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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꿈 없는 밤을 보냈다. 꿈속에서 정체 모를 것들에 시달리는 대신 눈꺼풀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푹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서 이렇게 개운한 게 대체 얼마만인지, 방바닥에 몸이 딱 붙어 도무지 이불을 걷어내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와니시가 이토록 편안한 밤을 보내는 데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가까이서 겪어보니 알겠다, 어째서 그가 세미에게서 휘황찬란한 빛을 보았는지.
모두가 잠들었을 늦은 밤 불쑥 카와니시를 찾아온 세미는 결국 피로를 핑계로 왕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 이곳에 있고 싶다는 투정에 카와니시도 딱히 그를 말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꼬박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좁아터지긴 했어도 카와니시의 방에서 이불 한 장을 함께 덮고 잠에 들었던 것이다. 그가 가까이에 있던 덕분인지 뜨거운 불꽃 사이에 홀로 헤매던 꿈이 거짓말처럼 휘발되었다. 더 의심할 것도 없이 세미는 카와니시의 빛이었다.
다만, 너무 푹 잘 잔 것도 좀 문제였다.
잠자리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깨야 하는 시간을 놓쳤다. 수호사제는 아침 일찍 본당에서 야간 경비를 선 사람들로부터 인수인계를 받고, 사제들의 지시를 받아야 했는데 앞에 언급한 이유로 카와니시가 오전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행이 대사제가 카와니시의 방까지 행차하는 일은 없었다. 신궁 쪽에서는 조용했으니, 아마 카와니시가 빠진 것을 눈감아주려는 셈―아마도 대사제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오히려 왕궁에서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권력과 하등 관계없는 막내 왕자님이어도 신궁에서의 외박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카와니시는 슬슬 세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뺨을 쓰다듬으면서 깨울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
카와니시는 본당에 가야했다. 가서,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전 회의에 불참했음을 대사제에게 보고해야 했다. 다만 세미를 놔두고 훌쩍 다녀오긴 좀 그랬다. 옷부터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그를 두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세미는 잠투정을 부리듯 몸을 뒤챘다. 이제 깨어도 좋을 시간인데, 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카와니시는 숨도 멈췄다. 장에서 개어놓은 옷을 꺼내 갈아입고서 카와니시는 세미의 옆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깨우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새근새근 잠든 얼굴이 카와니시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에 가까워서 차마 마른 어깨를 흔들 수가 없었다.
“에이타, 나 잠시만 나갔다올게요.”
결국 잠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게 들리긴 했는지 세미는 모로 누운 채 고개만 끄덕였다. 허공으로 삐죽삐죽 솟은 그의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보듬어주다가 카와니시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와니시.”
꽉 잠긴 목소리에 결국 발을 붙들렸다. 어딘가 메마른 음성이었다. 막 자고 일어나 수분이 마른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인다. 카와니시는 문앞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여전히 누워있는 세미를 보았다.
“꼭 가야해?”
“……뭐, 그런 건 아니지만요.”
반은 거짓말이었다. 수호사제라면 모두 참석해야 하는 오전 회의를 기별도 없이 빼먹은 주제에, 카와니시를 배려해 방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은 대사제에게 늦은 보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그러나 세미가 가지 않기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하도 신궁을 들락거려 이미 왕궁 자신의 방만큼이나 이곳이 익숙해진 세미에게도 신궁은 카와니시가 곁에 없다면 어린 날 처음 나가보았던 시전과 마찬가지로 낯선 장소일 것이다.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카와니시는 그의 곁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카와니시는 도로 자리에 앉아 물었다. 겨우 뜬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던 세미가 푸스스 웃었다. 나도 몰라. 반쯤 포기한 목소리였다. 시라부가 엄청 화낼 거야. 웃음을 섞어서 세미는 그렇게 말했다. 카와니시는 그보다 다른 게 더 걱정이었다. 오늘의 일로 세미가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른다. 그는 가진 게 없었으므로 사실 잃을 것도 없었지만, 에이지로는 그런 점을 약삭빠르게 눈치 채고 있었으니 아마 세미의 정신을 갉아먹을 작정이다. 세미를 괴롭힐 핑계는 많았다. 신궁에서 외박한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것 역시 학대의 합당한 핑계가 될 것이었다.
