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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일 카와세미 교류회 '꽃가루 주의보'에 발간된 배포용 글입니다.
*게이샤 카와니시의 이야기.
예자화藝者話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나는 두 해 전 처음으로 나를 지명한 귀부인의 댁에 간 일을 기억한다.
유곽에서의 정식 교육 과정을 마치고도 보통은 한 달 길면 세 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게이샤의 운명 치고 나는 시일이 빨랐다. 그랬으므로, 아직도 당시 선망의 눈으로 나를 보던 동기들의 얼굴이 선하다. 네 얼굴 반반한 건 알았지만 그렇게 높으신 부인에게 불려가다니 네 놈 운이 참 좋다. 대모의 애정을 담뿍 받던 한 동기 아이가 그리 말했었다. 그러게. 나는 별 생각 없이 마르게 웃었다. 지명이란 이곳 유곽의 모두가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이었지만 글쎄, 나는 감흥이 없었다. 예술인으로 포장한다 한들 그것은 유곽을 지배하는 몇몇 오이란에 한한 것이었고, 결국엔 나이 많은 귀부인들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창기일 뿐이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이 혹자들의 말대로 얼굴만 반반하고, 몸이 좀 예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를 지명한 귀부인 댁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는 네 살 아래로, 이 집의 삼대독자라고 했다. 그 댁을 방문하는 세 번의 횟수 동안 어찌나 애지중지 보물처럼 숨겨두었는지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집의 안주인은 나를 집으로 들이는 걸 부끄러워하기는 했는지 내가 그 아이에 대해 물을 때마다 엄한 목소리로 꾸짖곤 했다. 나와는 태생부터 다르니 섞일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으라는 거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보다 스물두 살이 어린 게이샤를 돈으로 사서 밤일이나 하는 주제에 양반인 척하느라 용을 쓴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보이기 싫었겠지. 바깥양반이 집을 비운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일을 숨기기 위해 시비들의 입을 철저하게 단속할 만큼 치밀한 여자였으니까.
내가 집에서 어떤 시선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에이타가 학당에 가기 싫어해.”
“왜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아. 제 아버지처럼 무인이라도 되려는지 통 붓을 쥐지 않네.”
그녀는 지아비의 직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인이라고 상시 검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 텐데―전쟁 중이 아닌 이상―그녀는 항상 그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꼭 과부 같았다. 집을 자주 비우는 양반이라 이 집의 관리는 거의 그녀의 몫이었으므로 아들의 교육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무인을 곱게 보지 않았으니 그녀의 희망대로라면 이 집의 하나뿐인 아들은 아마 문관이 될 것이었다.
“에이타가 일곱 살 때 쓴 시가 있어. 나는 그 애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은가 봐.”
그녀는 무력하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이를 먹어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위로 입 맞추며 나는 힐끔 벌어진 문틈을 바라보았다. 언뜻 또랑또랑한 구슬 같은 게 비쳤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어린애는 기척을 숨길 줄 모른다. 그리고 이 집의 어린아이는 딱 한 명이었다.
대작은 애초에 끝나있었다. 발그레한 볼을 올려 웃던 그녀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졸았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등허리를 다독이다가 이부자리 위로 뉘였다. 슬슬 가볼 시간이었다.
“다음에 부르시면 책이라도 가져올게요. 도련님께서 글을 좋아하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테니.”
“타이치.”
내 남편이 너만큼이라도 아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좋았을 걸.
그녀는 푸념하듯 말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싱긋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어진 앞섶을 여미고 그 위로 오비를 두른다. 도톰한 하오리를 걸치고 갈 채비를 마치니 문 바깥에서 푸다닥 작은 동물이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게다를 꿰어 신고 서서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도련님은 어떤 책이 좋으십니까.”
바깥은 어두웠다. 구름에 가려 은근한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선들선들 부는 찬바람에 이따금씩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멀찌감치 서있는 기둥 뒤에서 아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아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꽤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세미 에이타는 똑똑하다. 학당에 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곳이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어서, 그런 단순한 이유일 게 분명할 정도로. 시비들의 이야기를 건너말로 듣자하니 그는 독서를 즐긴다고 했다. 고작 열네 살짜리가.
