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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의 예상대로 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세미는 방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는데,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를 꽤나 두려워해서 카와니시는 종일 그를 달래야 했다. 그런 김에 상처들도 돌봐주었다. 작은 상처들은 거의 아물었고, 붓기도 가라앉았다. 보는 눈이 없다면 당장 낫게 해줄 수도 있었지만, 에이지로가 안다면 분명히 수상하게 여길 것이 뻔했으므로 그러지는 못했다.
세미는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어제는 앓느라 편안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불 속에 파묻히자마자 그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카와니시는 그가 편안하게 잠에 빠질 때까지 곁에 앉아 세미의 가슴언저리를 규칙적으로 두드려주었다.
피로한 것은 카와니시도 마찬가지였다. 몸살을 앓는 세미를 돌보느라 종일 잠을 자지 못했으니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아직 누울 수는 없었다. 카와니시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세미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제오늘 에이지로가 왕과 세미에 대해 나눈 대화를 들어야 한다. 과거를 읽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세미가 살아있을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 또한 카와니시는 봐야했다.
깊게 잠이 든 세미를 두고 일어서서 카와니시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원하는 과거만 찾아서 보는 것쯤은 이제 대수롭지도 않았으므로 카와니시는 금세 왕이 에이지로에게 명령을 내린 장면을 찾아냈다. 이른 아침이었다.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보이는 곳에 둘만 나란히 앉아서, 아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천천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왕이 세미를 호의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건조한 대화였다. 그는 이웃나라 사신의 방문을 축하하는 연회에 세미를 참석하게 하고, 그곳에서 직접 반역을 조작할 생각이었다. 극단적인 위협을 위해 왕의 사람들 중 하나가 독이 든 술을 마셔야 한다. 에이치는 그 대상으로 에이지로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범인으로는 세미를 지목할 생각이겠지. 에이치는 그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독의 양은 적당히 아플 정도로만 사용할 것이고 둘째, 빠른 회복을 돕기 위해 모든 치료를 아끼지 않을 것, 아마 에이지로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읽었을 터였다. 요약하자면, 세미를 공개석상에 드러내 반기를 들 여지가 있는 자들을 색출하고 숙청해 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뜻이었다.
대사제의 예측이 맞았다. 그녀는 신력은 없었지만 확실히 이쪽에 있어서는 눈치가 아주 빨랐다. 카와니시는 조금 초조해졌다. 당장 연회는 내일이다. 서둘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꼼짝없이 그들의 뜻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다.
에이지로가 왕명을 거역할 명분은 없다. 그에겐 별로 좋은 제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에이치의 명령에 따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 위험부담을 짊어질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랬으니 그는 절대, 그에게 주어진 독배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의 명령을 어길 배짱도 없었으니 그가 선택할 길은 단 하나였다. 자기를 대신할 다른 희생자를 찾는 것.
그러면 그 희생자는 누가 될까. 세미를 모함할 수 있고, 에이지로와도 연관이 있으면서 죽어도 손쉽게 묻을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을 쥐지 못한 자, 술 맛이 이상한 것 같다며 네가 먼저 마셔보라고 에이지로가 태연하게 권할 수 있는 자.
카와니시는 머릿속에 단 한 명을 떠올렸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무관복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신궁 안에서 입던 제례복과 다르게 소매가 펄럭이지 않아 움직이기에 용이했다. 팔목과 발목, 허리의 옷감을 단단히 동여맨 끈이 좀 거슬리긴 했으나 금세 적응될 거였다. 그럴싸하게 허리춤에 칼도 차고 카와니시는 자리에서 일어서보았다. 급하게 구한 거라 맞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다행이 길이도 품도 딱 알맞았다.
세미는 이미 자리에 불려갔을 것이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와니시는 흑립을 고쳐 썼다. 문간에 선 시라부가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칼은 쓸 줄도 모르는 게.”
“쥐는 법은 알아. 이렇게.”
“틀렸어.”
시라부는 심기가 단단히 뒤틀려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설프게 무관 흉내를 내는 카와니시를 지켜보다가 몸을 틀어 문 앞을 비켜주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중요한 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세미와 동행한다는 것을 못 견뎌하는 것 같았다. 카와니시는 낮게 숨을 쉬었다. 방을 나서려는데 시라부가 덧붙인다.
“왕자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
“무슨 일 생기면 너부터 가만두지 않겠어.”
카와니시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시라부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모른 척하고 카와니시는 걸음을 옮겼다.
