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누렇게 뜬 종이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연 먼지가 피었다. 카와니시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이른 시간 신궁의 서가에는 사람이 없다. 본래 사서가 지키고 있지 않은 시간에 서가는 출입금지였지만 카와니시야 일찍이 신궁의 여러 법칙을 거스른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사제의 명령으로 신궁 안에서라면 카와니시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혹자는 그걸 편애라고 여겨 카와니시가 수호사제의 직함을 달 때부터 그를 못 마땅히 여기는 것 같았으나,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이 시간에는 서가 근처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으므로 카와니시는 책장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책을 훑기로 했다. 기록하고 빌려가도 되었으나, 사서가 출근할 때까지는 그냥 읽고 있어도 좋을 것이다.


신궁의 서가에 보관된 책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읽기엔 그리 재미가 없었다. 제목만 봐도 그렇다. 신력의 운용법이니, 신력의 존재와 한계니, 카와니시처럼 이쪽의 일과 깊게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흥미를 보이기 어렵다. 카와니시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책을 빌려다 읽곤 했는데그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것도 마땅한 이유였지만그마저도 대부분은 소설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곳의 모든 책을 뒤져서 겨우 얻은 쓸 만한 책은 아홉 권뿐이었다.


카와니시가 그 책들을 쓸모 있다고 판단한 근거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의 존재를 다뤘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카와니시가 볼 수 있는 흐름이란 것이다. 물론 내용 중에서 카와니시가 직접 겪은 것과 거리가 먼 것들도 있었지만, 그건 아마도 책에서 언급되는 개인차 때문일 것이다.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흐름책에서는 정체불명의 힘이라고 부르지만세계의 근간을 구축하고 있는 수많은 평행의 시간과 공간을 실타래처럼 응축시켜놓은 것이었다. 카와니시가 그것들을 통해 가까운 미래를 예지하거나, 특정 인물의 과거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다. 다만, 책에서는 흐름의 한계를 두지 않는다. 우주에는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의 선택에 따라 생성된 셀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은 한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세상 속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아주 길고 유구하기 때문에 전생과 후생에도 영향을 준다.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에 의하면 카와니시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나 죽고 난 이후의 세계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카와니시도 이미 그것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어린 시절의 카와니시는 힘을 다루는 게 서툴러 원하는 것을 선택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그 수많은 실들 사이에서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만 있다면, 정말 아주 먼 미래의 일들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밖에 그 모든 평행세계를 아우르는 윤회의 길 등을 책에서는 장황하게 설명해놓았다. 앞서 언급된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에 관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풀어져있었다. 눈으로 까만 글자들을 읽다가 카와니시는 무료한 표정으로 책을 닫았다. 서가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힐끗 창밖으로 별관 쪽을 내다보았다. 벌써 날이 밝았지만 오늘은 어째 그의 소식이 없다.



사제님, 대사제님께서 부르십니다.”



……다행이 오늘은 카와니시도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괜히 헛걸음 시킬 바에야 오늘은 오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카와니시는 왕궁의 성벽을 바라보고 우두커니 섰다. 카와니시를 데리러 온 신관이 한 번 더 채근하고 나서야 카와니시는 그의 뒤를 따랐다.




서가를 나와 잠깐 바깥 길을 걷는다. 본궁으로 접어들어 촛불로 은은하게 장식된 중앙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면 나오는 대사제의 방은 홀로 고요하다. 신궁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 아니었지만, 대사제를 호위하는 수호사제 넷과 신관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본당은 그러나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카와니시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비단 이곳에 대한 좋은 기억이 전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와니시가 수호사제가 된 이후 대사제가 그를 호출하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카와니시의 예지가 필요할 때였다. 오늘도 자신의 방에 발을 들인 카와니시에게 대사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홀대가 이제 익숙하기라도 하듯 카와니시는 대사제의 명령 없이도 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집어삼켜질 듯 사위가 고요해지면, 카와니시는 스스로 눈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왕실의 사정을 뒤적인다.


카와니시가 흐름을 볼 때, 원래 대사제의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사제의 곁을 지키는 수호사제 둘이 방을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유가 뭘까. 카와니시가 힘을 조절하는 것에 능숙해져서 더는 눈에서 핏물을 뽑는다든지 하는 흉측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혹시 두려워진 것은 아닐까, 죽음이란 것이. 자신이 그렇게 옥죄어 키운 신궁의 유일한 희망이 단 둘이 남겨진 틈을 타 자신의 목에 오라를 묶을지도 모른다고.


