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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니시는 그날 밤 잠에 들지 못했다.


세미는 새벽 내내 앓았다. 맞은 데는 더 아프지 않다더니 흠씬 몸살에 시달렸다. 당장 쓸 수 있는 약재가 없어 카와니시는 하는 수없이 신력을 사용했다. 눈에 띌 만큼 빠른 속도로 부상이 나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당장 심각해 보이는 부분만 치료했다. 열이 자꾸 올라 체온을 낮춰주느라 특히 애를 먹었다. 카와니시가 곁에 있었음에도 악몽에 시달리는지, 얕은 잠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세미는 끙끙 앓았다. 이따금씩 우는 것도 같았다.


겨우 진정이 됐을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으니 카와니시는 곧 오늘 하루의 일정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세미를 두고 나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오전 회의가 끝나면 금세 돌아올 수 있을 테고, 경과를 보니 아무래도 세미는 이제야 겨우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으므로 한동안은 깨지 않을 거였다. 아주 잠시면 된다. 오는 길에 창고에 들러 약재와 탕약기를 빌려올 셈이었다.


세미를 치료하면서 카와니시는 그가 하루 종일 겪은 일들을 둘러보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세미를 저 꼴로 만든 건 에이지로였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하던 그의 폭력성을 불러일으킨 불씨는 바로 왕이 된 첫째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원래부터 제 형에게 찌든 열등감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의외였던 건, 왕이 되어서 이 나라의 절대군주로 군림한 첫째 왕자인 에이치가 세미에게 흥미를 보였다는 점이다.


세미는 타고 나기를 사람에게 상냥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니 아무리 존재감 희미한 막내 왕자라 하더라도 왕성에서 그의 인품에 대한 칭찬이 나오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었을 테다. 다만 그런 소문에 왕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현재 왕성의 분위기로 봤을 때 왕에게 반기를 들 만한 인물은 없다. 에이지로는 야망은 있었으나 멍청했고, 강자에겐 늘 약한 면모를 보였으니 감히 반역을 꾀할 배짱이 없었을 것이다. 세미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잔인하지 못했으므로 정치 싸움에 휘말릴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왕이 되어 모든 것을 손에 쥔 자가 뒤늦게 세미에게 관심을 보인 것일까.


카와니시는 그 이유에 대해 혼자 짐작해보았다. 뭐가 됐든 끝이 껄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세미를 정적으로 여길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권력도 능력도 사람도 없는 세미를 품어줄 만큼 심성이 너그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력을 다루고, 예지하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카와니시는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미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인물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좀 더 왕성의 일을 자세히 지켜봐야 한다. 선왕이 죽고 장남이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이 된 이후로, 확실히 왕성에는 불길한 정적이 감돌았다. 폭풍전야의 고요 같았다.



당장 내보내.”



오전 보고가 간략하게 끝난 이후로 대사제는 카와니시를 불러다놓고 대뜸 그렇게 말했다. 카와니시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보내긴 누굴 보내요? 모르는 척은 했지만, 역시 그녀는 카와니시가 수월하게 속일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세미의 잦은 방문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을 감아준 것은 그녀가 카와니시에게 배푼 자비였으리라. 대사제는 카와니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뾰족한 눈매로 그를 노려보았다. 결국 한 발 물러선 카와니시가 느슨하게 대꾸했다.



많이 다쳤어요. 당장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왕성의 사람이다. 왕성의 일은 왕성에서 끝내는 게 도리야.”

아픈 사람을 나가라고 내쫓는 게 도리입니까?”

월요의 왕자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끝내 그를 신궁에 들일 생각이냐.”

말했잖아요, 다쳤다고요. 다친 사람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냅니까.”

신력을 썼느냐.”



그녀가 예리하게 정곡을 찌른다. 카와니시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미처 변명할 거리도 생각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력의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카와니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능구렁이 같은 대사제는 카와니시가 거짓말을 한다면 귀신같이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조금, 아주 조금 썼습니다. 너무 아파해서,”

네 놈을 가둬야만 말을 들을 셈이구나.”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거라. 왕성에서 죽든 어딜 가서 매를 맞고 오든, 더 이상 그와 엮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우신 겁니까.”



