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카와니시는 그 다음 날 처음으로 왕궁을 들여다보았다. 그간 신탁을 위해 본 흐름들에서는 왕과 신료들의 얼굴 정도만 보았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탓에 세미가 이 나라 왕의 계보를 잇는 성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방 한가운데에 앉아 멍청하게 이곳까지 이어진 실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회의가 열리는 대전에 세미 에이타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의 남자에게 끌려가서 혹시 어디 갇힌 것은 아닐까. 카와니시는 세미에게서 보았던 금빛 실을 찾는다. 그러나 볼 수 없었다. 그 영롱한 빛깔은 정말로 카와니시의 착각이었는지.

 

그러다 문득 어제 만났던 왕궁의 사람흡사 세미를 납치하러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던을 떠올린다. 카와니시는 슬그머니 그의 흔적을 찾았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그의 이름이나 직위, 세미와의 관계 등을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누군가의 과거를 본다는 게 늘 기분이 좋은 일만은 아니라, 버릇처럼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왕궁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왕궁의 산책로를 굽이굽이 돌아 어전 회의가 열리는 본당그 건물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으니 대신 신궁의 구조를 덧대었다뒤쪽으로 조금만 들아가면 똑같이 생긴 건물 세 개가 나란히 서있다. 카와니시는 흡사 유령이 되어 그곳을 떠도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자신은 방안에 홀로 앉아 흐름들을 쥐고 있었을 게 분명했음에도. 그 세 개 중에서 어제 들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카와니시의 손가락을 두드렸다. 카와니시는 주저하지 않고 그곳의 창문을 엿본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세미와 눈의 색깔만 닮은 남자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직 날이 그리 춥지 않았음에도 실내에서 치렁치렁한 도포까지 걸친 그는 척 보기에도 재수가 없었다. 어제 불쑥 신궁에 나타난 남자는 대강 세미의 호위쯤으로 여겼는데, 대화를 엿듣고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카와니시가 판단하기에 그는 저 재수 없는 상판의 하수인 정도로 보였다.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카와니시는 조금 더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시라부 켄지로, 17세 어린 나이로 무과 시험에 합격해 왕의 최측근을 지키는 무사가 되었으나 곧 막내 왕자의 호위로 좌천. 좌천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이유는 좀 허무했다. 왕이 애지중지 여기는 꽃이자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답다고권력이란 대단하다.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의 입을 다물게 했으므로알려진 공주님의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그쯤에서 카와니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쓸모없는 대화를 엿듣고 있기엔 카와니시의 눈이 몹시 피로해졌다. 뻑뻑해진 눈꺼풀을 여러 번 감았다 들어 올리니 눈앞에는 도로 조그만 방 풍경이 펼쳐진다. 카와니시는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왕궁 어디에서도 세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오전이라 왕의 아드님들은 무슨 수업이니, 검술이니, 궁술이니 하는 것들을 배우고 있을 게 자명했음에도.

 

문이 드르륵 열렸다. 화들짝 놀라서 카와니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제의 일로 단단히 뿔이 난 대사제가 여기까지 직접 방문했나 했다. 웬걸, 문 앞에 비장한 얼굴로 서있는 사람은 세미 에이타였다.

 

 

고양이!”

 

 

누가 들을세라 카와니시는 다짜고짜 세미를 끌어당겨 입을 막았다. 서둘러 문을 닫아버리고 조용히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소리조차 없었다. 겨우 숨을 놓고 카와니시가 곤란한 얼굴로 묻는다.

 

 

여긴 또 왜 왔어요?”

고양이 보러 왔는데.”

 

 

그 말간 두 눈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분명 카와니시의 이불 속에 파묻혀 고롱고롱하던 고양이 몇 마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카와니시는 그가 묻기 전에 선수를 쳤다.

 

 

안에서 살게 하긴 좀 어려워서, 대사제님께 말씀드려서 별관 밖 대청에 자리를 마련해줬어요. 그쪽으로 가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쫓겨난 건 아니구나.”

여기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카와니시는 세미를 보지 않고 물었다. 썩 난감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그를 볼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금색 자수의 향연 같은 건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시라부가 없으니까 괜찮아. 형님께 불려갔거든, 나 때문에.”

