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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세미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미야기 현 소재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늦을 것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이 안을 헤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고 카와니시는 생각했다. 미리 와서 학교 탐방이라도 했다면 단번에 현재 목적지인 교무실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도 뒤따랐다. 자신은 전학생 신분이니 사실 급할 것도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제 6월에 막 접어든 초여름 하늘의 뜨거운 열기였다.


원체 더위에는 약했다. 햇빛을 오래 쐬면 피부도 금세 붉게 타버리는 통에 여름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긴팔을 입었다. 시라토리자와의 하복은 당연하게도 반팔이고, 카와니시는 마땅한 자외선 차단제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그늘로만 다녀야 했다. 그랬으니 가뜩이나 넓은 이 학교에서 카와니시가 찾는 건물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셈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물어나 볼 텐데.


체육 수업 중인지 시끌벅적한 체육관 옆을 막 지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카와니시는 매섭게 날아온 무언가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한 박자 늦게 들린 목소리는 어딘지 흐리멍덩했다.







여름 헌정곡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전학 온 첫 날 가장 먼저 구경한 장소가 양호실이라니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딱히 양호실까지 올 일도 아니었지만, 당사자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누구 덕분에 카와니시는 강제로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카와니시를 명중한 것은 말랑말랑한 배구공이었다. 체육 시간에 종종 날아드는 공에 맞아본 일은 있지만, 농구공 같은 무게감의 배구공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라 카와니시는 적잖게 멍해졌다. 이 공을 던진 주인공은 역시 이 학교의 학생으로, 괜찮다는 카와니시를 닦달해 기어이 양호실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다.



말 미안해요!”



그는 합장하듯 손을 모으고 카와니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날아오는 공에 맞고 반동에 바닥으로 쓰러진 것이 그에겐 어지간히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어디 피가 난 것도 아니고, 넘어지면서 손바닥만 살짝 까졌을 뿐인데 이 유난을 떠는 게, 딱히 싫지는 않아 카와니시는 머쓱하게 침대에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희미하게 작은 공간을 채운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당장 일어나자니 눈앞의 가해자라고 말할 것까진 없을 것 같지만가 가만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고, 바깥은 덥고 당장 교무실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으니 조금만 시간을 죽이자 생각했다. 카와니시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에게 정말로 아픈 곳 없으니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혼자 쉬어도 괜찮다고. 공에 맞은 당사자는 카와니시 본인인데, 이쯤 되니 카와니시가 눈앞의 학생에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근데, 학교를 이제 와요? 지각생?”



결국 표정을 풀고 카와니시가 살짝 웃어 보인 뒤에야 그는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그렇게 물었다. 무감각한 목소리로 카와니시가 느리게 대꾸했다.



오늘 처음이에요. 전학 왔거든요.”

……진짜, 진짜 미안해요.”



이제 그는 머리를 땅에 박을 기세였다. 정수리만 동그랗게 보이도록 고래를 숙여 사과하더니 뾰족한 눈꼬리를 축 내리고 카와니시를 본다.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카와니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 일도 이렇게 됐으니 학교 안내는 내가 해줄게요.”

그럴 필요는…….”

교무실에 가야 하는 거 맞죠?”

……없는데.”



카와니시는 단박에 그가 좀 귀찮은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 딴에는 미안해서 하는 말과 행동들이 부담스러울 줄 모르는, 전형적으로 예쁨 받고 자란 도련님 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번듯하게 잘생겼다. 성격만 좋다면 훤칠한 이목구비가 남녀노소 관계없이 인기 많을 상이었다.



진짜 괜찮아요. 이제 돌아가셔도,”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기.”



미안한 표정으로 샐쭉 웃는 얼굴에 카와니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확실한 게 한 가지 더 늘었다. 그는 어지간히 특이한 사람이다. 사람이 부담스러워 할 호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재주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 발생한 돌발 상황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을 그는 카와니시가 양호실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쫓아다녔다. 정확히는 카와니시가 그의 뒤를 따라다닌 거였으나, 필요 없다는 사람을 만류하며 오지랖을 부린 건 그쪽이었으므로 그렇게 표현해도 틀린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카와니시는 손쉽게 교무실을 찾았다. 학교가 큰 만큼 중앙 교무실도 규모가 컸다. 그 속에서 직접 전학 수속 담당 선생님을 찾아준 그는 과연, 교무실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학생회장이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아니면 그것 말고 특출하게 잘하는 분야가 있다거나. 어쨌든 그는 선생님들에게도 예쁨 받는 학생이었다. 딱히 낯선 풍경도 아니었는데 카와니시는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등을 보이고 선 그가 과도하게 반짝거렸던 탓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수속을 마치고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카와니시를 반까지 안내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카와니시는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편하게 온 것은 사실이니, 그래도 고맙다는 소리는 해야 할 것 같아 운을 떼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한 발 더 빨랐다.