“이런 일을 하면 느는 건 눈치밖에 없거든요.”
나는 그를 바라보고 빙긋 웃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반쯤 숨기고 그 아이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 나도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드러난 머리끝이 불에 탄 것처럼 어두웠다. 붉은 기가 빠진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달빛을 반사해 희게 반짝였다. 초겨울이라 쌀쌀할 텐데 가벼운 유카타 한 장만 걸친 몸은 아직 덜 자랐음에도 퍽 부드러운 곡선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무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아이는 따뜻한 실내에서 붓을 들고 고풍스러운 시를 쓴다든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림책도 가지고 있어요?”
“유곽에서 받은 것들 전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도 게이샤가 갖춰야 할 소양 중 하나이니 물론 있지요.”
“……빌려줄 수 있어요?”
의외였다. 흔히 학당에서 배우는 고리타분한 학문 내지는 양반들이 향유한다는 고급 문학을 원할 줄 알았는데. 하기야 고작 열네 살짜리에겐 그림책이 더 어울릴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 아니고 화조도니 초충도니, 양반들이 보고 좋아할 것들이 가득한 책이었으므로 아마도 교양이 있을 아이에겐 적당할 터였다.
“부인께서는 그림책을 사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제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고 그래요. 예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아이는 비로소 아이처럼 우물쭈물 거렸다. 제 어미에게 들킨다면 호되게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란 걸 자각하고는 있는지 부탁하는 말끝을 여리게 흐렸다. 물론 그럴 경우 혼이 날 사람은 또 있다.
“가져다드릴게요. 대신 비밀로.”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대답 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강아지 같은 얼굴로 손을 홰홰 내저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작아 보이는 손가락이 서툴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 판판한 가슴 아래 스친 두근거림이 분명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 지명한 세미 가의 귀부인을 시작으로 유곽에서는 ‘타이치’를 찾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졌다. 동기 아이들 중에서는 가장 지명도가 높았다. 벌어오는 돈의 액수로 가치를 판단하는 유곽에서 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대모의 관심도 유곽을 대표하는 오이란의 흥미도 나를 향했다. 내게 오는 옷들의 재질부터 장신구, 대작을 위해 내놓는 술과 다과들까지 처음과는 사뭇 질이 달랐다. 고정적으로 유곽을 찾아오는 물주들이 많아졌다. 고작 두 달 사이 물질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풍요로워졌지만 반대로 내 정신은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었다.
그들은 탁했다. 말투도 목소리도 생각도 전부 흙먼지가 가득한 물웅덩이 같아서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나도 더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유쾌할 리 없다. 밑바닥에 닿을수록 끝없는 나락만이 펼쳐졌다.
자연스럽게 외부 지명에는 나갈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내게 들어오는 외부 지명은 그 귀부인 댁 딱 하나였으므로 사실 그리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퍽 마음에 든 것 같았으나, 내가 바쁜 것을 핑계로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곽까지 찾아와 너한테 얼마를 썼느니, 네가 나한테 그래선 안 되느니 하는 구닥다리 설교는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명망 있는 가문의 며느리라 소위 말하는 체통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 집에 자주 오지 않네요.”
다만 그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청에 쭈그리고 앉아 에이타가 그렇게 말했다. 칠일에 한 번 꼴로 찾던 집을 달에 한 번 찾으니 그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섬돌에서 신을 신다 나는 우뚝 멈춰서 그의 옆에 풀썩 앉았다.
아이는 빨리 큰다. 그 새 어깨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 말간 젖살이 빠지기 시작하면 얼굴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선이 분명해지면 인상이 더 또렷해질 것이고, 눈꺼풀이 얇고 눈이 가로로 길었으므로 뾰족하게 빚은 콧대와 어울려 제 어미를 똑 닮은 미색이 될 터였다.
아이는 어렸음에도 아름다웠다.
“내가 자주 오지 않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왜요?”