 

 

세미가 맑게 웃는다. 그러다 금세 낯빛에 쓸쓸함이 들어찼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잠깐 말을 머뭇댄다. 그러더니 갑자기 카와니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카와니시는 저항도 않고 술술 그가 하는 대로 따랐다. 방문을 열고, 누가 오갈까 전전긍긍하던 복도를 거닐고, 카와니시의 방에서 가장 먼 대청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마루 구석에 무명천으로 오목하게 만든 고양이 집이 놓여있다. 사람이 쓰던 그릇까지 내준 것으로 보아 아마 저 고양이는 결국 이 별관의 터줏대감이 되지 않을까. 어미가 버선발로 나와 둘을 맞았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세미는 고양이의 두 귀 사이를 어루만졌다. 카와니시는 엉거주춤 서서 그가 하는 양을 본다.

 

퍽 서운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카와니시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왕궁의 사람인 그가 신궁에 발을 들일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새끼를 낳고 잔뜩 날을 세우며 사람을 경계하는 어미 고양이가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너를 또 만나고 싶었어.”

 

 

세미는 마치 카와니시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와니시는 느리게 두 눈을 끔벅거렸다. 부지런히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길은 거두지 않은 채, 세미는 고개만 돌려 카와니시를 바라본다. 순간, 찰나, 그것보다 짧은 어떤 시간 동안 카와니시는 세미에게서 또 금빛 실을 보았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너무 놀라 팔을 푸드득 휘저었다. 귀신에 쓰인 것처럼 실제로는 아주 작은, 손가락 마디 정도의 움직임이었으리라. 카와니시는 그대로 두 손 안에 발갛게 익은 얼굴을 감췄다.

 

 

카와니시.”

 

 

그는 카와니시를 불렀다.

 

 

…….”

 

 

그리고 카와니시는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마치 처음부터 알던 사이처럼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목소리는 퍽이나 익숙하고, 다정했다.

 

 

바깥에 나갈래?”

 

 

순간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처음 겪는 생경한 감각에 카와니시는 끊어내듯 전보다 단호하게 대꾸했다.

 

 

못 나가요.”

?”

대사제님이 허락을 안 해주시거든요.”

그러니까 몰래!”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요.”

들킬 걸 걱정하는 거면 너도 나가는 게 싫진 않다는 뜻이잖아? 나가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제안은 카와니시가 호불호를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카와니시에게 신궁 외부로 나가는 일은 미지의 영역이다. 대사제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된 일이고, 이곳의 사람들 모두가 감시하고 있는 일이었다. 세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카와니시를 잡아끌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와니시는 선뜻 그 손을 쳐내지 못했다.

 

신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쉬웠다. 둘 다 아직 덩치가 작아 인적이 드문 좁은 길을 거닐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세미가 자주 드나드는 길을 걸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신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허무할 만큼 싱거운 일이었던가.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두려워해 신궁 밖으로는 발을 디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일까.

 

신궁은 월요의 성벽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왕궁이 서있다. 잿빛 담을 두르고 있는 두 장소는 분위기부터 완연히 달랐다. 다른 세계 같았다. 세미는 매일 저곳에서 이곳을 다녀간 것이다. 처음 신궁 밖에 나온 것치고는 감상이 시시했다. 사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일 눈으로 흐름들을 돌아보며 엿보았던 일상이라 오히려 풍경이 익숙했다. 다른 것은 앞장서서 카와니시를 이끌고 있는 세미의 작은 등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특별하다. 그라면 갑갑하고 작은 세상 속을 벗어나 드넓은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세상의 끝자락 어딘가로 데려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미는 그 길로 아예 왕성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카와니시는 슬금슬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자리에 없는 것을 별관 사람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알게 된다면 당장 수호사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카와니시를 찾겠다고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닐 텐데. 허락도 없이 바깥으로 나온 걸 알면물론 왕자님의 명령이라 불가항력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 테지만대사제는 달이 바뀔 때까지 카와니시를 방안에 가둬둘 위인이었다. 카와니시가 자꾸 주춤하는 걸 알고 세미가 뒤를 돌아 방긋 웃었다.

 

 

가끔 기분 전환은 괜찮잖아.”

