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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두 번째 장

 



신궁의 옆 풀이 무성한 뜰, 왕성으로 나가는 쪽문을 지나 곧장 별관의 대청까지 다다른다. 발꿈치를 바짝 들고 종종 걷는 걸음은 가볍고 퍽 행복하다. 볕이 드는 대청에 늘어지게 엎어져 하품을 하고 있는 고양이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곧장 별관 안쪽의 복도까지 접어든다. 총총 마룻바닥을 딛는 걸음소리는 발을 감싼 버선의 폭신함에 먹혀 귀로는 도무지 들을 수 없다. 카와니시는 방 안에 정좌한 채로 비죽 웃었다. 그가 다가오는 걸음을 계산하면서 속으로 수를 센다.


하나.

.

.


카와니시가 벌컥 문을 열었다.



와악!”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던 세미는 난데없이 열린 문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얗게 질려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마룻바닥에 엉덩방아를 찐 채로, 그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카와니시의 환영을 맞았다. 카와니시가 장난스레 웃으면서 말했다.



오셨어요.”

……어떻게 알았어?”



놀래주려 했는데. 아쉬움에 세미가 투덜거렸다. 카와니시가 뻗은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킨 세미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카와니시를 노려본다.



또 그거 썼지?”



푸스스 웃으며 카와니시가 세미를 잡아당겼다. 방까지 끌려들어간 세미를 한 팔로 안고 카와니시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삐죽 솟은 머리카락에 턱이 간지러웠다. 세미가 고개를 위로 바짝 들어 카와니시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다가 대뜸 화를 냈다.



너 또 나 보고 있었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게 더 문제란 생각은 안 들어?”

어쩔 수 없어요. 신궁은 조용하고 심심한 반면 에이타의 주변은 시끄럽고 즐거우니까요.”



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 카와니시가 속말로 중얼거렸다.


카와니시는 세미가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좁아터진 방에 훌쩍 커버린 사내 둘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게 모양새가 영 빠졌다. 후원에 나가는 날이 아니면 카와니시는 굳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감시하는 눈이 많다. 아직 세미가 카와니시의 능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세미는 그게 늘 불만이었지만.



, 잠깐만. 그럼 너 혹시 내가 옷 갈아입고, , 그런 것도 다 봐?”

양심상 에이타의 알몸을 본 적은 없어요. 소리만으로도 뭘 하는지는 다 알 수 있으니까. , 새벽에 자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요. 오늘 아침엔 정말 푹 잘 주무시더라고요. 입가에 침이,”



세미가 파드득거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카와니시의 입을 막으려다가 매운 손바닥으로 그만 그의 턱을 갈겼다. 제법 센 소리가 나고 카와니시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허둥지둥 카와니시를 부축하는 세미는 어쩔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쥐고 카와니시가 웃으며 말했다.



나날이 아파지네요, 에이타의 손.”

네가 자꾸 그런 소릴 하니까…….”

좀 보면 어때요?”

불공평해. 나는 여기 오지 않으면 널 볼 수가 없단 말이야.”



세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것마저 못내 사랑스러워 카와니시는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인내하지 않으면 단번에 그의 어깨를 잡아 안을 것만 같았다.


수호사제가 된 이후로 카와니시는 세미와의 만남에 있어서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 신궁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신관들이야 모두 여자여야 했지만 수호사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할 줄 아는 거라곤 어설픈 검무밖에 없어서 수호사제가 된 그의 자질을 의심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래도 설마 남자의 몸으로 신력을 가졌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할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예전처럼 꽁꽁 숨던 때와 다르게 본격적으로 신궁의 일원이 되었다. 수호사제로서 국가의 큰 제례행사에 참석하고, 신관들을 호위했다. 물론 카와니시는 검무를 선보이는 자리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사제의 명령으로 그는 언제나 외진 곳의 그림자에 숨어야 했다. 카와니시는 그것에 그리 불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관심을 갖는 존재는 이 좁은 세상에서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카와니시는 신력을 다루는 데에 탁월해졌다. 소년의 시기를 거쳐 성장하면서 신력을 담는 그릇이 넓어졌으므로 보다 유연하게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 마찬가지였다. 흐름의 농도와 능력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서, 눈을 열고도 자신이 원하는 흐름만 찾아내 볼 수 있었다.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흐름을 볼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그 때문에 카와니시는 종종 왕궁에서 생활하는 세미의 일상을 엿보곤 했다.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신궁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서가 가득 쌓여있는 서고에 방문하거나, 대사제의 부름으로 본당에 가서 필요한 일을 수행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카와니시는 방에서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세미의 생활도 썩 재미있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카와니시가 자란 만큼 세미도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 조금 여유로워진 그는 이제 시라부의 철통같고 꽉 막힌 면모에도 제법 유들유들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예전처럼 여전히 장난기 많고 솔직했지만, 제 감정을 다루고 숨기는 데에 좀 더 능숙해졌다. 몇 년 사이 훌쩍 어른이 되어버려서는, 종종 그가 여전히 그의 형에게 학대 받고 있음을 까먹을 정도였다.