“……데려다드릴게요.”
그러므로 카와니시는 제법 큰 결심을 한다. 매번 신궁을 드나드는 세미를 보면서 왕궁까지 직접 데려다주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전 회의도 빼먹고, 대사제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신궁 밖으로 뛰쳐나간 걸 알면 또 일주일은 외출 금지를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카와니시 본인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세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래도 되느냐는 질문을 눈으로 대신했다. 카와니시는 바닥에 구겨진 이불을 펼쳐 개어놓으면서 그저 웃었다. 세미의 신변과 관련된 이유라면 괜찮고 괜찮지 않고를 따질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가는 길에 산책도 좀 하자는 카와니시의 목소리에 세미는 밝게 웃는다.
어쩌면 또 신궁이 발칵 뒤집힐 선택이었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거침없이 세미를 데리고 평소 드나드는 쪽문을 통해 신궁을 나갔다. 겨우 낮은 벽 하나로 나뉘어있을 뿐인데 바깥의 공기는 훨씬 선선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낯선 공기를 만끽하며 카와니시는 세미와 함께 왕궁을 향해 걸었다.
돌아가면 시라부에게든 형님에게든 호되게 혼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네가 있으니 전혀 두렵지가 않네.
세미는 그렇게 말했다. 말로는 두렵지 않다 하지만 호되게 혼날 거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카와니시는 못 본 체한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왕궁의 구석, 세미가 머무는 궁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늦은 오전의 푸른 경치와 포로롱 날아다니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어우러져 세미는 퍽 상쾌해보였다. 아마 카와니시처럼 그도 오랜만에 좋은 잠을 잤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덕분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세미는 발랄하게 웃었다.
카와니시는 세상의 흐름을 볼 수 있음에도 딱히 운명 같은 것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의 선택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사람의 운명과 미래가 바뀌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미를 보면 카와니시는 그 재미없는 단어를 믿고 싶어진다. 세미에게 했던 말 그대로, 오로지 세미가 카와니시의 곁에 존재하는 미래를 만들고 싶다. 운명이 운명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바라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그 길을 향한 선택을 하려 발악할 수 있는 상대 혹은 현재. 그게 아니라면 달리 운명이란 단어를 수식할 방도가 없다.
카와니시는 처음 세미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오색찬란한 빛깔을 띤 금색의 실들을 본 적이 없다. 그건 지금의 미래를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세미의 궁 앞에서 시라부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에이지로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아,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전개였다. 카와니시는 세미가 슬슬 걸음을 늦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걸음을 옮기는 것은, 아마 또 자신의 부주의로 시라부가 엄벌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리라. 카와니시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게 세미의 선택이라면. 단지 에이지로의 지독한 괴롭힘으로부터 세미를 보호해줄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라부가 먼저 세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뒤따라오는 카와니시를 본 탓이다. 시라부의 시선을 느끼고 뒤늦게 에이지로가 고개를 돌린다. 심기 불편한 눈매로 사납게 세미를 노려보던 낯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카와니시는 바짝 세미의 등에 붙었다. 그것에 세미는 조금 안도한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시라부의 왼뺨이 이미 붉었다. 세미의 일로 또 몇 차례 맞은 게 분명했다. 시라부라면 이른 아침 세미가 자리에 없는 것을 눈치 채고 신궁으로 달려오고도 남았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평화롭게 오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터다.
카와니시가 에이지로와 마주친다. 세미를 보기 위해 수도 없이 헤맸던 흐름 속에서 유유히 그의 주위를 배회하던 얼굴 그대로였다. 카와니시는 속에서 잔잔하게 끓는 분노를 느꼈다. 비슷한 것을 감지했는지 에이지로의 눈썹이 불편하게 올라갔다.
