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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시야의 틈새로 스며들듯 빛이 보였다. 색이 짙은 꿈이라도 꾼 듯 아직 정신은 몽롱하다. 카와니시는 눈을 뜨지 않고 이리저리 몸을 뒤챘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아 어떻게든 몸에 닿는 햇빛을 피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곳간에는 가느다란 기둥 말곤 그림자로 쓸 만한 게 없었다. 결국 카와니시는 옷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지푸라기들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잠에서 깼으나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은 아직 멍하다. 졸음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노곤함 탓이었다.
카와니시는 신궁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대사제의 명령을 받은 수호사제들에게 붙잡혔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이 일로 왕성이 깨나 떠들썩했던 모양이었다. 당장 대사제의 방으로 불려간 카와니시는 그곳에서 뺨을 일곱 대 맞았다. 다행이 성 바깥에서 만난 무뢰배들에게 얻어맞은 곳은 아니었지만 뼈가 불룩 튀어나온 손바닥에 따귀를 맞는 게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맞으면서 설교도 참 다양하게 들었다.
카와니시는 방도 아니고 별관 뒤쪽 곳간에 처박혔다. 그리고 벌써 여섯 날이 지났다. 물에 풀어 만든 쌀죽을 제외하고는─그것도 하루 두 번─아무것도 먹질 못해 쫄쫄 주린 배에서는 잠에 들 때부터 깰 때까지 계속 천둥소리가 우르릉 울리곤 했다. 화상을 입은 손바닥엔 무명천자락을 덧대어 붙여주곤 별다른 치료도 없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나을 테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말라던 대사제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카와니시는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켰다. 푹신한 이불이 아니라 짚더미 위에서 자려니 온몸에 멍이 든 듯 쑤셨지만 이것도 하다 보니 적응이 된다. 카와니시는 먼저 손바닥을 바라본다. 며칠 전만 해도 새빨갛게 익어 껍질이 다 벗겨지던 피부는 어느새 하얗게 새살이 돋았다. 흉터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히 나았다, 고작 엿새 만에. 그 다음 카와니시는 그 손바닥으로 뺨을 만지작거린다. 대사제에게 여러 차례 맞았던 부위였다. 첫 이틀은 통증 탓에 만지지도 못할 만큼 탱탱 부어있던 볼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아픔조차 없는 맨살을 미열이 오를 때까지 비벼보다가 카와니시가 낮은 음성으로 푸스스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깨닫고 있던 일이었다. 그릇에 흘러넘치는 신력의 탓인지 카와니시는 다쳐도 금세 나았다. 그래서 종종 일탈을 시도하려던 카와니시를 제압하는데 대사제는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카와니시는 안전제일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사제가 직접 손을 쓴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처가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낫는다고 해서 그게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기는 싫었다. 아픈 것도 싫었고.
곳간까지 끌려오면서 신관들을 비롯해 근처를 지키라고 명령받은 신궁의 종들에게서 카와니시는 멸시 어린 시선들을 감내해야 했다. 신력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신궁 내부에 은밀하고 파다하게 퍼지면서 몸집을 눈덩이처럼 불린 모양이었다. 사실이 아닌 소문들이 카와니시의 귀에도 닿았지만 그는 딱히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적당히 씹다 버릴 수 있는 유언비어다.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비참해지는 쪽은 언제나 카와니시였다.
매일 같이 눈을 열어 흐름을 보았다. 차마 세미를 찾진 못하고, 그간 세미와 함께 보았던 바깥세상을 본다든지 하는 게 전부였다. 혹여 그 일로 세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지 왕성에 떠도는 소문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다. 그렇게나 떠들썩했다는 것치곤 어디에서도 에이타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막연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매일 카와니시의 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시끄럽고 쓸데없이 활기찬 그가 없으니 겨드랑이 안쪽이 괜히 허전했던 탓이다. 늘 혼자였던 적에는 몰랐던 감정이었다. 이런 걸 그리움 내지는 외로움이라고 부른다던가. 세미는 카와니시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 그런 울림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넋을 놓고 흐름을 헤집었다. 덕분에 머릿속이 휘청하는 것도 모르고 카와니시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습관처럼 그의 흔적을 좇지만 결국 세미의 흐름을 붙잡을 용기는 없어 카와니시는 벌써 엿새 째, 제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눈에서 투명한 핏물이 배어나온다. 바닥에 모로 엎어져서 카와니시는 아무 생각도 않고 도로 눈을 감았다. 식사를 가져온 시비가 철제 자물쇠가 걸린 문을 열고 곳간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들린, 아득하게 멀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눈앞이 금세 캄캄해졌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카와니시는 무언가 묵직하게 몸을 내리누르는 것 같은 착각에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곳간의 허름한 지붕이 아니라 정교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천장이 보였다. 카와니시의 방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싼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져 이윽고 음성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야 카와니시는 제가 신궁 안에 마련된 의원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몸의 말단이 불에 덴 듯 뜨끈뜨끈하고 코가 막혀서 숨도 쉬기 어렵다. 눈을 뜨고 있지만 흐름과 흐름이 아닌 것들이 한데 엉켜 시야에 비치는 것들을 좀처럼 구분할 수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수반됐다. 신력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카와니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인내하는 것에 한계가 왔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주변이 금세 소란스러워진다. 열이 오른 이마에 차가운 수건이 닿았지만 감각이 느끼는 것은 살을 에는 고통뿐이다. 카와니시가 결국 비명을 질렀다. 신체가 극도로 예민해진다. 무엇을 쥐고 싶어 카와니시는 무거운 팔을 들고 허공에 뻗었다. 휘젓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다. 문득 그게 서러워 카와니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소리 내어 흐느끼는 울음이 아니라 아무도 몰랐을 테지만.
