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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지지부진해진 원작기반 가벼운 삽질물(?

*Feat. 리퀘스트 박스












시라토리자와 학원 2학년 5, 배구부 후배, 미들블로커, 12, 어떤 것에도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은근히 쓸데없는 일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이상한 녀석, 그 이름 카와니시 타이치.


최근 들어 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열아홉 로망스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정정한다.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벌써 일 년이 되었고, 요즘은 그 감정을 사랑이라는 낯간지러운 말로 치장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이나 인정보다는 자포자기에 가깝다. 암만 현실을 부정해도 걔만 보면 코가 간질간질하고, 재채기가 나올 것 같고, 곁눈질로 힐끔거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괜히 헛기침만 하고, 아무튼 그걸 포장할 수 있는 다른 말을 못 찾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분명 예쁜 말이지만, 지금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걔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좀 쪽이 팔리니 그 정체불명의 기묘한 감각을 로망스라고 부르겠다. 이건 그래도 외국말이라 민망함이 좀 덜하다. 아무튼 카와니시 타이치에게, 같은 학교 배구부 후배인 그 애에게, 나는 혼자 로망스좀 더 와 닿기 쉽게 말하자면 썸를 찍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걔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보면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다. 처음 봤을 때는 내가 2학년, 카와니시가 1학년이었고, 배구부 입부를 환영하는 조촐한 파티에서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키가 작았고 좀 더 말랐다. 야위어보이던 얼굴은 그럼에도 훤칠해서 그래, 쟤 좀 잘생겼다고 텐도와 대화하며 맞장구를 쳤었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3학년이 된 이후로는 성장이 멈춰서 제자리인 나와 다르게 카와니시는 훌쩍훌쩍 커버려서는 어느새 눈높이가 쑥 올라갔다. 일 년 전보다 단단하게 마른 근육이 붙은 팔뚝이라든지 전력으로 뛰어올라 블로킹을 할 때 팔락거리는 바짓단 밑으로 보이는 튼실한 허벅지 같은 것에 자꾸 시선이 간다. 지금 당장 내가 내릴 수 있는 성급한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내가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내가 그 애를 지나치게 의식하게 된 것은 카와니시의 탓도 있었다. 텐도의 말을 빌리자면, 걔는 옆 학교 오이카와처럼 대놓고 잘생긴 미인형은 아니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페이스나 그 애가 가진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로 꽤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독차지했을 게 분명했다. 텐도가 말했던 그 분위기에 나도 말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친근한 선배에게 카와니시는 유독 상냥하다. 내가 딱히 선후배 사이의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서도 내 몫의 뒷정리를 도와준다거나, 가끔 회식할 때 당연하다는 듯 내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구워준다거나, 그 구운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내 그릇에 놔준다거나 하는 게 그 예였다.


처음엔 걔가 원래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착실하게 자기 일 챙기고, 생긴 거랑 다르게 오지랖도 좀 넓어서 남 일에 곧잘 신경 쓰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 주위에 한둘쯤은 있지 않은가. 걔도 그런 줄 알았다.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면서, 유심히 카와니시를 관찰하고 난 이후에는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카와니시는 내게만 다정했다. 도끼병 환자의 우쭐거리는 독백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무지 확신하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었다.



에이타가 챙김 받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광경인 거 알아?



텐도가 했던 말이 시발점이었다. 부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 불쑥 튀어나온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이타 군은 눈치 하나 없으면서 일은 정직하게 잘하잖아. 동기든 후배든 상관없이 늘 다른 사람 챙겨주는 위치라고 할까.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근데 요즘 들어 에이타를 유독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새삼 놀랍다고.



그렇게 말하고 텐도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막 부실로 들어온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나는 뒤늦게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 민망함에 두 손을 홰홰 내저었지만, 카와니시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텐도에게 대꾸했다.



원래 남들 잘 챙기는 사람이 자기는 못 챙기더라고요.

그거, 무슨 의미야?



텐도가 씩 웃으면서 되물었다. 카와니시는 거기까지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게 체육관 의자에 두고 온 내 져지를 능숙하게 건넸다. 나는 고맙단 말도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그 후로 나는 신중하게 카와니시를 관찰했다. 카와니시는 텐도에게 건넸던 말대로 남들을 먼저 챙기는 나를 챙기곤 했다. 딱히 나만 배구부 사람들을 챙기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기예보를 보고도 종종 우산을 두고 오는 나를 위해 제 몫의 우산을 건넨다거나, 손톱을 다듬을 때가 되면 제 캐비닛에 넣어둔 도구들을 꺼내 건넨다거나 하는 것들. 어느새 카와니시의 캐비닛엔 내가 쓰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들까지도 그가 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던 오랜 시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타.”



그렇게 한 번 카와니시에게 신경 쓰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됐단 뜻이다. 이제는 카와니시가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내게 슬쩍 자기 우산을 건네면 고맙다고 웃으며 받아들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도무지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에이타?”