에이지로의 괴롭힘은 해가 갈수록 더 교묘하고 악랄해졌다. 카와니시가 오랜 시간 지켜본 결과, 그가 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악행을 저지르는 날은 주로 왕위를 물려받을 첫째와 부딪치는 날이었다. 단순히 물리적 충돌을 넘어서서 그의 어머니인 왕후에게 대놓고 비교를 당한다든지, 왕궁을 거닐다가 신하들이 몰래 속닥이는 말을 듣고는 혼자 빈정이 상한다든지 하는 모든 종류의 충돌을 말했다. 심기가 뒤틀리면 그는 곧장 세미를 찾아다녔다. 나이를 먹어서는 어릴 때보다 더 은밀하고 잔혹하게 세미를 괴롭혔다. 시기는 불규칙했다. 자기 안에 쌓인 불평불만을 해소하고 싶을 때면 늘 세미는 원치 않게 불려나갔다. 주로 그의 방이나, 세미의 방이 장소였다.


세미는 늘 참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그가 무서워 이곳저곳 도망을 다녔지만 자란 이후로는 굳이 도망치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서 그의 악행이 저절로 멎길 기다린다고 하기보단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천성이 시기가 많고, 약자에게 강하며 그럼에도 가진 것 없는 제 형을 그는 꽤 안타까워했다.


자라면서 세미의 심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자기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늘 웃으면서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유연하게 지내는 월요국 셋째 왕자님은 조금씩 사랑받기 시작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저 주위의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게 꿈인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세미는 아랫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고호위인 시라부와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라든지 신궁의 사람인 카와니시가 허락 없이 이름을 불러도 전혀 지적하지 않는다든지누구에게나 상냥했다. 쉽게 말하면 난국에서 피어난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깨끗하고 순수했다. 그래서 조금씩,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에이지로도 그들 중 하나였다.


카와니시가 늘 세미를 보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보고 있다고 해도 카와니시는 여전히 신궁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사실 세미를 지켜줄 방도는 없었다. 그래도 보고 있어야 했다. 카와니시는 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아야 했다.



또 책 읽고 있었어?”

별로 할 게 없거든요. 읽어볼래요?”



잘 개어둔 이부자리 옆에 책이 세 권 놓여있다. 그 중 하나를 펼쳐든 세미가 몇 장을 넘겨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도로 내려놓는다. 카와니시는 들리지 않게 속으로 웃었다. 모를 법도 했다. 신궁의 유래나 신력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책이었다. 공부를 위해 카와니시가 가져다 둔 것으로, 어차피 이곳 신궁에서도 카와니시 말고는 그것들을 읽을 사람이 없었다.


불쑥 세미가 물었다.



아니. 카와니시, 나갈래?”

어디를?”

후원 울타리를 넘어가면 숲이 있어. 저번에 거기서 반딧불을 봤거든.”

위험할 텐데요. 궁에서 가깝다고는 해도 산짐승이 다니는 숲입니다.”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시라부가 있어서 안 괜찮은데요.”



카와니시가 느른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세미가 금세 곤란한 얼굴을 했다. 분명 또 시라부를 따돌릴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카와니시의 방에 들어올 때면 늘 시라부는 대청에 앉아 고양이들과 함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세미가 방에서 나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라부는 미련하게 거기 앉아서 그렇게 있었다. 두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시라부를 설득하는 건 어때요.”

되겠어, 그게?”

시라부 잘 다루던데요, 에이타.”

그래도 그건 안 돼. 그 애를 곤란하게 하긴 싫어.”

……몰래 나갔다가 걸리면 그게 더 곤란한 거 아닙니까?”



