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세 번째 장
고요가 마음을 좀먹기 시작한다.
카와니시의 덕으로 연회는 잡음 하나 없이 조용히 끝났다. 모두가 평화로운 듯 보였지만 사신단이 돌아가고 난 후 텅 빈 왕궁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에이타는 이 침묵의 정체를 안다. 왕궁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지배하는 월요의 왕이,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연회가 끝난 이후 에이타는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사람들의 시선이 드문 이른 아침 신궁의 문을 두드리러 걸음을 나서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마저도 식사는 거르기 일쑤라, 시라부가 직접 상을 봐오기까지 했다.
일주일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몰랐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고 다시 깜빡하면 해가 지고 있었다. 끼니를 챙기는 둥 마는 둥, 물만 마시고 살아 몸이 고됐지만 가장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 카와니시를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그의 안위를 신궁의 사람으로부터 들어야만 했으니 속이 답답해 병이 올 지경이었다.
신궁에서는 에이타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왕궁과는 법도가 달라 그곳에선 에이타가 윗사람이 아니었으니, 딱히 가는 길을 막고 선 수호사제들을 물릴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신궁을 지배하는 대사제의 명령이라고 했다. 카와니시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함구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고, 다만 아직 몸에 열이 펄펄 끓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에이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인세의 독 같은 건 신력을 가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카와니시를 사지로 내몬 것은 에이타 자신이었다. 그래서 종일 죄책감에 시달렸다. 연회에 카와니시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차라리 그 독주를 마시고 죽은 건 자신이어야 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니, 애초에 카와니시와 가깝게 지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대사제가 말했듯 에이타의 존재는 카와니시에게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 신궁에 가선 안 됐다. 카와니시를 만나고 자유와 사랑을 만끽했으나 그건 에이타와 카와니시 모두에게 독이었다. 몰랐어야 했다. 에이타는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왕궁에 남아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그렇게 껍데기처럼 살아야 했다.
자괴감, 자신이 소중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는 죄악감, 이 땅에 저를 낳아놓고 바람처럼 사라진 제 부모를 향한 원망까지 에이타의 끓는 속이 온갖 부정으로 가득 들어찼다. 힘이 없는 것을 자책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제 손으로 지킬 수 없음을 괴로워했다.
“또 거르셨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시라부가 말했다. 에이타는 의자에 앉아 힐끔 시라부를 바라보고는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다 식은 밥과 국을 천으로 덮어두고 시라부가 천천히 다가왔다.
“굶어 죽기라도 할 셈입니까?”
그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려던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 시라부가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시라부는 좋든 싫든 에이타의 호위무사였다. 그랬으니 그의 앞에서 함부로 죽는다는 소릴 하는 것은 시라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만하는 거라고 했다. 어지간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라부가 불 같이 날뛰는 것을 본 이후로 에이타는 그저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에이타는 괴로운 생각을 떨치려 애썼지만 이미 반절은 잠식한 그림자가 끝도 모르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곤 했다.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병든 것이, 그래서 신궁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에이타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카와니시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도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온전히 에이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있는 일일까.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정말 이대로 영원히 카와니시를 마주치지 않는 게 그의 평온한 미래를 위한 길임을 지독히 알고 있었음에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말간 얼굴을 도무지 지울 길이 없다. 자신의 이중성에 치가 다 떨렸다. 반역자로 잡혀 죽는 것이 지금보다 마음은 편했으리라.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도 목숨이라고 카와니시가 부지해준 것이니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상을 내가려는 것을 에이타가 막았다. 시라부는 자리에 우뚝 서서 에이타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식탁 위에 상을 내려놓는다. 데울 것들만 가서 데워오겠다는 시라부를 만류하고 에이타는 수저를 손에 쥐었다. 꾸역꾸역 허기가 지지 않는 뱃속에 먹을 것을 쑤셔 넣는다. 죽지 못해 사는 게 괴로워 늘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럼에도 산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까.”
무형의 송곳이 꽉 들어찬 목구멍 너머로 음식을 삼켜내면서 에이타는 그렇게 말했다. 뾰족한 눈매를 부릅뜨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럼에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닦을 생각도 않고 반찬을 집었다.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음식물을 욱여넣다가 맵게 기침을 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에이타는 손등으로 마구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힘이 있었으면, 내가 더 강했으면 너도 카와니시도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을 거야.”
