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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세미른 교류회에 발간된 글입니다.

*가벼운 캠퍼스 로맨스.

 

 

 

 

 

카와니시는 좀 더 집요해졌다. 괜히 조바심이라도 났는지 이전에 비해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았다. 수업 시작 전 교수님을 대신해 출장 공지를 마친 나에게 그 수업이 끝난 직후 카와니시는 찾아왔다. 그는 뭔가 잔뜩 속에 쌓아둔 게 많은 표정이었다.

 

 

출장 얼마나 가요.”

“34. 학회만 보고 오는 거라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왜 하필 지금 가요?”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아? 미리 잡혀 있던 일이야.”

도망치는 거죠, 지금.”

내가 뭐가 무서워서?”

 

 

카와니시가 입을 꾹 다문다. 무언의 항변이었다. 고작 나흘 일본을 떠나있을 뿐인데 뭘 저렇게까지 조급해하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 내가 했던 말들에서 아마도 카와니시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으리라. 예를 들면 내가 그를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이대로 그저 좋은 선후배 관계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새삼 이 덩치 큰 후배가 귀여워 보였다. 내가 좋다고 빨빨 쫓아다니는 카와니시의 대시에도 어느덧 적응을 끝낸 지점의 일이었다.

 

학회 때문에 교수님을 포함해 연구실 사람들 몇 명이서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학회는 이틀 동안 진행되고, 끝나자마자 바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이왕 미국까지 가는 김에 좀 쉬다 오면 덧나느냐고 투덜거리는 내게 시라부가 근무 태만이라고 매섭게 쏘았다. 다른 사람들은 해외 출장 가면 맛있는 것도 먹고 실컷 놀다 오던데, 나는 유난히 그런 운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학기 중 빡빡한 일정의 출장이 나라고 달가울 리 없다. 벌써부터 피로한 나를 대신해서 카와니시가 열심히 성을 냈다. 덕분에 나는 제법 즐거워졌다.

 

 

그럼 저랑 밥 먹어요.”

핑계가 이상하다?”

“4일 동안 선배 못 보는 거잖아요. 번호도 안 알려줘서 연락도 못하게 했으면 그 정도는 해줘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카와니시는 아주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지만 내 앞에서는 종종 떼를 썼다. 그 떼가 마냥 밉지는 않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그러마하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오늘은 마침 저녁에 시간이 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카와니시에게 제안했다.

 

 

저녁 먹을래?”

……진짜요?”

, 노력이 가상하니 한 끼 정도는 사주지.”

무르기 없기. 저 수업 다섯 시에 끝나요. 끝나고 여기로 올게요.”

 

 

카와니시는 덥썩 미끼를 물었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를 바라보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아주 약간이지만 죄책감도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얘는 나한테 이렇게 목을 매는 걸까. 사랑 받는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자꾸만 의문이 발자국처럼 남는다.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카와니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사람은 시라부 한 명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고 했다. 너는 왜 안 갔느냐는 질문에 수업 때문에 점심도 못 먹는 내가 불쌍해서 남아줬다고 했다. 그 얄미운 얼굴에 대고 황송해 죽겠습니다, 하고 픽 웃었다. 나는 가방에서 아침에 사둔 도시락 두 개를 꺼냈다. 점심, 저녁으로 먹으려고 샀던 건데 저녁에 약속이 잡혔으니 하나를 시라부에게 건넸다. 시라부는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안 받아? 나 배고픈데.”

걔에요?”

뭐가?”

선배가 술 먹고 키스했다는 사람.”

 

 

도시락이 힘없이 테이블 위로 낙하했다. 나는 금방 황망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되물으려던 목소리가 간신히 달싹거리는 입술 안으로 뭉쳐 사라졌다. 나는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나와 다르게 태연하게 그는 의자를 빼고 앉는다. 일회용 젓가락을 뜯어 도시락 뚜껑을 여는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찍었는데 맞았나 보네. 빨리 앉아요, 배고프다며.”

, , 어떻게 알았어?”

선배 표정 보면 안 봐도 비디오에요. 요즘은 그래도 좀 친해진 것 같네. 계속 선배 찾아오는 거 보면 술 먹고 키스한 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뜻일 테고, 그 녀석이 선배 좋아하기라도 한대요?”

 

 

눈 하나 깜짝 않고 내가 무려 한 달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내용들을 줄줄 읊는 시라부가 오늘은 진짜로 무서웠다. 예민하고 변화에 민감한 타입인 건 알았지만 설마 그걸 다 꿰고 있을 줄이야.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라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밥을 뒤적거리던 시라부는 내 침묵에 점차 얼굴을 굳혔다.

 

 

……진짜에요?”

 

 

시라부는 믿기지 않는다고 눈으로 말했다. 아마 처음 카와니시의 고백을 들었던 날, 내 표정도 지금의 시라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민망한 낯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설마 둘이 연애해요?”