다짜고짜 세미가 카와니시를 붙잡아 끌었다. 두 사람의 은밀하지 않은 만남을 감시하고 있는 것은 시라부뿐만이 아니라서 늘 행동거지를 주의해야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세미는 그런 것엔 통 관심이 없었다. 카와니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야 대사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지, 세미가 곁에 있는 마당에 더 이상 그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처음엔 카와니시를 엄하게 가르쳤던 대사제도 지금은 반쯤 포기한 상태다. 특별히 위험한 일을 저지르거나, 허락도 없이 왕성 바깥으로 튀어나가 무뢰배들에게 신력을 쓴다든지 하는 일만 아니면 그녀는 더 이상 카와니시를 말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살살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은 시라부 켄지로 한 사람뿐이라는 뜻이다.



후원으로 나가는 건 시라부가 대동해야 하니, 몰래 가려면 대청 쪽은 무리겠어요.”



카와니시의 대답에 세미가 개구지게 웃었다. 와락 카와니시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세미가 성큼성큼 앞장섰다.


신궁을 매일 제 집처럼 드나든 터라 세미는 카와니시보다 더 이곳의 지리를 잘 알았다. 후원으로 나가는 길목은 하나였지만 수풀더미를 헤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는 법이나, 길목에 위치한 문이 아니라 담을 넘는 것에도 능숙했다. 그는 좀처럼 자리에 앉아있지를 못했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필연적으로 그가 겪어야 할 억압과 고립에 대한 내면의 저항이라고 카와니시는 생각했다.


아쉬웠다. 이곳, 신궁에서만 그와 함께 있어줄 수 있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아직 날이 어둡지 않아서 반딧불은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숲이 어두워서 괜찮아.”



소매도 밑단도 긴 도포자락은 수풀을 헤치며 걷기에 썩 좋은 옷은 아니었다. 세미는 혹시 찢어질 것을 걱정해 폭이 넓은 소매를 몇 번이나 둘둘 팔뚝에 말아 고정시켰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 수풀과 나뭇가지가 험하게 우거진 숲속이라 시야도 그리 좋지 못했다. 한 걸음씩 차분히 내딛으며 맨손으로 가지들을 쳐내는 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카와니시가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꾹 잡아 세웠다.


카와니시가 한 발 더 세미를 앞서나갔다. 똑같이 소매를 팔뚝에 단단히 묶고 손을 크게 휘저었다. 반딧불처럼 노란 불빛이 카와니시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기다란 호선이 닿은 곳, 나뭇가지들이 저절로 몸을 움츠린다. 금세 시야가 트였다. 카와니시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세미를 바라보았다. 카와니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세미가 두 눈을 깜빡이며 마주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요?”

……분명 어렸을 땐 내가 좀 더 컸는데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세미가 대답 없이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카와니시의 품에서 벗어나 한층 걷기 수월해진 수풀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잠깐 자리에 붙박고 서있던 카와니시가 뒤늦게 픽 웃음을 터뜨리곤 뒤를 따랐다.



제가 좀 많이 크긴 했습니다.”

아아, 그러셔. 좋겠네, 타이치는.”

좋습니다. 에이타를 한 품에 담을 수 있게 됐거든요.”

……넌 대체.”

진심이에요.”



세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졌다는 시늉까지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그러나 붉어진 귀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뒤에서 그걸 지켜보면서 카와니시는 모르는 체 웃었다.


검푸른 숲으로 한참을 들어가니 연못이 나왔다. 숲의 빛깔에 그대로 물들어서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새카만 물웅덩이였다. 그걸 연못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수면에 동동 뜬 연잎과 연꽃 몇 송이가 다였다. 어두운 시간에 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완연한 검은색의 숲이었다.


그러나 수풀의 잎사귀, 나무를 타고 늘어진 덩굴이나 연못 주위에 자란 이름 모를 풀들 사이로 연한 빛이 동그란 모양을 하고 분주히 움직였다. 정해진 장소에 머물다가 불쑥 허공으로 튀어오르기도 하는 빛의 구는 세미가 말한 반딧불이었다. 탄성이 터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축축한 바닥 위에 쭈그려 앉아 느리게 허공을 떠도는 빛들을 바라보고 세미가 말했다.



분명 한낮인데 꼭 밤 같지.”

확실히 어둡긴 하네요.”

반딧불들이 기운이 없나 봐. 빛이 별로 밝지 않네.”