“…….”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나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 정도는 가졌어야 했는데.”
“……드시고 말씀하세요.”
“나는 왜 여태까지…….”
결국 에이타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소매로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시라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소매에서 면포를 꺼내 에이타에게 내민다. 붉어진 눈으로 하얀 천을 내려다보던 에이타는 팔을 뻗어 시라부의 손을 쥐었다.
“어떻게 하지, 시라부.”
“…….”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강해지세요.”
에이타가 고개를 들었다. 시라부의 단단한 목소리가 귓등을 때려 얼얼했지만 손을 마주잡은 악력에 에이타는 벗어날 수 없었다. 또렷한 시선을 마주보았다. 시라부는 여느 때처럼 단정했지만 그의 눈에는 분함이 일렁였다.
“이런 일로 울지 않도록, 누군가가 상처입어도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모두를 내려다보시면 됩니다. 칼과 활을 다룰 줄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무기를 쓰는 건 모두 나의 몫이니 당신은 내 주군이 된 사람답게 나를 쥐고 휘두르면 됩니다. 대신 절대로 무너지지 마세요. 누가 당신 앞에 서서 위협을 가해도 절대 물러서지 말고 대신 명령하십시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순진하게 타인을 믿어서도 안 되고 방해물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맞서 이 땅을 지배할 군주가 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당신이 나아갈 길 위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흩뿌려지든 염려하지 말고, 그저 하늘만 보고 앞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끝으로 치달을수록 격앙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에이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시라부는 에이타가 답을 내기를 채근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느 저잣거리를 배회하며 장사를 하거나 떠돌면서 광대노릇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먹고 살기는 팍팍하더라도 그 편이 더 즐겁다고 생각했다. 왕궁에 가당치 않은 신분으로 태어나 팔다리가 잘리고 성대까지 제거되어 있는 듯 없는 듯 필요에 의한 인형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타는 지금의 처지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 소중한 사람 몇몇만 손을 잡고 같이 달아날 수 있기를 바랐을 뿐 피를 뿌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은 잔악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구 내지는 휘두를 수 있는 무기쯤으로 여긴다면 에이타의 두 형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싫어.”
에이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시라부도 카와니시도 에이타에겐 좋은 진구였을 뿐, 한 번도 자신이 소유한 무기라고 여긴 적 없다. 그랬으니 지금 시라부의 ‘강해지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카와니시처럼 나 때문에 위험한 순간에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나로 인해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 하지만 그걸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또 해쳐야 한다면…….”
“…….”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에이타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은 그쳤으나 여전히 그렁그렁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본 채로 시라부는 천천히 에이타의 손을 쥔 악력을 풀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에이타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거면 됐습니다. 나도 당신이 그런 존재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도 카와니시도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세요. 그게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면, 차라리 왕자님을 힘들게 하는 것들에 맞서 싸워요. 혼자가 아니니까 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
“아무도 남지 않더라도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그러니……, 강해지세요.”
늘 목석같은 얼굴로 묵묵히 세미의 곁을 지키던 시라부가 처음으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에이타는 떨리는 숨을 겨우 이었다. 거느리는 사람이 많다고 그것이 전부 자신의 힘은 아니다. 그러나 에이타에게는, 단 두 명뿐이어도 세상을 모두 던질 수 있을 만큼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에이지로에게 휘둘리지 마라, 더 이상 무엇도 내주고 싶지 않다면 그에게 맞서라. 시라부는 에이타의 등 뒤를 단단하게 지키고 서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신궁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시라부의 격려로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에이타는 부지런히 왕궁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걸음은 신궁으로 향한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들과는 이미 얼굴까지 텄다. 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에이타가 지겨울 법도 할 텐데 그들은 늘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좋은 점은 아니었다. 냉대와 싸늘한 시선, 한결같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에이타를 바라보는 표정 등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카와니시도 썩 신궁에서 사랑을 받는 인물은 아닌 듯했다.
카와니시는 늘 에이타를 보고 있었다. 그게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점을 차치하고서도 에이타는 카와니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는 늘 에이타에겐 다정하고 따뜻했기 때문에 그가 신궁에서 겪고 있는 나름의 고충도 알려 하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그토록 에이타를 감싸주었는데, 자신과 연고도 없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헌신했는데.
“타이치는 깨어났나요?”