“2학년이네요.”

…….”

그럼 내가 선배네. 3학년이거든요. 말 편하게 해도 괜찮아요?”



카와니시는 잠깐 우물쭈물 댔다. 그렇게 묻는 그가 싫었다고 하기 보다는 선배가 후배에게 말을 놓아도 되냐고 묻는 상황이 좀 어색했을 뿐이다. 조금 뜸을 들였더니 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얼굴을 보고 카와니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 별 게 다 인연이구나. 어느새 그에게서 옅게 땀 냄새가 났다. 아까는 분명 체육 시간이었으니 그 때문에 땀을 흘렸을 터다.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카와니시는 여름이 왔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부 활동은 뭐할지 정했어요?”

아뇨, 딱히 부 활동은…….”

으응, 그렇구나. 공부하는 타입?”



솔직히 말하면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전 학교에서도 성실하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와니시의 전공 분야는 공부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부만 하려고요.”



카와니시는 조금 퉁명스러움을 담아서 그렇게 대답했다. 아까보다 훨씬 단조로운 음이었다. 뒤늦게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아 머쓱해졌지만 그 이후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으므로 카와니시가 구태여 사과할 일은 없었다.

 






*

 






카와니시의 어린 시절 기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늘 똑같은 장면이었다. 검고 하얀 건반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어서 옛 기억들을 떠올리려 하면 눈앞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하교하고 나면 곧장 레슨을 위해 학원을 갔다. 밤이 늦도록 혹독한 수업이 이어지는 건 물론이고, 카와니시는 같은 곡을 수도 없이 쳐야 했다. 자기 전에 누워서도, 심지어는 자는 도중에도 카와니시는 건반이 없는 허공에 대고 연주를 했다. 첫 콩쿠르 곡이었다.


운이 따랐는지 카와니시는 처음 참가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최우수는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렸음에도 섬세한 연주가 돋보여 카와니시는 단번에 유명세를 얻었다. 그 때의 기분은 솔직히 말하면 짜릿했다. 그래서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한 일이 없었다. 레슨 때문에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매일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건반을 두드려야 했지만. 수상을 위해 무대에 다시 섰을 때 그 순간의 희열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이후에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재능도 있었고, 미래가 유망한 피아니스트라며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라이벌이라고 지목된 경쟁자들이 카와니시의 아래에 줄을 서는 것을 보고서 기묘한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피아노는 카와니시 인생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잃고 카와니시는 도망치듯 미야기 현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



책상 위에 엎어져있는 카와니시에게 누가 말을 걸었다. 그 누가 누구인지는 훤하니 카와니시는 부러 못 들은 체했다.



안 먹어? 점심.”

먹을 거야.”

그럼 일어나. 급식실까지 업고 가랴.”

업을 순 있어?”



아주 약간의 비웃음을 섞은 말에 시라부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쥘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는 무엇이든 결심한다면 진심으로 실행에 옮길 인물이었으므로 카와니시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라부 켄지로는 카와니시가 이곳에서 처음 사귄 친구이자, 반장이었다. 반장이니 책임지고 전학생을 도맡아 이것저것 알려주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학교 구경이나 시켜주겠다던 그의 첫인상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반장과 반장이 아닌 학생이었으니 학기 중에 몇 마디 말이나 나누면 다행일 관계를 예상했지만, 시라부는 꽤 살뜰하게 카와니시를 챙겼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았다.



배구, 재미있어?”

.”



시라부는 배구부였다. 카와니시가 학교에 전학 온 날 카와니시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던 것도 배구공이었으니 무심코 물은 말이었는데 의외로 칼 같이 떨어지는 단정한 대답에 카와니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란 것도 좀 웃기지만, 심드렁하게 묻는 말에 저렇게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은 시라부가 더 황당했다. 원체 농담이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대답할 줄이야. 그런데 의외로 카와니시는 그게 부러웠다. 저렇게 단호하게 재미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카와니시에게도 그런 게 있었다. 누군가가 피아노가 재미있느냐 물으면 자신과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전학을 오면서는 모든 미련을 털어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성실하게 참여하며 그동안 못한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면서는 조금 피아노를 잊을 수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자꾸만 꾸역꾸역 비린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아마도, 이 학교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이 부 활동은 하지 않을 거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습, 구경 가도 돼?”