불꽃이 아니라 벌레니까요.”

하지만 선조들은 반딧불을 잡아서 호롱에 넣어두고 공부를 했다는데.”

속담 아닙니까, 그거.”



카와니시의 심드렁한 대꾸에 세미가 푸스스 웃었다. 그 바람에 잔잔하게 움직이던 빛들이 조금 더 불규칙하게 떠돌아다녔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세미의 등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카와니시가 뒷짐을 진 손바닥에서 반딧불보다 진한 금빛의 씨앗을 뿌렸다.


민들레의 홀씨처럼 선명한 빛들이 연못가 주위를 촘촘하게 에우기 시작한다. 심연처럼 까마득하던 연못 위로도 별처럼 노란 빛이 흩뿌려졌다. 간신히 봉오리를 맺은 연꽃 위에도 빛을 품은 홀씨 하나가 떨어졌다. 은근한 조명들 위로 눈부시게 은하수가 펼쳐졌다. 밤보다 깊은 새벽, 달조차 없는 그믐의 어둠처럼 새카맣던 숲 안으로 눈부신 빛의 경치가 스며들었다.



진짜 못하는 게 없구나.”

에이타 앞이 아니면 안 써요.”

못하는 말도 없고.”

…….”

예쁘다.”



카와니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옮겨온 신력을 축복으로 여겼다. 저주의 낙인이나 다름없었던, 지금까지 카와니시가 살아온 인생을 시궁창으로 몰아넣은 힘의 근본이 처음으로 저에게 있어 다행스러웠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가 짓는 웃음 한 톨을 위해서라면 카와니시를 억압하는 신궁의 모든 것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와니시의 옆에서 그게 진심이든 가식이든 해사하게 웃는 저 달빛 같은 얼굴 때문에, 자신을 이 땅에 잉태한 어머니를 피눈물로 저주했던 것에 최초로 용서를 빌었다.


모든 게 낯선 최초였다. 세미 에이타는 카와니시에게 최초의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경이로운 존재였다.



……, 예뻐요.”



카와니시가 슬며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빤히 세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별의 지도가 수놓인 검푸른 연못의 위를 바라본다. 그의 모습이 불현듯 그 위로 피어올랐다. 카와니시가 눈에 담은 그의 잔상이, 여전히 눈동자에 남은 것이리라.

 





*





 

맨몸으로 수풀을 헤치고 다닌 덕택에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겨우 시간 안에 별관 후원 뜰까지 도달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 발생했다. 그 꼴을 시라부에게 해명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는 은밀하게 카와니시의 방으로 돌아가 옷에 묻은 풀들이라도 떼어낼 참이었다. 들키지 않고 돌아갈 수 있다면 제일 좋았겠으나, 역시 언제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카와니시의 방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시라부는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을 성이 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다녀오십니까.”

……질문이 아닌데, 시라부.”

제 몰래 가야만 하는 곳이 굳이 있습니까?”



세미는 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잘못을 알아서 마땅히 둘러댈 변명이 없었다. 어릴 때 카와니시와 함께 멋대로 왕성 밖을 나가 벌어졌던 일들을, 카와니시가 신력으로 무뢰배들을 물리쳤다는 것을 제외하고 시라부는 모두 알았다. 세미는 그 사단으로 왕궁과 신궁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걸 핑계로 세미의 호위인 시라부가 에이지로에게 귀뺨을 두어 차례 얻어맞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 규칙을 어기고 밖으로 튀어나갔으니, 시라부에게 혼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라부는 의외로 쉽게 길을 터주었다. 그는 눈빛으로 세미에게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물론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조차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카와니시의 방문 틈으로 세미가 쏙 들어갔다. 뒤이어 방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카와니시는 불쑥 제 앞을 막아선 시라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 문이 닫힌다. 진득하게 정적이 들러붙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뻔뻔한 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야?”

멀리 간 것도 아니고 후원 숲에서 좀 헤매고 다닌 것뿐이야.”

……다시 너를 만나러 신궁으로 오신다 하면, 내가 전력으로 막도록 하지.”



시라부가 부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카와니시가 미미하게 얼굴을 구겼다. 규칙을 어긴 거야 할 말이 없다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막아봐.”

…….”

내가 만나러 갈 거니까.”



