘 기억을 못해서.”
나는 힐끔 교수님 쪽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하나에 죽 둘러앉은 학생들은 그나마 멀쩡해 보여 다행이었다. 지금 당장 내가 죽겠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는 질렸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쓰러져 자고 싶은데 언제든지 자리를 뜰 수 있는 학생들과 달리 교수님께 월급을 받는 나는 그럴 수 없다. 갑자기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우리 교수님이 물론 인기가 많아서 대형 강의도 곧잘 열고 그러긴 했는데, 그래도 전공 수업 티오를 구십 명으로 잡을 줄은 세상에 몰랐다. 거기다 조교도 나 하나뿐이라, 모든 과제와 프로젝트와 시험 채점은 나 혼자 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울컥해서 눈물이 다 찔끔 났다. 나는 훌쩍 코를 먹었다.
“울어요?”
“오늘 집에 몇 시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서글퍼서요.”
내 앞에 앉아있던 애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는 다시 배시시 웃으면서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홀짝 입 안에 누런 맥주를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코를 박는 내 정수리 위로 안쓰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휙 고개를 들었다. 그 애는 제법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 잔 받을래요?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조교님이…….”
“에이, 나는 괜찮아요. 필름 끊겨도 부를 놈 있어서!”
나는 곧장 머릿속에 시라부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퇴근해서 씻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교수님은 내가 이런 일로 기절하면 곧장 시라부를 부르곤 했다. 술 못 먹는 인간 그만 좀 먹이라고 시라부는 매번 구시렁거리지만 그래도 그 애는 못 이기는 척 나와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고마운 후배였다. 오늘이라고 교수님 부탁을 거절할까―내 부탁도 아니고 교수님 부탁인데!―, 그런 얕은 믿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오기도 용기도 생겼다.
새 맥주를 땄다. 이름 모를 학생에게 한 잔 따라주고 내 잔도 채웠다. 짠, 신나게 건배도 하고 벌컥벌컥 씁쓸한 맥주를 들이켜고,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다가 나는 얼마 가지 못해 필름이 끊겼다. 그 애는 분명히 내게 이름을 말해준 것 같았는데, 테이블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사이 까먹었다. 시야가 새까맣게 암전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Allegro, Moderato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별 요상한 꿈을 다 꿨다.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꿈에서는 다 그렇더라.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직직 끌리고 아무리 달려도 속도가 안 나서 꿈속의 나는 아주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에 날개가 돋아서 펄럭 허공으로 뛰어올랐는데, 나는 것도 새처럼 사뿐하게 되는 게 아니라 진짜 온 힘을 다해 날개를 퍼덕여야 했다. 모양은 좀 빠졌지만 어떻게든 추적에서 벗어난 나는 허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쫓고 있던 정체불명의 무리는 아주 놀랍고 황당하게도 내가 쓰고 있는 논문과 산더미 같이 쌓인 학생들의 과제 및 시험지들이었다. 깨고 나서 생각한다면 아주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꿈은 꿈이었으므로 나는 아주 진지하게 자유를 탐하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디에 걸려서 강으로 떨어졌는데, 그 강이 온통 술이었다. 술독이 아니라 술이 흐르는 강에 빠져 죽은 거다, 꿈속의 나는.
목을 꽉 조이는 갑갑함에 확 눈을 떴다. 후덥지근해서 이마에 촘촘하게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 누워 낯선 천장을 물끄러미 십 초 정도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이곳이 내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리고 다시 십 초 정도가 흐르고 나서 모로 고쳐 누웠다. 머리도 아프고 잠은 쏟아지니 조금 더 잘 요량이었다.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단단한 품을 파고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연한 살 냄새가 부유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감고 다시 십 초 후,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얀 목덜미였다.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어깨가 숨이 차고 빠질 때마다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멎은 것처럼 흐름이 느렸다. 내 이마로 떨어지는 따뜻한 숨에 나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병아리?”
시선을 조금 들면 반듯한 얼굴 위로 금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나는 그가 어제 간담회에서 만났던 반도체 수업의 이름 모를 수강생임을 깨달았다. 찬찬히 어제의 일을 되짚어본다. 술자리에서 결국 인사불성이 된 나는 안타깝게도 필름이 끊긴 이후의 기억이 아예 없었다. 아, 망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것뿐이다. 간담회 도와주러 온 석사 조교가 술에 떡이 되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담당 수업 수강생의 집으로 끌려왔다니, 시라부가 들으면 십 년은 놀려먹을 일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이불을 벗어났다. 내 어깨를 단단하게 말고 있는 팔뚝을 조심스레 벗겨내는데 잠귀가 예민한지 병아리가 반짝 눈을 떴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다. 몽롱한 표정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던 병아리는 팔을 뻗어 도로 나를 베개처럼 끌어안았다.