배구는 손으로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피아노만큼 섬세한 움직임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은 손으로 운동은 무리겠지만룰도 모르고그래도 저렇게나 자신 있게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그냥 던진 말이었다. 시라부는 평소와 같은 단정한 얼굴로 카와니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내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 들어오려고?”

아니.”



그냥 보고 싶어져서.



주장한테 물어볼게.”



카와니시의 무료한 대꾸에 시라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왜 그랬을까. 뒤늦게 후회를 담은 자문에 카와니시는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시라부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와니시가 전학 온 첫 날, 농구공만큼 묵직한 무게의 배구공을 날렸던 신원미상의 학생이 바로 시라토리자와 학원의 배구부 3학년이었다는 것이다. 얼핏 이름을 들은 것 같았으나 별로 집중하지 않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전히 카와니시에게 신원미상이었다. 그런데 그 신원미상의 특이한 인물은, 시라부를 따라 체육관으로 들어온 카와니시를 곧장 알아보고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모른 체할 수는 없어 카와니시도 머쓱하게 손을 흔들었다.



부 활동 안한다더니.”

아는 사이에요?”

으응, 전학생이랑 전학 첫 날에 좀.”



그가 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시라부는 질색을 했다. 3학년이면 선배 아닌가. 선배 보는 앞에서 저렇게 표정을 막 구겨도 괜찮은가. 음악계와 마찬가지로 체육계도 군기가 엄하다던데, 고작 동아리이기 때문에 그런 상하관계에서 자유로운 걸까. 카와니시가 홀로 당황해서 서성이는 사이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두고 훌쩍 코트 안쪽 탈의실로 사라졌다. 이제 막 훈련이 시작되려는 참인지 체육관 안은 비품을 옮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배구에 관심 있었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관심……, 까지는 아니고요. 선배가 배구부인지도 몰랐어요.”

시라부랑 같은 반이야? 이거 참 우연이네.”



양 옆에 가지런히 두었던 손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어색한 관계였음에도 그 앞에서는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부 활동에 대한 그의 질문이 카와니시를 이곳까지 이끌었으므로.


세미세미, 준비운동 안 해?


코트 중앙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세미,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구경 잘해. 재미있었으면 좋겠네.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는 빠르게 등을 돌려 카와니시에게서 멀어졌다. 자리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카와니시는 한참을 거기에 서 있다가, 곧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공을 피해 체육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덥지도 않나.


연습하는 걸 보고 있으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체육관 안이긴 했지만 바깥은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다. 다른 날보다 좀 더 습도가 높아 실내라고 시원할 리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이 더위에도 열심히 움직이는 체육 소년들의 땀 냄새가 가득했다. 온도도 습도도 모두 높은 최악의 컨디션, 카와니시는 가만히 앉아있었음에도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뜨거운 날씨에 저러다가 쓰러지진 않을까.


괜한 걱정임은 알았다. 그러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새를 보고 있자니 등에서 절로 땀이 났다. 시선 끝에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 걸렸다. 카와니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던 세미는 아예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굉장한 집중력이다, 카와니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청소년 특유의 땀 냄새, 운동화와 매끄러운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 바닥에 동그랗게 찍히는 땀방울과 기합 소리, 전부 카와니시에겐 낯선 것들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익숙했다. 아마도 카와니시의 몸이,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족히 서른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넓은 공연장 무대 위,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에 놓인 검은색 그랜드피아노, 그 위에 앉아 손끝의 섬세한 감각만으로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연주를 마치고 나면 그 사이의 생각은 어느새 까맣게 암전되어 있다. 귀신에 홀린 듯 연주를 끝내고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 그제야 연미복 안 셔츠는 땀을 함빡 머금곤 했다. 다리가 풀릴 것 같고, 손가락 끝이 달달 떨리고, 온몸의 모든 장기와 뼈가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 혼신을 다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쾌감.


한때는 카와니시도 느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 카와니시가 그런 것을 느낄 일은 없다.


카와니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 훈련이 한창이라 아무도 카와니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다.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족쇄에 묶이기라도 한 듯 축축 쳐졌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카와니시는 체육관 밖, 내리쬐는 햇볕을 마주보고 섰다.



벌써 가?”



분명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 입구 근처에 세미가 나타나 카와니시를 슬쩍 막고 섰다. 카와니시는 또 속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한다.



학교 지리를 아직 잘 몰라서요. 다른 곳도 돌아다녀보려고…….”

금방 끝나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가면 안 돼? 학교 구경시켜준다는 말, 아직 유효해.”