반쯤은 진심이었다. 수호사제가 된 이후 어느 정도 행동에 자유가 생겼기 때문에 신궁을 벗어나 왕궁을 돌아다녀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세미가 그런 것처럼 매일같이 왕궁에 나타나면 물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은 있겠지만, 그건 단순히 카와니시를 해야 할 일 제대로 하지 않고 놀러 다니는 불량 수호사제로 여기는 정도일 것이다. 세미가 꾸준히 신궁을 방문했으니 이미 월요의 셋째 왕자님이 신궁의 이름 모를 수호사제와 아주 친밀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랐다. 한 마디로, 카와니시는 거칠 게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떠들지 마.”

그럼 네 입으로 내가 모르는 걸 가르쳐주던지.”

그 분은 눈에 띄어선 안 돼.”

그것 참 모호한 이유네. 그래서 누구도 못 보게 눈 가리고 귀 막고, 그렇게 인형처럼 에이타를 가둬두겠다고?”



기어코 시라부가 카와니시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가 짐승처럼 목 안의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게 내가 그 분을 지키는 방법이야.”



무엇으로부터?


벌컥,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덕분에 카와니시는 그 물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야 했다.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나온 세미의 표정이 퍽 어두웠다. 복도를 바라보고 서서,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세미가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시라부.”



말은 권유였으나, 그의 어조는 명백한 명령이었다. 시라부는 얌전히 카와니시를 두고 등을 돌려 세미의 뒤를 따랐다. 카와니시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게 가면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는다.


인사라도 해주지 그래요.


애달픈 목소리는 결국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가시가 걸린 듯 목 언저리가 따가웠다. 카와니시는 천천히 걸어 방 안으로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에 찢겨진 옷자락이 처량하게 떨어져있다. 카와니시는 허리를 숙여 손바닥만 한 천 귀퉁이를 집어 올렸다. 카와니시의 서랍에 있는 먹을 급하게 녹여 손가락으로 정갈하게 쓴 글귀가 눈에 띄었다. 카와니시는 슬프게 웃고야 말았다.


고마워, 타이치.

 





*

 





그날 밤, 카와니시는 또 꿈을 꾸었다.


처음 꿈을 꾼 이래로 불규칙하게 머릿속에 나타나는 꿈이었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집, 카와니시는 여전히 그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이 쉬도록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꿈속의 상황이 그 모양이니 카와니시는 꿈속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수백 번의 같은 꿈을 꿨어도, 그 속에서 카와니시는 어떤 일도 자의로 할 수 없었다.


꿈속의 환영은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피부를 짓누르는 불길의 무거운 감각은 뜨겁고 아팠다. 코로 재가 되어버린 것들의 잔해가 스며들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검댕이 묻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카와니시는 무작정 그 집의 방을 헤매고 다녔다. 목적이 무엇인지, 찾고 있는 게 대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불에 타버린 기둥이 중심을 잃고 쓰러져 지붕이 카와니시의 위로 쏟아질 때까지 카와니시는 내내 그 속을 뛰어다녔다.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 꾸는 경우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와니시가 신궁의 서고에서 책을 빌려오는 이유도 그냥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나타나는 꿈속의 불타는 집은 과연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지하고 있는 것일까. 무리해서 흐름의 속을 헤엄쳐도 카와니시는 주위의 미래에서 불꽃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대체 그 꿈은 카와니시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신력은 이 땅 위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월요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과 다르게 신력이 발현되는 인간은 극히 소수이고, 성별이나 연령에는 제한이 없다. 카와니시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우연히 신력을 타고난 것일 뿐, 그가 신력을 가지게 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밖에도 월요의 신궁에 있는, 역대 대사제와 신관들이 편찬한 책들에는 실제로 카와니시가 겪어 알고 있는 것들과 거리가 먼 설들이 많았다. 그게 바로 카와니시가 월요국이 생기기 이전, 고대부터 대대로 이어져온 고서들을 읽는 이유였다.