“좀 더 자요…….”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이불의 포근한 소리에 홀려 나도 모르게 그 품에서 다시 잠에 빠질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병아리의 맨 가슴을 밀었다. 꾹 감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던 투명한 눈동자가 도로 나를 본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병아리를 마주보았다.
“……저기, 학생.”
“카와니시요.”
“그래, 카와니시 군. 내가 왜 여기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더니 병아리, 아니 카와니시가 되레 두 눈에 당황스러움을 덕지덕지 묻히고서 되묻는다. 기억 안 나요? 그 질문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누가 일부러 먹칠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싹둑 잘려버린 기억의 단편 속에 어젯밤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기,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나는 잔뜩 얼어있었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나는 내 주사를 모른다. 기절한 나를 데려가는 것은 언제나 시라부의 몫이었고, 시라부는 내가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말에 언제나 경멸스러운 눈을 하고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가지 못하는 술자리에서는 절대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마셔서는 안 될 거라고 경고까지 해줬다. 나는 모르는 내 술버릇 중에 아주 고약한 놈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술버릇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조교를 담당하고 있는 수업의 수강생에게─그게 대체 무슨 자랑이라고─선보인 것이다.
카와니시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한 이불을 덮고서 마주보고 있자니 조금 민망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나를 덮은 이불을 걷어냈다. 상체를 일으키고 나서야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쥐구멍이 있다면 지금 당장 들어가 숨고 싶었다.
“실수…….”
카와니시가 중얼거렸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만 푹 숙였다. 덩달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카와니시가 맥이 풀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실수라는 거네요.”
“……그런 거?”
“현관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저한테 키스하신 거요.”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나란히 침대 위에 앉아서 시시껄렁하게 나누는 대화 치고는 수위를 너무 넘어서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은 한참 뒤에 따라붙었다. 내 얼굴은 금세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는 이 순간 지구가 확 폭발해버려서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으면 하고 빌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짙은 한숨이 샜다. 딱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카와니시에게 되물었다.
“내가……, 뭘 했다고?”
“들고 오는 도중에도 계속 뽀뽀하려고 덤비더니 집에 오자마자 나한테 했다고요, 입술 박치기.”
세미 에이타, 이십육 년을 살면서 이토록 죽고 싶었던 적이 또 있던가. 시라부가 그렇게나 경고했던, 나도 모르는 내 주사가 아무나 붙잡고 하는 스킨십, 뭐 그런 것이었던가.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비죽 웃음이 다 났다. 멍청하게 앉아있는 나를 넘어서 카와니시는 방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찬장을 뒤적이는 행동이 아주 태연자약하다.
“라면 먹을래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이미 포화로 가득한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카와니시는 나보다 더 잘 마시는 것 같았고,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마셨을 테니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다짜고짜 저한테 뽀뽀를 감행했다던 나를 당장 내쫓지 않고 자기 침대 위에 뉘여 재웠다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지난밤의 일은 너무나 명확해진다. 나는 당장에 비명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악!”
“……깜짝이야.”
나는 그대로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라면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던 카와니시는 놀라 자리에서 굳었다. 나는 우는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망했어, 시라부 이 자식은 어디서 뭐하고 안 나타난 거야.’따위의 말을 속사포로 내뱉으면서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카와니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난리에요? 내가 조교님 덮치기라도 했을까봐?”
“……아니야?”
“그 표정 뭡니까. 그러길 바랐던 것 같은 얼굴인데요.”
“근데 왜 벗고 있어……요, 카와니시 군.”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원래 안 입고 자요.”
카와니시가 그렇게 말하면서 냄비에 물을 올렸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허망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긴 너무나 깨끗하고 평화로운 등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다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내가 저 병아리한테 무슨 소릴 한 거야. 기분이 하도 오락가락해서 숙취를 느낄 새도 없었다. 내가 정신 사나웠는지 아니면 정말 억울해서 변명이라도 하려 했던 것인지 카와니시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닥에 이불 깔아뒀었는데 자꾸 침대로 올라와 엉겨 붙어서 그냥 치웠어요. 같이 자고 있던 건 그래서고.”
