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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WORD : 평행세계, 환생

* 글에 나온 지명 및 특정 명칭들은 실존하는 것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일본 미야기 현에서 발견된 고서古書를 바탕으로 각색한 책입니다. 현존 및 고대 언어에서 발견되지 않은 문자들로 적힌 부분은 의역하였습니다.

 

 

 

 

들어가는 글

 

 

일기를 쓰는 것은 제가 이 세상에 난 이후로 처음이라 조금 어색합니다. 벌써 100년이 넘게 인세를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쓰고자 마음먹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게, 이토록 어렵고 애틋한 일인 줄을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한 자씩 적어보자 생각한 것은 무려 보름이나 전이었는데, 이제야 첫 장을 펼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는지 합니다.

 

기록, 저에겐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일기가 나와 당신이 머문 이야기를 세상에 남길 유일한 증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 미래, 또 다른 세상들을 순회하며 살아갈 당신에게 이 일기 속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현실성이 없어 그저 소설 속의 이야기로 치부될 지라도 저는 이 일기를 꼭 당신의 품에 남겨주고 싶습니다. 이기적일는지도 모르지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결국엔 잊을 당신의 머릿속에 내 이름 네 자 정도 새기는 것은 어쩌면,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욕심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분노한 신도, 그래서 나의 당신을 향한 갸륵한 애정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내가 서문에 적고 있는 이 짤막한 글은 당신에게 나를 소개하는 단락이기도 합니다. 이제 겨우 100년 남짓, 나는 앞으로도 내 영혼이 모든 힘을 잃고 소멸할 때까지 구천을 떠돌며 오로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 곁에 머물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이름, 그리고 내가 수 세기에 걸쳐 당신을 사모했던 이 이야기를, 부디 마지막까지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카와니시 타이치 川西太一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첫 번째 장

 

 

연무, 구름. 그것보다 가느다란 실 같은 무언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뿌연 것은 흐름이다. 카와니시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볼 줄 알았다. 습관처럼 머리가 아파올 때면 그것들을 바라보고 넋을 놓는다. 힘을 조절할 수 없었던,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주시하는 카와니시에게 그것들이 슬며시 말을 걸어오곤 했다. 알고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알아야 했다. 카와니시는 신이 점지한, 세상의 인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였기 때문이다.

 

월요越窯에서는 매해 추수철이 다가오면 감사제가 열렸다. 이름 그대로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행사였지만 카와니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바깥의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푸짐하게 먹을 것을 늘어놓고, 꽃잎과 별빛과 풀 냄새로 치장한 수풀이나 호수나 하늘과 같은 것들을 즐기고 향유했지만 카와니시에겐 와닿지 않는 먼 세상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카와니시는 신궁神宮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신궁에서, 매년 그랬듯 카와니시는 홀로 달을 벗 삼아 차를 달여 마시게 될 것이었다.

 

 

……지루해.”

 

 

혼자 볼멘소리를 했다.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위를 굴러다니다 카와니시는 벌떡 일어섰다. 모처럼 신궁에 아무도 없을 날이다. 규율이니 법도니 하는 재미없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다. 신궁은 왕이 사는 커다란 궁궐만큼이나 컸다. 정원도 있고 작은 연못도 있고 소담하게 만들어둔 정자도 있었다. 그러니 산책이라도 나갈 참이었다. 어차피 오늘, 신궁 안에는 신궁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리 없을 테니 딱히 거동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카와니시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이곳에 머무는 시동이나 하인도 모두 바깥으로 나가 복도가 고요했다. 조금 신이 났다. 이 넓은 신궁 내부가 온통 자기 것만 같았다.