, 그건 아니야! 너무 갔다고.”

……세상에 선배를 좋아하는 별난 사람도 있네요.”

무슨 뜻이야? 그거.”

 

 

발끈해서 묻는 내 목소리엔 대답도 하지 않고 시라부는 입 안에 밥을 한술 떠 넣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얌전해서 아주 조금이지만 김이 샜다. 나는 누구든 카와니시의 일을 알게 되면 기함을 해서 길길이 뛸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라부는 언제나 내 예상 밖에 있는 인물이었다. 홀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시라부는 묵묵히 식사를 했다. 나도 차마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의외였다. 카와니시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에 의문을 가지거나 혹시 내가 착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은 흔히 말하는 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런 것도 편견의 한 종류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시라부가 오히려 옳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더 어렸지만 의외로 사려 깊은 구석이 있었다.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도시락을 뜯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휴대폰이 눈에 밟혔다. 번호 좀 달라고, 이제 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던 카와니시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비죽 웃음이 나왔다.

 

 

 

 

 

Allegro, Moderato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고민 끝에 고른 메뉴는 오코노미야끼였다. 야끼소바도 잘하는 집이 있다고 카와니시가 먼저 나를 이끌었다. 노란 조명이 어둡게 실내를 비치는 넓은 식당이었는데, 아직 채 저녁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무리들이 다양했다. 밥집에 술집을 겸하고 있는 가게라고 카와니시가 짤막하게 소개했다. 2인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나는 메뉴판을 펼쳤다.

 

 

선배, 손 예쁘네요.”

……너 진짜 그런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라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연필 쥔 선배 손 되게 뽀뽀하고 싶게 생겼어요.”

 

 

맨날 칙칙한 학과 건물에서 만나다가 처음으로 밖에 나왔더니 카와니시는 조금 들뜬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학문적 호기심이라는 구차한 핑계 없이 오로지 나와 단 둘이서 목적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금세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면서 괜히 손가락을 숨겼다. 내 행동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피던 카와니시는 그제야 픽 웃으면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간만의 외식으로 기분이 좋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속으로 신이 나서 메뉴판을 읽다가 문득 주류에 눈이 갔다. 금주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삼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시라부에게 자랑할 만한 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힐끔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리하게 내 속내를 짚어냈다.

 

 

사케 마실래요? 아니면 맥주?”

 

 

전혀 거리낌 없이 묻는 뻔뻔한 얼굴에 나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자제하고 나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둘뿐이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실 일은 아마 확률적으로 제로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술로 엮이기 시작한 인연이라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카와니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툭 말을 뱉었다.

 

 

안 잡아먹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저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막말로 취해서 나한테 먼저 키스한 건 선배,”

으아악!”

 

 

나는 단박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카와니시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란에 주위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눈을 세모꼴로 뜨고 미간을 콱 구겼다. 나름대로의 협박이었다. 그 이상 입을 연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같은.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요?”

지구가 폭발했으면, 할 만큼.”

그럼 맨 정신일 때 키스해주는 건 어때요. 되게 낭만적일 것 같은데.”

그 놈의 낭만은 다 어디 가서 얼어 죽었대? 별 걸 다 낭만이라 그래.”

 

 

주문을 마치고 음식이 나왔다. 동그랗게 잘 익은 오코노미야끼가 뜨뜻하게 달궈놓은 철판 위에 놓였다. 카와니시가 주문한 맥주도 유리잔에 나왔다. 나는 군침이 돌아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카와니시가 다시 묻는다. , 마실래요? 나는 힐끔 그의 눈치를 보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부가 봤다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곤 혀를 찰 장면이었다. 카와니시는 웃으며 직원을 불러 맥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사실 나도 한 잔 정도로 필름이 끊길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저냥 어느 정도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한계를 조금만 넘겨도 그대로 기절하는 타입이었다. 아니, 기절하는 줄로만 알았다. 의식이 저만치 날아간 무의식의 내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카와니시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를 좋아하는 그 감정이 단순히 일시적인 것은 절대 아니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확답했었다. 그래서 그 날, 카와니시는 자기가 나를 데려다주겠노라 했던 걸까. 교수님은 분명 시라부를 부르려 했을 테고, 아마도 카와니시는 그것을 저지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목적이 보이는 행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코노미야끼 한 점을 쏙 입에 넣고 카와니시가 나를 본다. 도무지 꿰뚫어볼 수 없는 저 나른한 눈매에, 어찌 보면 가장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카와니시.”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나는 손등에 턱을 괴고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제 맘 받아주실 생각 전혀 없다는 분이 그런 건 왜 물어보고 그래요?”

, 부끄러워한다.”

 

 

내가 박수를 짝짝 쳤다.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곤 카와니시가 귀엽게 나를 노려보았다. 아마 언젠가 했던 대화가 또 그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내게 카와니시는 되려 내게 질문했다.

 

 

선배는 나랑 왜 밥 먹어줘요?”