그럴 수 있었다. 카와니시에겐 그럴 명분이 있었고, 지금은 그만한 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틀렸다. 카와니시는 자신의 능력을 그런 것에 허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궁은 꽤 시끄러웠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카와니시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어수선했다. 바깥으론 휴전 중인 국경 상황을 늘 살펴야 했고, 안으로는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왕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명칭을 특정할 수 없는 병이라 달리 손 쓸 방도가 없으니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실정이라고 어의가 과거에 했던 말을 엿들었다. 혹시 치료 방도를 알고 있을까 왕실에서 신궁에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대사제는 소용이 없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신력을 가진 카와니시라면 그의 병을 호전시키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녀는 카와니시를 세상 밖에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보물창고에 숨겨둔 보석이었으므로.


카와니시는 왕의 흐름을 살폈다. 그의 미래를 짚었더니 온통 수의를 입고 있는 왕실의 사람들만 보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나라의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이름도 원인도 치료 방법도 모를 병일까. 어릴 때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카와니시는 왕실 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암투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대사제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 카와니시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스름한 시야에 대사제의 주름진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말 대신 눈빛으로 카와니시에게 명령했다. 네가 본 것을 전부 털어놓으라고. 흡사 취조를 받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카와니시의 능력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왕이 죽을 날을 정확히 알고, 왕의 건강 악화로 인한 신하들의 동요와 은밀한 물밑의 움직임 등을 미리 파악해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와 실세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였다. 카와니시는 그 불순한 목적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는 이 나라의 셋째 왕자님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셋째 왕자와 만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일이 끝나고 방을 나가려는 카와니시에게 대사제가 불쑥 물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외부인이니까요.”

네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 그 사실만은 잊지 말거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요, 그 말.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은 마세요. 에이타는 내 정체를 안다고 어디에 떠벌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까.”

카와니시.”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짙어진다. 카와니시는 등도 돌리지 않은 채로 문을 응시했다. 그녀의 우려를 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어린 카와니시에게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에이타가 카와니시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음을 모른다.


그녀는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예전부터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던 것이 있다. 카와니시가 신력을 가졌기 때문에 외부와 단절된 채, 보호를 명목으로 늘 대사제의 감시 하에 있어야 하는, 진짜 이유.



……보위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왕실의 후계자다. 왕궁의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조만간 왕궁에 피바람이 불 테니.”

잘 됐네요.”



그녀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카와니시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가장 기다리고 있던 답변이다. 카와니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같이 도망치면 되겠네.”



대사제는 더 말이 없었다.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긴 했지만. 카와니시는 더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대사제의 방을 나왔다. 나와서, 본당의 긴 복도를 걸었다. 걷는 중에 마주치는 다른 신관들에겐 부러 인사도 하지 않았다. 본궁의 문을 나와서야 거친 호흡이 터진다.


카와니시에게 이곳은 감옥이었다. 탈출할 수 있다면 어떤 기회든 잡고 싶었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삼형제가 나란히 왕의 침소에 섰다. 침상에 누운 왕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지 않다. 시체 같은 낯빛에 마른 입술 새로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창살을 꽂은 듯 거칠고 날카로워 듣기 거북했다. 몇 마디가 힘겹게 오고간다. 물론 대꾸는 장남과 차남의 몫이었다. 그러나 에이타는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기다렸다. 가시방석 같은 자리를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에이타를 제외한 두 형제는 쾌차할 수 있을 거라며 병든 왕에게 뻔한 거짓을 고한다. 에이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나서지 않는 게 최선인 것을 어린 시절부터 몸소 겪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라는 이유로 다른 두 사람과 한 데 묶여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모순적이게도 에이타는 그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강력하게 보여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할 수 있으니까. 에이타는 왕위에도, 재력이나 권력에도 일절 흥미가 없음을 그들이 알아야 에이타를 속박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왕자들보다 조금 모자란 척해야 하고, 마냥 착하게 굴어야 하고, 정치에는 관심도 가져선 안 되었으며 무예나 궁술에도 접근해선 안 된다. 숨만 붙어있는 연못 안의 관상어가 되어야 했다. 에이타가 이 왕궁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 어째서 에이타는 살아야 했을까.



