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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눈이 뜨였다. 밤하늘이 어두운 걸 보니 아직 새벽이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흥건했으니 아마도 지독한 악몽이었을 거라고 생각만 했다. 바로 누운 채로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다가 달빛을 향해 돌아눕는다. 신궁의 벽 위로 높게 뜬 달에 뿌옇게 구름이 끼었다. 커다란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날개가 있었다면 훌쩍 날아 저곳을 넘을 수 있었을 테다. 날개가 없더라도 만들면 될 뿐,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와니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에 들려고 한 것은 아니고, 차라리 현실을 지우면 흐름의 세계가 더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 전부다. 한참을 뒤척이던 카와니시는 결국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갑갑하다. 먹은 게 없는데 속이 더부룩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나갈 수는 없었다. 방문을 수호사제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소에 갈 때도 최소 두 명은 동행해야 했으니 대사제가 작정하고 카와니시를 감금하기로 한 게 틀림없었다. 더욱이 지금 카와니시는 신력을 잃었다. 힘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 통제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세미에 대한 정보, 왕성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카와니시는 하나 아는 게 없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다. 카와니시가 질문해도, 말을 걸거나 심지어는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이 방을 지키는 모두가 꿈쩍을 하지 않았다. 대사제의 명령이겠지, 처음부터 그녀는 카와니시를 완벽히 고립시키려 한 것이다.


창문으로 나갈까. 나간다 한들 도대체 어디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세미를 만나기 전, 대사제의 엄격한 통제와 신궁 사람들의 멸시 어린 시선 아래에서 혼자 고독하게 방에 틀어박혀 흐름을 헤집던 나날들, 너무 어릴 때부터 필요에 의한 상생관계를 깨달아버린, 결코 좋게 기억될 수 없는 시간의 파편들.


카와니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세미를 만나야 했다. 자꾸만 꿈속에서 죽어버린 전생의 세미가 생각나서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안전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세미 에이타는 멀쩡히 잘 살아있다고, 언젠가 신력을 되찾은 카와니시가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시라부와 함께 차분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겨우 정신을 차린 지 이틀 째, 카와니시는 두 다리를 딛고 설 수 있었다. 인체에 치명적인 독에 의해 온몸의 균형이 망가졌음에도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차츰 회복하기 시작했다. 대사제는 하루에 세 번씩 카와니시를 찾았다. 그리고 신력이 돌아왔는지 확인했다. 아직 쓸모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력이 돌아왔다 한들 카와니시는 그녀에게 보고할 생각이 없다. 힘이 돌아오면, 그래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의 눈을 따돌릴 수 있게 되면 당장 이곳을 박차고 나갈 것이다. 나가서, 당장 왕성으로 달려가 세미가 무사한지 확인할 것이다. 무사하다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서둘러 그를 품에 안아볼 것이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길, 에이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꾸역꾸역 차오르는 불길함은 기우이길 바랐다. 신력을 잃었으니 앞날을 느낄 수 있는 예지 역시 막혔으리라. 그러니 지금 카와니시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불길한 일들에 대한 예지가 아니라 그저 카와니시가 인간으로서 세미를 걱정하는 마음일 뿐인 것이다.

 






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또 먹지 않은 게냐.”



대사제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호통을 쳤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카와니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도 먹고 싶어 죽겠어요. 근데 몸이 받질 않는 걸 어떻게 합니까.”

……네 몸뚱이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구나. 그러게 진즉 왕성의 인간들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카와니시가 대사제를 뾰족하게 노려보았다. 키우다 잡아먹을 짐승에게도 저리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신궁은 카와니시에게 감옥과 다름이 없었지만, 세미를 만나 바깥세상의 자유를 누려본 뒤라 평소와 다름없는 억압도 더 괴롭게 느껴졌다. 어서 나가고 싶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태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권력과 공포로 카와니시를 통제해온 이곳에서 발돋움해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그런데도 몸이 축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도 신력 때문인가.”