“게이샤니까요.”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이었다. 에이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와니시는 내가 익히 들었던 것들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에요.”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뿐이겠지. 나는 실소했다. 내가 오는 날이면 밤새 그녀의 침소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어린애 주제에.
“어떤 면에서?”
나는 비꼬는 투로 그렇게 툭 던졌다. 에이타는 말문이 막힌 듯하다. 가끔 책이나 가져다주며 몇 마디 나눴던 것으로 나를 긍정적으로 판단하기에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또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고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입을 오므리고 우물거리다가 에이타가 이윽고 말문을 텄다.
“나를 어린애로도 어른으로도 보지 않으니까요.”
“…….”
“어머니에게도 그랬죠. 내내 두 분의 대화를 엿들은 건 죄송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오로지 어머니로 대하는 건 카와니시뿐이었어요.”
에이타는 퍽 어른스럽다. 생각이 깊고 눈빛은 총명하고 말은 섬세하며 다정했다. 나는 그저 게이샤로 사는 법을 배웠을 뿐인데, 에이타는 예술가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는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부드럽게 감쌀 줄 알았다. 조곤조곤 작은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혹여 그 말로 속이 상하진 않을지 걱정하는 맘이 눈빛에 그렁그렁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 아이에게, 에이타에게 빠져버렸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도련님의 어머니에게 나를 부를만한 돈과 권력이 없었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순전히 돈의 액수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뿌듯한 인생은 아닙니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좋잖아요. 지키지도 못할 규율을 내세우고 결국 허울뿐인 양반이란 이름엔 이미 넌더리가 났습니다.”
에이타는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하루는 대모가 나를 불렀다. 내가 게이샤로서 눈에 띄게 성장한 이후로는 종종 그녀와 조촐하게 술상을 잡았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아직 어린 시비의 종종걸음을 쫓아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대모는 내실에서 화분을 돌보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에요?”
“네가 교육생을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지?”
“세 달 조금 더 됐습니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용케 여기까지 해내는 구나.”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녀는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유곽을 지배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일개 게이샤인 나에게 말하기 꺼릴 것이 있으랴 싶었다.
“처음 너를 데려왔을 때는 그저 나이 먹은 노인네들이나 근근이 상대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애티를 벗으니 확실히 사람을 홀릴 줄 알게 되었어.”
“사설은 그쯤 하고, 부른 이유가 뭡니까.”
“그 집엔 이제 그만 가거라. 너는 더 이상 부르면 달려갈 만큼 몸값이 가벼운 게이샤가 아니다.”
“언제는 중요한 물주니 꼭 붙들고 있으라면서?”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나를 그 집 안주인에게 소개해준 것은 대모였다. 귀중한 기회이니 허투루 보내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끼얹던 사람이었다. 계급이 높은 게이샤일수록 새장 안의 새처럼 유곽에 얌전히 앉아 손님을 맞는 것은 공공연한 이곳의 규칙이다. 고작 두 달 새에 동기들의 수익을 모조리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번 내게 그러한 변화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으나 나는 단박에 대모의 말에서 송곳 같은 것을 집어내었다. 그 집 안주인도 꽤 높은 지위의 사람이다.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곽의 사정은 단순히 유곽 안의 일들로만 꾸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소위 높으신 양반들의 정치적 견해가 필연적으로 개입되었다. 그래서 유곽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노라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정계 이야기를 듣게 되기 일쑤였다. 흉흉한 소문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그건 비단 소문뿐이 아니었는지 피 냄새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정말로 다음 날 누군가가 은밀히 죽어나가곤 했다. 물론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유곽의 모든 사람들은 손님이 술김에 한 이야기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무엇을 들었든 떠벌리고 다녀선 안 되었다. 입이 가벼우면 요절한다. 유곽 교육생들이 숙지하는 첫 번째 규율이다.
예의 그 귀부인도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섞인 손님이었다. 그에게 발을 끊으라 하는 것은 그 정치적 목적이 수명을 다했음을 뜻했다. 아니면 그들과의 교류를 완벽하게 끊어야만 했던 모종의 이유가 있었거나.