살아남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저주처럼 귀에 붙박인 그 목소리는 열두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에이타의 주위를 떠돌았다. 에이타의 어머니는 영리했으나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왕궁에서 쫓겨나던 날, 제 아이의 애타는 손길을 차게 뿌리친 것은 그의 앞길을 걱정한 부모의 도리 때문이다. 처음엔 그녀를 원망하던 에이타도 이제는 속절없이 흐르는 야속한 세월만을 미워했다. 그녀의 소식은 간간이 들을 수 있었으나, 얼굴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에이타에게는 왕궁을 나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도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어디에 칩거하는지 알지 못했다. 종종 왕궁을 드나드는 시종에게서 그녀가 쓴 서신을 받아볼 뿐이다. 그마저도 에이타에게 닿기 전, 반드시 검수를 거쳐야 했다.


이름만 왕자였지 볼모와 다름없었다. 에이타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에서만 조금 달랐다. 누구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에이타는 왕궁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철저하게 배제된 인생을 걸어왔. 그랬으므로, 욕심도 없고 인품도 상냥한, 마냥 착하기만 한 막내 왕자님으로 이곳에 살아있을 수 있었다.



에이타.”



접견이 끝났다. 아픈 왕을 대신해 정무를 담당하고 있는 세자는 호위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에이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안도한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검고 축축한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슬 같은 목소리가 에이타를 붙들었다. 본능에서 비롯된 공포가 순식간에 사방을 에웠다. 에이타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에이지로가 서있다. 그는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에이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먹처럼 짙은 눈동자에 분명한 적의가 서렸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다. 에이타는 불가항력으로 그를 향해 걸었다.



오늘도 신궁에 가니?”



그는 상냥하게 물었다. 억지로 입 꼬리를 당겨 웃던 에이타는 대답을 주저했다. 에이타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가 눈으로 답을 재촉했다. 그에 관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에이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가지 않으려 합니다. 폐하께서도 편찮으시고 왕궁의 상황도…….


에이타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걸 붙들고서 에이지로가 한껏 목청을 높여 물었다.



네가 왕궁의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데?”



에이타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웃고 있지만 기분이 영 좋지 못하다. 왕위를 이을 첫째 왕자와 같은 공간에 처박혀있어야 했으니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에이타는 계속 성장했다. 아마 자세하게 측정한다면 에이지로보다 더 클 것이었다. 에이타가 더 이상 그에게 밀릴 게 없다는 뜻이다. 그가 에이타를 괴롭히는 핑계라고 대는 것들은 대부분이 억지라 단호하게 거절하고 철저하게 대응한다면 그의 악행을 멈출 수 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각인되어 온 끔찍한 기억의 파편만으로도 에이타는 그에게 거역할 수 없게 된다. 정신적인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세뇌 당하듯 꾸준히 받아온 학대로부터 에이타는 자유롭기 힘들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에이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향한 이성적 연민뿐이다.


에이타는 그 앞에서 바싹 말라붙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시라부가 가까이 다가와 에이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에이지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진다. 그러나 주저 않고 시라부는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일정이 있으니 서둘러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에이타는 직감적으로 바로 다음 일어날 일을 예측했다. 그러나 몸의 반응은 좀 더 느렸다. 다짜고짜 날아든 에이지로의 손등이 시라부의 뺨을 갈겼다. 에이타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나 시라부는 아주 평온했다.



에이타 감시 좀 잘 해. 자꾸 밖으로 기어나간다는 소문이 나잖아, 왕실 질 떨어지게. 너 그러라고 붙여둔 거야.”



그는 족쇄를 채울 참이다. 왕이 죽으면 곧장 왕위를 이어받아 이 땅에 군림하게 될 형제 때문에 장이 뒤틀리고 꼬일 대로 꼬여선 차선책으로 에이타를 괴롭힐 셈이었다. 우뚝 멎어있던 시라부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의 미동 없음이 못마땅했는지 에이지로는 얼굴을 구긴 채로 등을 돌렸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에이타는 시라부의 등을 바라보고 정지했다.



또 맞았네.”