대사제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카와니시의 진맥을 확인하던 그녀의 주름져 음울한 눈빛이 카와니시를 꿰뚫었다. 어딘지 아니꼬운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내쫓고 싶겠지, 신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신궁의 화포 같은 카와니시의 존재를.



……너도 어지간히 신께 사랑받는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신을 믿지 않는다고 윽박질렀을 테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세미의 안위를 위해 신에게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믿지 않는다며 화를 낸다면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존재하더라도 그가 인세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무형의 존재에게 간절히 빌어야 할 만큼 카와니시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바깥에서 사람이 달려와 대사제를 불렀다. 카와니시는 눈을 모로 뜨고 상황을 살폈다.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은 대사제 측근의 수호사제로,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외부 상황을 살피는 역할을 했다. 그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으므로, 아마 왕성을 포함해 신궁 바깥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대사제의 대답을 듣기 전에 방문이 닫혔다. 잠시 멍청하게 앉아있던 카와니시는 후다닥 달려가 방문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능구렁이 같은 대사제가 이미 자리를 옮긴 것이다. 카와니시는 또 다시 불안해졌다. 비워내고 털어내도 꾸역꾸역 불길함이 들어찼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카와니시 같은 이례적인 존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신이 있다면 분명 카와니시에게 이 같은 힘을 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무엇에 쓰라고 준 것인지 감히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카와니시는 그것을 단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세미를 그렇게 태어나게 해서, 보호자도 없이 오롯이 홀로 폭력을 견뎌내게 했으면 신도 그 정도는 눈감아줄 거라 믿었다. 그러지 못할 신이라면 차라리 필요치 않다. 세월의 흔적과 더불어 모래처럼 바스러져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두 손을 꼭 붙들고 카와니시는 기도했다. 손끝이 달달 떨렸지만 끊임없이 세미의 무사를 기원했다.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렸다. 카와니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흰 자기그릇을 올린 소반을 들고 며칠째 카와니시를 감시하던 수호사제가 들어온다. 담갈색 소반을 바닥에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마지못한 존대로 카와니시에게 말했다.



대사제님께서 내리신 탕약입니다.”

식사도 받지 않는데 탕약이라고,”

드십시오. 드시는 걸 보고 물리라 명령하셨습니다.”



카와니시의 으름장엔 눈 하나 깜짝 않더니 대사제의 명령이라고 유난히 또 끈덕지다. 카와니시는 미간을 모아 있는 힘껏 찡그렸다. 먹어봤자 잠시 후면 다시 게워낼 텐데, 잘 듣지도 않는 탕약은 왜 자꾸 내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사제의 명령인 이상 눈앞의 수호사제는 강제로라도 카와니시에게 저 시커먼 물을 기어코 먹이고 말 것임을 알았기에 카와니시는 얌전히 그릇을 들었다. 깊은 그릇도 아닌데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맣다. 약의 성분조차 모르는데, 몸에 좋은 것이라고 무작정 먹어도 되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대사제가 이대로 카와니시를 내칠 리 없건만,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그녀가 더 이상 쓸모없어진 카와니시를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감초도 넣지 않았는지 탕약은 썼다. 먹다가 뱉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씁쓸한 감각에 카와니시는 인상을 구겼다. 한 모금 들이켜고 잠시 멈췄다. 뜨끈한 약이 몸 안을 도는 게 느껴지고 나서야 카와니시는 그릇을 단번에 비웠다.


소반 위에 팽개치듯 그릇을 내려놓고 꼴도 보기 싫다는 시늉을 하며 문을 닫으려는 찰나 카와니시의 시선에 수호사제 뒤편,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사제들이 걸렸다. 평소와 같다면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으나 카와니시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그들의 복장이었다.


그들은 평소 입지 않는 옷을 입었다. 왕성이나 신궁의 높으신 분들의 장례를 치를 때 입는 예복이었다. 카와니시는 멍청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겨우 경직된 머리를 느리게 굴렸다. 그리고 수호사제가 문을 완전히 닫으려는 찰나, 카와니시는 문틈 사이로 재빠르게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누가 죽었습니까?”