밥 먹는 게 뭐 어때서.”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매일 찾아가는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리고 날 받아줄 생각도 전혀 없다면서 왜 나한테 잘해줘요.”

…….”

선배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삽시간에 공기가 진중해졌다. 나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또렷한 눈이 나를 꿰뚫는다. 나는 역습에 허둥대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잘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나를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선 안 되는 거였다. 카와니시와 나는 실제로 아주 이상한 관계다. 좋아한다고 시작부터 고백을 했고 카와니시는 이미 한 번을 차였다. 끈질긴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라는 항목에 있어서는 그에게 벽을 쳤다. 왜냐하면 나에게 카와니시는 그저 귀엽고 잘생기고 가끔씩 황당한 후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와니시 타이치와 사귈 수 있느냐고, 친구 혹은 선후배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자신이 있느냐 물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젓곤 했다. 이 일방적인 관계는 나에겐 아주 이기적이고, 카와니시에겐 아주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애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안, 실수했다.”

알면 됐어요.”

그럼 출장 돌아오고서는 네 얼굴 안 보면 되는 걸까.”

그건 싫어요. 괜찮아요. 내가 참을게요.”

 

 

참는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상대가 모르고 있는 짝사랑과 우리의 경우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카와니시는 아무래도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시라부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을 깊게 할수록 일을 망치는 타입이니 최대한 단순무식하게 생각하라고. 그때는 그게 그렇게 억울했는데 지금 상황에는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그러니까 미안하면 돌아와서 나랑 영화나 봐요.”

 

 

먼저 웃는 것은 카와니시였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소바를 깨작였다. 내가 일본을 떠나있는 것은 기껏해야 나흘뿐인데 돌아와서 영화를 보자는 그 말이 어째서인지 아주 멀게만 들렸다.

 

둘 다 맥주를 깨끗하게 비웠다. 역시나 카와니시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가볍게 음료 한 잔 마신 느낌으로 그의 얼굴색은 아주 온화했다. 반면에 나는 슬슬 홍당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분도 살짝 알딸딸하고 눈이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아마 딱 적당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 젠장. 또 얼굴…….”

왜요, 예쁜데.”

 

 

흉하게 붉어진 두 뺨을 두 손으로 가리자마자 카와니시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목을 가볍게 쥐었다. 정말이지 카와니시는 표현에 거리낌이 없다. 그가 서슴없이 뱉은 말들이 뾰족한 송곳이 되어 훅훅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카와니시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막 뱉지 마.”

진심인데.”

 

 

그래, 진심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다. 나는 눈 꼬리를 축 내리고 투덜거렸다. 나는 카와니시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여태까지도 내가 겪어왔던 흔한 것들 중 하나였고, 나는 그럼에도 슬슬 카와니시가 뱉는 말 한 마디마디에 은근히 흔들리고 있는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때꾼한 눈으로 카와니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걔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조금 겁이 났다. 나에게 연인을 만나고 사랑하는 모든 과정 자체가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렇게 잘난 카와니시는 분명히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을 만나봤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선물, 사올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슬쩍 벽에 기대선 눈을 감았다. 술만 들어가면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이 기분이, 꼭 술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차올랐다. . 카와니시 타이치, 네가 있어서. 내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이 전부 너라서.

 

 

 

 

 

* * *

 

 

 

 

 

 

미국에 온 것은 어렸을 때 부모님과 가족 여행을 갔던 때 이후로 두 번째였다. 출장은 그래도 꽤 다녀봤는데 주로 국내로만 돌았지 해외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 나는 아주 들떠있었다. 삼박사일의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매일 똑같이 흘러가던 일상을 벗어났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찾고 일행이 묵을 숙소로 곧장 향했다. 나는 시라부와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비행기 안에서 교수님의 명령에 따라 결정된 사항이었으므로 시라부는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교수님과 같은 방을 쓰지 않는 게 어디냐고 은근슬쩍 그를 위로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아직 따뜻했다. 이른 아침부터 컨퍼런스 준비로 교수님과 선배들이 바쁜 사이 나는 시라부와 식사거리를 사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한정적이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야 했던 탓에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사가기로 결정했다. 햄버거며 감자튀김, 콜라 등이 들어서 제법 묵직한 비닐봉투를 바리바리 들고 나는 시라부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시라부는 나와 같이 있을 때에는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싶어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시라부는 현재 카와니시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엊그제 카와니시와 식사를 하면서 했던 대화들을 다시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카와니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내가 그와 거리낌 없이 밥을 먹고 웃으며 대화를 하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그렇게 비정상적인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명확히 따라오는 대답은 없다. 그런 미적지근한 관계가 지속되다보면 언젠가 나도 지치고 카와니시도 지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면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 애를 받아주어야 맞는 것일까. 모든 해답을 찾기에 나는 경험이 없었다. 은근슬쩍 시라부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카와니시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와 그 날에 있었던 모든 일들, 한 달이 넘도록 나를 찾아오고 있는 카와니시의 행동과 생각들을 줄줄이 읊었는데 시라부는 별로 재미도 없을 내용을 묵묵하게 들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시라부는 기다렸단 듯 툭 말을 뱉었다.