에이지로는 위화감을 느낀 듯했다. 다가오는 세미의 인사를 받고 그는 잠깐 껄끄러운 얼굴을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으니 세미의 곁을 지키고 선 카와니시가 더 낯설었을 것이다. 카와니시는 일부러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신궁의 법도는 왕궁의 지위고하를 상회한다. 그는 세미나 시라부에게 윗사람이었지만 카와니시에게는 아니란 뜻이었다. 신궁의 사람인 카와니시가 그에게 예를 갖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그것에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우리 막내가 매일같이 신궁을 드나든 이유가 여기 있었네.”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듣기엔 나긋하지만 말 속에는 적의가 담겨있다.
“신궁의 수호사제가 이런 곳까지는 어쩐 일로?”
“매번 혼자 돌아가시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려 따라왔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카와니시가 이곳까지 세미와 동행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눈앞에 선 남자로부터 세미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카와니시에겐 아니었지만 세미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남자다. 카와니시가 돌아간 이후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카와니시는 충동을 감내해야 했다.
공기에 묘한 긴장감이 스몄다. 시라부는 에이지로 대신 카와니시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무슨 연유로 온 건지 그는 말 대신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히는 불편한 시선들을 그도 느낀 것이다. 확실히 에이지로는 온몸으로 카와니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와니시가 세미의 곁에 있음으로써 에이지로가 평소 세미에게 휘두르던 권력이 힘을 잃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시는 거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부러 카와니시는 세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세미는 적잖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지로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그는 더 아무 말 않았다. 세미는 우물쭈물하며 자리에 선 채로 갈팡질팡했다. 아마 들어가도 좋다는 에이지로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결국 시라부가 나섰다.
“어전 회의에 늦으시겠습니다.”
그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결국 등을 돌렸다. 왕궁의 일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전 회의란 것은 꽤 중요하게 다뤄지는 일이었으므로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에이지로는 시라부의 등 뒤에 서있던 내관들과 함께 사라졌다. 한바탕 싸늘한 폭풍이 불어 닥친 곳에 먼지만이 부유했다.
긴장이 느슨해지고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사위가 고요해지자마자 시라부는 달려들어 카와니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세미가 당황해서 그를 막아섰지만 카와니시는 그의 다급한 손짓을 만류했다. 시라부가 이를 갈았다.
“여기까진 뭐 하러 왔어.”
질문이 아니었다. 명백한 대상을 노린 비난이었다.
“대답한다고 들을 기세도 아닌 것 같은데.”
카와니시는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곳을 거쳐 간 에이지로의 잔악함 때문이리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세미는 그런 생활을 이토록 오래 지속해온 것이다.
“네가 낄 자리가 아냐.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이게 내 방식이야.”
“…….”
“네가 그렇듯 나도 네 방식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들 해.”
곁에서 지켜보던 세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라부는 생각보다 쉽게 카와니시를 놔주었다. 이만 들어갈게. 세미는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카와니시로부터 멀어졌다. 쏙 궁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카와니시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다. 이상한 때에 세미는 카와니시를 외면한다.
“그는 더 악랄해질 거야.”
“…….”
“너 때문에.”
시라부는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언급했던, 그만의 세미를 지키는 방식을 카와니시가 망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단순히 카와니시가 존재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에이지로는 충분히 더 잔혹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미 본인이었다. 잘한 짓이라고 떵떵거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죽이며 그의 비위에 맞추어 평생을 살아야 할 바엔 이렇게라도 끊어내는 게 낫다고 카와니시는 생각했다. 얕은 방법으로 세미를 지킬 방법은 없다. 시라부가 선택한 길은 안전했지만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권력에 물든 이를 억누르는 것은 또 다른 권력이다. 신궁의 사람인 카와니시에게 제격인 일이었다.