“……미안해요.”
“아무리 그래도 술에 떡 된 사람 어떻게 해보려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닙니다.”
“정─말 미안해요!”
“키스는 좀 설렜지만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가 이제는 귀 끝까지 붉게 물들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가고 있었다.
“조교님, 키스 잘하시던데요.”
“……그만 놀려요.”
“기억 안 난다니까 괜히 아쉽네.”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덧붙이려다가 나는 그러길 포기했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내 옷을 주섬주섬 챙겨서 한쪽 구석에 몰아넣은 뒤에야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이 토요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 비명을 질렀을 것이고, 우는 얼굴로 카와니시가 끓여준 라면은 입에 대지도 못한 채 연구실로 출근해야 했을 것이다. 벌써 정오가 지났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와서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자기는 푹 잘 잔 모양이다.
“저기…….”
“저기 아니고 카와니시.”
“그런 건 좀 넘기면 안 돼요?”
“존댓말 안 쓰셔도 된다니까요.”
머리도 노란 병아리, 카와니시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에는 아주 선수였다. 말다툼할 기력도 없어서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불 앞에 서있는 카와니시의 등을 뾰족하게 노려보았다. 한참 말을 고르다 겨우 입을 떼려는데 카와니시가 선수를 친다. 상 좀 펴줄래요? 냉장고 옆에 있어요. 나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서 자리를 폈다. 작은 일인용 탁자다. 덩치 큰 남자 둘이 쓰긴 너무 앙증맞은 사이즈였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분 안 나빴어요?”
“뭐가요.”
“그러니까 그……, 갑자기 키스한 건 미안해요.”
“내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요?”
“…….”
“……농담.”
싸늘하게 굳어가는 내 표정을 관찰하던 카와니시가 심심한 눈으로 사과를 한다. 나는 어쩐지 이쯤에서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멀쩡하게 생겨서는 보통이 아니다. 시라부가 욕지거리를 퍼붓는 내 눈치와 촉도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나는 눈을 모로 뜨고 물었다. 내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이상 저 병아리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믿자니 또 신뢰가 안 간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키스 따위를 했다는 것도 그리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키스 말인데요. 진짜로 내가 그런 거 맞아요? 그것도 거짓말인 거 아니에요?”
“장난 한 번 쳤다고 진지함이 하늘을 뚫네. 나 거짓말 안 해요, 선배.”
물을수록 더 모르겠다. 이제 슬슬 내 머리가 헤까닥 돌아버린 건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고민 그만하라고 마침 내 앞에 보글보글 맛있게 끓은 라면 냄비가 놓였다. 계란도 풀고 송송 썬 파까지 올린 게 꽤 본격적이다. 오랜 시간 공복이었던 데다가 어제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들이부었으니 맛있는 것을 보자마자 뱃속에서 위장이 울었다. 카와니시가 내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영 찜찜한 표정으로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진짜 장난친 거예요. 어제 나한테 키스한 건 정말이고.”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대화의 토막들로도 그가 나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건 알겠는데, 기분 나빴느냐는 질문은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갔으면서 끝까지 나와의 키스는 진짜였다고 말하는 저 반반한 얼굴의 의중을 모르겠다 이거다. 나는 슬슬 기분이 꿀꿀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한 술 떠서 호로록 먹는 저 얄미운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나는 배고픔을 못 이겨 결국 라면에 손을 댔다.
“이, 일단은 미안해요. 신세 좀 졌네요.”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그가 라면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투명한 동공이 오롯이 나를 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긴장되는 순간,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말 놓으라니까요.”
“……어제 처음 봤는데.”
“불편해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그럼 그건 천천히 하는 걸로 하고, 다른 부탁 할게요.”
꼭 부탁을 해야 하나. 미안하면 미안한 걸로 끝내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무튼 둘 다 좋은 일 아닌가. 나는 급격하게 눈알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 무슨 말로 나를 당황시킬지 몰라 나는 앞 접시에 덜어둔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기만 했다.
과연, 내 기대 이상으로 그는 미친 사람이었다.
“조교님 저랑 연애할래요?”
“컥.”