 

카와니시 타이치는 올해로 열네 살이다. 일 년 뒤 생일이면 어엿한 신궁의 일원이 된다. 누군가는 기쁘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은 사실 카와니시의 팔에 새로 묶일 족쇄나 다름없었다.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을 방에 갇혀야 할지도 몰랐다. 신궁의 잡일을 도맡아하는 시동으로 위장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카와니시의 이후 거처 문제는 신궁의 관리자인 대사제가 결정할 일이지만, 카와니시는 모든 것에 무뎠던 터라 그것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위협을 끼칠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카와니시에게 신궁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한 장소였다. 딱히 그렇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빈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 갇혀 지내야 할 이유를 납득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싶은 어린 소년의 충동은 아주 질겼다. 대사제는 그런 카와니시를 엄격하게 고립시켰다. 아니, 그녀가 카와니시를 고립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카와니시를 꾸준히 돌봤다. 애정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카와니시가 혼자가 된 것은, 나면서부터 그가 가지게 된 기이한 양의 신력 탓이었다.

 

월요는 완벽한 제정분리 국가다. 신궁은 제를 대표하는 장소로, 대사제를 중심으로 신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월요의 왕과 어전 회의의 결정을 감시하고 제한할 수 있다. 그 주요 구성원들은 대사제를 포함해 모두 여성이다. 신력은, 오로지 여성의 대로만 이어지는 진기한 능력이었다.

 

카와니시는 사내아이였다. 신궁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던 어머니로부터 잉태된 건강한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신력을 가졌다. 본래 절차대로라면 남성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이곳 신궁에서 태어나자마자 쫓겨나야 했지만, 그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방에 가둬진 채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와니시가 가진 신력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인을 잘못 찾은, 길 잃은 힘에 불과했다. 본래 카와니시와 함께 세상에 태어난 그의 누이의 것이어야 했다. 남성이 신력을 받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누이는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사람들은 그 죽음을 저주라고 불렀다. 저주를 잉태한 죄로 카와니시의 어머니는 신궁에서 아사餓死했다. 한 끼를 먹지 못하고, 제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의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물만으로 두 달을 버티다가 죽었다. 물론 카와니시는 그 둘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곳에서 카와니시는 멸시의 대상이다. 언제부턴가 카와니시 본인도 그 사실을 수긍했다. 나이 오십 먹은 대사제만 카와니시를 챙겼다. 그러나 고작 열네 살의 소년은 그녀의 관심이 오로지 이 신궁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안다고 딱히 더 외로워지거나, 서글퍼지거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누구를 비난한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카와니시는 지금보다 어렸던 때에 깨달았다.

 

 

 

신궁 뒤뜰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그 가운데에 섬처럼 뜬 곳에 정자가 하나 서있는데 이 따분한 신궁 안에서 유일하게 재미있는 소문이 가득한 장소였다. 특히나 흐름에 예민한 카와니시에게 더 그랬다. 카와니시는 가뿐하게 다리를 밟았다. 예쁜 염료로 칠해진 나무다리는 정자와 연못 주위를 그러안듯 감싼 갖은 수풀, 꽃들과도 퍽 어울렸다.

 

그것들을 흐름이라 이름붙인 것은 카와니시다. 이전까지 카와니시의 사례가 기록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카와니시의 시야에는 인간의 세상 말고도 다른 것들이 보였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아우르듯 연결하고 있는 뿌연 줄은 이름 그대로 허공을 흘러다녔다. 그것에는 여러 목소리가 담겨있다. 오직 카와니시만이 보고들을 수 있는 흐름의 목소리에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목판에 찍힌 듯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카와니시는 인간들이 그것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신궁에서 불길한 존재로 여겨지는 카와니시를 그냥 두는 것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리라.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공생이었다.

 

이 연못은 과거 전쟁으로 신궁의 탑이 불탄 자리에 생겼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흐름의 빛이 진했다. 어떤 것은 미약하게나마 색깔도 가졌다. 카와니시는 이곳에 나와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람이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했으므로 번번이 대사제에게 출입을 금지당한 장소였다. 오늘은 아무도 그를 막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 장소는 오롯이 카와니시를 위한 곳이다. 마침 푸르고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가 포로롱 연못가를 날아다녔다.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앉은 채로 카와니시는 연못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 감사제는 유난히 떠들썩했다. 카와니시가 올해 풍년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공표한 것은 대사제였다. 카와니시는 결코 바깥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재미없어. 카와니시가 투덜거렸다. 깊어진 눈동자로 다른 흐름들을 찾는다. 신궁 뒤를 감싸고 있는 산에서 커다란 산신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고, 월요의 북쪽 경계 끝, 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이 불에 탔다. 온갖 것들이 카와니시의 눈을 통해 스며들었다. 아직 조절이 힘들어 결국 카와니시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그것들은 입을 다문다. 시끄럽게 조잘대던 것들이 훅 꺼지고 나면 고요가 찾아든다. 그래야 했다.