어제와 다르지 않게 신궁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에게 에이타가 그렇게 물었다. 담백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입술을 꾹 닫고 있는 모양새가, 오늘도 어지간히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조바심이 났지만 에이타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생각했다. 생각하다가, 결국 신궁 앞 돌계단 위에 주저앉는다.
“가르쳐줄 때까지 가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건 말건 에이타는 신궁의 문을 등지고 앉았다. 아침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는다.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텅뭉텅 떠다녔다. 이대로 해가 질 때까지 죽치고 있을 생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마음에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보았더니, 문지기 한 명이 사라졌다. 그제야 에이타는 눈치를 챘다. 왕궁에서 온 사람을 내쫓고 싶은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으니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 안에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존재감 없이 살았다고 한들 왕성의 왕자인 자를 내쫓을 만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대체 무슨 무례입니까.”
에이타는 지금을 기회로 여겼다. 대사제는 금빛 자수를 수놓은 흰 무복을 입고 있었다. 카와니시의 말에 따르면 이른 아침 대사제와 신궁의 몇몇 인물들이 모여 조회를 한다고 들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그녀는 이미 그 일을 마친 뒤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낯짝이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군요. 도대체 여긴 무얼 하러 오신 겁니까.”
에이타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비난 섞인 목소리에 위압감까지 서려 도무지 어깨를 펼 수가 없다. 그러나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무례인 것도 알고 그녀의 말대로 뻔뻔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에이타는 카와니시를 위기에 처하게 한 장본인으로서 그의 안위를 확실히 해야 했다.
“……카와니시를, 카와니시의 상태를 보고 싶어 왔습니다.”
“막내 왕자님에 대해서는 늘 좋은 이야기만 들었는데, 하시는 것을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비수가 쏟아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에이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카와니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신궁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토록 카와니시와 깊은 연을 맺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내내 가까이 지내다가 결국 이 사달을 냈으니 입이 열 개여도 에이타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아이를 볼 생각일랑 접고 돌아가시지요. 앞으로도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독주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건 왕자님께서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더는 신궁에 걸음하지 마십시오.”
“나을 수 있습니까?”
에이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물었다. 대사제는 에이타가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신궁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월요의 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 이제 막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 발을 뗀 에이타가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랬으니 최소한, 카와니시가 무사하다는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다. 죽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은 아프더라도 곧 나을 수 있다면 그녀의 말마따나 카와니시를 마음에 품고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습니까, 그 아이.”
에이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에이타가 말하는 ‘예전’이란 그가 카와니시를 만나기 전을 의미한다. 전부 없었던 일로 덮어두려 했다. 시라부는 카와니시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 말했지만, 그렇다고 더는 그를 위험에 빠지게 둘 수는 없다. 에이타는, 도와줄 원군이라곤 달랑 한 명뿐인 나약한 에이타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과 싸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왕자님이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 약조하시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제가 다시 거두겠습니다.”
“…….”
“그러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대사제의 매서운 말이 가슴 속을 쿡쿡 찔러서가 아니라, 적어도 신궁의 비호를 받는 카와니시만큼은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만하면 되었다. 카와니시도 에이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그저 먼 기억 속에 남길 좋은 추억 정도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강하니까.
에이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성장했으니까.
에이타는 감사의 뜻을 담아 대사제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직접 두 눈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욕심이라는 걸 알았기에 부러 다른 뜻은 비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방에 누워 앓고 있을 그 아이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번 생에 다시 만나기는 글렀으니, 우리 다음 생에는 평범한 사람으로 만나 일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눈물이 말라버려서 몸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유감스럽게도 에이타가 머무는 궁 앞에는 에이지로가 제 호위들과 함께 서있었다. 반역을 이유로 에이타를 잡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을 테다. 시라부를 앞에 두고 서서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이타는 저도 모르게 손에 주먹을 쥐었다. 물러서서는 안 된다. 도망쳐서도 안 된다.
에이지로는 연회의 일로 상당히 심기가 뒤틀려있었다. 왕인 에이치가 좋은 기회를 직접 만들어주었음에도 미적지근한 일처리로 그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는 아마도 근래에 왕을 포함한 그의 측근에게 몹쓸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당장 에이타에게 화풀이를 하러 오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으니 그가 그동안 속에 쌓아온 분노의 양은 감히 가늠하기 어렵기까지 했다.