에이타는 조심스럽게 시라부의 어깨를 돌려세운다. 손버릇 나쁜 그를 상대한 것치고는 선방한 것이다. 마찰 때문에 입가가 조금 찢어졌다. 흉하게 피가 흐르진 않았지만, 송골송골 땀처럼 핏방울이 맺혔다. 에이타는 소매를 들이밀었다. 거절한 쪽은 시라부였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미안해.”

사과하지 마세요.”

…….”

이게 제 일입니다.”



무어라 더 대꾸하려던 에이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라부의 의중을 알기 때문이었다. 에이타도, 시라부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시라부는 언제나 그렇게 에이타를 달래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없었다면 지금쯤 너는 더 빛나는 곳에 서있지 않았을까.


시라부가 듣는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소리였다. 그 말들을 쓰게 곱씹어 삼키면서 에이타는 약하게 웃었다. 시라부가 앞장서서 에이타를 안내한다. 가느다란 어깨를 바라보며 에이타는 스스로를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어도 그게 에이타의 일이라면 전혀 사소하지 않고, 아무리 중대한 일이어도 에이타의 일상과 관계가 없다면 제겐 사사로운 일입니다.


금색의 찬란한 힘으로 에이타를 구하고, 에이타가 보고 싶어 하던 반딧불을 부리고, 아마 앞으로도 에이타를 위해 온 힘을 다할 사람이었다. 혹시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까. 에이타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방긋 웃었다.

 






*






 

그날따라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촛불 하나만 달랑 켜진 방은 어두웠음에도 에이타는 무사히 나갈 채비를 마쳤다. 조금 열린 창문을 꽉 눌러 닫고 훅 바람을 불어 불빛을 껐다. 완연한 암흑이 찾아든다. 혹시 발이 잘못 걸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에이타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은 경비가 교대할 시간이라, 때만 잘 맞추면 무사히 왕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에이타는 허리를 숙이고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어딜 가십니까?”



허억, 뒤를 밟힌 에이타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에이타는 등을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금세 시라부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에이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시라부에게 말했다.



, 언제부터?”

방을 나오실 때부터요. 앞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못 보셨습니까?”

너무 밀착 경호 아냐?”

제 맘입니다.”



시라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마 에이타가 어디를 가려는지 눈치를 챈 것이리라. 에이타는 중죄라도 지은 표정으로 시라부의 얼굴을 살폈다. 아랑곳 않고 시라부가 다시 한 번 묻는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는 겁니까?”

……한 번만 모른 척해주면 안 돼?”

신궁에 가십니까?”



시라부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물음에 에이타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예전에 시라부가 했던 말을 빌리면, 하루 못 본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어쩌면 카와니시는 이미 잠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가고 싶었다.



……제가 따라가겠다고 하면.”



시라부는 미묘하게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에이타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쥐고 시라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분명 거절하실 테지요.”

……,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못 가게 막으면 미워하실 겁니까?”



그럴 줄 알았다. 에이타는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이번 침묵은 긍정보단 반항에 가까웠다. 시라부는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었다.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마치 관문을 거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에이타는 그의 물음을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유가 있을까. 없다. 개인적인 일정 문제로 그와 만나지 못한 날은 오늘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가야할까. 모른다. 에이타는 그렇게 답을 내렸다. 그저, 그냥 잠에 들기엔 마음이 허해서 또 악몽을 꿀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 늦은 밤에도 사무치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다녀오세요.”



에이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마침내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 의중을 알고 시라부가 다시 한 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들키지 않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는 못 나갑니다.”



시라부는 에이타에게서 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차분히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에이타는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시라부는 이유를 물었다. 에이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가 잠겼던 침묵은 아마 보다 깊고, 복잡했으리라.

 






*






 

카와니시는 대청에 앉아있었다. 밤하늘 한가운데에 둥실 뜬 달빛을 횃불삼아 무릎을 베개로 길게 엎드려있는 고양이의 이마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거짓말처럼 카와니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세미는 카와니시를 방문하지 않았다. 왕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 세미를 둘러싼 것들이 모두 느리게 움직인다. 세미는 오늘 하루, 그것들에 발목이 붙잡힌 것이다. 굳이 잠이 오지 않는 이유를 따지라면, 아마도 그것 때문이다.