카와니시의 질문에 잠시 멈칫한 수호사제는 주변을 둘러보고 뒤늦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지방 너머를 딛고 서서 미닫이문을 쥔 손에 힘을 준 채로 그가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신경 쓰실 일 아닙니다.”

장례에 쓰는 저 예복을 입을 정도면 신궁에서는 대사제님, 왕궁에서는 왕실의 핏줄 정도 되는 인물이 죽었다는 뜻인데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요?”



가벼운 신경전이었다. 그가 닫으려 힘을 준 미닫이문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앉아서 카와니시는 팔뚝으로 힘껏 문을 밀어내고 있었다. 한동안 허공에 불꽃이 튈 만큼 서로를 노려보던 중 결국 수호사제가 먼저 백기를 든다.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그럼 누가 죽었습니까?”

둘째 왕자가 죽었습니다.”



세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하니 일단은 안심이었으나, 그 뒤에 튀어나온 정갈한 대답에 카와니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둘째 왕자라면 왕성의 핏줄 중 하나로, 선대왕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태어난 세미 에이지로를 가리키는 것일 테다. 수도의 내부 및 외부가 모두 고요했으므로 전쟁이 난 것도 아니거니와 반란이 있을 이유도 없는데 둘째 왕자가 죽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필요를 다했으므로 현왕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음에 이른 것일까. 적잖게 충격을 받은 카와니시에게 수호사제가 덧붙였다.



호위무사 중 하나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호위무사……?”



애석하게도 왕성에 인맥이 없는 카와니시가 호위무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도 아니었으니 확신해선 안 된다. 에이지로는 워낙 평판이 나쁜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학대를 받던 누군가가 홧김에 칼을 뽑아 그의 심장을 찔렀다는 가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시라부 켄지로가 저지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하필 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그저 카와니시의 기우일 뿐인 셈이다.


시라부는 꿋꿋하게 에이지로의 폭력을 견딘 사람이다. 외부의 공포에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가 갑자기 분노로 에이지로를 베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가설이 카와니시의 머릿속을 스친다. 에이지로가 주먹을 휘두른 대상이 시라부가 아니라 세미였다면. 시라부가 보는 앞에서 세미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그를 죽음 가까이까지 몰고 갔다면.


답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카와니시는 점차 불안에 잠긴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세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다.

 






*






 

참변이었다. 둘째 왕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던 왕성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혹자들은 모여서 언젠가 그렇게 비명횡사할 줄 알았다며 수군거렸다. 생전에 심보를 그리 고약하게 썼으니 가는 길에 진심으로 애도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그의 죽음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에이타의 이름은 없었다.


에이타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와니시가 죽을 위기를 겪었을 때처럼 절망하며 주저앉지는 않았다. 시라부가 에이타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금부에 잡혀간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나약한 주군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자를 위해 희생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시라부 켄지로는 에이타에게 칼을 휘둘렀던 둘째 왕자를 저지하려다 그를 죽였다.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가의 핏줄을 고작 호위무사 따위가 살해했으니 시라부는 당장 극형에 처해져도 모자랄 극악무도한 범죄자였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참형을 내리지 않았다. 금부 지하의 싸늘한 옥에 팔다리를 묶어 처박아놓았을 뿐이다.


에이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눈앞이 캄캄하더라도 왕의 집무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가 끝나고도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일국의 왕을 알현하는 자리였지만 에이치를 만나러 가는 내내 누구도 에이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아마 에이타가 방문할 것을 예지한 왕이 미리 길을 터두었으리라. 그렇다면 에이타가 여기에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도 그는 알고 있을 거였다. 얘기가 빠를 것이다. 왕은 에이타와 거래를 하려 했다.


선왕이 죽고 왕좌를 꿰찬 에이치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두 동생들은 은근하게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빌미로 에이지로를 죽이고, 그 죄를 에이타에게 뒤집어씌워 두 사람을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을 했다. 카와니시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되었을 터다. 그러나 에이지로는 살았고, 에이타에게 어떤 죄도 물을 수 없었으니 이 땅에 군림하고 있는 왕은 최근에 그 일로 근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던 와중에 세미 에이타의 호위인 시라부 켄지로가 눈엣가시였던 자를 죽여 버렸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영리하지만 잔악한 제 첫째 형의 부름에 그러나 에이타는 기꺼이 응수할 생각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무실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에이치는 붓을 들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각지에서 모인 상소문이 그득히 쌓여있다. 오전에 회의를 마치고 잡무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최근 국경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무력 충돌 때문에 그 역시 대외적으로 골치를 앓고 있을 거였다.