그런데 거짓말처럼 손끝에 따뜻한 게 닿았다. 다정한 살 내음에 파묻힌 손가락의 통증이 서서히 물러났다. 카와니시는 눈을 감고 뒤척였다. 그것은 카와니시를 달래듯 손등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다가, 이윽고 손목까지 완전히 감싼다. 비단이라면 이렇게 부드러울까. 땀을 함빡 머금고 카와니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타.
에이타, 보고 싶어요.
응, 나 여기에 있어.
그건 환영이었을까. 혹은 꿈이었을까. 언젠가 그 듬직한 등을 엿보았던 탓에 느꼈던,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그 일을 끝으로 카와니시는 다시 진득하게 들러붙는 수마에 빠졌다.
꿈에서 집에 불이 났다. 꿈이었음에도 생생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유난히 뜨거웠다. 카와니시는 급박한 와중에도 몸이 부담을 이기지 못해 잔뜩 열을 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불이 붙은 집은, 크기는 소담했지만 견고한 벽돌과 예쁘게 세공된 기와로 만들어져있어 제법 부잣집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그 한가운데 서서 울부짖었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건지 본인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 한쪽이 매섭게 아렸던 건 확실했다.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았으니 아마도 무의식 저편에서 끄집어낸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꿈에서 헤엄쳐 나온 직후의 일이었다.
눈꺼풀이 무겁다. 기분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카와니시의 눈두덩에 마른 수건이 놓여있었다. 카와니시는 한동안 앓아 축축 늘어지는 손으로 그것을 치워냈다. 밝은 빛이 쏟아지면서 천장이 보였다. 시야가 어룽어룽 자꾸만 흐려지던 일은 멎었다. 겨우 괜찮아진 모양이다. 흰색 무명수건에 묻은 핏자국이, 이번 후유증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보여주었다.
“카와니시!”
시야로 동그란 머리통이 툭 튀어나왔다. 카와니시는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한참 정신을 차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뒤늦게 그 얼굴이 그토록 보고 싶다 속으로 되뇌었던 사람의 것임을 알고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잠이 안 깼나.”
“응?”
“…….”
“괜찮아?”
카와니시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딱, 그 바람에 단단한 머리 두 개가 충돌했다. 카와니시가 누운 이부자리 위로 허리를 굽히고 엎어진 세미가 금세 앓는 소리를 낸다. 카와니시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세게 부딪친 이마가 찌르르 아프다. 이 통증은 꿈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분명한 감각이었다.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세미 에이타가 눈앞에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 왜 있어요?”
“병문안 온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야?”
세미가 손바닥을 펼쳐 제 머리통을 싹싹 문질렀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핑 돌았으니 부딪친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다. 카와니시가 뒤늦게 팔을 뻗었다. 귀 밑에서 맥이 팔딱팔딱 개구리처럼 뛴다. 그게 뭐 그렇게 긴장할 일이라고, 땀에 젖은 손으로 세미의 팔목을 쥐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만 같았다.
“……진짜네. 진짜 에이타예요.”
“너 잠 덜 깼어? 더 잘래?”
“아니, 아뇨.”
카와니시가 우는 듯 웃는 표정으로 세미를 응시했다.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광대가 형편없이 올라갔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 놀랐어. 그때 그렇게 두고 와버려서, 미안해서 사과라도 하려고 들렀는데 방에 네가 없는 거야.”
