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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세미른 교류회에 발간된 글입니다.

*가벼운 캠퍼스 로맨스.

 

 

 

 

눈을 감았다 뜨면 하얀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뜨면 거짓말처럼 네가 밟혔다. 아무래도 미친 게 아닐까.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은 뇌가 미쳐서 눈앞에 환상 같은 걸 그려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약 냄새 같은 것을 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아프던 배는 진통제를 주사하고 나니 곧 멎었다. 겨우 평화를 되찾고 나는 진이 다 빠져 자리에 누운 채로 꼼짝을 않았다.

 

급성 위경련이었다. 근래에 끼니를 자꾸 거르고, 혼자 예민해져 있던 게 아마 원인이 된 모양이었다. 술이라도 먹은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울렁거리는 시야로 시라부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진짜 멍청이도 아니고.”

……환자 구박하지 마.”

아프면 병원을 가든지 왜 나한테 전화를 해요?”

아픈데 내가 내 힘으로 병원 가는 거 얼마나 서러운 일인데.”

애냐고, 진짜.”

 

 

말로 씨름할 기력도 없어 나는 마른 숨을 뱉어내고 눈을 감았다. 말은 저렇게 밉게 해도 걱정 된다고 후다닥 달려와 준 시라부가 내심 고마워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라부는 여전히 뭔가 못마땅해 보인다.

 

 

그래도 너, 내가 걱정되긴 했나보다?”

걱정은 무슨……. 나 죽겠네, 울고불고 소리 지르는데 안 가고 배깁니까?”

아닌데에. 아까 절박했던 목소리를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아픈 거 뻥이죠? 빨리 일어나서 집에나 가요.”

 

 

시라부가 링거를 뺄 기세로 일어섰다. 나는 한손으로 시라부의 옷깃을 붙잡았다. 붙잡는다고 붙잡힐 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좀 봐준다. 참아야 하는데 자꾸 입 밖으로 비죽 웃음이 샜다.

 

아마도 근래에 카와니시 때문에 온통 스트레스를 받은 내 몸뚱이가 이제 적당히 땅 파라고 내 배를 쿡쿡 찔러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조금 후련했다. 카와니시도 나 때문에 이렇게 앓은 적이 있을까. 지금이야 다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말로 뱉고 나면 몇 배의 속도로 빠르게 선명해지는 터라, 사실 맘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후회해봤자 늦었다. 시라부의 말대로 이렇게 후회하게 될 거 차라리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들이대볼 걸 그랬다. 그래, 카와니시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걔 때문이죠?”

 

 

침대에 걸터앉아서 문득 시라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피곤한 눈으로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어. 신경 끄라고 했으면 알아서 잘 좀 하던가.”

 

 

짜증을 부리는 뒷모습이 조금씩 흐려진다. 너무 아파서 시력까지 멀어지나 싶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내 쪽에서 반응이 없으니 이윽고 시라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물감처럼 번진다. 그렇게 울고도 또 울 힘이 남아있었는지, 내 얼굴에는 졸졸 가느다란 물길이 텄다.

 

 

……아 좀.”

……미안.”

환장하겠네. 왜 우는데 대체.”

그러게.”

좋아해요?”

…….”

카와니시 타이치, 좋아하냐고요.”

 

 

시라부가 정곡을 찌른다. 아마도 내 속에서 곪아 썩어가고 있는 내 감정을 구원하기 위함일 것이다. 시라부는 예전부터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입에서는 단 한 번도 밖에 내뱉지 못했던 말들이 꾸역꾸역 솟아나왔다. 도무지 내 힘으로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꽁꽁 숨겨둔 것들이 목소리로 구체화되어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좋아해.”

 

 

시라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나는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타이치를 좋아해…….”