……제가 찾아올 것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나에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단다.”

…….”

네 소중한 친우처럼 말이지.”



에이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는다. 그가 카와니시의 능력에 대해 알 리 없다. 신력이란 대대로 여성에게 전승되는 힘이었고, 무엇보다 그 실체를 왕성의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본 일이 없다. 왕은 지금 에이타를 떠보고 있는 것이었다. 카와니시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에이타는 침묵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니.”



왕은 절대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에이타가 이곳까지 찾아온 연유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끝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에이타의 입으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꺼내게 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수 싸움에 능하다. 그리고 권력도 지녔다. 그 간극은 에이타가 백날을 뛰어봐야 메울 수 없을 게 훤했다.



……시라부를 풀어주세요.”

왕족을 죽인 극악무도한 자를 풀어달라니, 너답지 않은 부탁이다.”

아시지 않습니까. 둘째 형님을 죽인 건 그가 아니에요.”

에이지로의 호위를 죽인 건 그 자가 맞지.”

제가 그랬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왕의 눈썹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아마도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일 것이다. 에이타는 주저하지 않았다. 시라부를 살려내고, 반역의 중심에 서서 화형을 당하든 참형을 당하든 그렇게 세상을 떠나면 될 일이다. 더 이상 이승에 미련도 없었다. 다만, 끝내 카와니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예전부터 에이지로는 널 괴롭혔지, 내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

그래서 죽였니?”



왕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아우가 죽었음에도, 에이타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담담한 목소리에 속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일이 틀어져버려서 골치가 아팠는데, 네가 그 애를 죽여준 덕분에 더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어졌어. 네겐 감사하고 있다.”

……그러면.”

시라부 켄지로라고 했지. 네가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겠다면 그 아이는 풀어주겠다. 신궁의 그 수호사제도 내 기꺼이 아량을 베풀어 기이한 힘을 가진 것을 눈감아주도록 하지.”



에이타의 어깨가 떨렸다. 왕이 뱉은 마지막 말은 예상치 못한 대꾸였기 때문이다. 그가 카와니시의 힘에 대해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왕성에서 그 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에이타뿐이고 에이타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심지어 시라부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동시에 에이타는 속으로 안도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에이타에게 이 정도의 거래 조건이라면 거절할 명분이 없다. 시라부를 살리고, 설사 왕이 카와니시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카와니시도 왕성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기만 하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더 살아도 쓸모없을 인생을 바쳐 두 사람을 살려낸다면, 그것으로 에이타는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다. 신궁은 월요의 왕성을 기만한 죄로 모두 불타 사라질 것이야. 한 명도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니, 네 소중한 친우에게도 변을 피하라고 사전에 알려두는 것이 좋겠지.”

……폐하!”

여기까지가 내가 너를 위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이야. 그 이상을 바란다면 전부 네 길동무로 만들어줄 생각이니 더 입을 열지 말거라.”



짙은 위협이 담긴 목소리에 에이타는 입을 다물었다. 월요의 왕은 충분히 그만한 힘이 있었다. 에이타를 살인 및 역모의 주도자로 위장시켜 사형을 고하고,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둘을 살려주는 것도 그의 말마따나 그가 베푼 자비였다. 에이타는 망설였다. 카와니시가 살아갈 곳, 대사제와 신궁의 비호 아래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야 할 터전이 사라진다. 신궁이 없으니 더 이상 수도에도 머물 수 없을 테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왕과 에이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랬으니 어쨌든 살아남기만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디에서든 그는 잘 살 수 있으리라.


에이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 카와니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스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우울하고 슬픈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인연이 있어 잠시나마 행복했다.