시라부는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카와니시는 세미가 들어간 궁의 입구를 한 번,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시라부의 등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고는 뒤를 돌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이 딱 들어맞는 게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 에이지로를 마주하자마자 열지도 않은 눈앞에 나타난, 엉망으로 흐트러진 잿빛의 흐름들 때문이었다.
질긴 악연이지 않을까. 어째서인지 카와니시는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
카와니시는 그 이후로 한동안 세미를 보지 못했다. 잠깐 왕궁에 드나든 것으로 방에 감금되어 당분간 외출금지 명령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시기가 좋지 못했다. 세미를 보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튿날 내리 세미의 거처 주위를 지켜보았다. 대사제에게 불려 본당으로 향한 것은 바로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그녀는 왕궁에 심어둔 정보원으로부터 왕의 건강상태가 최근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당에 도착해 그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카와니시는 단박에 그녀의 용건을 알아챘다. 지체하지 않고 눈을 열어 흐름을 헤집는다. 하루 종일 그러고 있으려니 눈두덩이 뻐근했지만, 왕의 죽음은 카와니시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세미는 셋째 왕자다. 장남이 다음을 이을 왕이 되겠지만, 그 사이에 벌어지는 불안정한 폭풍에 그가 휘말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카와니시는 바로 다음 날을 예언했다. 죽음이 가까웠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과였다. 월요의 왕은 카와니시가 본 미래와 똑같은 일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왕자들과 왕궁의 대소신료들이 모두 왕의 처소 아래에 모여 목을 놓아 울었다. 하루 종일을 그러고 나니 이후에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함부로 입을 여는 이도 없었고 울음을 터뜨리는 자도 없었다. 장례는 미리 준비되었던 것처럼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다음 월요의 왕이 될 세미 에이치의 진두지휘 아래, 모두가 똑같은 상복을 입고 제례를 준비했다.
카와니시는 신궁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누런 상복을 입었으나 제례 준비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대사제는 예민한 기간이라며 카와니시에게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울 것을 당부했다. 정권 교체의 시기에 잘못 눈에 띄면 자칫 피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고. 카와니시는 무미건조한 태도로 고개만 끄덕이곤 방에 처박혔다. 세미는 카와니시를 방문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왕의 죽음이 인생에 걸쳐 가장 큰 사건일 테니 이해하자, 그렇게 생각해도 보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왕궁은 꽤 시끄러웠다. 왕의 죽음 뒤 첫째 왕자의 즉위식이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성대하게 치르는 건 삼가자며 그는 신하들 앞에서 왕관과 옥새를 받는 것으로 즉위식을 마무리 지었다. 왕의 죽음이 바깥으로 퍼진다. 국경에서는 종종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듯했다. 위태로워보였다. 누군가 단단한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그게 부싯돌이 되어 불꽃을 일으킬 것처럼 불길했다. 카와니시의 예감은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 점을 본인도 지독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카와니시는 내내 불안했다.
며칠 전 세미가 물었다. 자신은 언제 죽느냐고. 대답 대신 카와니시는 세미가 없는 미래를 결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요즘은 그 결심이 차츰 무뎌지고 있었다. 세미가 살아있는 미래만을 위해 선택하겠다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켜보이겠노라고, 그런 허무맹랑한 의지는 주위를 에운 폭풍에 의해 너무나 손쉽게 흐트러져 사라진다는 걸 카와니시는 근래에 들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무얼까. 왕이 죽은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왕궁이 시름에 쌓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습하고 무더운 여름의 절정처럼 불길한 예감이 피부에 들러붙는 감각은 분명히, 카와니시가 처음으로 왕궁에 가 에이지로를 만난 뒤부터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장남이 왕위를 이었다. 세미 에이타는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열외로 두자면, 차남인 에이지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형과 달리 문무에 출중하지 않았고 막내와 다르게 인품이 둥글지도 않았다. 드러내기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개처럼 굴었으나 속으로는 내내 잘난 제 형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씨였다.