괜찮아요. 연습 열심히 하세요.”



카와니시는 그렇게 세미를 두고 나왔다.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빠르게 체육관으로부터 멀어진 카와니시는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체육관 입구에 서서 세미가 물끄러미 카와니시를 바라보고 있다. 그 유한 시선에 화들짝 놀란 등골 사이로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배구, 관심 있으면 말해줘.”



세미는 그렇게 말하고 체육관 안으로 쏙 사라졌다. 카와니시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고작 이 거리를 왔을 뿐인데, 심장은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 마냥 쿵쾅거렸다.

 






*






 

이런 시골에도 이 정도의 큰 학교에는 도쿄의 콩쿠르에 관심이 있는 선생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와니시가 전학 온 이후 한 달, 쭉 카와니시를 지켜보던 음악 선생님이 그를 교무실로 불렀다. 부쩍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를 묻거나, 혹은 다시 이곳에서 피아노를 쳐볼 생각은 없겠느냐 이야기하면 당장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별다른 대책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음악실 옆에 붙어있는 작은 교무실에는 미술과 음악, 체육을 담당하는 예체능계 선생님들의 자리가 모여 있었다. 카와니시가 그곳을 방문한 것은 방과 후의 일이었으므로, 음악 선생님을 제외하곤 모두 자리를 비웠다. 이야기가 불편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카와니시에 대해 아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시시한 잡담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흐물흐물 시간을 따라 흘렀다. 카와니시가 피아노를 그만둔 데에 그 역시 들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카와니시는 똑딱똑딱 시계 초침 소리만 세고 있었다. 그만큼 지루하다는 뜻이다.



도쿄에서는 장래 유망한 피아니스트였지?”

……옛날이야기입니다만.”

혹시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가 있니?”



알고 묻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일까. 어느 쪽이든 카와니시는 순순히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항의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그는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해볼 생각은 없어?”



카와니시는 그 물음에 확신했다. 그는 카와니시가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를 전혀 모른다. 목구멍 끝, 혀뿌리까지 욕설이 올라왔지만 간신히 붙잡은 이성으로 혀를 억누르고 카와니시는 침을 삼켜냈다. 다시 해볼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다시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려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변명조차 포기했다. 카와니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그 침묵의 의미를 알겠다는 음악 선생님의 손짓에 겨우 교무실을 벗어났다. 또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내려올 때의 긴장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눈앞에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어쩌면 지금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카와니시는 속으로 마음껏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허여멀건 얼굴에 대고 침을 뱉을 순 없었으니 땀이 밴 손바닥만 바지춤에 닦아냈다.



……할 말 있어요?”



세미는 다른 때와 다르게 좀 긴장한 표정이었다. 카와니시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까. 딱히 이야기라고 할 만한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피아노에 관한 것들을 들었다면 역시 피곤해질지도 모른다. 카와니시는 모른 척했다. 세미는 카와니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조금 걱정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 그냥 지나가다가.”



급격하게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방과 후였고, 카와니시는 따로 동아리를 하고 있지 않았으니 기숙사로 돌아가도 좋을 터였다. 더 이상 세미와는 나눌 대화가 없는 것 같아 카와니시는 늘어지는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 했다.



괜찮아?”



세미는 퍽 우울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카와니시는 부쩍 귀찮은 티를 냈다.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기엔 아까운 청춘이라며 피아노를 그만둔 카와니시를 다그치던 아버지에게 묵음으로 반항하던 때와 같은 감정이었다. 치기, 오기, 더 나아가서는 질투. 생각할수록 쓰레기 같은 감정들이 마구 뒤섞였다.



……뭐가요.”

그러니까……. 혹시 지금 울고 싶다거나…….”



그 말에 카와니시는 조금 흠칫했다. 끝이 떨리는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카와니시를 배려한 말임이 분명했지만 그마저도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음성이었다. 왜 굳이 그는 카와니시를 붙잡았을까. 화가 났다거나 울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면 차라리 혼자 두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대안일 것이다.


세미는 오지랖이 넓었다. 좋게는 사람의 감정을 잘 읽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러나저러나 지금 카와니시에게 세미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카와니시는 뒤늦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이제 그만 그가 포기하기를 바라면서.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갈래? 학교 석식, 오늘 맛없던데.”



그러나 세미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멋쩍게 웃는 얼굴에 대고 또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뭐해서그가 딱히 선후배 사이의 군기에 집착하는 인물이 아니었음에도카와니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동적인 찬성이긴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카와니시에겐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메뉴는 돈부리였다. 카와니시에게 선택권은 없었고, 세미가 맛있는 집을 안다며 데려간 식당은 제법 음식이 괜찮았으니 그럭저럭 만족했다.