꿈도 신력과 비슷했다. 일반 사람들이 꾸는 꿈에는 그들의 무의식을 반영한 결과만 남아있을 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체가 신력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꿈은 카와니시가 볼 수 있는 흐름과 비슷한 경향이 있어서, 카와니시처럼 신력이 특히 강한 사람은 잠에 드는 틈에 꿈과 흐름이 뒤죽박죽 섞이기 쉽다. 고대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예지몽에 관한 것도 모두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카와니시는 주기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동일한 장면을 그저 꿈이라고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카와니시에게 요구하는 것을 파악해보고자 여러 서책을 뒤져보고는 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미래의 흐름에서는 같은 장면이 보이는 게 없다. 그렇다고 미래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카와니시와 크게 상관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그건. 며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시원하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촛불에 의지해 찬찬히 글을 읽던 카와니시는 표지를 덮었다. 눈이 뻑뻑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랜 시간 한 곳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생기는 물리적 통증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다가 문득 열린 틈으로 뜬 달을 바라본다. 꽤 늦은 시각이 되었다. 슬슬 이부자리를 펴고, 촛불을 끄고 잠에 들지 않으면 오늘 순찰을 맡은 다른 수호사제들에게 눈총을 받을 게 뻔했다. 책들을 구석으로 치워두고 카와니시가 이불을 넓게 펼쳤다. 간신히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연한 달빛이 내리는 창마저 틈 없이 닫고 나니 금세 방 안에 완연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카와니시는 부스럭거리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서, 습관처럼 흐름 속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이 닿는 곳은 늘 세미의 곁이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사이였으나 해가 지기 전에 헤어지는 게 늘 아쉬웠기 때문이었을까, 카와니시는 어느덧 하루의 마지막을 그의 잠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 세미는 이미 이부자리에 들어있었다. 그는 모로 누워 허리를 둥글게 구부리고 웅크린 채 자는데, 처음엔 분명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자다가도 채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벗어던져 구석으로 밀어버리곤 했다. 시라부에게 언뜻 세미는 고뿔에 잘 걸리는 체질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카와니시는 단박에 그 이유를 찾아냈다. 당장 왕궁 그의 침소로 달려가 이불을 덮어주고 밤새 옆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 이야기를 세미에게 했더니 그는 민망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날 때부터 몸에 열이 많아서 그래.

그래도 잘 덮고 자요.



카와니시의 엄한 목소리에 세미는 맘대로 안 된다며 투덜거렸다. 하기야 잠버릇이 사람 맘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 어쩔 수 없다며 양보는 하겠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모양새를 보니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 날이 많이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흐름 속을 막 빠져나오려던 카와니시는 자리에 꽉 붙잡혔다. 귓가로 선명하게 세미의 약한 음성이 스며든 탓이었다. 카와니시는 졸음도 잊고 세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그에겐 바람 같은 느낌이라 딱히 주의를 기울일 필욘 없었지만, 혹여 그를 깨울까봐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이불을 걷어차고도 몸이 더운지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꼭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아래에 숨겨진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악몽이야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으나, 카와니시는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옆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이불에 주름이 생기도록 손가락으로 그러쥐고서 세미는 앓고 있었다. 꿈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카와니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꿈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무의식을 반영한다. 타인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세미에게도, 카와니시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잠깐 서서 지켜보던 카와니시가 가만히 세미의 이마를 짚었다.


숲속에서 보았던 반딧불처럼 연한 빛이 맞닿은 살결 위로 피어올랐다. 그것은 세미의 이마를 뒤덮고 있다가 카와니시의 손끝에 동그랗게 뭉친 채로 매달렸다. 곧 새벽의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산란하듯 모습을 감춘다. 세미가 떠올리고 있는 악몽을 한 꺼풀 걷어낸 것이다. 여전히 관자놀이는 땀에 흠뻑 절어있지만 밤새 악몽을 걷던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리라, 카와니시는 그렇게 믿었다. 카와니시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카와니시는 흐름을 닫았다. 온전히 방으로 돌아온 정신이 맑게 트였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눈을 깜빡거리다가 모로 몸을 기울였다. 기다렸단 듯 쏟아지는 졸음 너머로, 문득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났다.


감사제, 모두가 흥겨워하던 풍경 너머로 널따란 신궁 안에 홀로 갇힌 카와니시의 모습, 그리고 호수에서 처음 만난 세미, 그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수려한 금빛 실의 향연과 시야를 뒤덮던 오색의 빛깔, 우연히 다시 만나 몰래 왕성의 바깥을 구경했던 날, 두 손으로 직접 그것들을 처음 만져보고 아닌 척 아이처럼 신이 났던 카와니시, 친구가 생겼다며 행복한 웃음을 짓던 에이타, 그리고…….


기억의 종착역에 닿을 듯 말 듯 카와니시는 천천히 잠에 빠졌다. 이윽고 머릿속은 까맣게 암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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