불씨가 향할 곳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만만하고, 가장 외진 곳에 존재하며 저항 한 번 하지 않을 순한 제 동생, 세미나 기껏해야 시라부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횡포를 막을 방법은 있는 것인가. 카와니시가 가진 힘이라면 겉만 번지르르한 시궁창 속에서 세미를 꺼내오고도 남았다. 다만 그러기에 카와니시가 지고 있는 위험이 너무 많았다. 당장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말라던 대사제는 어떻게 설득할 것이고 카와니시가 신력을 드러냄으로써 월요 왕궁의 사람들이 갖게 될 낯선 두려움은 어떻게 할 것이며, 세미를 꺼내온 이후에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옳은 길일는지. 카와니시에겐 선택에 의한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지만 정작 세미가 있을 미래를 위한 선택에는 잃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시라부의 고집이 옳았다. 카와니시는 아득해졌다. 세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어느 것에도 자신할 수 없었다.
*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누런 상복이 부스럭거렸다. 그 작은 소리마저 거슬릴 만큼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실내에서 에이타는 부쩍 불안해했다. 어릴 때에는 몇 번 밟아보지도 못한 본궁인데 성인이 된 이후로, 특히 선왕이 승하한 이후로는 왕의 개인 집무실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왕위에 관심 없는 막내까지 이곳에 불러들인 에이치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벌써 세 번째, 에이타와 에이지로를 함께 불러 이 불편한 집무실 안에 앉혀두었다. 공공연히 벌어지는 에이지로의 폭행사실을 분명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둘을 집무실로 부른 목적에 대해 그는 늘 ‘그간 바쁘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으니 피로도 풀 겸 차나 한 잔 하자’라는 핑계를 댔다. 그의 면전에 대고 속내를 털어 놓으라 할 용기는 없었으니 에이타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생각들뿐이었다.
“에이타.”
난데없이 이름을 불려 에이타는 몹시 당황했다. 입술만 축이던 찻잔을 내려놓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 얼굴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궁 안의 사람들에게 평판이 아주 좋더구나.”
“……예, 예?”
“어릴 때부터 네 인품은 진즉 알아봤지만, 궁에서 그토록 바르게 자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텐데.”
네가 자랑스럽다. 에이치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오늘 에이타가 그와 나눈 대화는 저 몇 마디가 전부였음에도 에이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왕의 칭찬에 얼굴을 굳힌 채 있을 수는 없어 경련이 이는 뺨을 끌어당겨 웃은 에이타는 뒤늦게 옆에 나란히 앉은 에이지로의 눈치를 살폈다. 형님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그는 누구든 에이타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못 견뎌했다. 그게 왕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에이지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에이타는 원인 모를 물안감에 휩싸여 고개만 푹 숙였다.
왕이 된 그가 에이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똑같은 선왕의 자식들이었지만 엄격히 나뉜 서열에서 에이타는 단연 꼴찌였다. 그랬으니 왕위를 이어받을 고귀한 혈통인 그가 에이타에게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무엇보다 에이타는 알고 있었다.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할 만큼 그는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냉대보다 아픈 무시, 마치 없는 사람인 양 에이타를 취급했던 것이 바로 지금 왕위에 오른 에이치였다.
무슨 속셈일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손끝이 떨려서 더는 차를 마실 수도 없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집무실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오늘 에이타가 느낀 모든 불안감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믿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에이지로는 에이타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나란히 본궁을 나오자마자 에이지로는 예의 가시 돋친 목소리로 에이타를 제 방으로 불러냈다. 왕이 된 자가 에이타에게 흥미를 보였으니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선왕이 죽은 후 어째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그의 평온은 언제나 달을 채우지 못했다.
에이지로의 방은 왕의 집무실보다 조금 더 작았다. 에이타가 사용하는 침실과 크기는 비슷했으나 훨씬 꽉 차있었다. 자개로 장식한 장도 에이타의 것보다 훨씬 컸고, 선반 곳곳에는 고급스러운 도자기가 놓여있었다. 선왕에게 하사받은 칼도 한 자루 장식되어 있었다. 거치대와 칼 손잡이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을 금으로 덮었다. 생긴 것이 고급스러웠으니 실전에서 사용하는 칼은 아닐 테다. 왕자들이 받는 성인식의 증거물이다. 하지만 에이타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너는 한 번도 검을 배워본 적 없지?”