하지만…….”

일각이면 돼. 들키지 않을 수 있어.”

 

 

세미는 종종 이렇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굴 수 있을 리 없지. 카와니시는 폭 한숨을 내쉬고 그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이왕 일탈한 것, 차라리 실컷 즐기다 돌아가 주마.

 

왕성의 정문과 수도의 입구를 잇는 길고 커다란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양 옆으로 죽 늘어선 상가와 사람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둔 가로수 위를 폴폴 날아다니는 새들, 형형색색의 비단을 늘어놓은 가게와 달콤한 경단을 파는 노점, 거리 위를 뛰노는 어린 아이들……. 흐름을 통해 종종 보던 풍경이었으나 이렇게 직접 두 눈에 담는 것은 처음이다. 카와니시는 눈알이 뻐근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열지 않았음에도, 눈이 시릴 만큼 예쁜 풍경이었다.

 

바깥에 나갈 것을 권유한 사람은 세미였지만, 사실 카와니시보다 그가 배는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바깥에 나오는 것이 카와니시처럼 아예 처음인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잔뜩 들떠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돈은 또 두둑하게 들고 나온 모양이다. 뭔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스스럼없이 상인에게 배가 불룩하게 나온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곤 했다.

 

 

이거,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대로에서 떨어져 외진 곳에 위치한 장신구 가게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매대에 올려놓은 것들을 유심히 살피던 세미가 팔찌 하나를 집어 카와니시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유백색의 옥으로 만든, 다듬어지지 않아 모양이 울퉁불퉁한 팔찌였다. 카와니시는 해괴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저랑 어울린다고요.”

네 머리카락은 예쁜 금빛이니까,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는 것보다야 이런 게 낫지.”

……아니, 이건 여인들의 장신구 아닙니까.”

신관들은 이런 거 안 해?”

신궁에서 의례로 받는 장신구는 있지만…….”

 

 

머뭇거리는 카와니시의 팔목에 세미가 직접 팔찌를 걸어주었다. 차르륵, 고정되지 않은 옥이 미끄러지며 썩 맑은 소리를 냈다. 카와니시가 만류할 새도 없이 세미는 계산까지 마쳤다. 곧장 또 맞은편 만두 가게까지 끌려갔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것을 하나씩 쥐고 나서야 세미는 걸음을 늦췄다.

 

문득 카와니시의 시선이 바깥을 돌아다니는 내내 꼭 붙잡은 두 손에 닿는다. 혹시 잃을까 소중하게 쥔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는데 싫은 기색도 내지 않고 세미는 카와니시를 끌고 돌아다녔다. 꽤 걸었음에도 말간 표정이 빛깔을 잃지 않았다.

 

 

즐거워 보이네요.”

 

 

처음으로 신궁 밖의 음식을 먹어보았다. 사람들이 살을 부대끼며 사는 동네를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외출을 들켰다간 대사제에게 호되게 혼이 날 거라는 생각도 어느새 잊었다. 즐거워 보인다, 그 말은 어쩌면 카와니시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너는 즐겁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으응, 하지만 표정은 좋은 걸.”

그것도 잘 모르겠고요.”

 

 

세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엇비슷한 눈높이라 세미의 동그란 얼굴이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한 뼘 가까워진 거리에 카와니시가 문득 숨을 멈춘다. 그 사이를 어느새 다가온 노을이 자줏빛으로 채웠다.

 

 

역시, 좀 당황스러웠을까.”

 

 

그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환해졌다. 뿌옇고 가느다란, 세미의 얼굴에 하얗게 드리워진 그것은 분명 카와니시가 익히 보던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의지로 눈을 열지 않았음에도 흐름이 보였다.

 

 

카와니시? 괜찮아? 어디 아파?”

아뇨, 잠깐만.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여러 번 눈꺼풀을 감았다 떠도 주위를 부유하는 흐름의 흔적은 여전히 잔재했다. 늘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눈알이 시큰거린다. 눈을 질끈 내리감고 카와니시가 주저앉았다. 세미는 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카와니시는 그 상태로 가만히 멈췄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하지만 왜. 눈을 감았음에도 새까만 암막 위로 깃털들이 부유한다. 순간 카와니시는 이질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든다. 얇고 불투명한 층이 감싸고 있을 눈동자로, 카와니시는 세미 에이타의 그림자 뒤에 선명하게 서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연기 같은 거였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그것의 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미가 경악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듣지 못한다. 뚜렷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카와니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내가 보이는 구나.