모종의 이유란 단순했다. 조만간 왕도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참 재미없지, 정치놀음이란.”
나는 환멸에 휩싸여 매운 웃음을 지었다. 대모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마지막 지명은 이왕 받은 것이니 다녀올게요.”
내실을 나서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까맣게 암전된 화선지 위로 먹물이 번지듯 에이타의 얼굴이 퍼졌다.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 속에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불 위에서 부스럭거리던 그녀가 내 어깨를 밀쳐내고 말했다. 에이타를 닮아 뽀얀 뺨은 혈색 없이 창백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노닐 듯 쓰다듬다가 나는 늘 그렇듯 모르는 체 웃어보였다.
“왜요?”
“그 능구렁이 같은 할멈한테 못 들었니? 이쪽은 이미 버려진 패야.”
“…….”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너를 더 이상 내게 보낼 리 없지.”
그녀가 비아냥댔다. 매섭게 말아 올린 입 꼬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가니 미간 주름이 더 도드라졌다. 세월을 함빡 머금은 얼굴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하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헐렁한 유카타 밖으로 드러난 내 쇄골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이내 이불 속으로 파묻히듯 숨어버렸다. 가까스로 열이 오르던 찰나에 팍 김이 샜다.
“이만 돌아가.”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나는 너희가 싫어.”
습도 높은 목소리다. 그녀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다 늙고 구부러졌어도 사람은 사람이다. 텅 빈 집안을 지아비 대신 지켜온 무수한 세월, 아들과 독수공방했을 그녀는 분명 여기저기 상처 입었을 터다. 자식이라고 다를까. 에이타도 말간 얼굴을 한 꺼풀 들춰내면 분명 눈물이 엉망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리라.
방을 밝히던 촛불이 부러 끄지 않았음에도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결에 훅 사라졌다. 곧장 어둠과 냉기가 찾아든다. 나는 우두커니 그녀의 침구 옆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지막 인사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 거였으므로, 나는 잠자코 방을 나오기로 한다.
걸음이 죽죽 늘어졌다. 사랑이고 운명이고 다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이며 짧고 변덕스런 봄 날씨처럼 지랄 맞은 것이니 누굴 보아도 목석처럼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는 대모의 가르침은 뼈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랬으니 게이샤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는 것은 곧 약점이었다. 그랬는데, 처음으로 이 집을 나서는 게 못내 아쉬웠다.
부러 섬돌을 앞에 두고 앉아 뭉그적댔음에도 에이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미 잠에 들었을까. 빌려준 서책들은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는데. 어차피 다시 꺼내볼 것들도 아닌데 머릿속은 자꾸만 핑계거리를 찾는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뇌에 가까운 교육생 시절의 가르침은 그런 종류의 감정에 구역질마저 나게 했다.
“……구질구질하네.”
결국 나는 게다를 신고 일어섰다. 비라도 내렸으면 처량하기라도 했을 텐데 달빛이 훤히 다 보일 만큼 하늘이 맑다.
“이제 안 와요?”
에이타는 조금 늦게 나타났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망설이던 걸음이 확신에 차서 후다닥 달려왔다. 나는 그 발자국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신발에 모래가 그득 묻었다. 내 앞에 나타날까 말까, 내내 망설였을 고된 시간이 생생하게 보였다.
에이타의 손에는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그동안 내가 빌려줬던 서책을 감싼 것이리라. 그도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닐까.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핑계를 찾았다면 역시 그것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다.
“부인께서 안 부르시면 안 옵니다.”
“……책, 잘 봤어요.”
돌려주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고 그것을 핑계로 이곳에 찾아올 수 있도록. 그래서 흰 손등이 내미는 보자기를 차마 받지 못했다.
“가져도 괜찮아요.”
“왜…….”