사레가 들렸다. 뭘 먹은 것도 아니고 입에서 우물대던 라면 국물 약간이 그대로 기도를 통과할 뻔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카와니시는 그럼에도 낯빛 하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봤던 모습들은 다 장난이라는 듯 얼굴에 진지함이 뚝뚝 묻어날 정도였다. 나는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내게 카와니시는 쐐기를 박는다.
“키스, 해줘서 고마웠어요.”
“…….”
“내가 조교님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요.”
카와니시의 뺨 끝이 살짝 물든다. 나는 너무 어마어마한 고백에 뒤통수를 거하게 두들겨 맞은 듯 그대로 얼어버렸다. 쥐고 있던 젓가락까지 떨어뜨리고, 다 식어버린 라면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불어 닥친 건지 사태파악도 어렵다. 나는 창백하게 질려서, 아주 허망한 표정으로 그 애의 담담한 고백을 바라보았다.
“카와니시 군.”
나는 아주 비장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좋아서 설렌다거나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허리케인이 한 바퀴 휘몰아치고 간 내 머릿속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어 생긴 감정의 공백 같은 거였다.
“……못 들은 걸로 할게. 나 먼저 간다. 재워줘서 고마워!”
나는 잽싸게 구석에 모아놓은 내 옷들을 가방에 쑤셔넣고 자리를 떴다. 국물을 잔뜩 먹어 퉁퉁 불어터진 면발이 눈에 띄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카와니시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나는 운동화도 제대로 신을 새 없이 도망치듯 그의 집을 뛰쳐나왔다.
* * *
카와니시의 자취방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사는 집보다 더 가깝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애는 더 이상 나를 쫓아온다거나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애가 뱉었던 말들에 쫓기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벗어던지고 그대로 침대에 골인했다. 그제야 귓속을 맴돌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단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치고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터라 침대에 엎드려 나는 내내 멍했다. 어디서부터 후회를 해야 할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술을 먹고, 취했고, 기억을 잃었고, 그렇게 그 애의 집까지 가서 다짜고짜 그 애를 붙들고 입을 맞췄고, 그것도 모자라 한 침대에서 포근히 그 애 품에 안겨 잠까지 잤고,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채로 폭격을 맞았다. 그런 간지러운 고백이 원래 그렇게도 쉽게 튀어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던가. 나는 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깨달았다. 양손바닥을 펼쳐서 두 뺨을 세 차례 때렸다.
“미쳤지, 미쳤어.”
나는 속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앞으로 영원히 입에는 대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시라부가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나에게 잔소리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 쓸데없이 친근한 주사 때문인 것이다. 그럼 시라부한테도 내가 몇 번씩이나 그랬단 말이지. 나는 정말 딱 죽고 싶어졌다. 이대로 운석이라도 날아와 지구에 있는 힘껏 박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어 가방을 직 끌어올렸다. 안에 든 옷가지들을 대충 바닥에 늘어놓고 나는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이 꺼져있다. 따로 충전을 하지 않았으니 배터리가 방전된 모양이었다. 충전기에 꽂아두고 나는 다시 침대에 늘어졌다. 아침부터 해괴한 일을 겪었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그리고 곧장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혹시 그 병아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슬금슬금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갖다 댔는데, 초인종이 신경질적으로 여러 번 울렸다. 나는 단번에 나를 방문한 주인공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쳤다. 곧 들릴 따가운 잔소리를 예측하고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제 그 진상을 부렸으면 집에 들어갔다고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어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미안…….”
“그렇게 들이부은 것치곤 멀쩡하네. 그 새 라면까지 먹었어요? 내 연락은 껌 씹듯 씹어놓고 목구멍으로 밥은 넘어갔나봐. 아침엔 집에 없더니 없는 척 한 거예요, 아니면 술독에 빠져 죽었다 살아나느라 기척도 없었던 거예요? 지가 무슨 예수야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시라부는 무섭다. 기관총 발사하듯 내 온몸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냅다 꽂아버리는 그 기세에 풀이 죽어 나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저기……, 시라부.”
“뭐요.”
“아니야. 미안해.”
“미안한 거 알면 말 좀 들어먹던지.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마셔?”
“있잖아, 시라부.”
“아, 왜.”
독불장군처럼 말로 나를 밀치고 집 안까지 들어온 시라부는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가지를 보자마자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침대 위로 집어던지고 당장 옷을 세탁기 안으로 구겨 넣었다. 시라부가 차가운 한숨을 쉬었다. 얼음으로 얼린 화살이 내 등에 콕콕 와서 박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마 먹을거리를 좀 챙겨온 듯 했다.