시라부를 말로 조곤조곤 설득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카와니시가 가진 신력에 대한 것은 그에게 비밀로 해야 했으므로 그 부분을 빼고 설득한다고 시라부가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시라부는 아주 깐깐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으니 차라리 세미의 명령을 등에 업고 이번 연회에서 그를 빼버리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시라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세미는 카와니시로부터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미리 들었기 때문에 무조건 시라부의 동행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대신 카와니시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세미는 차라리 혼자 가겠다고 했다. 카와니시가 본 미래가 진실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왕은 세미를 반역자들의 수장으로 만들어 처형시킬 테니 굳이 다른 사람 희생시킬 필요 없이 순순히 그들의 생각에 따라주면 된다고 했다. 카와니시는 혹여 누군가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세미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로 그를 설득했다.
카와니시는 육신에 신력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신력이란 평범한 인간들이 다룰 수 없는 기이한 힘으로 그것을 타고난 카와니시는 어지간한 상처도 금세 회복되는 놀라운 치유력을 가졌다. 흉터가 반드시 남는 화상도 삼 일이면 말끔히 사라지고, 칼에 찔리거나 내장이 다쳐도 금세 회복되곤 했으니 독이라고 다를 거 없다는 게 카와니시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에이치는 에이지로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소량의 독만을 사용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보통 사람에게 그 정도의 영향을 줄 독이라면 카와니시에겐 별다른 부상을 입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랬으니 시라부보단 카와니시 본인이 나서는 게 맞는 일이라고 그는 세미를 설득했다. 독을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은 카와니시가 직접 에이지로의 독주를 바꿔치기하고, 그러면 연회는 아무런 이변 없이 평범하게 진행될 거였다. 적어도 이번 일로 희생될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세미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래도 불안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엔 수긍했다. 카와니시가 워낙 완강했던 것도 있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는 유일한 길이란 것에 세미도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세미는 카와니시가 미래를 볼 줄 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랬으니 자기 몸의 안위를 챙기는 것을 맡겨도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일이 잘 진행되면 시라부도 세미도 추궁 받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소란을 바랐던 왕은 에이지로가 멀쩡한 것을 보고 나중에 그의 실수를 추궁하겠지. 그러면 그들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었으니 다음부턴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세미는 이미 연회장에 가있었다. 형제들이 나란히 모여 입구에서 사신단을 마중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종들이 그들에게 직접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신궁의 무녀들도 보였다. 월요국 만의 독특한 가무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카와니시는 조용히 세미의 뒤로 가 그 옆에 앉은 에이지로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결국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입 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창 달았을 때, 에이지로는 제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마시지도 않을 잔에 대고 기울였다. 투명한 액체가 졸졸 따라 나왔다. 잔을 손에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려 카와니시를 바라본다.
카와니시를 발견한 그는 표정이 일순 굳었다. 신궁의 사람인 카와니시가 무관복까지 차려입고 연회장에 있는 게 이상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짧은 순간의 정적을 뒤로 하고 그는 씩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마침 거슬리는 놈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카와니시는 속으로 그의 의도를 비웃었다. 형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띠고 카와니시는 에이지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무녀들의 호위로 몇몇 사제들이 와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래……, 뭐. 이거 술맛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네가 맛 좀 봐봐.”
예상대로다. 카와니시는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카와니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아무리 상처나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지만, 아무래도 독이 든 것을 제 입에 털어 넣기는 긴장이 된다. 에이지로의 옆에 앉은 세미를 힐끔 바라보았다. 두 눈에 걱정을 주렁주렁 달고서 세미는 카와니시를 마주보고 있었다. 괜찮다는 눈치로 한 번 웃어주고서 카와니시는 입가로 술잔을 가져갔다.
순간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몸이 예상했던 것과 결과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저할 수 없다. 카와니시는 말끔하게 술을 입 안으로 털었다.
“……확실히 맛이 좀 이상하네요. 시종을 시켜 술상을 바꾸라 이르겠습니다.”
카와니시가 웃으며 에이지로에게 말했다. 그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카와니시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장면을 예상했겠지만 카와니시는 술병을 들고 아주 태연하게 연회장 뒤로 퇴장했다.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쪽문을 지나친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무작정 걷던 카와니시는 어느새 왕성의 성벽, 거대한 문을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맥박이 크게 뛰었다. 카와니시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짐작한다. 식도부터 위장까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뱃속이 꼬이기라도 하듯 금세 피부 위로 열이 퍼진다. 이건, 평범한 사람들이 적당히 ‘아플’ 수준의 독이 아니었다. 카와니시의 머리로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던 것이다.