“어쩐 일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그러나 에이타는 다가가서 태연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다. 목소리 끝이 미약하게 떨렸지만 이성을 반쯤 잃은 에이지로는 아마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시라부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타는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밖에서 이야기하긴 모양이 그러니 안으로 드세요.”
“너…….”
“시라부, 들어가 있을 테니 차를 좀 부탁할게.”
에이타가 먼저 호위를 물리니 에이지로도 혼자서 궁 안으로 발을 들인다. 이겨내기 힘든 공포가 슬금슬금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를 거닐어 침묵 속에서 방에 다다를 때까지 에이타는 숨조차 편하게 쉴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문도 모르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폭력에 노출되었던 기억은 아주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서 내내 에이타를 괴롭혀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일 때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의 주범과 단독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에이타에겐 아주 커다란 부담이었다. 어린 시절의 고통과 마주한다. 똑바로 쳐다보고, 더는 당신이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음을 외쳐야 했다.
방안은 고요했다. 아침에 나갈 때에 정리를 마쳐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을 보일 뻔했다. 서둘러 의자에 자리를 마련하고 에이지로를 안내했다. 에이타가 평소와 다른 것을 그도 눈치 채긴 했는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는 조용했다.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던 때와 다르게 차분한 표정으로 에이타를 관찰하는 것이, 마치 다른 속내가 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술, 드셨습니까?”
미미하게 냄새가 났다. 밖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좁은 방안에 들어오고 나니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의 정체가 훨씬 명확해졌다. 그는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에이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픽 웃음을 터뜨린다. 명백하게 멸시의 뜻이 담긴 웃음이었다.
“뭐 믿는 구석이라도 생겼어, 아우님?”
서늘한 음성이다. 에이타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이지로가 묻는 바를 알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모르는 척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것에 비위가 상한 에이지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못 본 사이에 쓸데없이 뻔뻔해졌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탕,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놓여있던 연적이 엎어져 물이 샜다. 에이타는 입 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게 무슨…….”
“어떻게 알았느냔 말이야. 너도 알고 있었지? 그랬으니 시라부를 빼돌린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
에이지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빠르게 뻗은 손끝이 에이타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미처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해 에이타는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뺨을 쥐고 있는 악력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에이타는 뒤늦게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그가 분노에 찬 얼굴로 일갈한다.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술에,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내가 묻는 말은 그게 아니야!”
미는 힘에 에이타는 발을 뒤로 물렸다. 질질 끌려가듯 벽에 뒤통수를 찧고서야 에이지로는 걸음을 멈췄다. 더 피할 곳도 없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에이타가 그의 팔뚝을 매섭게 쳐냈다. 발끝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차오르는 두려움에 호흡이 흐트러진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 에이지로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에이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에이지로가 데려온 호위 무관이었다. 안쪽의 소란을 듣고 심상치 않아 들어온 모양이었다. 시라부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대로 살았다는 생각에 에이타는 뒤늦게 안도했다. 펄떡펄떡 뛰는 맥을 진정시키려 에이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가까스로 말아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스릉, 날카로운 것끼리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에이타의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에이지로는 들어온 무관의 칼자루를 멋대로 뽑아냈다. 그가 당황해서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칼끝은 에이타를 겨냥하고 있었다. 에이지로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른다. 시뻘겋게 물든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목에 가까이 닿은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에이타는 그대로 경직되었다.
“자, 잠시만요, 왕자님. 일단 칼부터 내려놓으시고,”
“‘닥치고 물러서있어. 건드리면 너부터 죽인다.”
살벌한 으름장에 무관이 망설이다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선다. 이가 서로 딱딱 부딪쳤지만 에이타는 떨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시라부 시켜서 형님과 내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그래, 그때 봤던 신궁의 수호사제 그 놈이 한 짓인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너도 내가 우스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에이타가 눈에 띄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시선은 똑바로 에이지로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더 물러설 수 없다. 시라부는 무너지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뒤는 제가 지킬 테니 끝까지 앞을 보고 서있으라고 했다. 에이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제 목덜미를 겨냥하고 있는 칼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손바닥의 여린 피부를 찢었다. 잘 다듬어 은색 광이 빛나는 칼날 위로 핏물이 얇게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손끝의 떨림이 멎었다. 망설임 없이 에이타는 칼날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저를 우습게 보는 것은 형님입니다.”
아프다. 살면서 처음으로 칼에 베여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손바닥이 통째로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라부도, 카와니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새끼가……!”