……그거면 됐다. 각오는 충분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시라부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에이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자의로 이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것이다. 왕의 부름에 바깥에서 달려온 무관들이 곧장 에이타를 둘러쌌다. 에이타는 순순히 제 팔을 내민다. 붉은 오라가 채워지고 왕의 명령에 따라 바깥으로 끌려가는 내내, 에이타는 웃고 있었다.

 






*

 






왕의 수하들과 동행한 시라부가 에이타를 찾은 것은 늦은 새벽 무렵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단정한 자세로 창살 안에 앉아 에이타는 시라부를 맞았다. 그를 추포하던 도중 생긴 뺨의 상처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에이타는 그를 향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예상했던 대로 시라부는 에이타를 질책했다. 뒤는 자신이 지킬 테니 무너지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음에도 결국 에이타가 내린 결정에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해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에이타가 왕을 상대로 시라부를 구출할 수 있는 정공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에이타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이건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은 내 선택이야.”

누가 이딴 선택을……!”

네가 말한 방법대로라면 내가 강해질 길은 없어, 시라부.”

…….”

그러니까 존중해줘. 이게 내가 너희를 지키는 방식이야.”



시라부가 얼굴을 구겼다. 형편없이 벌어진 입으로 무어라 말을 이어보려다 그마저도 포기하고 시라부는 에이타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의 무릎이 닳았다. 짧은 시간이어도 이런 곳에 갇혀있었다면 몸이 멀쩡할 리 없다. 에이타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돌아가서 식사부터 챙겨.”

……지켜달라고 한 적 없잖아요.”



애끓는 목소리였다. 시라부는 있는 힘껏 울분을 참아내고 있었다. 에이타는 제 대신 무너지는 호위이자 친구의 눈물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앞에 있는 게 죽음이더라도 끝까지 하늘을 바라보기로 약조했다.



그런데 왜…….”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권력도 재력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끼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에이타는 더는 사과하지 않았다. 시라부도 입을 다문 채 창살을 붙들고서 바닥만 노려보았다. 이유를 물어도, 그 대답이 시라부가 엊그제 했던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서, 시라부. 카와니시한테 가서 전해줘. 꼭 신궁을 벗어나서, 수도를 떠나서 자유롭게 살라고.”



직접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설령 카와니시가 몸을 회복해 의식을 차렸다고 한들 대사제의 엄격한 감시 하에 두 번 다시 신궁 바깥의 땅을 밟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저, 시라부가 카와니시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면 카와니시가 언젠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돌아봐줄 거라고 믿었다. 그에겐 특별한 힘이 있으니까. 그가 아파하는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이다.



, 이제.”

고마워하지 않을 겁니다.”

, 괜찮아.”

하나도 안 고마워요.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고요.”

원망해도 좋아.”



고개를 들어 에이타를 바라보던 시라부가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네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리다 발걸음을 떼었다.


시라부가 떠나고 나서야 에이타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오래 앉아있기는 영 불편했지만, 그래도 짚더미라도 있으니 몸을 뉘일 수는 있어 다행이었다. 부스럭대며 편한 자리를 찾아 어깨를 이리저리 뒤챘다. 겨우 자리를 잡고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작게 창문을 뚫어놓은 틈으로 달빛이 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하던 짓을 한다더니, 그걸 보고 어쩌다 웃음이 터졌다.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왕은 직접 칙령을 내려 에이지로의 살해범인 세미 에이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왕족이었음을 감안해 참형은 면했으나, 어쨌든 며칠 내에 죽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게 두렵지 않다. 에이지로를 눈앞에 두고 그가 겨눈 칼날을 마주했을 때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는데, 코앞에 닥친 죽음은 언제나 염두에 뒀던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당일이 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당장 잠에 드는 데에 방해가 될 것 같진 않았으므로 에이타는 안도했다.


그래도 네가 있어 살 만한 인생이었다. 에이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음에는 꼭 강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함께 살아남아 너를 지켜줄 것이다. 강한 염원을 담으면 신이 이루어준다고 했으니, 나는 네가 믿지 않는 신에게 그렇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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