카와니시의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대사제는 언제나 신궁의 모두를 위한다는 말로 핑계를 대신했다. 어릴 때야 자신의 힘이 보통 사람은 가지지 못하는 종류의 것임을 이해하고 그녀의 통제를 얌전히 따랐지만, 세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달리 큰 문제를 일으킨 것도 없었기에 그녀의 명령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타당한 이유도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그녀는 무조건 카와니시를 옭아매려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 역시, 카와니시의 능력에 빌붙어 대사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었으면서.



왕이 정적을 숙청한다면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를 사람이 누구일 것 같으냐.”



자리를 뜨려는 카와니시를 그녀가 질문으로 붙잡았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말은 세미 에이타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드러내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세미는 정치와 하등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막내 왕자를 도대체 이 나라의 왕이 경계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랬으니 대사제의 말은, 적어도 카와니시에겐 단순한 위협용 협박이었다.



에이타는 정치 같은 것엔 관심 없어요.”

그래, 그래 보이더구나.”

그럼 걱정할 것 없잖아요.”

하지만 명분은 될 수 있지.”



그녀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카와니시는 문고리를 쥔 채로 자리에 굳었다.



선왕이 죽은 이후 이제 막 왕이 된 자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 같지? 그동안 자신에게 거부감을 보인 정적들의 처리가 최우선일 것이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그렇다면 그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희생양이 누가 될 것 같니?”

…….”

없어져도 궁이 돌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고, 적당히 써먹다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지금의 왕에겐 가장 필요한 것일 게야. 왕이 직접 만들어낸 반란군의 상징적인 수장이 될 인물, 너라면 누굴 꼽겠느냐.”



등줄기 사이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본당의 온도는 낮았지만, 오한과 함께 관자놀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카와니시는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모두 과대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현실성 있었다. 에이지로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이용해먹기 손쉬운 사람이었으므로 왕이 그를 버릴 패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의 혈통을 가졌고, 이 왕성에서 사라져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사람은 세미 에이타뿐이었다.


카와니시는 온몸을 죄고 드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왕으로 군림한 에이치가 세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관심이 아니었다. 세미를 떠보다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함께 숙청시킬 사람들을 모함해 죄다 목을 매달아버릴 계획의 시작이었다. 이 땅의 왕에겐 한없이 쉬운 일이 아닐까. 그에겐 움직일 수 있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세미에겐 아무것도 없다.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두둔하며 결백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네가 자꾸 그 왕자와 가까이 지내면, 그 불똥이 너와 신궁에도 튈 수 있다. 예전부터 왕성과 신궁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는 세력이었어. 그랬으니 지금 왕이라고 우리를 곱게 볼 리가 없지. 잘못 걸린다면 너도 그 왕자와 함께 반역 세력으로 잡혀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신궁도 무사하지 못한다.”



대사제는 카와니시 본인과 신궁의 미래를 위해 홀로 남은 세미를 혼자 두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대사제의 우려가 그저 기우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세미는 곁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강대한 권력에 맞설 만한 병사도 없었고, 힘을 매수할 돈도 없었으며 그 모든 것을 쟁취해낼 만큼 비겁하고 악랄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곁에 남을 사람은 기껏해야 호위무사인 시라부 켄지로 정도다. 대사제는 그런 그를 두고 돌아서서, 카와니시더러 신궁에 얌전히 처박혀 그와 모든 인연을 끊으라고 말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카와니시가 위험해질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신궁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대사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이기적이지 않은가. 높은 성벽과 화려한 깃발로 장식된 왕성은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이 타인의 생명을 능가하는 세상이었다.



……대사제님.”



카와니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을 오래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카와니시는 스스로가 원하는 길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에, 분명히 세미는 살아있을 것이다.



……저는 그런 게 두려워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짓, 안할 겁니다. 죽어도 사람으로 죽을 거예요.”

카와니시……!”

신궁을 나가겠습니다.”



카와니시는 등을 돌려 대사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말에 대사제는 기함을 하고 카와니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물러서지 않는다.