“그러니 무고한 사람에게 포악을 부리는 것은 그만두시고 들어가서 쉬십시오.”
그가 칼을 뒤로 휘둘렀다. 그 바람에 에이타의 손바닥에서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에이타는 앓는 소리만 냈다. 손바닥이 쓰라리다. 처음 겪는 격통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왕자님. 막내 왕자님께서 다치셨,”
“저리 꺼져!”
에이지로가 에이타의 앞을 막고 선 무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피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얻어맞은 그가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에이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에이지로를 올려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서 에이타의 앞에 선 그에게선 진심으로 살의가 느껴졌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생존에 대한 본능과 맞서야 한다는 의지가 충돌한다. 갈등하는 사이 그의 발끝이 에이타의 턱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에이타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곧장 그의 신발바닥이 피가 흥건한 에이타의 손바닥을 짓밟았다. 잇새로 튀어나오는 비명을 막을 틈도 없었다.
“아악……!”
“신궁에는 그런 놈들이 득시글하다며, 그 수호사제 새끼도 그런 거야? 신력인지 뭐지 하는 것으로 미래라도 봤대? 그래서 지가 직접 나서서 알아서 독주를 마신 거지?”
에이타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에이타는 정면으로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신력은 여인에게만 전승되는 힘이라더니 그것도 아닌가봐. 그래서 그 새끼는 독주를 마시고 내장이 다 녹아서 죽기라도 한 모양이지, 네가 지금 이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카와니시는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몸을 회복해서, 신궁에서 수호사제로 천수를 누리고 살 것이다. 에이타는 있는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피가 울컥울컥 새어나와 바닥을 적신다. 에이지로가 공중으로 치켜든 칼끝이 똑바로 에이타를 노린다. 소란 끝에 바닥을 뒹굴고 있는 깨진 연적의 조각이 가까이에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쥐고 에이타는 제 팔목을 짓밟고 있는 에이지로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비명이 터졌다. 두 사람의 피가 한데 섞였다. 동시에 칼날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이지로가 물러선 틈을 타 에이타는 서둘러 바닥에 놓인 칼자루를 쥐었다. 더 망설이지 않고 에이지로를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갗을 잘라내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왼쪽 어깨부터 흉부 아래까지 베인 에이지로는 그럼에도 살겠다고 악을 썼다. 빨리 에이타를 막지 않고 뭐하느냐며 그는 문간의 호위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금세 입을 다물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한다. 그의 행동이 일순 정지한 틈을 타 에이타는 양손에 칼을 쥐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슴 아래에 저를 지키던 호위무관의 검이 꽂힌 채로 비틀거리던 에이지로가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에이타는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 쳐 그의 죽어가는 몸뚱이에서 멀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 에이타의 등을 받쳐주었다. 에이타는 익숙한 품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얼굴의 시라부가 두 눈에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시라부.”
“늦어서 죄송합니다.”
등 뒤가 고요하다. 에이타는 두려운 눈으로 문간을 바라보았다. 에이지로를 말리려던 무관의 목덜미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다. 뒤늦게 에이타가 헛구역질을 했다. 비로소 피 냄새가 어지럽게 섞여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목격자를 없애야 했습니다. 용서를.”
시라부는 품에서 면포를 꺼내 에이타의 손바닥을 감싸주었다. 피가 그치질 않아 하얀 면포가 금세 붉게 물든다. 정적으로 차게 내려앉은 공간 속으로 시끌벅적 외부인의 소리가 난입했다. 에이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죽였어?”
“…….”
“내가 죽인 거야?”
“왕자님.”
시라부가 차분히 에이타의 등을 다독였다. 에이타는 숨을 헐떡였다.
“그를 죽인 건 왕자님이 아니에요.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시라부는 옅게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괜찮다는 그의 목소리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에이타는 마른 눈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금세 핏물로 가득한 좁은 공간이 인기척으로 가득 찼다. 무어라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에이타는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
'HQ 세미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카와세미] 예자화藝者話 (0) | 2017.12.03 |
|---|---|
| [카와세미] 낡은 일기 10 (0) | 2017.09.06 |
| [카와세미] 여름 헌정곡 (1) | 2017.07.09 |
| [카와세미] 낡은 일기 08 (0) | 2017.07.04 |
| [카와세미] 낡은 일기 07 (0) | 2017.06.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