“나 방금 들어왔어.”
“어디서 잤는데요.”
“반도체 수업 수강생네 집.”
“허.”
“시라부, 나 어떡하지.”
시라부가 질색을 하고 나를 보았다. 내 주사를 지극히 잘 알고 있는 그는 아마도 어젯밤 벌어졌을 일들을 대강 짐작한 듯 했다. 시라부가 험악한 얼굴로 내 앞에 풀썩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나를 재촉한다.
“무슨 짓 했어요. 솔직히 불어.”
“……키스했대, 내가.”
“이런 미친. 그 학생한테요?”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 죽고 싶다.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시라부가 정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나는 그런 시라부에게 그 뒷이야기를 말해줘야 할까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 그러나 일단 그것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애에게도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너한테도 그랬어?”
“말해 뭐합니까, 성희롱으로 고소할 뻔한 거 그래도 선배라고 참아주느라 혼났는데. 걔는 괜찮답니까? 선배 고소 안한대요?”
“으응…….”
나는 어설프게 말끝을 어물거렸다. 눈치 빠른 시라부가 눈을 홉뜨고 나를 노려본다. 아마도 지난날 내가 저질렀던 파렴치한 일들이 눈앞에 두둥실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로 시라부에게 말했다. 이제 술 안 마실 거야. 어련하시겠어. 그 우직한 다짐에는 시라부가 한껏 비웃음을 선사했다.
“오늘 토요일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교수님한테 왕창 깨졌어요.”
“알지, 알아. 아, 머리야.”
한바탕 혼란이 휩쓸고 간 자리에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제대로 된 숙취는 이제부터라는 듯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대 자로 뻗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고 시라부가 옆에서 내 두통을 거들었다. 나는 휙 바닥을 뒹굴었다. 오늘 청소기 돌리는 날인데, 도통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약 사왔어요. 먹고 더 자든지 알아서 해요.”
시라부가 싱크대에 올려둔 봉투를 내 옆으로 던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제법 감동한 얼굴로 시라부를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이 시베리아 벌판이다.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시라부가 잔소리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무슨 세미 에이타 전용 보모도 아니고, 진짜 매번 이게 뭡니까?”
“……약 사와준 건 고마운데, 끝이 영 별로야.”
“시끄러워요.”
“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시라부에게 나는 인사를 건네면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문이 쿵 닫히고 방안에 조금씩 적막이 들어찬다. 나는 침대에 뭉쳐둔 이불 위로 슬그머니 들어가 누웠다. 도톰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그 안에서 천천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카와니시가 내게 했던 말들이 시라부가 열고 닫았던 문틈으로 기어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에 빠질 때까지 나는 온통 그 반반한 얼굴만 떠올리고 있었다.
* * *
사실 카와니시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수업을 수강중인 학생이란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 이번 학기 내내 그와의 악연이 지속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첫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그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언젠가 들었던 몽롱한 목소리가 들리고 내가 그의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까지가 고역이었을 뿐이다.
카와니시의 길쭉한 신장과 노란 머리카락은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예전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 자꾸만 내 망막을 파고들어 눈꺼풀이 피곤할 지경이었다. 카와니시는 생각보다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출석을 부르고 강의실을 나가는 내 뒷모습에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은 아찔할 만큼 선명했다.
내 생각엔, 아마 그건 그의 선전포고였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와니시 타이치는 매일 같이 질문이 있다며 내게 메일을 보냈다. 차근차근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해주다가, 그는 물어볼 게 너무 많다며 따로 약속을 잡자고 했다. 학생의 학문적 호기심을 거절할 명분도 없고─진짜 그게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사적인 이유를 들어 그를 거절한다면 그게 또 교수님 귀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시간을 전달했다. 우리 연구실로 직접 오겠다며 카와니시는 꽤 정중하게 답장을 했다.
그가 교수님이 꽤 눈 여겨 보고 있는 학생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 연구실 선배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연구실에 방문한 카와니시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모르는 게 이상하다고 선배는 나를 탓했다. 카와니시는 내 앞에 앉아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성적도 우수하고 이미 한참 전에 우리 교수님이랑 면담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학원 진학 문제로.