 

 

 

 

 

Allegro, Moderato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나는 흔히 말하는 쉬운 사람이었다. 혹자는 내가 사기당하기 딱 좋은 타입의 인간이라고도 표현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허술하진 않았다. 유들유들하고 잘 웃고, 장난도 잘 받아주고 잘 속아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에도 학과 엠티를 간다든지 주점을 한다든지 하면 나는 주로 수습 담당이었다. 나이나 학번 같이 시시콜콜한 문제를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후배들에게도 편한 선배였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도 했다. 그럼에도 굳이 내 깊은 속 얘기를 꺼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무리에서 은근히 겉돌 때도 있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적당히 만족하며 살았다. ‘쉬운 사람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내 성격 덕분에 나는 원치 않아도 발이 넓어졌다. 나를 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연락도 술자리도 자주 했다. 사람들은 나를 편하게 여겼다. 나는 그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딱히 마음을 나눈다거나 서로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종종 만나서 실없는 농담 따위를 할 수 있는 관계만 있어도 나는 충분히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카와니시 타이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놓은 내 인간관계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누군가에게 정도 이상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떨리고 기분 좋은 일인지 나는 뒤늦게 알았다. 카와니시도 어떻게 보면 나만큼이나 서툴렀다. 무작정 좋아한다고 내게 고백했던 그는 그 이후로도 꾸준히 내게 직진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직접적인 애정을 받아본 적 없던 나는 난생 처음 겪는 낯선 감각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녔고, 겨우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표현할 방법을 몰라 허둥지둥했다. 기회는 놓치면 다신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아마도 그것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응급실에서 맞은 주사는 효과가 아주 뛰어났다. 급성 위경련은 스트레스성이 짙었으므로 당분간은 편안하게 쉬는 게 좋을 거라던 간호사의 말에 따라 나는 어제에 비해 정상적인 몸 상태를 하고도 오늘 결근했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시라부가 말렸다. 학교 나왔다가 또 아프면 그 뒷수습은 내가 하라고요? 시라부는 귀찮아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사온 죽이나 잘 데워 먹으라는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아프고 서러워서 엉엉 울며 쏟아냈던 말들을 시라부는 다행이 모르는 척해주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던 내게 시라부는 대신 경멸스러운 표정을 했다. 뭐랄까, 자기가 남 얘기 퍼다 나르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해져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미안할 짓 좀 하지 말라고 시라부가 퉁을 놓았다. 나는 그를 배웅하면서 비죽 웃는 것밖엔 하지 못했다.

 

푹 자고 일어나니 한결 개운했다. 어제 겪었던 끔찍한 고통 따위 이미 잊은 지 오래라 나는 일어나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죽을 꺼내 렌지에 데워 먹었다. 슬슬 반도체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교수님한테도 말씀드렸고 오늘 내 담당 업무들은 전부 시라부가 해주기로 했으니 딱히 걱정할 것은 없는데, 그냥 내 맘속에 한 사람이 걸렸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쉬라는 간호사의 말이 또 불쑥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털고 동시에 카와니시를 털어냈다. 오늘은 푹 쉬고, 나중에 학교에 가서,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그를 붙잡고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꼭 마음 접고 떠난 상대 아쉬우니 붙잡으려는 모양새 같아 좀 비겁하게 생각됐지만 그래도 이대로 묵히고 썩혀두느니 굳이 정돈되지 않은 말이어도 전하고 싶었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나는 어제 읽다 만 논문 뭉치를 줄줄 읽어 내려갔다. 몸 상태가 좀 괜찮아졌다고 어제는 그렇게 읽히지 않던 것들이 머릿속에 조금씩 들어왔다.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든 나는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등록되지 않아 화면에 그대로 뜨는 숫자 열한자리는 내가 보고 또 보고 수도 없이 봐서 이미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놓은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연락에 당황해서 휴대폰을 들고 받을 생각을 못했다. 목 너머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긴장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설마하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잘못 건 것은 아닐까. 잘못 걸었다고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나는 그 애에게 내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은 이미 수업이 시작됐을 시간이었다. ,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그러고도 한참 말이 없어 나는 기운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서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수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그리고 동시에 낯선 목소리가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켰다.

 

 

보고 싶어요, 선배.

 

 

숨이 확 막혔다. 누가 갑자기 기도를 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보단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정지했다. 나는 짧게 들이마신 숨을 느리게 내뱉으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듣고 있어요?

……간만에 하는 말치고는 너무 간지럽지 않냐.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부러 비장함을 담아서 말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한 내 나름대로의 노력이었지만 사실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엔 저쪽에서 말이 없다. 너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면 좋겠다.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너는 휴대폰에 눈이 달렸냐?”