 

눈앞에 금빛 실이 떨어졌다. 카와니시는 분명히 눈을 감고 흐름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연무보다 색이 진하고 가느다란 것이 눈에 보였다. 흐름의 요새에서 빠져나와 카와니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정자의 꼭대기에서 흘러내려온 것이었다. 뒤늦게 누군가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 도와줘…….”

 

 

카와니시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손으로 기둥을 붙잡고 허리를 내밀어 위를 바라본다. 카와니시 또래의 소년이 기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다. 카와니시는 황당한 표정을 했다. 저기는 어떻게 올라간 거야. 질문을 하기 전에 얼른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궁 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대화해선 안 된다. 대사제가 카와니시에게 엄격하게 일러둔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양팔을 길게 뻗어 품을 벌렸다. 달달 떨면서 카와니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카와니시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난간을 밟아 올랐다. 훅 높아진 시야에 뒷목이 아찔했다. 발을 넓혀 중심을 잡고 다시 카와니시가 손을 뻗는다. 양손으로 와락 기와의 지지축을 붙들고 엎드린 소년이 조심스럽게 카와니시에게 닿았다. 두 개의 시선이 선명하게 부딪친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금색 실이 와르르 번개처럼 쏟아졌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밤을 밝히는 횃불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이었다. 소년의 막직한 몸을 받아든 카와니시가 난간에서 미끄러졌다. , 나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찌르르 뒤통수에 통증이 일었다. 몸을 웅크리고 카와니시의 품에 안긴 소년은 겁에 질린 듯 눈을 꼭 내리감고 있었다.

 

 

……안 죽었으니까 그만 내려올래요?”

 

 

결국 카와니시가 입을 열었다. 소년이 내리누르는 무게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뾰족하게 솟은 머리카락이 자꾸 턱을 간질이듯 찌르는 것도 문제가 됐다. 팔랑거리는 옷깃을 슬쩍 당겼다. 그제야 소년이 고개를 들고 카와니시를 바라본다. 훨씬 더 가까이서 마주친 눈동자는 연한 회갈색을 띠었다. 아까처럼 금색 실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 카와니시가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고마워.”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소년이 말간 얼굴로 그저 웃는다. 대답할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카와니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이 소년과 말을 나눈 것을 대사제가 알면 또 한동안 방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일단, 소년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그러나 말문이 막힌 쪽은 카와니시였다. 소년은 다짜고짜 얼굴을 쏙 내밀고 카와니시에게 물었다. 이름까지 알려져선 곤란하다. 카와니시의 존재는 바깥에 알려져선 안 됐다. 망설이는 표정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나 채근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대신 다시 예의 발랄한 웃음을 지었다.

 

 

부탁 하나만 할게.”

…….”

오늘 나 만난 거, 비밀로 해줘. 알았지?”

 

 

카와니시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비밀로 해달라는 뜻은 즉, 그쪽에서도 카와니시와 만난 일을 누군가에게 발설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카와니시는 당황해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런 곳엔 왜 올라갔어요?”

이게 날아가서 꼭대기에 걸렸어. 소중한 거라 잃어버리면 안 돼.”

 

 

붉은 비단으로 만든, 폭이 넓은 끈이었다. 끝자락에 금색 자수가 예쁘게 수놓아져있다. 혹시 아까 봤던 금색의 실들은 저것이었을까. 카와니시는 멍하게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그 새에 소년은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마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서 뭍에 도착한 소년이 우뚝 멈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폼이 나가는 길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직하게 한숨을 또 뱉어내고 카와니시도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뒤로 다가가 팔을 뻗었다. 무심코 흰 손등을 붙잡으려다 머뭇거린다. 결국 소년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그가 돌아본다. 이번엔 금색 실이 아니라 눈앞에서 팡팡 불꽃이 튀었다. 폭죽이라고 하던가. 마주친 시선 사이로 새파랗고 빨갛고 하얗고, 아무튼 정신없는 것들이 시야를 뒤덮었다.