그리고 텐도는 엉뚱하게 방황하고 있는 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엉?”

무슨 생각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



목에 수건을 두르고 텐도가 물었다. 이마를 덮은 빨간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양이다.



책상 보니까 공부하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혹시 타이치 군 생각?”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죽을래?”

, 찍은 건데 맞았어?”

맞긴 뭐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 언제는 아니라더니 아닌 게 아니네에.”

……알겠으니까 조용해줄래.”



텐도를 상대로는 내가 승산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의 도발에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내가 당황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텐도는 내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 조언의 대다수가 그냥 카와니시한테 가서 직접 부딪쳐보라는 거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아직 그런 용기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와니시였다. 같은 학교, 기숙사 앞 동에 사는 배구부 후배. 엄격한 룰에 따라 배구부원들의 연애는 공식적으로 금지가 되어있다. 아니, 설마 카와니시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그 애에게 나 사실 너를 좋아해따위의 발언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민망한 풍파를 일으킬 게 뻔했다. 나는 그다지 사람이 뻔뻔하지 못해서 카와니시에게 차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걔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에이타는 의외로 자신감이 없단 말이야. 어차피 졸업하면 학교도 끝인데, 그냥 화끈하게 저지르는 건 어때?”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나는 그저 용기가 없을 뿐이었다. 카와니시는 섬세했고, 나에게 유난히 상냥했지만 그건 어쩌면 말 그대로 내가 나를 챙길 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걸 혼자 청춘이고 사랑이라며 멋대로 포장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건 나뿐일 거였다. 뭔가 확신이 생기면 좋을 텐데. 아니, 확신이 생기면 내가 과연 그 애에게 고백 같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만 자, 텐도.”



나는 훌쩍 자리를 벗어나 침대 위로 떨어졌다. 거짓말처럼 세상이 온통 카와니시다. 수업 들을 때도, 밥 먹을 때도, 배구할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그러니 더는 내 감정이 착각이라거나 한순간의 바람이라거나, 그렇게 치부할 수도 없다.


나는 카와니시 타이치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






 

휘슬이 울렸다. 한바탕 땀을 빼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데굴데굴 공 하나가 굴러왔다.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일어서서 두 손으로 공을 주웠다. 허리를 숙인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는 열 보 안이라면 카와니시를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그림자의 주인이 걔인 걸 금방 알았다. 일어서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 애를 피하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품에서 공을 낚아채갔다. 한손에 가볍게 쥐고 카와니시가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붙박은 채로 눈만 들었다. 걔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목에 걸린 하얀 수건에 뺨을 닦았다. 익숙한 듯 다른 손으로 쥔 물통을 내게 건넨다. 나는 기운 없이 그걸 받아들고 되물었다.



뭐가.”

오늘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아서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내 집중을 못 했잖아요, 선배답지 않게.”



그랬었나. 중간에 텐도에게도 잔소리를 들었으니 어지간히 산만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딱히 붙어있지도 않았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완전 괜찮으니까 신경 끄셔.”



카와니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달라질 이유가 없으니 당연했다. 나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으니 변한 건 그 애를 보는 내 시선뿐이다. 카와니시는 눈치가 빠른 편이고, 나는 심경의 변화를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텐도의 말에 의하면어쩌면 카와니시는 이미 그 변화를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눈치 챘으면 좋겠다. 눈치 채고도 내게 살갑게 군다면, 그건 분명 그도 내게 호감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연습은 겨우 마무리되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부실로 들어가니 텐도와 야마가타는 이미 가고 없었다. 시간은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얼른 기숙사로 튀어 들어가 씻고 잠에 들어야 했다.



수건 줘요.”



카와니시가 캐비닛 앞에 서있는 내게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에게 땀 묻은 수건을 건넸다. 카와니시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젖은 수건들을 정리해 바구니에 담았다. 일학년들을 시켜도 될 텐데, 굳이 그걸 제 손으로 해낸다. 잘 들여다보면 쟤도 어지간히 나랑 닮았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맸다. 그러고 나니 부실에는 카와니시 말고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부실을 나온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카와니시를 의식한 이래로는 처음이다. 그러니까, 카와니시와 단 둘이 부실에 남아있는 상황은.



같이 가요.”



어정쩡한 걸음으로 문고리를 향해 걷는 내게 카와니시는 능숙하게 말을 걸었다. 걔도 마침 옷을 다 갈아입은 참이었다. 같이 가자는 말에 딱히 거부할 변명이 없었으므로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내 맥박처럼 똑딱인다. 하나, , 하나, . 나는 초조하게 침묵 속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아무도 없는 부실, 카와니시와 단 둘만 남아있는 고요한 공간. 고백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배 안 고파요?”

……조금?”

들어가는 길에 뭐 좀 사가요.”



카와니시가 부드럽게 내 팔뚝을 잡아 이끈다. 나는 반걸음 뒤에서 털레털레 딸려갔다.