목소리 엄청 쌩쌩한데요. 아파서 결근했다 그래서 뭐 얼마나 아픈지 궁금해서 전화했는데.

아니거든. 절대 아니거든? 어제 죽는 줄 알았거든?”

 

 

건너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신기했다. 보름 동안 말 한 마디 않았을 정도로 우리 둘은 냉전 중이었다. 진짜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쩍고 그렇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란 걸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병문안 가도 돼요?

수업이나 들어가. 너 내가 결석 처리해버린다.”

한 번만 봐줘요. 조교님 병문안인데 기특하잖아.

카와니시.”

다른 거 요구하지 않을게요. 얼굴만 보게 해주면 안 돼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 지금 선배가 너무 보고 싶은데.

 

 

카와니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감했다. 원체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수화기 너머로도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간지러운 웃음이 났다. 보고 싶어요. 그 한 마디에 혼자 끙끙 앓고 걱정하고 있던 것들이 싹 날아갔다. 좀 부끄럽지만 울컥해서 눈물도 핑 돌았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카와니시를 만났을 때와는 완연하게 다른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딘지 알아? 우리 집.”

 

 

짧은 대화가 끝나고 통화는 종료되었다. 나는 조금 초조해져서 침대 위를 뒹굴었다. 한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녀석이 내가 아프다는 말에 당장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아픈 것도 괜찮네. 어제는 그렇게 더부룩하고 뒤틀리던 뱃속이 이제는 미동조차 없다. 나한테 필요한 약은 아마도 너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시라부가 내게 말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 * *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전화가 끊기고 삼십 분이 지나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처음 오는 길이라 조금 헤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벗어던지고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한 뼘 정도 높은 곳에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말간 눈동자가 있었다. 속으론 보자마자 반가워서 우는 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예전처럼 위아래로 격동하던, 그래서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던 감정은 어느새 잔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카와니시는 예의 그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없어보였다. 한참 말없이 서로를 감상하듯 마주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나를 지켜보다가, 카와니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은근하게 울려 퍼진다.

 

 

……제가 원래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가볍게 떨렸다.

 

 

근데 선배한테는 그게 안 돼요. 미련 버리자고 다짐해도 눈 떠보면 나, 다시 선배 앞에 서있더라고요.”

…….”

그러니까 옆에만 있게 해줘요.”

 

 

이마를 짚은 손이 부끄러운 듯 뒷목을 쓸다가 허공으로 툭 떨어진다. 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저 두 눈에,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고 짓는 저 표정이 정말 심각하고 한없이 진지해보여서 미안하게도 좀 웃음이 났다. 내가 홀로 앓았던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한 흔적이었다.

 

나는 왜 망설이고 있었을까. 처음엔 다 서툴 수밖에 없다는 걸 어째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어떤 감정보다 더 명확한 그 불꽃을 왜 애써 외면하려 했었던 건지 저 멀리서 무언가가 물처럼 밀려왔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기묘한 기분에 나는 또 허둥댄다. 하지만 또 허무하게 놓치지 않으리라 몇 번이나 다짐했던 나는 끝을 얼버무려서라도 말을 해야 했다.

 

 

좋아해, 타이치.”

 

 

처음으로 불러보는 이름의 떨림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나는 습관처럼 마주잡은 손가락을 움지럭거렸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카와니시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당황스러울 것을 안다, 나도 역시 그랬기에. 하지만 나는 너로부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들기부터 하는 것도 전부 너에게 배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굳이 재고 나누고 판가름할 어떤 이유도 근거도 없는 법이었다.

 

 

……. 그러니까 네가 싫어서 피했던 건 아니야. 나도 나대로 좀 고민할 게 많아서……. 좀 비겁하지?”

 

 

카와니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나는 무너지려는 입 꼬리를 서둘러 끌어올렸다. 가까스로 그를 향해 빙긋 웃어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나도 네 곁에 있을게.”

 

 

그랬더니 카와니시 눈동자가 울먹울먹한다. 말하면서도 울컥해서 코가 찡해졌는데 그걸 보고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당황해서 한 발 물러났다. 기어코 카와니시 눈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또 다시 허둥대기 시작했다.