나를 지켜줘.

……이 아이를 지켜줘.

 

 

카와니시!”

 

 

종잇장이 찢어지듯 연기를 물들인 노을이 부서졌다. 카와니시의 눈앞을 그득히 수놓던 흐름들은 모두 모습을 감춘 뒤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카와니시는 저를 품에 그러안은 세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그렁그렁 어렸다. 그제야 카와니시는 뺨 위를 굴러 떨어져 옷깃까지 적신 핏물을 알아 챘다.

 

 

……괜찮아요.”

 

 

보았을까. 많이 놀란 건지 움쩍도 않는 세미의 등을 토닥이면서 카와니시는 생각에 잠긴다. 흐름을 보는 눈은 겉으로 드러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평소의 눈과는 확연하게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봤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봤는데. 왕궁에서 살고 있는 막내 왕자님이 카와니시의 능력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 대사제에게 혼이 날 것은 차치하고, 이 사실을 신궁의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세미가 위험해진다. 카와니시는 그리 오래지 않은 어느 날, 신궁에 물건을 대던 남자가 우연히 카와니시의 눈을 본 일을 기억했다.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바로 다음 달에 사람이 바뀌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파?”

……아뇨.”

거짓말. 피 나는데.”

 

 

세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카와니시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카와니시는 서둘러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박박 닦아냈다. 세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카와니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만 돌아갈까요.”

 

 

걱정이 그렁그렁 묻은 눈으로 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와니시는 세미의 손을 붙들고 걸음을 서둘렀다. 해가 저물고 있다. 산등성이 사이로 빛이 여물어 들어가기 전까지,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카와니시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눈이 열렸던 것은 아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어떤 형체 때문이었으리라. 카와니시는 뒤늦게 그것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빛은 어두웠지만 분명 그것이 입고 있던 옷은 화려한 색상의 비단으로 지은 것이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긴 머리카락과 목을 감싼 동정에 묻은 검붉은 혈흔, 눈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

 

정체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귀신인가, 요괴인가. 어째서 세미 에이타의 뒤에서 나타난 것인가. 혹시 카와니시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보았던 금빛 실이나 형형색색의 불꽃들과 관련이 있는 존재인가. 그리고……, 그것이 카와니시에게 했던 말들은 대체…….

 

지켜달라고 했다. 한을 품고 승천하지 못한 혼령과는 다른 존재란 뜻이다. 신일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볼품이 없었다.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대사제나 다른 신관들에겐 비밀로.

 

 

 

 

 

 

*

 

 

 

 

 

와삭. 사과 껍질이 즙을 내며 터졌다. 카와니시는 과육을 우물거렸다. 쭈그리고 앉은 다리가 슬슬 저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앉은 채로 바라본 정면에는 마침 수도를 지나치는 광대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판을 벌이고 있었다. 옆에는 세미가 앉아있다. 그는 시종일관 흥미를 가득 담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밌어요?”

 

 

카와니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러다 파리 들어갈라. 광대의 기행에 놀라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세미를 대신해 카와니시가 천천히 뭉툭한 턱을 당겨주었다. 세미가 침을 삼킨다. 이럴 때 보면 한 왕국의 왕자님보다는 그냥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세미는 이제 열다섯 살이었다. 카와니시와는 딱 한 살 차이로,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애였다.

세미와의 은밀한 외출은 이로써 벌써 네 번째였다. 운이 좋았던 건지 첫 번째 외출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긴 이후로 세미는 종종 카와니시에게 바깥 구경을 하자고 졸랐다. 그 사이 대청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도 건강을 되찾았다. 그 품에서 꼬물거리는 새끼 세 마리는 모두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세미는 물론 고양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신궁 방문에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지만 본 목적은 언제나 카와니시와의 외출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모두 들키지 않았으니 비밀스러워야 할 외출은 이제 대담해지기까지 했다.