 

 

선배 되게 나쁜 사람이네요.”

 

 

그러면서 푹 한숨을 내쉰다. 나는 생각도 못한 말을 듣고 넋이 빠졌다. 멍청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내게 시라부가 꽤나 명확한 답을 늘어놓았다.

 

 

마음 결정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잘해주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선배야 원체 모질지 못한 성격이니까 그럴 수 있다 생각해도 걔는 전혀 아닐 테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계속 선배의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지쳐서 떨어져나가는 건 걔일 걸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못되게 하는 게 자신 없으면 최소한 여지는 주지 말아요.”

그게 말로는 쉽지…….”

잘하시잖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눈치 없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날 구박하던 애가 맞나 싶어 손등으로 두 눈을 비볐다. 재빠르게 나를 외면하고 무겁다고 짜증을 부리며 시라부는 내 품에 제가 들고 있던 봉투 하나를 더 얹었다. 빨리 안 들어? 내게 짐을 떠넘기는 시라부에게 나는 윽박지르는 것으로 응수했다.

 

 

선배는 어떤데요.”

 

 

결국 강제로 봉투를 가져간 시라부가 불쑥 물었다.

 

 

?”

걔 좋아해요?”

 

 

. 나는 잠깐 박 터지는 소리를 내놓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지 물론. 근데 그게 흔히들 말하는 사랑……이라거나, 그런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단순히 친구로서의 호감일지도 모르잖아. 내 말에 시라부는 꽤 공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힘껏 구기고 나를 향해 묻는 말에는 미묘하게 가시가 팍팍 돋아있었다.

 

 

걔랑 손잡고 다닐 수 있어요?”

?”

맨 정신에 키스할 수 있어요?”

, 잠깐…….”

섹스도,”

우와아아악!”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질문의 흐름에 나는 눈만 꿈뻑이다가 봉투를 든 손으로 시라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긴 미국이고 일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 단어는 만국공통어란 말이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시라부를 노려보았다. 강제로 입이 틀어 막힌 시라부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있었다. 잠시 후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시라부는 내 손을 쳐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팔을 휘저으며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천천히 가라고 시라부에게 퉁을 놓고 싶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이상한 생각들뿐이었다. 나는 걸음이 직직 느려지고 얼굴이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처음 겪는 생리적 현상에 나는 당황한 채로 머릿속에서 손사래를 쳤다. 카와니시와의 키스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보다 더한 일에 내가 태연할 수 있을 리 없다.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적당히 해요.”

 

 

앞서가던 시라부가 우뚝 걸음을 멈춰서 내게 말했다. 나는 귀까지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 시라부의 등에 대고 오만 가지 욕을 쏟아 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에 스위치가 켜져 버렸다. 전부 시라부 때문이었다. 회의장으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도 긴지, 자꾸만 머릿속에 불쑥 차오르는 카와니시의 얼굴 때문에 나는 종일 혼자 씨름해야 했다.

 

 

 

 

 

* * *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메인 행사인 아카데믹 컨퍼런스와 그 외의 갖은 행사들 때문에 숙소로 돌아오는 때는 항상 자정이 넘어서였다. 아직 채 시차적응도 하지 못했던 탓에 나는 졸린 눈을 하고 일을 마무리 한 후에야 잠이 들었는데, 그 일정이 귀국 당일까지 이어졌다는 게 극도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무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오는 길은 눈 깜짝할 새였다. 도착 안내 방송을 듣지 못한 나를 시라부가 깨우고 나서야 나는 반짝반짝한 아침을 맞는 도쿄의 하네다 공항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출장 기간 동안 내 머릿속은 태초의 상태인 카오스나 다름없었다.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것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내 안에 나타났고 그런 때면 내 얼굴색은 여지없이 붉게 도색되곤 했다. 오전 시간에는 어디가 아프냐는 소리를 들었고, 다과회가 함께 있는 오후 일정에서는 와인을 너무 마신 것은 아니냐는 우려를 들었다. 물론 나는 알코올 따위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부 시라부의 탓이다. 그냥 거기서 끝냈어도 될 말들을 공연히 줄줄 읊어줘서 그게 자꾸 내 머릿속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게 만들었다. 시라부는 내 기분을 알아차릴 때마다 한심한 표정을 짓곤 혀를 찼다. 나는 그런 그에게 항변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시종일관 같았다. 선배가 변태인 거 아니고요?