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어?”



세미는 식탁 위에 턱을 괴고서 그렇게 물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언뜻 위화감을 느낀 카와니시는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가던 수저를 우뚝 멈추고 세미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이상하다. 그저 사람을 잘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풍부한 감성을 담아 피아노를 연주하던 카와니시는 그 외의 감정표현엔 서툴렀다. 그랬으니, 어지간히 눈치가 좋지 않은 이상 카와니시의 기분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손쉽게 말해, 읽히는 느낌이었다. 기묘하다. 그는 아주 기묘했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카와니시가 마침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세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겨우 웃는다며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산뜻한 목소리로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타고났다고 할까.”

눈치?”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치로 모든 걸 파악한다고 하긴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 외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그득 담긴 카와니시의 눈을 보고 세미는 대답 없이 웃었다. 따로 술수를 부린 것도 아닐 텐데, 그 웃음에는 거짓말처럼 굳어있던 마음이 허물어졌다.






 

*






 

그 날을 시작으로 카와니시는 가끔 세미와 외출하곤 했다. 학교의 규율이 엄격한 편이긴 했지만, 이곳을 쭉 다닌 세미는 넓은 학교의 어디로 드나들면 들키지 않을 수 있는지 꿰고 있었으므로 선도부나 선생님에게 걸려 벌점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행은 주로 세미가 먼저 제안하곤 했지만,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는 카와니시가 먼저 세미에게 나가자고 부탁했다. 학교생활은 아주 평화로웠으므로 위로가 필요한 일은 많지 않았지만, 무료함을 달래기에도 그와의 대화는 썩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미는 그 날, 교무실 앞에서 카와니시가 음악 선생님과 하는 대화를 들었다고 했다. 음악 선생님의 자리는 문에서 가장 가깝기도 했고, 문틈이 벌어져 있어서 원치 않게 듣게 되었다고. 그는 딴에 변명이라도 하는 듯 민망한 얼굴을 했지만 카와니시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과거에 피아노를 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서 세미가 그걸 어디에 퍼뜨린다거나, 카와니시에게 피아노를 그만둔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할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카와니시는 세미에게 더 편안하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피아노를 아주 어릴 때부터 쳤고, 평생을 까맣고 하얀 건반만 내려다보며 살아왔다고. 이전 학교에서 있었던 학생들과의 다툼에 휘말려 오른손을 못 쓰게 되었다는 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그것까지 그가 알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럼 이제는 피아노, 치지 않는 거야?


세미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카와니시는 태연한 얼굴로 이제 칠 생각 없다고 대꾸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카와니시를 스친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세미는 또 기가 막히게 잡아낸 모양이었다. 카와니시 대신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그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어쩐지 불편해져서, 무어라 변명하는 대신 색이 진한 세미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달력은 7월에 멎었다. 올해 여름은 성난 폭염이 단단히 찌들 거라더니, 일기예보는 어쩐 일로 틀리지 않는다. 나날이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의 강도는 세지고, 이제는 그늘 아래에서도 더위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습도가 높아지고 비가 내리고, 다시 찌는 듯한 더위가 반복해서 찾아오는 한여름의 어느 날, 카와니시는 손부채질을 하며 음악실 옆을 지나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나 CD플레이어로 재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끊어질 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피아노의 음계들은 좀 서툴렀으므로, 아마 이제 막 피아노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초보자가 남몰래 음악실에 숨어들어 연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내 정통 클래식만 듣고 연주해오던 카와니시가 듣기에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카와니시는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발이 묶였다. 아는 곡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다. 그래서였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음악실 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당장 열고 들어가기는 당사자도 민망해 할 것 같아서 카와니시는 열린 문틈 사이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수가 있든 말든 서툴게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은, 도무지 그럴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미의 어깨가 조금씩 움직였다. 운동 때문에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건반을 정성스레 누르고 있는 그는 오로지 곡에 집중한 듯했다. 카와니시는 잠자코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처음 듣는 곡이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아닐 테고, 악보를 보는 것 같지도 않으니 혹시 어디서 흘려들은 노래를 듣고 외운 것일까. 언제부터 피아노를 쳤을까.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아직 건반을 누르는 게 능숙하지 않았으므로.