 

세미의 등 뒤에 나타났던 유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아낸 바가 없었다. 그 이후로 그것은 카와니시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신궁 안에서조차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카와니시가 정체 모를 유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어렴풋이 세미와 머리카락 색이 닮았던 것 같으니, 그의 직계 가족 중 하나가 아닐까 했다. 가령 돌아가신 어머니나 할머니라든지. 왕실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찾아보겠다고 무리하게 눈을 열었다가 또 피를 보고는 그마저도 관뒀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세미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저런 건 얼마나 배우면 할 수 있을까?”

왜요, 배우고 싶어요?”

 

 

세미가 혓바닥을 내밀고 웃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자기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광대들은 물론이고 이곳 상가에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 그밖에도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살기 위해 기술을 배운 것이다. 저들에겐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미가 배우긴 어려울 것이다. 기술 자체의 난이도보다는 꾸준히 다듬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나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

 

 

작은 손바닥 위에 다소곳이 턱을 괴고 앉아 세미가 푸념하듯 말했다. 그는 카와니시에게 자주 농을 건네곤 했는데, 이번에는 농으로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의 저 말은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미는 분명 왕실 세력의 중심인 왕자였다. 열다섯 살, 한창 또래보다 바쁘게 지내야 할 그가 한량처럼 카와니시를 데리고 바깥으로 떠도는 것은 분명 왕실 내부의 어떤 복잡한 사정 때문일 것이었다. 당장 왕위를 이을 첫째 왕자는 스물, 둘째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실의 법과 의례를 비롯해 많은 수업들을 들은 것으로 안다. 세미에겐 그런 특권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불분명한듯 명확했다. 세미는 모종의 이유로, 왕자의 직위를 가졌으나 그만한 권리는 가지지 못했다. 허울뿐인 이름이란 뜻이다.

 

엊그제 그가 했던 이야기는 그 사실을 보다 단적으로 보여줬다.

 

글은 물론이고 서가에 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 검술도 궁술도, 전쟁에 나가 싸울 때에 필요한 전술 같은 것들도 내겐 전부 허락되지 않아. 글도 가까스로 배웠어, 겨우 읽고 쓰는 정도로.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왕궁은……, 너무 갑갑하고 무서워.

 

그렇게 쓸쓸한 눈으로 말하면서도, 그는 한사코 왕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아마도 카와니시와 같은 기분이었을 거라고, 감히 짚어본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눈도 닫고 귀도 닫고 그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 운명. 너무 어려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받아들이고 불합리한 체제에 순응하게 되는, 그래서 결국 가축처럼 길들여질 운명. 알고 있었음에도 세미처럼 카와니시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 배워볼래요?”

 

 

불쑥 카와니시가 말을 꺼냈다. 잠깐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던 세미가 이내 휘둥그런 눈으로 카와니시를 돌아본다. 서둘러 카와니시가 사족을 붙였다.

 

 

진짜 검술은 아니고요. 검무……, 같은 건 배워서 좀 할 줄 알아요.”

, 할래.”

 

 

와락 세미가 카와니시에게 달려들었다. 옷에 흙이 묻을까 쭈그리고 앉아있던 카와니시는 그 힘에 밀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럼에도 잔뜩 기대를 품은 그 맑은 눈동자에 말문이 막혀 그를 탓하지 못했다.

 

 

뭐든 하고 싶어.”

 

 

순수한 호기심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열의에서 비롯된 불빛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목만 묶여 흐르는 시간만 멍하게 보던 날의 무기력에 더 이상 잔류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카와니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미에게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켰다. 시끄러운 광대의 놀이터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일단은 돌아가요. 외출은 더 이상 안 돼요, 들킬지 모르니까. 대신 별관으로 오면 후원 뒤편 갈대숲에서 검무를 가르쳐줄게요.”

, 좋아!”

 

 

세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왕성의 사람이 제례에서나 쓸 검무를 배운다니,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으나 세미가 좋아하니 그걸로 됐다. 사실 카와니시도 검무를 배우다 말아서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뒷말로 삼켰다. 세미에겐 배우는 것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그저 뭐든 하고 싶은 거였다.