 

 

, . 왜 울어 갑자기. ?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울지 마라, ? 타이치.”

……거짓말 아니지.”

 

 

카와니시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입술까지 꼭 깨물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그 뺨을 닦아주면서 서둘러 고개만 끄덕였다. 훅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가장 가까워진 틈으로 옅게 체취가 났다. 체취보단 그가 즐겨 쓰는 바디 워시라든지 로션 같은 것의 냄새일 터였다. 등에 카와니시의 손이 바싹 붙었다. 나를 빈틈없이 꽉 끌어안고서 카와니시는 내 귓가에 대고 울먹였다.

 

 

진짜에요……?”

 

 

나도 눈가가 발개진다. 그 떨리는 목소리에 그동안 카와니시가 겪었을 온 풍파가 그대로 깃들어있어 더 그랬다. 나는 대답 대신 카와니시의 등을 꼭 안아주었다. 덩치는 훨씬 크지만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 위를 천천히 다독였다. 훌쩍, 코를 먹는 소리가 들려 와중에 웃음이 터졌다. 늘 어른스럽고 선을 지킬 줄 알았던 카와니시는 내 부끄러운 고백 한 마디에 무너지는 애였다.

 

병문안을 온다고 해놓고 집안에는 발도 들이지 않은 채, 나와 카와니시는 현관에 덩그러니 껴안고 서있었다. 그때만큼은 누군가가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시시한 걱정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속에서 무언가가 사정없이 터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폭죽이었다.

 

 

 

 

 

* * *

 

 

 

 

 

내 얘기를 들은 시라부는 대뜸 혀부터 찼다. 그러고는 결국 그렇게 될 거면서 뭘 그렇게 혼자 앓고 난리를 쳤느냐며 나한테 핀잔을 주었다. 그러게. 그 말에 나는 대꾸할 바를 찾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웃다가, 조금 부끄러운 목소리로 나는 시라부에게 말했다. 이제 너한테 폐 끼치지 않을게. 그 말을 듣고 시라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실컷 싸우고 징징대며 전화할 내가 눈에 선하다나 뭐라나. 차마 반박할 수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일단은 기분이 좋아서 방긋했다.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느냐는 내 추궁에 카와니시는 결국 순순히 털어놓았다. 교수님께 직접 여쭤봤다고 한다. 카와니시는 이미 방학 때 우리 연구실 인턴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던 데다가 교수님의 무한한 애정을 듬뿍 받고 있던 열의 있는 학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조교의 권한으로 네 번호 열한자리를 몽땅 외고 있었노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한바탕 눈물 뚝뚝 흘리고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한 시시한 고백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나는 카와니시가 그토록 밝게 웃는 모습을 그 날 처음으로 보았다.

 

특별하게 바뀐 것은 없었다. 카와니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늘 나를 찾아왔고, 여전히 학문적 호기심이라는 핑계를 주렁주렁 달아서 나를 만났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슬쩍 찔렀지만 그럴 때마다 카와니시는 침묵하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결국 내가 먼저 뭘 그렇게 자꾸 보고 있냐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 자연스레 카와니시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올라가고 있어요.

 

나는 늘 카와니시를 기다렸다. 카와니시는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매일매일 달랐기 때문에 그 기다림의 시간도 늘 바뀌었다. 신기하게도 바뀌지 않는 게 있긴 하더라. 같이 하교하기 한 시간 전, 카와니시가 오길 기다리는 콩닥콩닥한 마음 같은 거.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명확하고 선명한 감정이었다. 그래, 특별히 바뀐 것 없는 관계였다. 늘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 전전긍긍하던 내가 사라졌다는 것만, 그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였다.

 

 

기말 프로젝트 나왔던데요.”

 

 

함께 하교하던 중에 카와니시가 불쑥 물었다. 2차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그런 걸 주느냐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얼굴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다 교수님 권한이다. 나 같은 일개 조교가 무슨 힘이 있겠어.”

일개 조교치곤 권력이 대단하지 않나요. 과제고 시험이고 내 거만 점수 다 깎아놓고.”