“작별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짙은 눈썹이 팔자로 내려간다. 에이타는 아이답게 솔직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늘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내게 그 다정함은 축복이자 독이다. 나는 다른 것을 하는 대신 손을 뻗어 에이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꽃잎처럼 흐드러진다. 그가 걸친 잿빛 유카타 위로 머리카락 사이를 산란한 빛줄기가 잘게 부서졌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두고 돌아섰다. 희고 말간 얼굴, 그림자가 져 조금 어두운 빛의 눈동자, 붉은 기가 하나도 없는 갈색 머리카락과 조금 헐렁해 가슴 위가 드러나는 유카타, 모래가 묻은 신발, 뚫어져라 내 등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
내가 기억하는 에이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틀 뒤 과연 왕도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몇 사람이 반역을 이유로 붙잡혀 처형되었고 삼대를 멸하라는 천황의 명령에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은 가솔들을 품고 불에 타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 평생 아픈 일이 없던 나는 그 날 이후로 일주일을 앓았다. 성장통이었다.
*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건 시전의 귀퉁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아 거지들이 들끓는 더러운 곳에서였다. 눈앞이 휘청할 만큼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는 초봄의 어귀에서 그 아이는 처음 만났던 겨울의 어느 날처럼 희고 빛났다.
처음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단정한 유카타 대신 다 낡아빠진 넝마를 걸치고, 흙먼지가 묻어 꾀죄죄한 얼굴에는 이따금씩 파리도 꼬였다. 발은 피가 나서 퉁퉁 부은 채였다. 꼴은 그곳 바닥에 널린 여느 거지와 다름없었다. 처참할 만큼 망가진 몰골로 그 아이는 그러나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이 말갛고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점차로 유명해졌다. 대모는 사람이 갑작스레 유명세를 타면 부정이 옮는다고 늘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사실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다. 상대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관계없이 나는 대처를 잘했다. 오로지 내 앞가림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탕발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손님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고 또 필요에 의해서라면 요구되는 것 이상을 해냈다. 그랬으니 내 미래는 진작부터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유곽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던 오이란도 더 이상 나에겐 적수가 아니었다. 어디로 줄을 댈까 고민하던 어린 시절을 거쳐 나는 이제 누군가의 ‘줄’이 된 것이다.
어지간한 권력과 돈이 아니면 나는 유곽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년기를 거쳐 늘씬한 성인으로 자란 나는 대모의 말을 빌리자면 얼굴에 꽃이 피었다. 큰 맘 먹고 한 번 나를 방문한 부인들은 연령에 관계없이 상사병을 앓는다는 괴이한 소문도 퍼졌다. 보기 드문 은은한 금발, 흰 피부와 훤칠한 키, 적당히 마른 몸과 잘 빚어낸 것 같은 매무새는 유곽에서도 독보적인 것이었다.
바깥을 나다닐 때면 늘 호위와 함께 다녔다. 더 이상 낯선 손님들과 잠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되었고 대신 행동과 말에 제약이 생겼다. 더 이상 일개 유곽의 게이샤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천황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돌았을까. 처지는 그 옛날과 많이 바뀌었지만 정작 나는 변한 게 없었다. 열여덟 살, 막 게이샤로 발을 떼던 어린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거지소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저 낯익은 얼굴을 그저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
빗물에 씻겨가듯 묵은 때가 벗겨진다. 곰팡이 냄새가 나던 게 사라지니 비로소 다시 열어볼 마음이 생겼다. 나는 호위를 마다하고 그를 향해 차분히 걸었다. 에이타는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죽은 건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줄곧 나를 보았다. 그 앞에 한쪽 무릎만 꿇은 내가 또렷하게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에이타는 그렁그렁 눈물을 흘렸다.
그때가 열네 살이었으니 지금은 열여덟이 되었겠구나.
기분이 묘했다. 눈앞이 몽롱해서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에이타는 때가 탔다. 순수하고 맑고 고상했던 그 시절의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선물은 잃어버렸겠네.”
여전히 같은 눈이었다.