자꾸 연구실에 찾아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는 일일 수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메일로 해결하자는 말도 결국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이 허락한 인재라면 연구실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도와야 하는 암묵적인 의무가 있다. 심지어 우리 연구실 사람들은 꽤 카와니시를 좋아했다. 선배들은 카와니시가 키도 크고 꽤 잘생겼고, 무뚝뚝해보여도 싹싹한 편이니 나한테 잘 좀 가르치라고 조언까지 얹어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를 대하기 껄끄럽기 짝이 없었는데, 도대체 이 사연을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할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카와니시는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불쑥 찾아와서 내게 질문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은혜도 모르고 가버려서 혹시 화가 난 건 아닐까, 이러다가 시라부 말대로 고소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하루 종일 불안해야 했다. 누가 들으면 아주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만큼 진지하고 심각했다. 나에게 연애하자는 어마어마한 발언을 툭 던져놓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 카와니시를 보면서 나는 어지간히 허둥대고 있었다.
“카와니시 타이치, 겨울방학 때부터 우리 연구실에서 인턴하기로 했대요.”
그렇게 한 보름쯤 흘렀나, 슬슬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도 적응이 되었을 때에 시라부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얼마 전에 교수님이랑 카와니시가 면담을 했는데, 중간고사 성적도 썩 잘 받았고 머리도 좋은 그가 교수님은 꼭 마음에 들었는지 먼저 인턴 제의를 했단다. 카와니시는 어차피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교수님 권한으로 카와니시의 겨울방학 인턴은 일사천리로 합격이 떨어졌다.
“……시라부.”
“왜요.”
“진지하게 나 휴학할까봐.”
“술 끊더니 머리가 돌았습니까?”
“너 가끔 내 취급이 너무한 것 같지 않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고 일이나 하세요.”
나는 나대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걸 어디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학 내내 그 반반한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은 또 없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이렇게까지 뾰족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지만─이건 이것대로 자존심이 상했다.─그래도 여전히 매일 같이 나를 찾아오고 있는 그 병아리가 나는 영 불편했다. 별 말을 안 하니 더 답답하다. 그 애는 유난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일은 전부 농담이었다거나, 아니면 차라리 그때처럼 내게 솔직한 말을 털어놓으면 목을 꽉 조이는 갑갑함이 조금이나마 풀릴까. 보름을 이런 식으로 시달리고 있으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 병아리의 의견은 필요 없고, 나는 그저 한 명의 수업 조교로서 그 애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해주면 된다. 나 혼자만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게 좀 억울하기도 하고, 정작 사람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어놓은 당사자는 눈에 띄게 천하태평이니 머리 쥐어싸매고 끙끙 앓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애와 나는 완벽한 타인인 것이다. 어차피 한 학기 수업이 끝나면 더 볼 일 없는 사이였다. 아니, 비록 그와는 겨울방학 때 내내 얼굴을 맞대야 할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단 둘은 아니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는, 카와니시가 내 생각 이상으로 눈치 빠르고 약은 사람이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교수님으로부터 방학 인턴을 허락받은 이후로 그 애가 나를 찾아오는 빈도가 심심찮게 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방해가 될 것 같다며 연구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언제는 그런 것 신경 썼던 것처럼─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공용 책상에 앉아 내게 궁금한 것을 질문해놓고는 내가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고 있으면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처음 며칠은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곧게 나만 담고 있는 그 시선이 충분히 부담스러웠던 나는 결국 나흘 째 되는 날 그 애에게 퉁명스럽게 따져야 했다.
“그만 좀 봐. 너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지?”
“본다고 닳아요? 다 귀에 들어오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너 진짜 질문하고 싶어서 온 거 맞아?”
“학생의 학구열을 무시하시다니, 조교로서 할 말입니까?”
카와니시는 한 마디도 안 졌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그는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며 내 말을 유들유들하게 받아쳤다. 나는 그 애를 이길 수 없었다. 나중엔 화가 치밀어서 내가 설명했던 것들을 다시 말해보라고 윽박을 질렀는데 카와니시는 이미 시험공부를 마친 사람처럼 줄줄 내용을 잘도 읊었다. 허망해진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보고 있으면 그 애는 못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가 되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같이 눈치 없는 사람이 봐도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다정한 시선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아직 질문 안 끝났는데요.”
“메일로 해.”
“싫어요.”
연필을 쥐고 연구실로 돌아가려는 나를 카와니시는 능숙하게 붙잡는다. 근데 그 손아귀에는 은근하게 소심함이 묻어있어서, 또 나는 그걸 세게 뿌리치지 못했다.