에이치는 에이지로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를 죽이고 세미를 역모에 가담한 반역자로 몰아 처형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려 했다. 왜 미리 알지 못했을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래서 더 신중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카와니시는 비틀거리며 겨우 신궁 앞까지 걸었다. 눈앞이 거뭇거뭇하게 변했다. 호흡이 가쁘고 곧 몸속이 녹아내릴 듯 뜨거운 통증에 휩싸인다. 고통스러웠지만 혀가 굳어 카와니시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미처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양의 독을 소화하지 못한 그릇에 진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눈앞이 암전되었다. 혀는 일찌감치 감각을 잃었고 곧 혀도 마비되었다. 손바닥에 닿는 게 돌담인지 흙바닥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귀가 멀었다.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을 때쯤, 카와니시는 신궁의 문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듯 의식을 잃었다.
*
…….
독은 몸 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물리력에 의한 외상과는 회복 가능성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가진 힘을 과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면서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결국 이런 화를 당한 것은 제 자만이 자초한 일이었지요.
그 날의 기억을 끝으로 저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신궁의 의원에서 깨어났으니 신궁 앞을 지나던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 들어갔겠으나, 아무튼 그 사이의 기억이 없습니다. 독의 영향으로 몸이 엉망으로 망가진 채, 다행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회복이 될 때까지 꼼짝없이 수마에 갇혀있어야 했어요. 그 속에서 저는 기나긴 꿈을 꾸었는데, 그것마저도 썩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라 내내 괴롭고 슬펐던 기억만 납니다.
꿈은 늘 꾸던 것이었습니다. 화재가 난 집안 한가운데에 서서 누군가를 다급하게 찾는 꿈, 꿈이라 불길에 덴 몸이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았지만 그 누군가를 찾는 애타는 마음만은 분명히 가슴 속을 매섭게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잿더미로 변한 곳을 뒤지기도 하고, 채 불길이 꺼지지 않아 기둥을 활활 태우고 있는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저는 그게 제 자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그저 피곤한 기분으로 그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꿈의 색이 짙어지면서 발바닥에 붙는 뜨끈한 바닥의 감촉이 생생해지고, 피부에 닿는 뜨거운 불꽃의 그을음이 느껴질 때쯤에야 이게 그리 단순한 ‘꿈’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건 꿈이자 곧 현실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 꿈속의 그가 되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성대가 트여 목소리가 튀어나오면서는 뺨 위를 죽죽 내리긋고 있는 물줄기도 내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래 묵혀두었던 기억이 차츰 돌아오면서, 나는 더 이상 카와니시 타이치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정신없이 불꽃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이윽고 줄기가 굵은 소나기가 머리 위를 적셨습니다. 습기에 불꽃이 차츰 스러지고 이제는 정말 잿더미뿐인 집터에서 나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간절하게 찾던 사람을 결국 찾지 못한 탓이겠지요. 오열 속에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열이 비명이 되어 빗소리에 섞인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나는 꿈의 잔영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가, 꿈속의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나도 일전에 본 적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맑은 호수 위로 달이 둥실 떠오르듯 내 머릿속에 나타난 얼굴은 예전, 에이타의 뒤에서 본 적이 있었던 유령이었습니다. 아, 그러면 이건 에이타의 기억일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의 어머니 내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러나 내 짐작은 완벽하게 틀렸습니다. 그것은, 옷 동정에 피를 함빡 머금고 나를 향해 슬프게 웃고 있던 그녀는,
……내 연인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 어딘가에서 나와 만나 백년해로의 약조를 나눈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돌고 돌아 겨우 다시 만난, 에이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습니다. 불이 나 집이 활활 타는 와중에 화마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숨 쉬던 그녀는 불에 타 죽었습니다. 나를 위해서였습니다. 편지로 나를 신사에 보내놓고 나를 죽이러 온 자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나는 목숨을 부지했으나 그 순간 나의 생명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지금의 ‘나’인 것도 아닌데 숨이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독을 먹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온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시신도 찾지 못한 그녀의 넋이라도 기려주려 온힘을 다해 오열했습니다…….
저는 추레하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제 신변을 돌보던 시종 아이의 감탄 섞인 비명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도 저는 그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대사제가 다가와 소매로 내 뺨을 닦아주었을 때야 비로소 저는 살려달라고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누구를 살려달라고 빌었던 것인지는 정신이 없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수마에 잡혀있었던 터라 현실과 꿈속의 분간이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뼈조차도 남지 않았을 오래 전 이야기는 분명 진실이었습니다. 에이타와 나는 누군가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질긴 인연의 끈을 붙들고 말았습니다.