의외였다. 배구에 그렇게 열중하는 사람이었으니 다른 취미가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카와니시는 슬쩍 지나가려고 했다. 몰래 음악실에 들어와 홀로 연주하는 것을 보니 그에게도 그만이 간직한 비밀 같은 게 있으려니 했다. 비밀을 들킨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오늘 엿듣게 된 것은 모르는 척 묻어둘 생각을 했다.



안 들어오고 뭐해?”



카와니시를 붙든 건 세미였다. 음악실 안에서 넘어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카와니시는 뜨끔해서 자리에 멈춰 선다. 어떻게 알았지, 돌아본 것 같진 않았는데. 세미는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 귀신같아서 무섭다.



어떻게 알았어요?”



음악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카와니시가 물었다.



기척이 들렸어.”

피아노도 치네요, 선배.”

그냥 취미로, 가끔.”

방금 건 무슨 곡이에요?”



세미는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기척이 들렸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일 테지만 카와니시도 모른 척하며 세미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목 없음.”



카와니시는 알쏭달쏭해졌다. 제목이 없다는 건 말 그대로 곡의 이름이 무제라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제목을 짓지 못했다는 뜻인지 의미가 불분명하다. 세미는 전공자가 아니었으니 작곡 같은 걸 할 리도 없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역시 전자에 수렴한다. 그랬으니 그 곡이 카와니시에게 낯선 게 당연할는지도 몰랐다.



쳐볼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제안에 하마터면 카와니시는 그러겠다고 할 뻔했다.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감싸 쥐고서 카와니시는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물끄러미 카와니시를 바라보다가, 세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카와니시, 이건 네 곡이야.”



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 하나로 장난스럽게 누르면서, 그러나 목소리엔 전혀 농담을 담지 않았다. 무슨 뜻일까. 카와니시는 피아니스트였지만 곡을 만든 적은 없다. 잠시의 정적 이후 세미는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에, 네가 처음으로 웃었을 때 내 귀에 들린 곡이야. 너한테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들어버려서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거 있지.”



귀에 들렸다는 표현이 그렇게 낯설 수 없었다. 더구나 카와니시가 웃었을 적에 들었던 곡이라니 더 말이 안 됐다. 카와니시는 세미와 대화를 하는 도중 어떤 것도 들은 기억이 없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세미가 눈썹을 내리고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는 들려, 사람들의 감정이. 내가 인지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노랫소리로 바뀌어서 나한테만 들려.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까지 서러워지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음악은 너무 시끄럽고 엉망이라 두려워지기까지 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훨씬 편안해지는 소리가 들려.”

…….”

근데 처음에, 너 만났을 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 그럴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너무 이상한 거야. 세상에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네게 관심이 생겼어. 점점 가까워지니까, 그제야 네 소리가 들리더라. 그래서 알았어. , 얘는 이렇게나 마음을 굳게 닫고 사는 구나…….”



카와니시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라니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현실에서 겪기엔 너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문득 그동안 세미가 해왔던 행동과 말들을 떠올린다. 눈치가 빠르고,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능숙했고, 또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가 어떤 방식인지 알았고, 그래서 늘 상대방의 기분을 낫게 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에게조차 세미의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세미 에이타는 늘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학교 선생님들, 동급생들, 동아리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미를 향한 숱한 애정들이 그냥 생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다. 왜 그럴까? 몇 번 스쳐지나가고 말 인연들까지 붙들기 위해 어째서 그는 그렇게 노력하는 걸까. 세미의 허무맹랑한 답변을 듣고 나서 카와니시는 조금 이해가 됐다. 그는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무리하고 있는 거였다.


자기에게만 들리는 소리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힘든 무형의 것들은 너무나 괴롭고 공포스러웠으니, 차라리 기분 좋은 소리만 듣자고 세미는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나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세미는 사람들의 기분을 잘 알았다. 그리고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딱 적당한 위로를 건넬 줄 알았다. 그래서 카와니시는 세미가 마법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로, 마법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해도 괜찮아요?”

너는 믿어줄 것 같았으니까. 거봐, 의심하지 않잖아?”



면전에 대고 대뜸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의심하고 자시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뿐이다. 카와니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서 여전히 피아노를 둥당거리는 세미를 바라보았다. 장난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너무 장난 같지 않아서 오히려 심각하다. 카와니시는 부쩍 진지해졌다.



카와니시, 뭔가가 하고 싶은 거지?”



그 말에 카와니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피아노를 그만둔 이후로 여태껏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전학을 와서,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고 이따금씩 밖으로 나가 체육활동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속에서 카와니시는 어떤 것에도 욕망하지 않았다. 세미나 시라부가 온 힘을 다해 동아리 활동에 참여할 때에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좀 부러웠을 뿐이다. 배구를 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았다. 원체 공을 다루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카와니시는 손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뒀다. 손으로 하는 스포츠라니 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게 꼭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그저 너를 태울 무언가가 필요한 거지, 카와니시.”