 

공항을 밟자마자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가방에 넣어둔 카와니시 몫의 선물도 팽개치고 일단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그런데 출근해야 한다. 아침에 귀국한 것도 오로지 연구실로의 출근을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곧장 귀가다. 나만 학교로 가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연구실의 전용 실험실 관리 담당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이틀 전에 깨달았다. 좌절하며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나는 연민을 듬뿍 담아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시라부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잔뜩 보내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까무룩 잠이 몰려온다. 이러다간 정류장을 놓칠 것 같아 나는 괜히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카와니시는 내 번호를 모른다. 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시라부가 말했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었다. 연락이 잦고 얼굴을 보는 시간이 많을수록 없던 마음도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감정으로 상대와 덜컥 연애란 걸 시작하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방에서 카와니시에게 줄 기념품을 담은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그것을 꼼질꼼질 문지르다가 의자 등받이에 길게 기댔다.

 

그리고 깜빡 잠이 들었다. 버스가 내는 규칙적인 소음과 누적된 피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 사람에 대한 복잡하고 어려운 고민들에 온통 검게 색칠된 뇌가 휴식을 부르짖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꿈에 카와니시 타이치가 나온 것이다.

 

 

 

 

 

* * *

 

 

 

 

 

어쩐지 나는 출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카와니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간만에 수업에 들어와 출석을 부르는 나를 카와니시는 한결같이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건만, 나는 이상하게 그쪽을 바라볼 수 없었다. 계속 불러도 낯선 이름들을 지나 카와니시의 이름을 부를 때면 괜히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고 그랬다. 원래는 이름 부르고, 대답이 들리면 자리를 확인하고 체크를 해야 했지만 나는 그냥 카와니시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상상력이 풍부하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이력이 없는데,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낯 뜨거운 상상에 나는 간헐적으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조교님 어디 아파요?”

 

 

나와 마주보고 앉은 카와니시가 특유의 나른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연필을 쥔 손으로 황급히 팔을 저었다. 그러다가 그 눈과 마주친다. 나는 큰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진짜 아픈 척이라도 할 걸. 미지근하고 말랑한 게 턱 근처에 닿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한 뼘 훌쩍 가까워진 그가 팔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늘 건조하던 두 눈에는 어느새 걱정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손을 쳐냈다.

 

 

……열 있는 거 같은데?”

아니야. 하나도 안 아프거든!”

뭐예요, 그 반응.”

,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

 

 

나는 후다닥 뛰어 연구실로 돌아왔다.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나는 가방 속에서 비닐봉투를 꺼냈다. 카와니시에게 줄 선물이었다. 정말로 별 건 아니고, 선물용 초콜릿이랑 입체 자석이었다.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와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와니시에게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꽤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선물이에요? 내 거?”

, 그럼 네 거지 누구 거야. 사온다고 했잖아.”

, 감동.”

 

 

생각보다 좋아했다. 별 거 아닌 선물에 열심히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 했다. 평소에야 그다지 생각이랄 게 없어보여도 카와니시는 감정 표현에 능숙했다. 그게 나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카와니시는 의외로 표정이 다양했다. 나는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지어내고 있는 온갖 상상 속에서 카와니시가 짓는 모든 표정과 하는 행동, 말투들이 현실의 카와니시와 너무나 닮아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괴로웠다. 도대체 뭘까, 이거. 내가 카와니시를 좋아하고 있나? 스스로에게 묻기에 너무 부끄러운 질문이다. 불과 한 달 전 나는 내가 좋다던 카와니시를 찼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진짜 사올 줄은 몰랐네.”

으응.”

이따 저녁 같이 먹을래요? 내가 밥 살게요.”

아니, 아니야!”

뭘 또 그렇게 질색을 하고 거절해요, 사람 민망하게.”

 

 

여태까지 한 번도 내가 누군가와 이렇게나 쉽게 사랑에 빠지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수두룩한 소개팅 경험이 있었지만 그 중 이 사람과 연애할 수 있겠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성애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던 게 바로 엊그제의 일이다. 시라부의 말 한 마디에 그가 좋아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내가 좀 변태인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괜히 우울해졌다.

 

수업이 있다며 카와니시는 금방 돌아갔다. 그 너른 등판을 보면서 나는 걱정이 짙게 밴 한숨을 토해냈다. 둘만 있는 공간이 이렇게나 숨 막혔던 적이 또 있었던가. 나는 축 늘어진 걸음으로 연구실을 향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가슴에 의문을 적어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풀리는 것은 없었다.

 

 

 

 

 

* * *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민망할 만큼 크게 들렸다. 어딘지도 모를 공간에서 나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었다. 홀에 갇힌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나를 때렸다. 그 목소리는 다른 때와 다르게 푹 젖어있어서 훨씬 뜨끈했다. 거짓말처럼 선명한 소리와 촉감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쉴 틈 없이 마찰하는 땀에 젖은 살, 흔들리는 허리와 빈틈없이 엉킨 두 나체를 마치 영화처럼 감상하고 나서 나는 무언가 팍 터지는 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기라도 호되게 앓은 것처럼 온몸의 살갗이 따가웠다. 나는 부끄러운 숨을 두어 번 들이쉬고 내뱉다가, 슬쩍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올렸다.