저를 통해 얻으신 권력, 적어도 저 때문에 잃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마십시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카와니시는 더 듣지 않고 본당 대사제의 내실을 나왔다.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에 긴장감이 어린다. 강하게 주먹을 말아 쥔 손바닥 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대사제와의 이야기가 길어져 방으로 돌아오는 게 좀 늦어졌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간 카와니시는 세미가 반짝 눈을 뜬 것을 확인했다. 여전히 이불에 폭 싸여 누워있었지만, 동그랗게 뜬 눈으로 카와니시를 바라보고 세미는 배시시 웃었다.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이제 좀 덜 아픈 모양이다. 밤새 간호하느라 얼마나 혼이 났는지, 투덜거리려다가도 그의 웃음을 보고 있으니 못된 마음이 싹 사라진다.



몸은 어때요. 좀 괜찮아요?”



하루 만에 그 상처들이 모두 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신력으로 통증을 좀 덜어주었으니 움직이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세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마치 간밤에 카와니시가 한 고생을 알기라도 하듯.



어디 다녀와?”

본당에 잠깐.”



신궁을 나가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아마 오늘 중으로 방을 빼야 할 것 같다. 대사제가 그렇게 빡빡한 사람은 아닐뿐더러 당장 카와니시를 놓쳐서는 손해가 막심할 테니 약간의 유예를 주기야 하겠지만, 그런 건 카와니시 쪽에서 거절이었다. 더 이상 신궁의 해괴한 법도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대사제의 말대로, 지금 왕의 칼날이 세미를 향해있다면 카와니시는 반드시 그를 보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가 빠르게 세미와 함께 신궁을 빠져나가야 한다.


세미의 상태가 좀 호전되면 바로 나갈 생각이다. 갈 곳은 없었지만, 왕성 어딘가에 별당이 있다면 그곳을 써도 좋을 일이다. 세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왕성에도 여럿 있었으니, 좁더라도 방 한 칸은 구할 수 있을 거였다.



에이타, 잠시 손을.”



카와니시가 팔을 뻗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부스럭거리며 손을 꺼내 내민 세미는 피곤에 젖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세미의 손과 맞닿은 피부에서 은은한 금빛의 안개가 피어오른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상처가 빨리 낫기를. 통증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카와니시의 마음이 닿았는지 세미가 푸스스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카와니시는 곧장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서책 몇 권과 여벌옷을 보따리에 담았다. 이불 위에 앉아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세미가 묻는다.



어디 가?”

같이 가요. 더는 신궁에 있을 수 없게 됐거든요.”

……혹시, 나 때문에 혼났어?”

그런 거 아닙니다. 제가 제 발로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왜.”



세미는 심통을 부렸다. 마치 저 때문에 카와니시가 신궁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세미의 정수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카와니시는 웃어보였다. 이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에이타와 함께 있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지만, 그걸 에이타 본인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카와니시가 부지런히 달랬지만 세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이다. 쫓겨나는 게 아니고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거라고 변명했지만 그는 카와니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잦은 방문과 지금 왕성의 상황에 맞물려 카와니시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반쯤은 맞는 말이었으니 아니라고 둘러댈 생각은 없다. 다만, 당분간 머무를 거처는 필요했으니 그건 세미에게 부탁해야 했다.



혹시 왕성 안에 따로 머물 곳은 없나요?”

……으음, 글쎄.”

미안해요.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대사제님께 사과를 드리고, 나는 돌아가는 게 어떨까?”

그건 싫어요. 에이타와 함께 나갈 거예요.”



결국 세미가 기권했다. 카와니시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본인이 포기한 듯했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조금 기울어있었다. 신궁에서 나가겠다고 당당히 선포했으니 더 이상 쪽문으로 드나들 필요도 없다. 성큼성큼 신궁 성벽의 정문으로 다가가니 대사제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수호사제들이 앞을 막고 섰다.



비켜.”

나가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두 번은 말 안 해.”



분위기가 바짝 굳었다. 긴장감에 얼어붙은 것은 다름 아닌 세미였다. 카와니시의 등 뒤에 바싹 붙어서 그의 옷깃을 당기고 있다. 곤란한 일이 생겨선 안 되니 그냥 자기 혼자만 나가겠다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나갈 수 있는 건 뒤에 계신 왕자님뿐입니다.”

좋게 말할 때 안 비키면, 신력이라도 써서 전부 제압하고 나갈 거야.”