세미는 예리했다. 그리고 카와니시는 그의 말에 홀렸다. 자신을 태울 무언가.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이 너무나 정확한 진단에 카와니시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의 사고로 날아간 열일곱 평생의 인생, 그 이후로 길을 잃은 듯 내내 텅 비어있던 마음에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꾸역꾸역 들어차기 시작한다. 세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낮은 시선으로 그는 다정하게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뭐든 괜찮아. 나는 계속 네 소리를 듣고 싶어.”



세미의 목소리에는 특이한 울림이 있었다. 명령도 아닌, 어찌 보면 그저 부탁에 불과한 음성에는 기묘한 힘이 깃들어있어서 저절로 몸이 움직이게 만들고, 멀어지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든다. 세미는 카와니시를 분명히 꿰뚫어보았다. 무기력증이라며 스스로 판단한 질병의 근원은 그저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위로하고 있었다.


지금 세미에겐 무슨 소리가 들릴까. 이 혼잡한 사고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박자며 리듬이며 선율이며 온통 엉망인 노래가 들리지 않을까. 그러나 세미는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의 노랫소리는 때때로 본인마저도 서럽게 만든다면서, 세미는 카와니시를 똑바로 보고 웃었다. 그에 카와니시는 무너지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안해, 엿보려던 건 아니었어.”

알아요.”

카와니시.”



세미가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서 잠자코 카와니시를 달랜다. 카와니시가 울고 있었음에도 세미가 안도하는 것은, 그 울음의 의미를 분명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카와니시는 웃는 듯 울었다. 혹은 우는 듯, 웃었다.

 






*






 

의외로 세미는 공부에 소질이 없는 듯했다. 배구공을 만지는 순간을 제외하고 딱히 세미를 본 적이 없는 카와니시는 그 사실을 시라부로부터 들었다. 기말고사를 코앞에 앞두고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세미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단다. 학년이 다른데 그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라부의 성적을 생각하면 아주 무리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세미에게 했더니, 공부는 잘 되고 있느냐는 카와니시의 질문에 그는 불쑥 성을 냈다. 시라부는 영 귀염성 없는 후배라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 해서 솔직하게 물어봤더니 짜증을 내더란다. ‘이런 것도 몰라요?’, ‘선배 이 정도면 유급감인데요.’등의 독설은 물론이고 가시 돋친 시선이 아주 매웠다고. 세미의 신경질이 귀여워 카와니시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시라부랑은 잘 지내네요. 걔한테서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지 않나 봐요. 세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 걔가 원래 좀 꼬여있어서 그래. 근본이 나쁜 애는 아니니까. 세미의 고백을 들은 이후로 그가 살아온 삶을 곰곰이 상상해본 카와니시는 그래도 저런 면에 있어서는 편리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하지도 않은 상대의 마음을 안다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일 테지만, 적어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대화를 하지 않아 생기는 오해들을 면할 수는 있을 테니. 그렇기 때문에 세미가 인간관계의 선이 아주 명확한 시라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세미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카와니시는 늘 그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굴었다. 세미를 만나면서 조용히 요동치던 부정적 감정들이 많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이따금씩 피아노를 치던 시절의 꿈을 꾼다든지 하는 날에는 그걸 조절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카와니시의 기분에 따라 세미에게 들리는 소리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에겐 말이나 행동보다 속내를 주의했다. 세미에게도 그 가상한 노력이 들리곤 했나 보다. 그럴 때면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조용히 웃어보였다.


그래서인지 카와니시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적어도 세미와 있을 때에는 우울한 생각에 침몰하지 않았다. 사소하더라도 가벼운 즐거움에 때때로 웃기도 하고, 석식을 빼먹고 몰래 밖으로 나가려다 걸려서 혼날 뻔했을 때에도 그의 넉살좋은 대처에 속으로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점차로 일상이 좋아졌다. 꼴도 보기 싫었던 피아노에게도 시선을 주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시험도 끝나고 방학을 앞둔 어느 주말,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한가로웠다. 대부분 방에서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밖에서 놀다 들어오거나 쇼핑을 하거나,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거나 했다. 카와니시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방 침대에 틀어박혀 멍청하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한 탓이다.


뭔가가 하고 싶은 거지?


카와니시는 곰곰이 세미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지만 카와니시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멍하게,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싫었지만 안타깝게도 카와니시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직 찾지 못했다.