 

이럴 수가. 아니길 바랐으나 뒤늦게 쏟아지는 감각에 팬티가 축축해진 것을 깨닫고 나는 절망했다. 두 손으로 터질 것 같은 얼굴을 가득 안고 나는 자리에 도로 누워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것은 내 방 천장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애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그곳에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와니시 타이치였다.

 

 

……지구야, 이제 그만 터져줘.”

 

 

나는 딱 죽고 싶은 심정으로 모두가 잠든 새벽, 엉금엉금 침대를 빠져나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화장실로 들어가 대야에 물을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두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마구 퍼부어주었다. 모든 일의 원인인 시라부 켄지로, 카와니시 타이치에게.

 

 

 

 

 

* * *

 

 

 

 

 

삼십 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인생, 나는 정말이지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꿈은 자주 꾸지만 늘 하루도 안 돼서 다 까먹는 내가 유난히 그 꿈만은 잘도 기억했다. 덕분에 나는 도저히 이전처럼 카와니시를 대할 수 없었다. 걔만 보면 재생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머릿속에 지난 꿈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지곤 했다. 그래서 일부러 카와니시를 피해 다녔다. 차마 이 쪽팔린 꿈 얘기를 카와니시에게 할 수 없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대뜸 사귀잔 얘길 꺼내기도 민망했다. 좀처럼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나는 늘 갑작스러운 카와니시의 방문을 슬슬 피했다. 시라부는 뭔가 눈치 챈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카와니시가 찾아왔었다고 친절하게 전해줬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역시 가장 고역인 것은 출석 체크를 위해 강의실에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카와니시는 늘 항상 일찍 와서 강의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출석을 부르다가 또 부끄러운 일이 생길까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질 못했다. 파일에 코를 박고 열심히 이름만 부르는 내 정수리를 따가운 눈이 뚫어버릴 듯 보고 있었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그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끈질긴 추격전이 어느 새 일주일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무슨 숨바꼭질합니까?”

 

 

연구실에서 시라부가 대뜸 물었다. 나는 속으로 뜨끔해서 부러 웃으며 시라부에게 되묻는다. 뭐가? 시라부는 되도 않는 변명 둘러댈 생각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나를 채근했다.

 

 

카와니시 말입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데 왜 자꾸 도망쳐요? 자꾸 연구실 자리 비울래요? 교수님한테 찌를 거예요, 근무태만.”

아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당연하다. 얼굴도 보질 못했는데 그 애가 뭘 알 리 없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온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좀 적당히 하라고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요.”

진짜 너 가끔 너무할 정도로 잔인해.”

무슨 열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시라부가 쯧 짧게 혀를 찼다. 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홱 돌려 앉은 시라부의 등을 뾰족하게 노려보았다. 시라부가 카와니시에 대한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지난 밤 꾼 꿈을 모조리 털어놓는 것은 절대 무리다. 나는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일이 이렇다보니 내 퇴근길도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최대한 늦은 시간에, 복도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절대 타지 않는다. 차라리 계단을 밟았다.

 

출장을 다녀온 이후로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그 출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랬다면 시라부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을 리도 없었을 테고, 그런 꿈에서 카와니시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던 탓인지 식욕도 떨어지고 그래서 끼니를 곧잘 걸렀다. 긴장을 하면 배가 살살 아프던 옛 습관이 스멀스멀 내 안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뭔가 해결될 리는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카와니시만 보면 말문도 막히고 눈도 저절로 질끈 감겼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마냥 손까지 덜덜 떨리는데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솔직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그 애가 어려운 모양이다. 나도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말 한 마디는 어째 목 밖으로 튀어나갈 줄을 몰랐다.

 

 

 

열 시가 다 되었다. 나 말고는 전부 퇴근한 이후라 연구실 안에는 내 자리 컴퓨터만 덩그러니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뻐근한 어깨를 펴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양쪽 어깨를 붕붕 두어 바퀴 돌리고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갔다. 이깟 나무 문짝 하나 여는 게 뭐 대수라고, 나는 여태 아무 일도 없었던 퇴근길에 바짝 긴장을 했다. 슬쩍 문을 열었다. 도어락이 열리자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텅 빈 복도 너머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나는 힐끔 문틈 사이로 주변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벌컥 문을 열었다.

 

뭐가 훅 튀어나왔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는 반쯤 열린 문 안으로 도로 자빠질 뻔했다. 문이 닫혀 잠길 세라 커다란 손이 문간을 콱 붙잡았다. 엉덩방아를 찧을 자세로 나는 공중부양하고 있었다. 억세게 잡힌 팔뚝이 찌르르 아팠다. 나는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카와니시를 바라보다가 데굴데굴 눈알만 굴렸다. , 망했다. 그 말을 속으로 수백 번 외쳤다. 나를 붙잡고 카와니시는 한참을 아무 말 않았다. 내가 바닥만 쳐다보고 있으니 금세 낮게 깔린 목소리가 경고등처럼 울렸다.