 

 

괜찮아?”

 

 

소년이 걱정스레 묻는다. 가까워진 얼굴을 피하려 뒷걸음질 치면서 카와니시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곳은 이쪽이에요.”

 

 

결국 신궁 밖으로 나가는 쪽문까지 그를 안내했다. 카와니시는 오늘만 해도 꽤 많은 규율을 어겼다. 그러나 들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름도 모를 그 소년을 보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또 올게.”

그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땐 꼭 이름, 알려줘.”

…….”

 

 

카와니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는지 소년은 해사하게 웃으며 퇴장했다. 신궁이 고요해진다. 이곳은 다시 아무도 없는 장소가 되었다.

 

카와니시는 소년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앞으로 쏟아지던 금빛의 실이나 허공을 가득 에우던 형형색색의 빛깔들은 그가 세상에 나서 처음 본 것들이었다. 무얼까. 흐름은 아니다. 금빛 실 역시 흐름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카와니시는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뒤로 카와니시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대체 뭐였을까. 그 예쁜 것들은. 옅은 고민을 하다가, 소년의 이름을 속으로 물으며 카와니시는 쪽잠에 빠졌다. 눈이 아주 피로했던 탓이었다.

 

 

 

 

*

 

 

 

 

내내 신궁 안에서만 지낸 카와니시는 당연히 신궁 밖의 일엔 어두웠다. 종종 근처를 떠도는 흐름들을 통해 바깥의 일들을 엿보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더구나 흐름을 보는 눈을 여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라 카와니시는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굳이 그러려하지 않았다. 신궁 안의 일로도 카와니시는 충분히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렸으므로. 제 방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 같고, 대사제가 머무는 본당은 까마득하게 커다랗고, 신궁은 이 세상에서 가장 광활한 건물이라고 여겼다.

 

특히 월요의 왕은 누구이고 신료들은 어떤 사람이며, 그들이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와니시와는 완벽하게 분리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카와니시가 할 일은, 대사제의 명령으로 흐름을 읽어내고 그녀와 이 땅의 왕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카와니시가 직접 세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없을 거였다.

 

본당 중앙에 앉아 카와니시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연못과 함께 흐름의 농도가 강해지는 곳에 위치한 본당에서 카와니시는 대사제의 명령을 수행하곤 했다. 이곳은 대사제와 신관 몇을 제외하곤 출입금지 구역이다. 신성한 장소라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카와니시는 이제 안다. 그러나 굳이 묻거나 아는 체하지 않는다. 대사제는 카와니시가 똑똑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게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인 줄은 모르고.

 

 

이제 그만할래요.”

 

 

이른 아침부터 불려와 호되게 당했다. 카와니시는 대사제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눈알이 시큰시큰하다. 뒤늦게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흐름을 볼 때면 눈동자 위로 뿌옇고 얇은 막이 생기는데, 그게 오래 지속되면 눈이 피로해졌다. 좀 더 가면 이내 두통이 오고, 마침내는 눈에서 피를 쏟기도 했다. 피가 난 것은 딱 한 번이다. 카와니시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한계를 시험해보겠다며 대사제가 무리하게 눈을 열도록 시킨 것이다. 카와니시는 그때 자신을 둘러싼 채 구경하듯 바라보던 신관들의 시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눈에서 핏물을 왈칵 쏟아내는 카와니시를 보고 그들은 마치 괴물을 보는 양 겁에 질린 표정을 했다. 그 이후로 카와니시는 오랫동안 흐름을 보는 것을 꺼려했다. 가끔씩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돌아보는 것 외에는 능력을 쓰려하지 않았다.

 

 

아파요.”

……식사를 하고 돌아오너라.”

오늘은 더 무리에요.”