그건,”

곤란하겠지? 남자인 내가 신력을 가졌다는 게 일파만파 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예상 가능하잖아.”



그들은 말을 잃었다. 카와니시가 워낙 완고했던 탓이다. 어차피 대사제는 카와니시를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얄팍한 위협이라도 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카와니시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수긍하지 않기로 했다. 세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 많다. 신궁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카와니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수호사제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그 중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제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겁니까.”

은혜라니,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긴 나에게 감옥이었어.”



카와니시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카와니시를 막을 의지가 없어보였으므로 카와니시는 세미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으로 신궁에서 벗어난 날이었다. 결코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족쇄를 끊고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고수한 결단이었다. 기분이 묘하다. 이렇게 쉬운 일을 그동안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이 모든 게 곁에 세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걸 안다.



……갈까요.”



세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 시라부는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도로 내쫓을 수는 없고, 자기 처소에 같이 머무르게 할 수도 없었으니 시라부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해보겠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곰곰이 생각하던 세미가 덧붙였다.



그냥 내 방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다. 시라부가 세미를 신궁에 데려간 것은 왕궁의 법도와 지위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리라. 모종의 이유로 신궁에 있을 수 없어졌다면 사실상 그 가호를 받기는 글렀으니, 이제 왕궁 어디를 가더라도 에이지로의 손아귀에 있는 셈이었다. 시라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엄지로 눌렀다. 그리고서 삐죽한 눈매로 카와니시를 쏘아보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죠, 저거.”



카와니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사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미를 밖으로 내보낼 사람이었으므로.


한창 세미의 거취를 문제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카와니시는 불쑥 바깥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 만한 어두운 기운이었으니 분명 심상치 않은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카와니시는 단박에 그 걸음이 불청객의 것임을 알았다.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카와니시가 속삭였다.



……시라부, 여기 숨을 만한 곳, 있어?”



누가 와. 카와니시의 표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본 시라부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허겁지겁 둘을 벽장 뒤로 숨겼다. 영문도 모르는 채 카와니시에게 붙잡혀 세미는 꼼짝없이 좁은 공간에 구겨졌다.



, 카와니시.”

. 바깥에 들리겠어요.”

아니, 너무 붙었어. 조금만 떨어져봐.”

어쩔 수 없어요. 에이타랑 내가 모두 들어가긴 너무 좁다고요.”



카와니시가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카와니시 품에 폭 안긴 자세로 세미는 얼굴을 붉혔다.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팽팽해진다. 카와니시는 혹시 세미가 보일까 그의 어깨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찾아온 사람은 에이지로였다. 일전에 그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기운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다. 한 발만 늦었어도 이곳에 모두 모여 있는 걸 그에게 들킬 뻔했다. 한 나라의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제 발로 시라부의 처소까지 찾아왔다는 건 그 만한 용건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아마 왕궁에서 세미가 실종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뭐야, 없잖아.”

……무엇을 찾으시는지.”

긴히 전할 말이 있는데 에이타가 보이질 않아서.”



여기 숨어있나 했지. 그가 끝 음을 올리며 웃었다. 어제 그 꼴을 당했으니 시라부가 세미를 이곳에 숨겨둔 줄 안 듯했다. 카와니시는 슬쩍 세미를 내려다보았다. 떨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다. 숨은 거의 참듯이 하고 있었다.



폐하의 명령이야. 내일 어전 회의가 끝나고 휴전 중인 이웃국의 사신이 방문할 예정이거든. 연회에 참석하래, 에이타도.”



세미가 짧게 숨을 뱉었다. 다행이 소리는 밖으로 새지 않았다. 긴장한 세미를 달래듯 카와니시는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세미는 평생 그런 자리에 참석한 일이 없을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세미의 표정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시라부가 대답에 뜸을 들이는 걸 보니 그 역시 명령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제 그 난리를 쳤으니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어 참는 중이겠지. 대답 없는 시라부를 그대로 두고 방을 한 바퀴 둘러본 에이지로가 태연하게 물었다.



에이타, 못 봤어? 안 보이네, 오늘.”

……처소에 안 계십니까?”

. 또 도망쳤나봐. 신궁으로 갔나. 나중에 알아서 데려와.”