다시 올려줬잖아.”

내가 따져서 올려준 거잖아요.”

그거야 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랬지.”

 

 

내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카와니시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나는 두 발 앞서 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꽤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뭔가 말실수를 했나. 좀 당황해서 어물어물거리는 내게 카와니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늘진 얼굴로 묻는 말이다.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요?”

뭐야, 배우다니? 나는 진심이라고.”

선배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면 뭐 잘못 먹었나, 어디 아픈 건가. 왜 갑자기 안하던 짓해요?”

아하, 싫다 이 말이지?”

누가 싫답니까?”

 

 

다시 걸음이 빨라진다. 카와니시 보폭을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으며 우리는 흡사 다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구 쏟아냈다. 그동안 혼자 마음고생 시킨 게 미안해서 좀 잘해줄까 싶었는데 카와니시는 그럴 때마다 얼굴을 빳빳하게 굳히곤 했다. 카와니시는 생각보다 부끄럼이 많았다.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나한테 퉁명스럽게 말을 던져놓고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귀 끝이 발갛게 물들어서는카와니시는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다. 술 먹을 때도 그랬고길쭉한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나한테 그렇게 저돌적으로 굴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와니시는 수줍어했다.

 

이제는 그저 그런 애매한 사이도 아니고, 적당한 애정 표현 정도는 해줘야 일방적으로 한쪽이 지치는 일이 없을 거라던 시라부의 조언을 나는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면 카와니시는 종종 목석처럼 굳었다. 처음엔 나도 많이 창피하고 그랬는데 카와니시의 반응을 보고 나니 이제는 슬슬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나보다 더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웠던 카와니시도 알고 보니 영락없는 이십대 초반의 남자애였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것도 역시 그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결국 발목이 잡혔다. 자기 프로젝트 도와달라고 카와니시가 날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카와니시네 자취방까지 끌려갔다. 가는 도중에 나는 내내 카와니시에게 말을 걸었다. 조교한테 너무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 아니냐고. 네 과제는 네가 하라고 나름대로 따끔하게 충고를 했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대신 맛있는 거 해주겠다고 카와니시가 대꾸했다. , 또 라면? 그렇게 묻는 내 얼굴에 대고 카와니시는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내 이마 위에 가볍게 뽀뽀했다. 나는 당황해서 파드득 뛰어올랐고 이번에는 카와니시가 킥킥 웃었다.

 

카와니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맨날 보던 사람을 못 보니까 정말 딱 죽겠다 싶어서 반쯤은 자포자기 상태로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할 생각이었단다. 더구나 내가 아파서 결근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천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그랬다. 그래서 막상 나한테 수줍은 고백을 듣고서는 혹시 자기가 환청을 듣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쯤 되니 사람이 미쳐서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했다고.

 

처음 카와니시와 만난 날을 제외하면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작은 집은 그래도 제법 낯이 익었다. 문득 그때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조금씩 붉어진다. 술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은 일이 영화 필름처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안 들어와요?”

 

 

그렇게 묻는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카와니시는 벌써 탁상부터 차렸다.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더니 오자마자 밥부터 먹는 거냐는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카와니시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맛있는 거, 해주려고요.”

 

 

그러고는 찬장에서 뭘 뒤적거린다. 자취생의 운명과도 같은 인스턴트식품 봉투들이 가득 들어있다. 뭐야, 라면 맞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카와니시가 홱 뒤를 돌아 나를 째려보았다. 마치 그런 거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표정이다. 시선은 나에게 고정시켜놓고 찬장에서 꺼내는 건 크림 소스였다. 작업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카와니시가 이번엔 서랍을 열었다.

 

 

파스타 좋아해요?”

, 뭐야.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자신은 없지만.”

못 먹을 거 만드는 거 아니지?”

그 정돈 아니거든요.”

 

 

제법 본격적이다. 서랍에서 파스타면이 나왔다. 바로 냄비에 물을 올리고 불을 켰다. 타닥타닥, 하도 오랫동안 뭘 해먹질 않아서 이제는 낯설어진 소리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잠깐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카와니시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었어요?”

뭐가?”

나 피했을 때요.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면서.”