 

 

카와니시가 투덜거렸다. 아마 오늘 종일 카와니시를 괴롭혀도 원하는 대답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카와니시는 분명 흐름을 읽을 줄 알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사의 일부, 특히 그들의 미래는 낮은 확률의 추측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욕망하며 선택하니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끈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떠한 선택지에 따른 결과까지도 볼 줄 알았지만, 사람이 미래에 고를 선택지를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흐름들로 엮인 역사는, 아직 어린 카와니시가 판단하기에 신이라도 접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네가 내린 신탁에 조만간 있을 전쟁의 운명이 달렸단다. 카와니시, 조금만 더 도와주지 않으련?”

흐름은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특히 미래에 관해서라면요. 미래는 사람의 선택이 길을 만드는 거지, 내가 본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카와니시는 빠르게 본당을 벗어났다. 신관 몇이 막아섰지만, 대사제가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카와니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오래 흐름을 보고 난 뒤에는 꼭 배가 고프거나 잠이 왔다. 어쨌든 어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셈이었다.

 

본당 왼쪽에 위치한 작은 별관이 카와니시가 머무는 장소다. 카와니시는 신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정문보다는 옆으로 난 샛길을 걸었다. 타박타박 신경질적으로 걷다가 무심코 옆을 돌아본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수풀이 움직임을 멈췄다. 카와니시는 발걸음을 돌려 수풀 앞에 멈췄다. 누군가 지어놓은 것처럼 생긴 나뭇가지들을 헤쳐 놓으니 그 안에 성묘 한 마리가 서있는 게 보였다. 꼬리털을 잔뜩 부풀려 경계를 하다가, 카와니시의 눈을 보고는 금세 얌전해졌다. 이내 고양이는 살짝 몸을 비켜 등 뒤를 보여줬다.

 

새끼가 다섯 마리 있었다. 개중 둘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은 뒤였다. 어미도 썩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두면 새끼는 물론이고 그들을 지키려 한껏 예민해진 어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눈으로 어미에게 묻는다. 새끼들을 안아도 괜찮을까.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듯 어미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작은 생명들을 하나씩,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품었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동물을 돌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어미가 깃털 같은 걸음으로 카와니시의 뒤를 따랐다. 다행이 별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와 카와니시는 제 이불을 옴폭하게 깔아주었다. 그 위에 새끼들을 놓으니 어미가 주위를 뱅뱅 돌았다. 뭔가 먹을 것이 없을까. 식당에 가서 날고기라도 한 점 가져와야겠다. 새끼를 돌보기 위해서는 어미가 건강해져야 했다.

 

 

잠깐만 있어. 금방 올게.”

 

 

카와니시가 어미 고양이의 이마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별관을 나와 샛길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돌았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와중에 맞은편을 달려오던 인영을 보지 못하고 그만 부딪쳐버렸다. 이마가 얼얼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카와니시가 인상을 썼다. 능력을 쓴 게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왕왕 울렸다.

 

 

, 괜찮아?”

 

 

,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다. 카와니시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먼저 자리에 일어서있던, 카와니시와 비슷한 체구의 소년이 팔을 뻗는다. 카와니시는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소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걷히자 카와니시는 가장 먼저 눈앞을 수놓았던 금색 실을 떠올렸다.

 

……도대체 여긴 또 어떻게 온 걸까.

 

신궁은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장소였다. 어지간한 신분의 사람이 아니라면 발도 들일 수 없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감사제 때야 신궁에 사람이 없으니 들어올 수 있다고 해도 신궁 사람이 아닌 자가 평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분명 그때, 연못에서 본 사람이 맞았다.

 

 

미안해. 급하게 가다가 미처 못 봤어.”

……신관님께 알려도 될까요? 외부 사람이 신궁에 들어왔다고.”

에엑, 하지만 비밀로 해주기로 했잖아.”

그거야 그때 일이고.”