부드럽게 달래듯 세미가 카와니시의 악력을 풀어냈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마주잡고 그가 다른 손으로 카와니시의 이마를 짚는다. 열은 다 내렸어. 다행이다. 말간 얼굴로 하는 소리에 카와니시는 그만 울컥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코끝이 매워서 하마터면 꼴사납게 재채기를 할 뻔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그야, 둘째 형님이랑 여기 신관님 허락 받고, 시라부 대동 하에……. 너 울어?”
“에이타.”
“응.”
“내가 무섭지 않아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카와니시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란 세미가 팔을 파닥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건네자니 이미 핏물이 배어 못쓰게 되었고, 그렇다고 이불로 닦아주자니 여린 피부가 다칠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에이타는 다정했다. 그렇게까지 애달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무섭지 않아.”
결국 엄지로 카와니시의 눈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져주던 세미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 우리 둘 만의 비밀인 거지?”
‘그것’은 아마도 세미가 보았던 카와니시의 기이한 능력을 뜻했다. 카와니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퍽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가 당돌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기뻐. 우리 둘 만의 비밀이라니.”
세미는 그렇게 말하고 끝이 뭉툭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그제야 세미의 입가에 가지런히 앉은 피딱지가 보였다. 세미를 따라 웃던 카와니시가 놀라 펄쩍 뛰었다.
“다쳤어요?”
“으응, 좀 넘어졌어.”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려던 카와니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카와니시와 둘이 밖에 나가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하자며 기뻐하던 세미는, 그것만큼은 혼자 끌어안을 비밀이어야 한다고 카와니시에게 말하고 있었다. 더는 물을 수 없었다. 그를 곤란하게 하긴 싫었기에. 혹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카와니시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지금은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로 카와니시는 퍽 안도하고 있었다.
세미가 그랬던 것처럼 카와니시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곁에 있어주는 것, 그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게, 그것보다 더한 축복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그리고 저는 금세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신력의 과용으로 인한 몸살은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회복되곤 했지만, 저는 그게 나에 대한 것을 알고도 내 곁에 스스럼없이 다가와준 당신이 부린 마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신은 나를 향해 변함없는 웃음을 지었고, 나는 숨이 막혔어요. 서책에서 보았던, 무량의 물이 가득하다는 바다 한가운데에 갇히면 그런 기분이 들까 생각했습니다. 그것만큼은 한 번 본 일이 없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 날 이후로 당신은 좀 더 자유롭게 신궁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함께 바깥에 나간 일로 왕궁의 사람과 대사제가 어떤 약조를 한 게 분명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별로 내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더 이상 우리의 만남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만이 나를 들뜨게 했어요. 당신도 그랬을까요. 햇빛보다 찬란하게 웃음 짓던 얼굴을 떠올리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만나서 바깥에 나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습니다. 당신의 곁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언제나 시라부 켄지로가 동행했으니까요. 우리의 만남에는 그다지 제약이 없었지만, 우리가 만나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있었습니다. 첫째, 검무를 출 때 쓰는 날이 없는 칼─검무를 배우기로 했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제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의 호위였던 시라부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어요.─이나 고무를 발라 끝이 뭉툭한 화살을 제외하고 ‘위험한’ 물건은 절대 손댈 수 없었습니다. 둘째, 저는 여전히 외부에 철저하게 비밀스러운 존재였으므로 신궁 별관의 뒤뜰에서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후원까지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별관 대청까지는 허락을 받았어요. 당신과 나의 고양이들이 그곳의 터줏대감이 되었으니까요.
우리는 만나는 대로 후원에 가 검을 휘둘렀습니다. 말이 조금 과격했지만 사실 그것은 날을 세우지 않아 뭉툭한데다가 베기도 찌르기도 좋지 않은, 순전히 장식용 칼이었기 때문에 휘두른다고 큰일 날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멀찌감치 서서 시라부가 우릴 감시하고 있었지요. 나는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배웠던 검무의 기억을 떠올려 당신에게 가르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누가 엿보기라도 하면 당장 비웃음이 터질 만큼 형편없는 솜씨였지만 당신이 기뻐하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땀을 흘리다가 조금 지루해질 때엔, 최근 바쁜 일로 잠을 못 자 늘 피곤한 시라부가 꾸벅꾸벅 조는 틈을 타 나뭇가지를 들고 왕성의 무사들 흉내를 내곤 했지요. 입으로 챙챙 소리를 냈습니다. 열넷, 그리고 열다섯의 우리는 그런 게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그렇게 해가 저물 때까지 놀고, 그냥 돌아가기 싫다며 당신이 고집을 부리는 통에 별관 대청에서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산등성이 너머로 새빨간 노을이 깔리는 것을 바라보며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당신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있었어요. 색색 평화로운 숨소리와 이따금씩 고양이들이 우는 소리와 근처에 있을 시라부가 풀숲을 부스럭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때면 저는 늘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조용한 와중에 듣기 편안한 소리만 가득한 백색의 시간. 그날도 그랬습니다.