 

 

 

좁은 길의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난데없이 거대한 덩치 몇이 카와니시와 세미를 쫓아왔다. 그저 가는 방향이 같은 거라고 여기기엔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기 때문에 카와니시는 서둘러 세미를 이끌었다. 그러나 곧 길이 막힌다. 카와니시는 세미를 뒤로 밀어 넣고 그들과 대치해 섰다.

 

아까 광대의 놀음판이 벌어지던 곳에서 본 인상 험악한 남자가 여럿 끼어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세미를 발견한 것이리라. 세미는 왕실의 사람답게 값비싼 옷감으로 지은 포를 걸치고 있었다. 햇빛을 보지 않아 흰 얼굴, 비싸 보이는 차림새가 필시 저들이 가진 욕망의 끈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마도 카와니시를 세미의 몸종 정도로 여겼겠지.

 

카와니시는 재빠르게 빠져나갈 구멍을 살폈다. 이쪽은 몸집이 작고 저쪽은 하나같이 팔 척의 거구였으므로 잘만 움직인다면 무사히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련님, 저쪽에서 누가 찾던데.”

 

 

이마에 큰 흉터가 난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세미는 카와니시의 등 뒤에 숨어 힐끔 밖만 내다보았다.

 

 

데려다드릴게요, 우리가.”

 

 

누런 이가 드러났다. 세미는 그 길로 카와니시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옷깃을 붙든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린다. 아마도 처음 겪는 상황이겠지. 호위도 뭣도 없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게 열넷, 열다섯 하는 어린애들이 감당하긴 버거운 것이다.

 

 

괜찮아요. 도망칠 수 있어요.”

 

 

카와니시는 세미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위가 좁혀온다. 보호를 자처하고 나선 카와니시도 역시 그들 눈엔 젖비린내 나는 애였으므로 별로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카와니시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세미였으므로. 몸종 같은 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일 터였다.

 

수도 어디에 아이들을 잡아다 인신매매를 벌이는 질 나쁜 무뢰배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백주대낮에,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골목길까지 스며들어왔기로서니 대놓고 납치를 시도할 줄은 몰랐다. 카와니시는 한 발자국씩 느리게 뒤로 물러선다. 세미에게 괜찮을 거라고 떵떵거렸지만 사실 마땅한 방도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카와니시가 머뭇거리는 사이 주저할 것도 없이 성큼 다가온 사내 하나가 카와니시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악력에 여린 피부 위로 통증이 몰려와 카와니시가 짧게 신음을 터뜨렸다. 등 뒤에서 세미가 냅다 비명을 지른다. 투박한 손바닥 하나가 날아와 세미의 입을 틀어막았다. 팔뚝을 이빨로 물어뜯고 카와니시는 세미에게 몸을 던졌다. 곧 매서운 파열음이 골목길을 울렸다. 날아드는 두툼한 손등에 얼굴을 후려 맞은 카와니시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타이치! 안 돼. 시라부, 시라부!”

 

 

입 안에서 흡사 철가루가 녹은 것 같은 감각이 혓바닥을 뒤덮었다. 귓속에 이명이 울리고 눈앞의 사람은 간혹 둘 셋으로 겹쳐보였다. 조금 더 후엔 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 팔에 반짝 세미를 안아든 사내들이 슬슬 걸음을 물린다. 데려가게 둬선 안 된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세미가 사라진 것을 알고 예의 호위가 기적처럼 나타나는 것과, 카와니시가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신력을 사용해 저들을 제압하는 것. 전자는 확률이 낮았고, 후자는 카와니시가 곤란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카와니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손바닥에서 금빛 살이 솟아올랐다. 형체 없이 공중으로 부유한 금색의 실 여러 가닥이 조금씩 모습을 갖췄다.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사위가 고요해진다. 처음 보는 광경에 일동이 침묵하는 와중 카와니시만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게 뭐야……?”

 

 

누군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마술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누구라도 그랬을 터다. 카와니시는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직 신력을 쓰는 것에 능숙하지 않아 자칫 힘 조절에 실패할 최악의 경우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신력은 강한 만큼 카와니시 본인에게 되돌아오는 반작용도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그래봤자 애새끼야, 한꺼번에 덤벼!”