 

 

그렇게 말하다가 카와니시가 입을 닫는다. 그의 존재를 신궁 사람들에게 알려봤자 도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카와니시를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눈앞의 순진한 소년도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카와니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누르며 물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 혹시 고양이 못 봤어? 저기 수풀 속에 내가 숨겨놨는데 보니까 없어져서. 새끼들도 있었는데 혹시 나쁜 사람이 쫓아낸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의 손에 큼지막한 주머니가 매달려있다. 어쩐지 고양이가 숨어있던 덤불이 사람 손을 탄 것 같더라니, 그들의 주인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이 소년이었던 모양이다. 카와니시는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식당에 가서 먹을거리라도 얻어오려던 참이었는데 굳이 갈 필요가 없어졌다. 카와니시는 소년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따라오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그가 총총 카와니시의 뒤를 쫓았다.

 

고양이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웅크리고 앉은 몸을 일으켜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소년을 반겼다. 카와니시는 기둥에 기대고 서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끈이 풀린 주머니에서 와르르 다진 고기가 쏟아졌다. 이내 어디서 훔쳐온 게 분명한 작은 그릇에 먹기 좋게 담아서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듯 어미는 고기를 먹었다. 한동안 저 고양이들을 돌본 사람이, 신궁 안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너는 이름이 뭐야?”

…….”

또 만나면 알려주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타인을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소년은 분명 카와니시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일 터였다. 무엇보다 신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소년은 벌써 두 번이나 신궁을 찾았다. 아니, 횟수는 그보다 많을 게 분명했다. 신궁에 들어와 카와니시를 만난 것이 두 번째였으므로.

 

 

……카와니시 타이치.”

 

 

대사제가 알면 크게 혼이 날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눈앞의 소년이라면 어쩐지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카와니시의 이름을 한 번 곱씹은 소년이 해사하게 웃었다.

 

 

난 세미야. 세미 에이타. 넌 여기서 일해?”

일단 그렇습니다.”

그럼 너도 예비 신관이야?”

 

 

잠시 말문이 막힌다.

 

 

……아뇨. 신관은 신력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거짓말이다. 현존하는 신관들은 모두 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카와니시는 신력이 있음에도 시동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가 신관이 될 수 없는 건, 신력을 가진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력이 없는 남자도 제례 때 검무를 춘다고 들었어. 그 사람들은 신관이 아냐?”

엄밀히 말하면 신관은 아니죠. 신관과 신궁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자들입니다. 검무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 거고요.”

카와니시도 배웠어?”

조금…….”

 

 

세미의 두 눈에 동경 같은 반짝반짝한 감정이 담겼다. 멋지다! 그가 입으로 낸 탄성에 괜히 머쓱해진 카와니시는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식사를 마친 고양이가 카와니시의 손등에 얼굴을 부빈다. 쓰다듬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럼 그거. 나도 배울 수,”

 

 

드르륵,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세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와 마주보고 쭈그려 앉은 채로 카와니시는 몸이 굳었다. 눈만 들어 방으로 난입한 그림자의 정체를 살핀다. 신관 하나와 처음 보는 옷차림의 남자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카와니시와 세미를 노려보고 있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카와니시가 세미의 앞을 막아섰다. 변명을 해서라도 세미에게 불똥이 튀는 일을 막아야했다.

 

 

신관님, 잠깐,”

왕자님!”

 

 

냅다 윽박지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카와니시가 바짝 얼어붙었다. 카와니시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세미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슬금슬금 남자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신궁에는 출입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하지만 고양이들이…….”

 

 

남자의 미간이 촘촘하게 구겨졌다. 입안을 질겅질겅 씹기라도 하는지 턱에도 주름이 자글자글 졌다. 카와니시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대신 세미가 앞으로 나왔다. 팔을 뻗어 남자의 가슴께를 마구 민다. 어서 나가자는 재촉에 그의 서늘한 시선이 아주 잠깐 카와니시에게 닿았다. 방을 나가면서 세미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바라보는 다정한 눈망울로 그는 카와니시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미안해. , 미닫이문이 제법 세게 닫힐 때까지 카와니시는 자리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었다. 분명 세미도 카와니시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타인이 곤란해질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의 변화는 카와니시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거였다.

 

아니, 그보다.

 

 

……왕자님?”

 

 

카와니시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세미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발밑에서 고양이가 푸근하게 울었다.

 

 

 

 

*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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