여전히 대사제의 명령이 있으면 본당으로 끌려가 눈을 열곤 했지만, 당신과 재회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는 내 의지로 눈을 연 일이 없었습니다. 별로 큰 이유는 아니었어요. 당신으로 인해 그럴 필요가 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세계는 왕성 뒷산의 산신 호랑이나, 사람들의 재미없는 입담 같은 것에서 오로지 에이타, 당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나와 당신은 매일 얼굴을 마주했지요,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연인처럼.
세미 에이타, 당신은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의 힘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어요. 눈을 열 때면 사람의 눈동자가 아닌 것처럼 불규칙하게 흐리고 뿌옇게 변하는데도 당신은 그걸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간혹 혹사당한 날 피눈물이라도 철철 흘리고 있는 날 보면서 당신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아마 어렸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죽는 것 아니냐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진심으로 울어주던 당신의 모습은, 훗날의 에이타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일이 되었어요.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당신은 누구에게나 상냥하면서 정작 자기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당신이 그토록 꺼려하는 비밀을 함께 지켜주고자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과 나이, 왕성에서의 지위와 늘 데리고 다니는 호위 무사의 이름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아마 이 왕성에서 나보다 당신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싫었어요. 당신만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길 바랐죠. 그래서 나는 눈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의 깊게 당신의 과거를 살폈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그리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습니다. 세미 에이타는 이 왕성의 셋째 왕자님이었고,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홀로 후궁의 자손이었습니다. 당신이 형제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것도, 그들이 나름대로의 수업을 받던 때 홀로 밖을 떠돌아야 했던 이유도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당신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일 테지요. 정실의 아들이 아니면 왕자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법이 이 나라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당신 역시 당신이 원하지 않았던 일로 차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걸까요?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만나지 못할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왕위를 이을 적자는 냉정하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람이었으나, 다방면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문무를 겸비했으니 차기 왕으로 촉망받는 인재였지요. 다만 둘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닥칠 불행이 아마도 그의 존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당신의 기억 태반은 그에게 고통 받던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똑같은 정실의 아들이면서도 늘 첫째에게 비교를 당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던 그는 그 화풀이를 당신에게 했더군요. 먼 훗날 당신은 어린 시절의 일이라 다 잊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끼가 낀 우물에 빠뜨리고 왕궁 뒤쪽에 있는 인적 드문 갈대숲에 묶어둔 채 꼬박 찬 새벽을 보내게 하고 심기가 뒤틀리면 때리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면서 당신에게 새총을 만들어 쏜 그 사람의 악행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에이타는 워낙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단단했기 때문에 잊은 척했던 것이겠지요.
어른이 되어서 내가 그 일을 꺼내 물으면 당신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그런 것쯤 어린 날의 장난이었으므로 다 없는 일로 여길 수 있다고. 하지만 아십니까? 당신은 어른이 되어서도 물을 몹시 두려워했다는 것을요.
그리고…….
…….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듬해 수호사제가 되었습니다. 남자였기 때문에 신관이 될 수 없었고, 신궁에 머무는 시동으로 위장하기에는 나이가 찼기 때문에 다른 대체할 것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나는 검을 쓰는 것엔 영 재능이 없었지만 대사제의 입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수호사제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재미가 없어 언젠가 그만두었던 검무도 다시 배워야 했고, 다른 수호사제들처럼 목검을 들고 검술 훈련을 받아야 했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이따금씩 본당에 불려갔던 때보다야 훨씬 나았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당신을 만날 시간이 줄었으니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정체를 숨겨야 했고, 남자였음에도 신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했으므로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종종 이른 시간에 찾아와 훈련을 받는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고.
……그러나 실제로 물은 일은 없어요. 나를 보는 당신의 표정이 어느 즈음에 들어서 쓸쓸한 빛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몰래 권유했습니다. 진짜 검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고. 내가 검을 잡은 지 딱 여섯 달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열여섯이 된 당신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기는 칼을 휘두를 수 없답니다. 자기가 검을 배운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해진다고요. 나는 아연해졌습니다. 동시에 당신의 존재가 서글펐습니다. 나는 더 권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어렸던 에이타가 헤아린 모든 것들을 부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렇게 우리는, 평탄하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이 되고, 당신은 열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보다 한 뼘 작아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열여덟의 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켜주겠노라고.
외로움을 감추려 애써 웃는 당신의 얼굴에 더 이상 쓸쓸함이 파고들 틈이 없도록.
에이타, 당신이 느끼는 모든 빈 자리를 내 힘으로 채우겠노라고.
……참으로, 참으로 어리석은 다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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