콧잔등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이슬이 내릴 시간은 아니었으므로 아마 비일 것이다. 나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에이타의 이마를 가려주었다. 어둠을 먹은 낯빛은 한층 색이 짙어졌다. 못 먹어서 살이 빠졌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고운 곡선을 그린다. 귀 밑의 뼈가 도드라져서 턱이 가녀렸다. 매끄럽게 솟은 콧대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입술은, 어린 시절엔 몰랐었던 색을 머금은 채로 꾹 닫혀있다. 예상한 대로, 앳된 허물을 벗은 에이타는 아름다웠다.
나는 에이타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긴 했지만 수염이 없다. 그쯤에서 나는 갈등한다. 에이타를 데려가고 싶다. 그래서 내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데려가선 안 된다. 그곳은 아마 에이타에게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욕망은 도의를 앞선다.
“같이 갈래?”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진다. 모래바닥에는 금세 물웅덩이가 생겼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나는 에이타에게 손을 뻗었다. 뒤늦게 다가온 호위들이 지우산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름 먹은 종이 위로 물방울이 똑똑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앉아있었다. 에이타는 많은 것을 담은 눈으로 그저, 허공에 정지한 내 손끝을 바라보았다.
에이타는 의외로 순순히 따라왔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니 제법 높이가 높아졌다. 영양실조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뼈 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마른 것을 제외하면 자라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자박자박, 쏟아지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리면 등 뒤에서 에이타가 금세 따라붙었다. 나는 그것에 괜히 웃음이 났다.
유곽에 가까워질수록 호위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다고 내 명령도 없이 아이를 내칠 만큼 용감한 놈들도 아니라서 그들은 눈짓으로만 에이타를 살폈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위태로워보였지만 에이타는 유곽까지 걷는 내내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과연 유곽에 발을 들이자마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시비들이 내 뒤를 쫓아오는 에이타를 보고는 화를 내며 내쫓으려 했다. 그를 저지한 건 뒤를 따르던 호위들이었다. 시비들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든다. 대청이 바로 보이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이윽고 에이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묘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맞부딪치는 시선에 망설임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절망도 원망도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을 에이타에게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일까.
오랜만에 만나는, 옛날에 알던 사람. 감상은 딱 그 정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잘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서 내 방으로 보내.”
곁에 있던 시비에게 그렇게 일러두었다. 에이타의 꼴을 한 번, 내 눈치를 한 번 번갈아보던 시비는 주춤거리다가 이내 종종걸음으로 그의 곁을 향해 걸어갔다. 꼬질꼬질 때가 밴 팔뚝을 그녀가 오만상을 하고서 만지려하자 에이타가 손길을 쳐냈다. 단호한 저항이다.
“제가 할게요. 안내만 해주세요.”
오랜만에 듣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톡 건드리면 부러질 듯 가냘팠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덧입혀져 훨씬 단정해졌다. 에이타는 잠자코 시비의 뒤를 따랐다. 오로지 자신을 향해있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갔다. 부모도 잃고 집도 잃고,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상태로 도망치지도 않고 왕도에 눌러앉은 배짱답게 눈빛도 전혀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첫인상은 영락없이 순수한 어린애였다. 일찌감치 이곳으로 굴러들어와 찌들대로 찌든 나와 다르게 귀한 집에서 곱게 자란 깨끗한 사람이었다. 에이타는 보다 끈질겨졌다. 지내던 기와집이 가솔들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진 이후 어떻게 살아남아 그 지옥 같은 사 년을 버텨왔는지 알 방도는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에이타는 생존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고고한 어머니 밑에서 배운 학문도 시를 짓는 법도 그림을 그리는 법도, 그리고 내가 주었던 책들까지 모두.
기분이 묘했다. 낯익은 듯 낯선 뒷모습이 멀어지는 게 마냥 현실 같지 않다. 어린 날의 감상에 젖어 그를 데려온 게 혹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는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앞으로 밀려올 무언가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에이타뿐만이 아니었다.
이 일은 대모의 귀까지 흘러들어갔다. 대모는 단박에 나를 내실로 불러들였다.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태연한 척 그녀의 앞에 섰다. 사 년 전보다 눈가의 주름이 늘어난 그녀는 부쩍 경직된 얼굴로 나를 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대뜸 시전에 나간다 하기에 바람이라도 쐬라고 보내주었더니 어디서 거지를 주워왔다고?”