시라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에이지로가 방을 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걷는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소리가 완전히 아득해지고 나서야 세미는 안도했다. 카와니시는 덩달아 깊은 숨을 쉬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고, 무엇보다 카와니시가 곁에 있었음에도 세미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만큼 저 자의 존재가 세미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뒷목에 그새 땀방울이 맺혔다. 카와니시는 세미를 끌어안은 채 소맷자락으로 그의 목 언저리를 닦아주었다.



…….”



세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운을 띄웠다. 카와니시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제 그만……, 놔주지 않을래?”

…….”



카와니시가 팔을 풀었다. 그 품에서 벗어난 세미가 도망치듯 후다닥 벽장 밖으로 튀어나갔다. 카와니시도 뒤를 따랐다.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시라부는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세미는 부쩍 불안해했다. 시라부는 그런 세미에게 의자를 권했다. 심호흡을 하고 목제 의자에 걸터앉은 세미는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그런 자리에 나가본 적 없어.”

부른 적도 없었죠.”



세미의 지위는 이름 그대로 형식적인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그가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은 전혀 없었다. 중요한 정치적, 외교적 사안을 다룰 때 세미가 늘 제외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부터 나온 것일 테다. 그런데 선왕이 죽고, 지금의 왕이 즉위한 이후로 세미에겐 자꾸 이례적인 일이 생기고 있다. 분명히 명확한 목적이 있는 행위임이 분명했다.



……저번부터 좀 이상해.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어.”



카와니시는 순간적으로 대사제가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왕의 명령에서 정치적 목적을 지울 수 없다면 그건 분명, 세미를 이용해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를 불순분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억측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카와니시는 힐끔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사제에게 들은 말들을 털어놓아야 할까. 시라부는 어릴 때부터 왕성에서 자랐으니 이쪽 일에는 눈치가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와니시보다 그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뭔가 수상한 낌새 같은 건 없었어?”



카와니시의 질문에 눈동자 네 개가 한 곳에 모였다. 물끄러미 카와니시를 바라보던 시라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걸 왜 너에게 대답해야 하지?”

나도 들은 게 있어서.”

신궁의 사람인 네가? 듣다니, ? 누구에게?”



시라부는 예리했다. 카와니시가 정치와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임을 그는 진즉 꿰고 있었다. 세미 때문이라고는 하나 갑자기 복잡하게 돌아가는 왕성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수상해보일 수는 있겠다. 해명하라면 할 수는 있으나, 카와니시는 침묵했다.


시라부는 아무것도 모른다. 카와니시가 신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왕궁의 사람은 세미가 유일했다. 대사제에게 들은 말들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한들 시라부가 믿을 리도 없었고, 본래 의심이 많은 그라면 더 깊은 것들을 캐물으려 할 것이다. 카와니시는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숨겨야 했다. 그랬으니 시라부에게 자세한 얘기 같은 걸 해줄 수 있을 리 없다.



……일단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갈게.”



세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일과 시간이었으므로 에이지로도 바빠질 테고, 그러면 오늘 당장 세미에게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시라부는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왕궁에서 세미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차라리 친숙한 방이 그의 긴장감을 푸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세미의 뒤를 따랐다. 그 꼴을 잠자코 지켜보던 시라부가 눈썹을 사납게 밀어 올리며 묻는다.



이 놈도 같이 가는 겁니까?”

나도 갈 데가 없는 걸.”

그건 네 사정이지. 어떻게 감히 왕자님의 침소에서 같이 지낼 생각을?”



카와니시는 물끄러미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저 고집불통을 설득하는 데에 쓸데없이 힘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에 카와니시는 은근슬쩍 세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미가 푹 한숨을 내쉰다. 또 부딪칠지도 모를 두 사람을 말리기라도 하려는 듯 세미가 조곤조곤 시라부를 향해 말했다.



카와니시가 같이 있어주면 든든할 것 같아. 아무래도 혼자는 좀 무섭거든.”

……저로는 안심이 안 되시는 겁니까?”



시라부는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서 웃는 세미에게 그러나 더 못된 말을 잇지 못한다. 시라부의 약점은 세미였다. 그는 누구에게도 굽히려 들지 않으면서 그는 세미에게만은 유약했다.


카와니시는 방문을 나오면서 시라부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그는 영 아니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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