 

 

그 얘기는 왜 또 꺼내고 그래. 나는 확 말문이 막혔다. 차마 시라부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듣고 오만 상상을 하는 게 부끄럽고 쪽팔려서 피했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탁자 위만 바라보는 나를 눈치 채고 개수대 앞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카와니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비밀이에요?”

어어……. .”

왜요?”

그런 게 왜 궁금해.”

선배 아팠던 거랑 관계가 있나 싶어서요.”

 

 

그 말에 좀 마음이 동했다. 아마도 내가 위경련 때문에 하루 결근했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그 사이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혹시 자기 때문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하는 속내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좀……. 관련이 없다고 말하기도 그런데, 아무튼 네 탓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내 고민에 카와니시도 한 몫 크게 했다. 물론 시라부의 탓이 훨씬 크긴 했지만. 아니, 아니. 그건 내 탓이었다. 고작 말 한 마디에 온갖 상상을 더해 심지어 꿈까지 꿔버린 내 잘못이 가장 컸다.

 

 

대답이 영 수상한데요.”

 

 

눈앞에 모락모락 김이 피는 접시가 놓였다. 가운데가 살짝 오목하게 들어간 접시 안에 제법 솜씨 있게 스파게티가 담겼다. 야채도 손질이 깔끔하고 새우와 베이컨 등 일반적으로 스파게티에 들어가는 재료는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모양새는 꽤 그럴싸하다. 나는 카와니시가 되묻는 말에 대답을 회피하면서 순수하게 감탄사를 뱉었다. 포크와 수저, 그리고 직접 담근 것으로 보이는 피클까지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니 어디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 부럽지 않은 식탁이 완성되었다. 나는 포크로 피클 하나를 집었다. 당장 그것을 아삭 깨물면서 물었다.

 

 

이건 뭐야. 산 거야?”

엄마가 보내주신 거예요.”

 

 

맛있다는 뜻으로 나는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자리에 앉으면서 피식 웃은 카와니시가 나를 똑바로 보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집요하기로는 아마도 카와니시를 따라갈 자가 없을 것 같다. 비장하게 포크를 들었지만 차마 눈앞에 놓인 스파게티를 먹지는 못하고 나는 우물거렸다. 그게 수상해보였는지 카와니시가 더 세게 추궁한다. 나는 억울한 표정을 하고 대꾸했다.

 

 

시라부가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선배네 연구실에 있는 사람이요? 저번에 출석 대신하러 왔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카와니시는 이번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가 포크를 든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면을 휘릭 건져서 수저에 얹고는 한입 크게 물었다. 나도 느릿느릿 따뜻한 스파게티를 먹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게, 미국 출장 갔을 때인데. 나보고……, 널 좋아하냐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카와니시 특유의 꿰뚫는 듯 예리한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담았다. 나는 한입밖에 먹지 않은 파스타를 바라보고, 포크를 물고서 우물쭈물 거렸다. 카와니시는 아마도 내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 너랑 손잡을 수 있냐고…….”

그래서요?”

?”

대답 했어요? 긍정이에요, 부정이에요?”

 

 

또 뭘 저렇게 진지하게 정색하고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그게 부정이었다면 내가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 카와니시가 탁,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는 괜히 쫄아서 움찔했다. 턱까지 괴고 본격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이미 배고픔 따윈 싹 잊은 얼굴이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날 피했다고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분위기가 거의 취조실 안이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주눅 들 필요가 있나 싶었다. 뭐라고 항변이라도 하려는 차에 나를 보고 씩 웃고 있는 카와니시의 얼굴을 보니 울컥했다.

 

 

너랑 키, , 키스할 수 있냐고.”

호오.”

 

 

기세 좋게 외쳤다가 카와니시의 능수능란한 대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어떤 말을 해도 내가 밀린다. 얼굴이 화륵화륵 달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울 지경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카와니시는 그러건 말건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그랬어. 차마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끝이 너무 시시한데. 왜요, 나 보면 막 나랑 손잡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랬나?”

조용히 해.”