“말이 좀 이상하네. 대모가 날 보내주고 말고 할 게 있어요?”
“말꼬리 물지 말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데려온 게냐? 거지를 보니 없던 동정심이라도 생겼더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적당히 짜증이 치밀었다는 의미였다. 대모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어 나는 그냥 등을 돌렸다. 어차피 에이타는 내 방으로 올 것이다.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재울 셈이냐?”
“기껏 씻기고 옷까지 입혀놨는데, 흙탕물에 다시 내보낼 리 있습니까.”
“방은 못 준다.”
“됐어요, 내 방에서 재울 테니까.”
대모는 영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유곽의 큰 손들을 여럿 쥐고 있는 내가 대뜸 열여덟 먹은 시전바닥 거지를 데려왔으니 무슨 꿍꿍이인가 싶겠지. 그러나 결코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아이는 사 년 전 숙청된, 내가 처음으로 지명을 받아 나갔던 집안의 외동아들이며 그 옛날의 풋풋한 감상을 잊지 못해 이렇게 데려왔노라고. 그렇게 털어놓았다간 뻔한 대모의 쿠사리를 바가지로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자명했다.
“너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대해선 안 된다.”
“또 그 얘기.”
“네 놈이 안하던 짓을 하니까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지 않느냐.”
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놈의 사사로운 감정, 사랑이니 애정이니 질투니 하는 것들은 진즉에 버렸다. 그게 나에겐 독이 된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에이타에게는 다만……, 동정으로 대하고 있을 뿐이다. 길바닥에 버려져 비를 피할 곳도 없이 웅크리고 앉은 그를 그저 옛정으로 돌볼 생각이 든 것이다.
방문을 열자마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시비와 에이타가 보였다. 불쑥 등장한 나를 보고 시비가 허둥지둥 댔다. 와중에 오비는 말끔하게 잘도 맸다. 깨끗한 유카타를 입고 방 중앙에 서서 에이타는 조용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손짓으로 시비를 물렸다. 방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닫히고, 온전히 우리 둘만 남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 자르니 감춰져있던 이마가 환하게 드러났다. 단정하게 다듬은 눈썹을 따라 횡으로 시선을 옮기면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귀 끝이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넝마에 가깝던 옷은 버리고 새 유카타를 꺼내 입혔더니 제법 잘 어울린다. 특색 있는 무늬도 아니고 이곳의 시비도 입는 단조로운 옷감으로 만든 것이었다. 에이타는 화려한 것보다 이편이 낫다.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할까요.”
“……아까는 아랫것 대하듯 하시더니.”
“…….”
“지금의 저는 사 년 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나는 에이타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었다. 쉽게 생각하면 비꼬는 것이 명확했으나 에이타는 평소보다 잔잔했다. 파동 한 번 일지 않는 멀끔한 얼굴에는 어떠한 비난의 의도도 깃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질문일 뿐이리라.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바깥에는 보는 눈이 많았으니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예전처럼 있고 싶어서요.”
에이타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큰 눈망울에 금세 서리가 얼 것 같다. 눈 밑이 붉었다. 몸을 씻다가 한바탕 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
“던져놓고 보니 질문이 좀 이상하네요.”
“하대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나는 우뚝 멈췄다. 어릴 때보다 더 무거워진 목소리였다.
“어차피 내 윗사람이 될 것 아닙니까.”
에이타는 시종일관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나는 적잖은 자조를 느꼈다. 그는 내 목적을 오해하고 있다. 그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에 내게 아무런 생각이 없었음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여기는 유곽이다. 왕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정계에까지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는 게이샤들의 천국이다.
“……어떤 일이든, 어떤 수업이든 전부 해낼 테니 걱정은 마세요.”
“나는…….”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도 듣지 않겠습니다.”
에이타는 내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내 욕망에서 비롯된 일임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유곽 내 규율은 엄격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학문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곁에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에이타에겐 그럴 의지가 없었다.
……에이타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 하고 있었다.