“이제 안 볼게요.”
“…….”
“그렇게 싫으면.”
사람은 무지에 공포를 느끼곤 한다. 내게는 카와니시가 그랬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그 애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에는 더욱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카와니시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분명히 거절의 뜻을 전달한 내게 아직까지 이러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그가 두려웠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이 상황이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카와니시는 한 풀 꺾인 모습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내가 질색을 하고 물러서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 애와 나 사이에는 딱 그만한 간격이 존재했다. 내가 그어둔 선을 넘어오면 나는 그 애에게 화를 냈고, 그러면 그 애는 더 다가올 듯 발걸음을 멈췄다. 차라리 불도저처럼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상대하기 쉬웠을까. 카와니시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가 죄책감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떨쳐내기가 더 어려웠다.
“……알았어.”
나는 또 카와니시에게 졌다. 내 대답을 듣고 그 애는 조금 안도한 듯 편안한 표정을 했다. 다시 자리에 풀썩 앉으면서 나는 혼잣말로 실컷 중얼거렸다. 카와니시는 내게 너무 어렵다. 견디기 버겁고 들고 있기 무거웠다. 내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게 무력화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가 껄끄러웠다. 이 감정을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잠시 카와니시 타이치를 잊기로 했다.
* * *
나는 연애란 걸 해본 이력이 없었다. 남들 말로는 생긴 것도 꽤 괜찮게 생겼고,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좋은데 왜 연애에는 그렇게 운이 없는지 모르겠단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어디서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한다는데, 나는 뭐가 빠져서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해봤을까 억울해서 못 견뎌했다. 나는 의외로 주위에 여자가 많다. 그녀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귀고 싶지는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연구실 선배들이 하나둘 씩 내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고, 그렇게 몇 번 여자를 만나본 결과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소개팅을 하면 설레고 두근거리는 사랑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만나본 여성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돌아왔다. 그쯤 해서 연구실 선배들도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었다. 놀라울 정도의 친화력을 가진 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았는데, 딱 그뿐이었던 것이다. 나도 어느새 장황하게 늘어지는 추상적 이유들을 납득하고 있었다. 나는 남들보다 눈치가 조금 느리고, 쓸데없이 성격은 좋아서 여기저기 잘 불려 다니고 휘둘린다. 시라부는 그런 내 태도를 지적했다. 그렇게 속없이 살다가 언젠가 뒤통수 맞을 거라고, 시라부는 내게 독설 아닌 독설을 했다.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연애하는 것을 완벽하게 포기하고 있을 때에 카와니시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무려 한 달 동안 지치지도 않고 나를 찾아온 카와니시의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점점 둘이서만 있게 되는 시간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사적인 이야기도 많아지고, 그래서 나도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카와니시에게 적응을 하면서부터는 카와니시도 알아서 선을 지켰다.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지 알아서 잘 판단했다. 카와니시는 비겁할 만큼 눈치도 빠르고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나도 그를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마치 그게 일상인 것 마냥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내는 이야기에는 그러나 나를 향한 강요는 전혀 없었다.
“……나 남자한테 먹히는 얼굴인가.”
화장실 세면대에 서서 거울을 보며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래, 객관적으로도 잘생겼다는 말은 종종 듣긴 했다. 시라부와 함께 우리 연구실 얼굴 마담이라고 교수님이 칭찬도 제법 해줬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 얼굴에 콩깍지를 씌운 것 같다. 손질하지 않아 여기저기 뻗친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데 새삼 내가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요?”
“아악!”
“밥 먹었나보네. 목소리 엄청 우렁찬데요.”
“너 왜 여기 있어!”
“조교님 보러.”
평소에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내가 카와니시만 나타났다 하면 평정심을 잃었다. 처음 카와니시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랬고 유독 얘 앞에서만 이런 추태를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카와니시를 뾰족하게 노려보았다. 그 애는 그러건 말건 내 팔뚝을 쥐고 화장실을 나갔다.
카와니시와 내가 만나는 장소는 이제 연구실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앞 책상이었다. 연구실에서 가까운 장소라서 종종 오가는 대학원생들에게 카와니시는 싹싹하게 인사도 잘 건넸다. 그쯤 해서 카와니시는 우리 연구실의 명물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나와 콤비를 짜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실없는 소리를 다 할까. 물론 이건 카와니시에게 비밀이다.