 

 

나는 전투적으로 접시에 포크를 꽂아 파스타를 둘둘 말았다. 차마 카와니시를 바라볼 순 없어서 나를 빤히 향하는 노골적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접시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걸 이렇게까지 숨겨야 하나 싶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하나 없는데. 사실 아주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인 건 맞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뭐 달라질 게 있는가. 카와니시라면 한바탕 거하게 웃고 말겠지만, 그리고 아마도 그 사실은 꽤 오랫동안 나를 놀려 먹기 위한 화젯거리로 활용되겠지만 그래도 못할 것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떠랴 싶은 생각이 차올랐다.

 

 

, 그리고.”

그리고?”

 

 

나도 창피한 것을 아는 인간인지라, 당당하게 너랑 그렇고 그런 거 하는 꿈을 꿨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깊게 숙이고, 흡사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와 닮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때문에……. , 너랑…….”

나랑?”

그러니까, 꿈에서…….”

 

 

나는 점점 작아진다. 목소리도 따라서 줄어들었다. 카와니시 혼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랑 잤어.”

 

 

지금 내 얼굴은 아마도 용암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새빨갛게 익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까처럼 내 말끝을 따라하면서 깐족대는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없어 나는 또 괜히 불안해졌다. 나는 딱 죽고 싶은 심정으로 슬쩍 눈만 들어 카와니시를 살폈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카와니시의 표정은 거하게 굳어있었다. 뭔가 아주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그냥 나는 나가서 죽는 게 빠르겠다.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나보다. 나를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거절해놓고 그런 민망한 꿈을 다 꾸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뭐라고 해도 좋으니 말 좀 해줘. 나는 속으로 간절하게 부탁했다.

 

카와니시가 눈알을 굴린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보기를 포기했다. 망했다. 눈에 띄게 가라앉아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깰까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역시 썰렁하더라도 농담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카와니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포크를 쥔 손이 붙잡혀 휙 딸려 올라갔다. 거의 동시에 마디가 굵은 손가락에 턱이 잡혔다. 우당탕탕 하다가 하마터면 탁자가 엎어질 뻔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입술에 닿은 따뜻한 촉감에 나는 저만치 의식을 날려버렸다.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가 불편하단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카와니시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스파게티 먹다 말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를 밀어내지 못한다. 조금 급하게 입술을 빨아들인 카와니시의 혀가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기라도 하듯 조금 우악스럽게 핥아낸다. 카와니시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고개가 꺾였다. 턱이며 팔뚝을 쥔 아귀힘이 세서 나는 남는 팔로 카와니시의 어깨를 받쳤다. 아랑곳 않고 벌어진 입 사이로 익숙하게 들어온 따뜻한 살덩이가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갔다. 이상한 감각에 내 발끝이 바짝 섰다. 나는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처음 겪는 경험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기도 잠시, 나는 갑자기 울컥했다.

 

 

, 잠깐만.”

 

 

세게 가슴팍을 밀쳤더니 카와니시는 손쉽게 떨어졌다. 아직 채 다 비우지도 못한 그릇들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나는 침이 샌 턱을 손등으로 박박 문지르면서 뾰족하게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잘하는 건데?”

이미지 트레이닝 했어요.”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기어코 카와니시가 나를 바닥에 깔아 눕혔다. 이게 뭐야!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아! 절박하게 외쳤지만 입 밖으로 새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의 도막이었다. 내가 좀 놀란 걸 눈치 챘는지 아까보다 좀 더 부드럽게 나를 달래던 카와니시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아주 지긋하게.

 

 

싫어요?”

 

 

이건 반칙이다. 잔뜩 당황한 나와 다르게 여유 만만한 그 표정이 너무 얄미워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지 말라고 카와니시가 내 팔목을 부드럽게 쥔다.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는 그 다정한 눈빛을 도무지 받아낼 용기가 없다. 나는 이대로 지구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으면 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셋만 셀게요.”

 

 

우리 밥은 먹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대신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소리만 내 온몸이 북이라도 된 양 둥둥 울렸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이마에 촘촘한 땀방울을 매달고, 카와니시가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

 

 

나는 순식간에 황망해졌다.

 

 

.”

 

 

그럼에도 카와니시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붕어처럼 입술만 빠끔거렸다. 아아, 대답하지 못한 나는 결국,

 

 

하나.”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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