 

 

요즘 나 피하는 거 맞죠.”

 

 

잘못을 저질러서 호되게 혼나는 초등학생처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붙잡힌 팔뚝에서 슬슬 열이 오른다. 나는 머릿속을 어지럽게 훑고 다니는 그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짐작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출장 다녀와서부터 뭔가 이상했어요. 선배, 왜 나 피해요?”

그게 아니고…….”

갑자기 내가 싫어지기라도 했어요?”

아냐,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이죠, 그거.”

 

 

카와니시의 목소리 끝이 아주 여리게 떨린 건 내 착각이 아니었을 거다. 나는 조금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눈만 들어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카와니시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내 앞에서 생각 없는 얼굴로 나만 바라보던 눈매가 처음으로 화가 나 있었다. 미간이 약간 구겨졌다.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 표정 곳곳에 괴로운 심정이 묻어있어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카와니시는 아파보였다.

 

 

……나한테 좋아한다고 해준 적 없잖아요.”

…….”

아니, 그런 거 기대하고 곁에 있는 거 아닌데.”

 

 

카와니시는 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해보였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차마 울지는 못했다. 카와니시에게 말해야 한다. 그런 거 다 오해라고, 사실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몇 번 달싹이던 입술을 겨우 떼어 나는 카와니시를 불렀다. 네 음절은 일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카와니시의 귀에 닿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카와니시.”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그게 아닌데.

 

 

이제 안 그럴게요.”

카와니시, 내 말 좀,”

내가 정리할게요.”

 

 

그 말에 내 몸 안에서 뭐가 쿵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벙어리가 된 것처럼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카와니시가 내 팔을 놓는다. 나는 황망해진 얼굴로 말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평소엔 장난스럽게 던졌을 그 단순한 말이 목구멍 너머로 나올 줄을 몰랐다. 카와니시가 등을 돌린다. 나는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정말 멍청하게 카와니시를 보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카와니시의 마지막 말이 종소리처럼 뎅뎅 머릿속을 울렸다.

 

넓은 복도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나도록 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있었다. 시야가 부옇게 점멸했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도로록 눈물이 떨어진다.

 

 

 

 

 

* * *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후회하지 말라던 시라부의 말이 이런 걸 뜻했던 걸까.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방황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그 애에게는 핑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변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떨리고 불안하고 설레고 동시에 아픈지, 나는 그보다 조금 더 늦게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와니시는 늘 똑같은 얼굴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와니시는 늘 그곳에 서서 나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거쳤고 어떤 감정의 폭풍에 휘말렸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만나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그의 감정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나는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 나는 카와니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가 그저 내 곁에 머물고 싶다 했기에 그저 그렇게 남아만 있었다. 어리석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그 날 이후 카와니시가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매일 같이 출근하던 연구실로 발걸음도 뚝 끊겼다. 나는 더 이상 그를 피할 필요가 없어졌다. 늘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그 빈자리가 내 예상보다 훨씬 커다랗고 무거웠다는 사실이 성큼 다가와 나를 파헤쳤다. 나는 덕분에 하루 종일 멍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변화가 없었다. 카와니시의 방문이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이따금씩 함께 점심을 먹다가 그 애에 대한 얘기가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면 나대신 시라부가 대충 둘러댔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식욕이 없었다. 온통 카와니시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서 다른 걸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 수업 시간은 딱 두 번이 있었다. 카와니시는 두 번 모두 수업에 나왔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에 그러나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해진 시선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 간절한 내 눈을 외면한 채로 그 애는 책에 시선을 꽂았다. 한 번은 출석 체크를 해줬고, 다른 한 번은 결석 처리했다. 나는 울고 싶은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아서 강의실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또 뭐가 문제예요?”

 

 

책상에 늘어져있는 나를 보고 시라부가 한 마디 던졌다. 나는 대꾸할 기력도 없어 손만 홰홰 저었다. 시라부의 얼굴에 짜증이 닥지닥지 끼었다.

 

 

그렇게 내 얘길 들어줘하는 표정 하고서 됐다고 하면 전혀 설득력 없는 거 알아요?”

내가 뭘.”

걔랑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속이 다 보이는 뻔한 거짓말이다. 하루 이십사 시간이 온통 카와니시로 가득했다. 시라부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걸 따라했다.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종일 움츠려 있었더니 어깨가 뻐근했다. 시라부 말마따나 열 살 애도 아닌데 이 정도 일로 남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카와니시와 함께, 혹은 나 혼자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부러 환하게 웃으며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시라부는 눈썹을 비스듬하게 모았다.

 

 

진짜로 됐어. 나 퇴근한다.”