에이지로가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대답한다.
“예.”
“어때, 나한테 배워볼래?”
“저는 무예에는…….”
“관심 없는 척하지 말고. 그 수호사제랑 종종 연습도 했다며?”
그 말에 에이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보다 카와니시와 했던 것은 검술이 아니라 검무였다. 이 나라의 정실의 왕자들이 배우는 전쟁기술이 아니었다. 그건 시라부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랬으니 에이지로도 분명 그렇게 보고를 받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에이타를 압박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저는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진심이었다. 지금 상황도 부디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에이타가 이 왕성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에이타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에이지로는 이제야 미간을 확 구겼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진다.
“너, 요즘 자꾸 나한테 말대꾸하는 거 알아?”
에이타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한 발자국씩 다가온 에이지로가 허리를 조금 숙여 에이타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으니 그의 억센 손이 에이타의 턱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나한테 검, 배울 거지?”
의도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왕이 된 에이치의 눈에 들었으니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에이타를 괴롭히겠다는 암시였다. 에이타는 망설였다. 고집이라도 부리듯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에이타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당신 뜻대로는 하지 않을 거라는 선전포고였으니 지금 당장 흠씬 두들겨 맞아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지로의 명령에 처음으로 저항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맥이 개구리처럼 펄떡펄떡 뛰놀았다. 에이지로의 표정이 점차 구겨진다. 에이타는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맞았다간 이빨이 나갈 수도 있다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손바닥이 날아와 왼쪽 뺨을 갈겼다. 정신을 차리고 거세게 돌아간 고개를 미처 숙이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멱살이 잡혔다. 에이타의 등 뒤에서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뺨을 치고 지나간 매서운 파열음이 바깥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시라부가 들어와 에이지로의 팔뚝을 쥐었다. 에이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버텼으나 에이지로의 패악에 금방 발이 뒤로 물렸다. 그가 시라부를 보고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나서지 마, 감히 호위무사 따위가.”
“흥분하셨습니다. 진정하시고,”
“한 번 더 막으면 둘 다 죽여 버린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형형했다. 에이타는 부쩍 두려워졌다. 오늘이야말로 머리 어딘가를 잘못 얻어맞아 숨이 끊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하던 시라부가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에이타는 시라부의 동그란 뒤통수와 잡아먹을 듯 자신을 노려보는 에이지로를 번갈아보았다.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맞아도 시라부보단 자신이 맞는 게 낫다 싶었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상처 입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온 안도임이 분명했다.
몇 번은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끽 소리도 않는 에이타가 괘씸했는지 조금 더 뒤에는 주먹이 얼굴이고 몸이고 여기저기에 꽂혔다.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에이타는 입술이 찢어지도록 깨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에이지로는 에이타를 향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윽박질렀다. 흥분 탓에 말들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살고 싶어? 왜, 형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래서 어떻게, 날, 좀 어떻게 이겨보려고, 그러는 거야? 띄엄띄엄 거친 숨이 말을 끊을 때마다 주먹이나 발등이 에이타의 몸을 두들겼다. 에이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벽을 딛고 일어선다. 무릎이 꺾이고 나무기둥에 머리를 박아 눈앞이 핑 돌아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에이타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위태로운 평화였지만 그저 매일이 조용하게 지나가길 바랐을 뿐이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곳에 이런 신분으로 태어날 거였다면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억압과 학대에 이젠 체격 차이도 나지 않는 에이지로에게 반항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치가 떨렸다. 에이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통의 시간은 꼭 영원 같았다.