 

 

우악스러운 팔뚝을 휘두르며 성큼성큼 무리의 대장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카와니시를 향해 다가왔다. 한 발을 뒤로 물리고 넓게 내려온 소매를 휘저어 카와니시는 곧장 허공에 올려둔 금빛 살을 쏘았다. 형체가 없던 것이 사내의 어깨에 명중하자마자 붉은 쇳덩이로 변했다. 칼에 베인 듯 치솟는 격통에 그가 괴악한 비명을 내지른다. 덕분에 덮쳐오려던 다른 사람들의 발이 우뚝 묶였다. 카와니시가 손짓으로 금빛의 힘을 부린다. 손끝에서 길게 뻗어 나온 무형의 검이 카와니시의 손바닥에 쥐어졌다.

 

검을 다룬 것은 검무를 배울 때 말곤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못 본 척하고 돌아간다면, 목숨만은 살려드리겠습니다.”

 

 

조잡한 협박이었다. 카와니시는 저들을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고작 열넷의 어린애가 늘어놓는 협박이 흡사 저승사자의 전언처럼 들릴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세미를 지키고, 이곳에서 벗어나 무사히 왕성으로 돌아가면 된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그들이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는 것뿐이었다.

 

거구 넷이 쓰러졌다. 신력을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빗나감 없이 모두 카와니시가 원하는 자리에 살이 꽂혔다. 전쟁터라도 되는 양 비명이 여기저기 울려 퍼지고 핏물이 허공을 그었다. 한동안 좁은 골목길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렇게 다섯 번째 장정마저 쓰러뜨린 뒤에야 그들은 물러섰다. 부상자들을 들쳐 업고서 카와니시가 부린 수상한 마술에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그들은 골목길 끝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카와니시가 찌릿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신력을 사용해 손바닥의 피부가 붉게 탔다. 어릴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손바닥 전체가 화끈거리고 쓰렸다. 그 와중에 긴장 탓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그것을 바지춤에 대고 문지른 카와니시가 세미를 바라본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세미의 표정은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놀랄 만도 하지. 그에게도 이 힘은 아주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을 테니.

 

 

다친 데는 없어요?”

 

 

모르는 척 다가가 카와니시가 다정하게 물었다. 세미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했다. 세미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나서야 카와니시는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그저 놀란 것뿐이다. 카와니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신력이 있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고작 열넷 먹은 어린애다. 온몸을 빳빳하게 경직시키고 있던 근육이 풀어지자마자 눈앞이 노릇노릇해졌다.

 

 

……다행이네요, 안 다쳐서.”

 

 

세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제 뜻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카와니시가 슬프게 웃었다. 손을 뻗어 휘둥그레진 두 눈가를 만져주려다 들려온 음성에 그마저도 우뚝 멈춰야 했다.

 

 

왕자님!”

 

 

날렵한 몸이 틈을 파고들었다. 카와니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서 뒤로 몇 발 물러섰다. 시라부가 세미의 양어깨를 붙들고 상태를 확인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미가 말을 더듬으며 괜찮다고 대꾸했다. 시라부가 카와니시를 돌아본다. 따갑기까지 한 시선에 카와니시는 대신 어깨 너머 세미의 두 눈을 응시했다. 당황스러움이 담뿍 묻은 눈동자가 여적 가느다랗게 떨고 있다. 그는 곧장 세미를 안아들고 자리를 떴다.

 

 

……들켰겠지.”

 

 

홀로 남은 카와니시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돌아가면 신관들의 보고를 받은 대사제에게 벌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허락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을 뿐더러 일반인들에게 신력까지 사용했다. 그것도 왕궁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뒷산에 매장 당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것보단, 어쩌면 괴물 같은 자신에게 겁을 집어먹고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세미 에이타에 대한 서러움이, 상처의 통증보다 조금 더 컸을 뿐이다.

 

 

 

*

 

 

'HQ 세미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와세미] 낡은 일기 04  (0) 2017.02.03
[카와세미] 낡은 일기 03  (0) 2017.01.23
[카와세미] 낡은 일기 01  (1) 2017.01.11
[카와세미] Allegro, Moderato 下  (1) 2016.11.21
[카와세미] Allegro, Moderato 中  (1) 2016.11.2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6/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