눈두덩이 시큰시큰 아팠다. 카와니시는 잠시 눈꺼풀을 닫았다. 손가락 두 개로 양쪽 눈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썩 시원하거나 개운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힘을 주어 미간을 모았다가, 느리게 푼다. 그리고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모양이 찌그러진 달, 보랏빛 밤의 어둠을 배경으로 그곳엔 세미가 서있었다.



…….”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꿈이 아니구나. 뒤늦게 깨닫고 카와니시가 되묻는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세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시라부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온 모양이다. 그가 신궁에, 그것도 별관에 이 늦은 시간 홀로 올 일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카와니시는 내심 그의 방문이 반가웠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세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 그게 말이지.”

오늘 안 와서 걱정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뒷말은 애써 삼켰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카와니시의 얼굴을 살피다가, 세미는 조심조심 걸어 섬돌을 밟아 올랐다. 신발을 벗지 않은 채로 그가 카와니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고양이와 단 둘뿐이던 세상에 그의 공기가 가득 찬다. 카와니시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좀 사정이 있었어. 별 일은 아니고.”

그러면 다행이네요. 들리는 소문엔……,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맞다, 너는 다 알 수 있지.”



카와니시는 힐끔 세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오늘은 다친 곳 없이 말짱하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하루가 아니었을까. 세미의 불행은 모두 그의 형으로부터 온다. 손찌검한 흔적이 없으니 당장은 안심이었다. 진상을 확인할 방법은 있었지만, 세미가 바라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 카와니시는 묻지도 않기로 했다.



많이 컸지, 다들.”



세미가 팔을 뻗었다. 카와니시의 무릎에 다소곳이 누워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고양이의 뺨을 쓰다듬는다. 기분이 좋은지 그가 낮은 음성으로 고로롱고로롱했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라, 그의 새끼들은 한 마리를 제외하곤 모두 외출 중이다. 덕분에 그 한 마리는 혼자 제 집 하나를 몽땅 차지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아요. 오래 살 것 같진 않네요.”



적당한 감상이었다. 카와니시는 세미의 손등을 덮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어미는 몸이 불편했다. 의원이 아닌지라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카와니시가 본 가까운 미래에는 그가 자리에 없었다.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쭉 별관의 대청을 지켜온 늙은 고양이는, 아마도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카와니시, 나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좀 겁나는데요.”

나는 언제 죽을까?”



카와니시는 세미를 본 채로 굳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질문이 튀어나온 탓이다. 카와니시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세미의 목소리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세미는 단호한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고 있. 카와니시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요?”

그냥, 궁금하잖아. 네 능력으로는 미래도 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내가 언제 죽는지도.”

내가 보는 건 선택에 의한 결과예요.”

…….”

그리고 나는, 에이타가 살아있는 미래만 볼 거고요.”



이윽고 세미가 살풋 웃는다. 반대로 카와니시는 빳빳한 볏짚처럼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은 질문이다.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세미의 신변을 살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쉽게 죽음을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다. 세미에게는, 지금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고마워, 카와니시. 그렇게 말해줘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카와니시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오늘 하루 그에게 있었던 일을 파헤치는 건 카와니시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든, 그가 죽음을 묻는 계기가 되었을 그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구역질이 났다.


세미는 언젠가 카와니시가 부럽다고 했다. 모든 것을 읽는 눈을 가진 건 다시 말해 세상을 남들보다 훨씬 더 넓게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는 신력이나 카와니시가 가진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부러워했다. 이유를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다. 다만, 카와니시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이 그에게도 있었다면, 그는 이미 날개를 달고 훨훨 비상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억압하고 옥죄는 모든 족쇄로부터 벗어나서. 아니, 이 힘은 축복이 아니다. 저주였고 고통의 가시옷이었다. 세미가 그 짐을 지게 되는 것은, 카와니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미는 퍽 울적해보였다. 카와니시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당겨 안는다. 그리고 힘을 주어 세미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카와니시의 어깨에 기댄 채로, 세미는 하얗고 순수하게 웃었다. 파스스, 그가 뱉은 금빛 입김이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활과 화살이 되겠다.








'HQ 세미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와세미] 낡은 일기 06  (0) 2017.06.21
[카와세미] 열아홉 로망스  (0) 2017.03.02
[카와세미] 낡은 일기 04  (0) 2017.02.03
[카와세미] 낡은 일기 03  (0) 2017.01.23
[카와세미] 낡은 일기 02  (0) 2017.01.1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6/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