 

 

나는 서둘러서 가방을 쌌다. 오늘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시라부는 대답을 않았다. 나도 딱히 시라부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얼른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끈질기게 내 그림자를 따라붙는 그 시선을 피해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내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카와니시의 번호를 안다면 나는 그에게 연락할 수 있을까?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고, 여러 가지 일로 내 감정을 정리하느라 그런 거였다고, 그렇게 변명하면 이번에는 믿어줄까. 그러니까 다시 예전처럼 내 곁에 있으면 안 되냐고, 매달리듯 그를 붙잡으면 그는 온전히 내 손에 잡혀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시큰해지는 눈가에 손부채질을 했다. 꼴사납다. 카와니시가 견뎌냈을 두 달 조금 안 되는 그 시간들 속에서 그 애는 얼마나 혼자 삭여야 했을까. 나는 모자란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그 애의 번호를 알고 있어도 차마 연락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나는 집으로 내달렸다. 누가 뒤에서 내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속도가 전혀 나질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철없이 눈물이 줄줄 났다. 나는 엉망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렀다.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 우는 소리를 참았다. 그럴수록 절규는 더 파고들어 자꾸 너를 떠올리게 했다.

 

 

 

 

 

* * *

 

 

 

 

 

한바탕 울고 나니 좀 개운했다. 대신 퉁퉁 부은 눈가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쓰라렸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쌓인 피로 때문에 까무룩 잠이 몰려온다. 다시 벌떡 일어섰다. 잠이 들기 무서웠다. 오늘도 꿈에 카와니시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뭔가 할 일을 찾으려 나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읽다 만 논문 한 뭉치가 나왔다. 잘 됐다. 뭔가에 집중할 때면 차라리 잡념을 지울 수 있어 좋았다.

 

 

……진짜 멍청하다, .”

 

 

책상에 올려놓은 작은 거울을 보니 스스로 한심해 견딜 수가 없다. 손가락으로 밀어 거울을 휙 돌려놓았다. 그냥 전화해서, 내가 널 좋아해 하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걸, 차라리 그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이게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 전에는 그토록 쉬웠던, 너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이제는 내게 너무 어렵다. 전화를 받고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가 끊길까 두려웠다.

 

책상에 엎드리듯 앉아 줄줄 논문을 읽었다. 당연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몇 번이나 집중해보려 안간힘을 써도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였다.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에 논문 더미를 집어던지고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길게 기댔다. 몸을 쭉 펼치니 갑자기 배가 콕 쑤셨다. 이제는 익숙한 통증이다. 요 며칠 불쑥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고 사라지는 만성 복통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런다. 원체 만사에 걱정이 없던 내가 정말로 오랜만에 겪는 현상이었다.

 

살살 배를 문지르다가, 따뜻해지라고 이불을 덮었다가, 그래도 안 되겠어서 결국 소화제를 먹었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십 분 뒤에 이를 후회했다. 앉았다가, 누웠다가 그 자세로 바닥을 뒹굴기까지 딱 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배를 쥐어짜는 통증이 한 눈에 봐도 보통은 아니다. 쑤시다 못해 누군가가 악력으로 내 위장을 마구 비트는 것 같았다. 억 소리 한 마디 내지 못하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대로 나아질 때까지 버티려다가, 나는 결국 휴대폰을 찾았다.

 

어디로 연락해야 하지. 마땅히 전화할 곳이 없어 본능적으로 119를 찍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왈칵 서러움이 터졌다. 아파 죽겠는데 부를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직접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까지 가야 한다니 아픈 와중에도 그게 억울해서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십 분을 더 버텼다. 통증을 완화해보려고 손등을 물어뜯었다가 결국 피를 보고서야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너였다. 조교에게 넘어오는 학생 정보에서 네 번호를 봤다. 숫자를 일곱 개까지 입력했다가, 도로 지웠다. 기절할 것 같은 와중에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결국 시라부였다.

 

연결음은 두 번밖에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배를 움켜쥐고 모로 누워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시라부…….”

목소리가 왜 그래요? 또 술 마셨어요?

나 좀 도와줘.”

 

 

잠깐 말이 끊긴다. 수화기 너머로 얕은 한숨 소리가 내려앉는다.

 

 

왜요, 또 집에 못 가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마시라고,

살려줘…….”

─ ……선배?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무지막지한 고통에 나는 울먹였다. 그 소리가 시라부에게 들린 모양이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 챈 시라부가 심각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선배 울어요? 어디야, 지금.

 

 

눈이 뒤집어진다. 기껏 갈아입은 옷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서 나는 푹 꺼진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몸처럼 덜덜 떨리는 게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대답 안 해요? 뭐야 왜 그래. 정신 차려, 어디냐니까!

 

 

시라부의 일갈로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바닥에 휴대폰을 엎어놓고 이를 악물고 견뎠다. 시라부가 우리 집까지 오는 데에는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길 내내, 자꾸 시야에 카와니시가 어른거리는 게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울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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