바깥에는 인적이 없었다.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아주 넓어서, 일과가 끝난 뒤의 교정은 황량했다.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었지만 그리 밝지 않다. 여기서 기숙사까지 빠른 걸음으로 족히 십오 분, 의외로 넉넉한 시간이었지만 글쎄, 그 사이에 과연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선배.”

?”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나한테 뭐 잘못했어?”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라 나는 얼버무리는 것 대신 되물었다. 카와니시가 왼손으로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정리가 필요한 복잡한 생각을 할 때 곧잘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를 재촉하지 않고 나는 차분하게 걸었다. 당황한 척하면 괜히 나를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없으면 됐어요.”

왜 그러는데?”

그냥 기분 탓.”

……별 게 다.”



아무렇지 않은 척 피식 웃으면서 나는 검지로 코끝을 문질렀다.


내가 자기한테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겉돌았으니. 갑자기 거리를 두고 말도 붙이지 않았으며 은근히 시선을 피하는 것까지 모두 카와니시는 그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고 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그에게 그리 좋은 선배가 되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닫기 직전 가까스로 편의점에 도착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도시락과 간식으로 먹을 것들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와니시가 지갑을 꺼낸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애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봉투 따로 담아주세요. 퍽 친절한 카와니시는 계산대의 직원에게 그렇게 말했다. 부스럭거리며 그가 봉투 두 개를 꺼낸다. 하나는 그가 담고, 내 몫은 카와니시가 직접 담아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면 될까. 그것으로 오늘 나의 고민은 종식될 수 있을까. 아니, 분명 오늘도 푹 잠에 들지 못할 게 훤했다.


좋아해, 카와니시. 너를 좋아하고 있어. 내내 맴돈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는 그 말 몇 마디 전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타는 듯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카와니시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 애 생각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아무것도 집어넣을 수 없다. 나는 멍하니 카와니시의 뒤를 따랐다.



같이 먹고 들어갈래요?”



편의점을 나오면서 그가 묻는다. 맑은 음성에 반짝 정신을 차린 나는 돌발적으로 운을 뗐다.



, 그게 좋지 않을까.

좋아해, 카와니시.”



……문제가 조금 있었다면, 말과 생각이 뒤바뀌었다는 것뿐.


정확히 오 초,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서로를 바라본 채로 얼어붙어있었다. 나는 크게 눈을 깜빡였고, 걷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카와니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 망했다. 뒤늦게 민망함과 함께 부끄러움이 얼굴로 몰려왔다. 나는 애써 웃으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상황을 수습할 변명이 필요했다.



, 카와니시. 그러니까 방금 전은…….”



카와니시는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든 봉투조차 바스락거리지 않을 정도였다. 내 시야가 금세 황망해진다. 입술 바깥으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실수야. 구차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려 했다.



……뭐라고요?”

……?”

선배 방금 뭐라고.”



나는 입술을 일 자로 꾹 다물었다. 카와니시는 어째 적잖게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 같은 부 선배에게 예상 못한 타이밍에 대뜸 황당한 말을 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나는 금세 울고 싶어졌다. 끝을 모르고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도 한 몫 했지만, 결국 너에겐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를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서둘러 그의 곁을 지나쳤다. 따라오는 소리가 한 발 늦었다. 축축 처지는 내 걸음을 손쉽게 따라잡은 카와니시가, 차마 나를 붙들진 못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세미 선배.”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말, 진심이에요?”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건 아니고, 그렇게 묻는 카와니시의 목소리 끝이 은근하게 떨렸던 탓이었다.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그 애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카와니시는 엉망이었다. 들고 있던 봉투는 편의점 앞에 내팽개쳐졌다. 나는 두 번째로 당황했다. 어쩔 줄을 몰라 카와니시를 보고 달렸다.



, , . 너 왜 울어?”



나는 그 날 카와니시가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유난히 감정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프거나 다쳤거나 물리적인 충격으로 몸을 제 맘대로 가누지 못할 때에도 습관처럼 찌푸리던 미간을 제외하고는 얼굴에 미동이 없던 애다.


그런데, 그런 애가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었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미안해. ? 그러니까 그만 울고,”

선배 대답에 달렸어요.”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다시 한 번만 말해줄래요?”



왜 네가 울고 있는 건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머리 나쁜 사람이 자꾸 머리를 굴리려 하면 뇌가 돌처럼 굳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물론 가설의 창시자가 텐도였으므로 그리 믿음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는 머리가 아팠다.



좋아해.”



그래서 한참 고르던 그 말을 기어코 입 밖으로 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해, 타이치.”



뭘 더 생각할 게 없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카와니시 품으로 이끌렸기 때문이다. 내가 쥐고 있던 봉투도 볼품없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 애의 목덜미에서 축축한 살 냄새가 났다.


카와니시는 그러고도 한참을 서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려서 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내 뒤통수며 등을 간절하게 쓰다듬는 손길에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매번 내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던 착각들이,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된 것.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카와니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삼켜내고 있었다. 나도 목구멍 안쪽이 찌르는 듯 아픈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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