“조교님은 어떤 사람이 좋아요?”
“글쎄.”
미운 사람도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카와니시와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주제는 알아서 슬금슬금 피하고 있는 카와니시가 이제는 조금 편해져서, 이따금씩 장난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내 특유의 친화력과 끊임없는 카와니시의 추파가 시너지를 만들어 이루어낸 성과였다. 나이가 좀 어리다고 그는 제법 귀여운 구석도 많았다. 아마 내가 카와니시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더라면, 그저 사이좋은 형 동생으로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이상형이라든지.”
“너는 아니야.”
“너무해.”
“뭐가 너무해?”
“내가 어때서요.”
카와니시가 목에 힘을 주고 항변했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서 줄줄 뱉는 말이 어째 다 자기 자랑이다. 이 정도면 잘생겼지, 키도 크지, 몸매도 잘 빠져서 옷걸이도 좋지, 공부도 잘하지. 도대체 자기가 빠지는 게 뭐냐고 묻는다. 나는 그 말에 잠깐 고민에 빠졌다. 카와니시는 소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눈치가 없는 나와는 다르게 빠릿빠릿해서 내 의중을 기가 막히게 잘 맞히곤 했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누구와도 둥글둥글하게 잘 지내는 내가 왜 카와니시를 이토록 낯설어하는지 당사자인 나조차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카와니시의 집에서 깨어난 날, 그러니까 그때 들었던 황당한 고백이 내내 꼬리표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던데.”
카와니시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본다. 우리의 관계는 은근히 변화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보는 저 뜨뜻한 시선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눈을 둘 곳이 없어 카와니시가 가져온 노트만 빤히 노려보았다.
“선배는 언제쯤 나를 봐줄까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진짜 너무하네, 이게 어떻게 실없는 소리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던 관계다. 카와니시는 점점 더 내게 가까워지고, 우리 둘 사이를 그은 선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나는 그런 생각들에 불쑥 겁이 났다. 서로를 알고 이름을 나눈 그 첫날에 이미 고백을 받은 나에게 카와니시는 더 숨길 것이 없다는 듯 불쑥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부끄러운 소리도 서슴없이 하는 그 애가 싫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걱정이었다.
그러니까, 카와니시는 언제 어디서 나를 보고 좋아하게 됐을까, 하는 생각.
나는 본래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저 질문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끝없이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나는 도무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이렇게까지 신중한 적 없던 내가 낯설어도 나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리지 않는 한 카와니시를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나는 카와니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에 카와니시는 툴툴대던 것을 멈추고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도 이번에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주위를 채운 공기가 덩달아 긴장을 했다. 의외의 질문에 카와니시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게요.”
한참 침묵하던 카와니시가 내놓은 답변이었다. 나는 싱겁게 웃었고, 카와니시는 무표정했다. 이로써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다. 타인의 감정을 내 잣대로 결정지을 수는 없었지만, 인생을 조금 더 산 선배로서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애정이 그저 약간의 호감에서 조금 더 진전된 정도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후련한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는지 카와니시는 입술을 삐죽였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우리 사이엔 좀 필요한 것 같지 않아?”
“다 좋아요. 내가 선배를 좋아해요. 그뿐이에요.”
“아니, 그럴 리 없어. 너는 그냥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카와니시가 발끈했다.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아는데요? 내가 좋아한다는데 왜 선배가 아니라고 해요?”
“나는 남자야.”
“알아요.”
“너도 남자고.”
“안다고요.”
의외로 카와니시는 완강했다. 그동안 내 거부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면서 이제야 그는 부쩍 억울한 표정을 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카와니시는 화가 난 얼굴로 내게 따지듯 항변했다.
“선배가 남자라서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고 보니 그 사람이 선배였던 거라고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런 것도 구분 못할까봐 그래요?”
“목소리 너무 크다, 카와니시.”
“두고 봐요.”
의자가 드르륵 밀렸다. 카와니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가져온 노트며 필기구를 주섬주섬 챙겨서 한 발 물러서더니 카와니시는 내게 선전포고를 했다.
“어떻게든 증명할 테니까.”
카와니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등을 돌려 사라졌다. 짧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방금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회도 반쯤은 했다. 항상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봐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저렇게까지 뜨겁게 반응할 수 있는가. 나는 다시 갑갑해진 심정으로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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