*
달이 모습을 감췄다, 세미가 찾아온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와니시는 오늘 바쁜 하루를 보냈다. 본당에서 하루 종일 대사제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느라 세미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미 잠에 들지 않았을까, 피로가 눈꺼풀을 짓눌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카와니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눈알이 시큰시큰하다. 예전처럼 눈에서 피가 나는 일은 없었지만, 눈 주위를 태울 듯 일렁이는 열기는 여전했다.
바깥의 기척에 카와니시는 문을 열었다. 빛 누런 상복을 입은 세미의 얼굴은 수척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건 차치하고서 당장은 놀라움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시라부가 곁에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시라부까지 대동해서 세미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고 카와니시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라부는 세미가 카와니시와 가깝게 지내던 것을 곱게 여기지 않았다. 세미는 윗사람이라고 아랫사람에게 억지 명령을 듣게 할 인물이 아니었으니 시라부가 이곳에 있는 건 그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테다.
“……에이타.”
카와니시는 눈짓으로 시라부를 바라보며 세미를 불렀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하고 카와니시는 긴장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카와니시는 세미의 얼굴이 엉망임을 알아차렸다.
뺨이 퉁퉁 부었다. 입가엔 굳은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아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연하게 멍도 들었다. 카와니시는 말을 잃었다. 그 반응을 조심스럽게 뜯어보던 세미는, 그 꼴을 하고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누가, 이런 짓을.”
뒤늦게 그게 멍청한 질문임을 깨닫는다. 누가 그랬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카와니시는 부득 이를 갈았다.
“괜찮다고 했는데……. 시라부가 안 된다고, 오늘은 여기에 있으라고 그래서.”
세미는 시라부가 할 말을 대신 건넸다. 시라부의 표정이 어둡다. 세미의 최측근 보좌인 그의 얼굴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카와니시가 아는 시라부라면 분명히 에이지로의 폭력을 막아섰을 것이다. 그랬음에도 세미가 저 꼴로 당했다는 건……. 일개 호위무사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의 포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카와니시.”
시라부가 카와니시를 불렀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처음이다.
“며칠만 부탁한다.”
시라부는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카와니시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그의 등을 붙잡지 않았다. 마주치면 부딪치곤 했지만 그럼에도 세미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동일했다. 방식이 달랐을 뿐, 카와니시도 지금 그가 느낄 잔잔한 분노를 이해했다.
눈앞에서 모시는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정작 호위무사인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권력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무력감에 시라부는 스스로의 뺨을 내리칠 위인이었다. 그랬으니, 직접 세미를 카와니시에게 데려온 것이다.
카와니시는 방에 초를 밝혔다. 세미를 앉혀두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핀다. 좀 많이 부었다. 손톱에 긁혔는지 얼굴 곳곳에 조그맣게 상처도 여럿 났다. 아팠을 것이다. 사람의 피부와 살은 생각보다 많이 여렸다.
“미안해요.”
당장 약초를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어 약재를 보관하는 창고도 전부 문을 걸어 잠갔을 것이니 대사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 카와니시라 해도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것 말고도 많은 게 미안했다. 세미는 물끄러미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오늘 좀 바빠서 지켜보지 못했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지켜본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잖아.”
“에이타.”
세미는 생긋 웃었다. 그만 웃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얼굴에 묘하게 후련함도 스며있어서 차마 화내지 못했다. 카와니시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묻는다.
“많이 아파요?”
“…….”
“괜찮은 거, 맞아요?”
세미는 늘 어른스러웠다. 장난기가 많았지만 성숙하고 참을 줄 알았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천성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는 그의 환경 때문에 강제로 그렇게 자랐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가장 먼저 눈치를 보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곤 했다. 그래서 세미는 언제나 참고 또 참았다. 반항 한 번 않았다. 그랬으니 괜찮을 리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여도 제정신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며칠을 아프고 나면 사라지는 질병이 아니었다.
“응.”
세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카와니시는 조금 서글퍼졌다.
“좀 무서웠지만 괜찮아.”
“…….”
“네가 자꾸 생각났어.”
담백한 대답이 좁은 방안을 채웠다. 카와니시는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세미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에서,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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