겨우 끈적거리는 수마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종일을 앓아 온몸이 땀으로 함빡 젖어 물에 적신 솜 베개처럼 죽 늘어진 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룻밤 새 일어난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되고 짙은 경험이었으니, 아무리 번지르르한 신력의 가호를 받는다고 한들 체력이 버텨주질 못했습니다. 차근차근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는 저를 보고 뒤늦게 대사제는 사람을 물렸습니다. 그제야 저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독을 먹고 신궁의 문 앞에서 까무룩 기절한 게 기억의 마지막이었으니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있었고, 시일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 분은 무사하십니까.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아 입술에 허연 거미줄을 죽죽 치고서 제가 물은 첫 번째 말이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저는 왕의 악의를 막기 위해 시라부 대신 연회에 호위로 잠입한 일을 떠올렸습니다. 독주가 번지는 걸 막았으니 왕이 에이타를 벌할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그는 무사해야 했습니다. 다만 꿈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자꾸만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에이타의 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녀를 저는 애절하게 다그쳤습니다.
대사제는 낮은 한숨을 폭 내쉬고 나서야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연회 당일의 일을 대강 저에게 전해들은 그녀는 그 덕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대꾸했습니다. 함부로 행동한 저를 탓하는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묻어있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왕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제가 없이 대사제가 알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그 일로 왕과 에이지로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갔을 터, 그의 화풀이에 또 에이타가 다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제게 대사제는 당신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무얼 하고 지내십니까.
그게 제가 물은 두 번째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꼴로 앓은 것을 알면 에이타가 그냥 있지 않았을 텐데, 혹여 병문안을 왔다가 대사제에게 쫓겨나거나 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한 번 더 채근해도 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늦었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그녀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지났습니까.
……보름이 지났단다.
그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눈앞이 휘청해 꼴사납게 무릎이 꺾였습니다만 저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보름, 보름이면 연회가 끝나고도 다른 방법으로 에이타를 모함할 수 있을 만큼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제야 에이타에겐 아무 일도 없다는 대사제의 말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이 증폭되어 벅찬 숨으로 저는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에이타가 분명 내 걱정을 하며 신궁에 왔을 게 뻔한데, 어째서 그 소식은 제게 알려주지 않는 겁니까.
돌아온 대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느냐. 그녀의 반문에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권력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해도 왕자를 그리 문전박대 했느냐 묻는 제 외침에 대사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습니다. 등을 돌려 문을 나가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빠진 다리가 몇 번이나 휘청거려 그럴 수조차 없었습니다. 방바닥에 무릎을 세게 찧고 나서야 저는 주먹으로 바닥이고 벽이고, 때릴 수 있는 곳은 전부 두들겼습니다. 꿈속에서 만났던 연인의 얼굴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에이타의 모습이 겹쳐져서 더 이상 풀 곳 없을 만큼 분이 찼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눈을 열고 무리해서라도 에이타의 안위를 확인하려 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독의 영향으로 몸속의 균형이 흐트러져 엉망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신력이 잠겨버린 거였습니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신궁을 나가려 했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일평생 검을 쥐어본 일은 검무를 배울 때 말곤 없었던 제가, 신력도 없이 다른 수호사제들의 감시를 뚫고 신궁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더 이상 저에게서 신력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살려둔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신궁에 데려와 정성껏 보살펴준 것일까요. 나는 이용가치가 다했는데, 독 때문에 사라진 신력이 어느 세월에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데, 무엇 때문에 에이타에게 달려가지 못하게 막고, 무엇 때문에 당신과 나 사이를 막고…….
다 그만두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비수 같았습니다. 소식을 들을 수도, 그 말간 얼굴을 볼 수도 없어 저는 그날 하루 종일 지쳐 탈진할 때까지 울었습니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에이타 당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조차 어려워서, 다른 때라면 침착하게 방법을 생각했을 테지만 꿈속에서도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당신이 어른거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잿더미로 변한 채로 덩그러니 놓인 집터에서, 그 재들을 뒤지다가 불에 탄 나무기둥 아래에서 새까맣게 탄 손만 삐죽 솟아올라있던 게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체에서 온전했던 건 그것뿐이었겠지요. 저는 헛구역질을 했습니다. 그건 분명 전생의 기억이었을 테지만, 마치 현실 같았습니다.
에이타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력이 없이는 방법이 없었기에 하루 이틀이 지나 아주 조금씩 평정을 찾고 저는 그저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잠들어있던 보름을 더해 앞으로 신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올 때까지 며칠만, 에이타 당신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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