머리를 복잡하게 굴려야 하는 일은 질색이었으니 공부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닐 테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것도 좀이 쑤셨으니 몇 번 하고 말 게 분명했다. 피아노를 다시 쳐볼까? 으스러졌던 오른손의 손가락들도 이제 움직이는데 무리가 없으니, 한창 때보다야 못하겠지만 어찌어찌 연주가 가능하긴 할 것이다. 그러면 만족할 수 있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콩쿠르 때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경쟁자로 거론되던 시절을 겪고 나서, 지금 다시 친다고 그 연주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세미는 하고 싶은 무언가에 집중하라 했지만, 카와니시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의 모든 걸 태울 수 있는 것이었다. 피아노에 있어서는 과거보다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피아노를 제외하고, 카와니시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엔 무엇이 있을까. 뭐든 좋다. 한여름 더위처럼 쨍쨍한 열일곱 청춘에, 도대체 무엇을 하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땀방울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카와니시는 벌떡 일어섰다. 옷을 대충 꿰어 입고 카와니시는 서둘러 방을 나왔다.


머리꼭지에 뜬 태양은 아스팔트를 녹일 기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잠시만 밖에 나가있어도 아이스크림처럼 온몸이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도 세미가 있을 곳을 예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체육관에서 공을 만지고, 던지고, 때리고 할 것이다. 그는 3학년이고 실력도 좋은 선수였으니 오늘 같이 공식 연습이 없는 주말에는 직접 후배들을 지도해줄지도 몰랐다. 세미가 오늘 연습에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물론 있었지만, 카와니시는 무작정 체육관으로 향했다.


역시나 체육관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 잠깐을 걸어오는 새에 관자놀이를 적신 땀을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 카와니시는 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바깥보다 한결 습도가 높다. 언제부터 연습을 시작한 건지, 후덥지근한 공기 속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빠르게 세미를 찾았다. 그는 구석 의자에 앉아 수건을 목에 걸친 채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저런 때는 영 웃지 않는 게, 처음 보면 좀 무서운 선배라 생각해 주눅이 들 것 같다. 카와니시는 문에 기댄 채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길 기다렸다.


또 그 노랫소리란 걸 들었는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세미는 퍼뜩 카와니시를 찾아냈다.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카와니시에게서 나는 소리는 어떤 느낌일까. 세미는 반가운 듯 웃었다. 그랬으니 아마 듣기에 편안하고 좋은 음악이 아니었는지 생각한다.


세미는 카와니시를 만나기 위해 잠깐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뜨거워 죽겠다며, 이대로 가다간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고기 한 점이 될 거라고 세미가 우는 소리를 냈다. 체육관 바로 앞 나무 그늘에 걸터앉아 세미는 부지런히 손부채질을 했다. 카와니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 짙게 밴 땀 냄새, 나무 그늘 아래 나뭇잎 탄 내, 여름의 향기, 뜨끈뜨끈하게 열이 단단히 오른 살갗.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주말인데.”

그냥요. 잠도 안 오고 공부하기는 싫어서.”



솔직한 대꾸에 세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와니시도 옅게 따라 웃었다.


그는 카와니시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권유하지 않는 것은, 카와니시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는 데에 어떤 강요도 하고 싶지 않은 배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전학 온 이후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청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는 카와니시에게, 그 낭비 이상으로 솔직한 본심을 보여줬으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세미는 그 이후로 카와니시에게, 카와니시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졌으니 그 답례로 음악실에서 카와니시는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연습했던 곡을 연주해보았다. 리듬이나 멜로디의 변화가 격렬하거나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곡은 무리였지만,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 연주하는 곡은 가능했다. 한동안 연습을 하지 않아 서툰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곡을 듣고 세미는 부쩍 기뻐했다. 계속 카와니시의 소리를 듣고 싶다던 세미는,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피아노 선율에 퍽 감격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피아노로 되돌아가긴 싫었다. 카와니시가 열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꼭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거나 손에 쥐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건 역시, 세미였다.


카와니시는 우물쭈물 댔다. 잠시만 밖에 서있어도 살갗이 붉게 타는 이런 날 불쑥 방문을 박차고 나와 세미를 만나러 온 것은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는다는 게 생각보다 만만한 일은 아니었고, 그럼에도 그가 곁에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한 발자국이었다.



선배.”

?”



예전부터 손으로 하는 일들에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그랬으므로,



……저 배구, 가르쳐주세요.”



카와니시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준 그가 곁에 있다면 까짓 배구, 뒤늦게 시작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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