고지식한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왕도를 자유롭게 드나들고 누구의 방해도 없이 고고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양반 댁 장남이 아니었다. 어설픈 고집이었고 독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안다.
“……쉬고 있어. 다시 올 테니.”
“카와니시.”
나는 무력하게 등을 돌렸다. 에이타가 붙잡지 않았다면 당장 문을 박차고 후원으로 나갔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춘다.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문을 닫았다. 허망하게 서서 나는 어디에 갈 생각도 못하고 덩그러니 있었다. 그가 나에게 고마울 리, 없었다.
에이타에겐 호의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그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에이타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를 다시 만났음에도 아무런 감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은근히 그의 생존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렇게도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다. 좀 더 높은 사람이 되면, 왕도의 모두가 이름을 들으면 감탄하고 고개를 조아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면 뒤늦게라도 에이타를 만나서 보호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에이타는 모든 걸 잃고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조에 따라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갈 사람이란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를 사람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깊은 나락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다. 그리고 에이타는, 그럼에도 살 길을 마련해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대모에게 알리기로 했다.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척 보기에도 에이타는 아름다웠으므로, 대모는 기꺼이 그를 거둘 것이다.
잠자코 고민하던 나는 비참한 표정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에이타는 그 자리 그대로 인형처럼 서있었다.
교육생들에게 유곽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다. 해야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으며, 이곳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선진들은 대다수가 손이 매웠다. 수련이 있는 날엔 꼭 몇 명이 호되게 두들겨 맞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규율 등을 잘 외지 못하면 회초리 같이 고상한 물건보다 손바닥이 먼저 날아갔다. 그러나 이탈하는 수련생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저마다 절박한 희망을 짊어지고 왔기 때문이다. 탈출구는 없었다. 이곳을 나간다면 그들에겐 주린 배를 움켜쥐고 흙탕물에 뒹굴 미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나는 보료 위에 길게 누워 수련실 안을 무료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었으니 이렇게 농땡이를 치고 있다 한들 누구도 잔소리를 곁들이지 않을 터였다. 내 시선 끝엔 에이타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가 받는 수업은 내가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대모가 멋대로 그의 미래를 결정한 탓이다. 여인들에게도 퍽 인기가 많을 상이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며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며, 거기다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성격까지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높은 양반들이 특히 좋아할 것이라고 대모는 짐짓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쯤해서는 거절해도 좋을 것이건만―내가 뒤를 봐주고 있었으니―에이타는 거절할 줄 몰랐다. 체념에 가까운 수긍이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나를 겨냥한 원망일는지도 모른다.
에이타는 차근차근 수업을 받았다. 원래 똑똑한 머리였으니 배우는 것도 남들보다 빨랐다. 단장하는 것, 옷을 갈아입는 것, 앉는 법과 술을 따르는 법, 게이샤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에이타는 철저하게 습득했다. 목소리도 단정하니 노래는 좀 서툴러도 충분히 순수하게 들렸다. 무인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가무에는 특출했다. 필요에 의해 빙긋 짓는 웃음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은 면이 있어서, 선진들에게 애정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그의 일상에는 내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내 곁에 두고 있었음에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갇혀있는 셈이다.
“보름 후에 열리는 연회에 에이타를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빨리? 배운 지 반 년도 되지 않았는데.”
“꾸준히 지켜봤다면 너도 잘 알 것 아니냐.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나이가 있어 걱정했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해내고 있어. 무엇보다 이미 에이타를 지명한 사람이 있단다.”
담뱃대를 물고 한 번 길게 빨아낸 대모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나는 비스듬하게 앉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반응을 지켜본 그녀가 담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 바닥에선 먼저 기회를 잡는 쪽이 이기는 법이다. 에이타에겐 이곳 아이들이 전부 우러러볼 만큼 좋은 물주가 들어왔어. 절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엔 방 한 칸 내주지 않겠다더니…….”
“뭘 그리 삐딱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에이타를 이곳에 데려온 건 너다, 타이치.”
할 말이 없었다. 이 유곽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에이타와 함께 지내겠다는 건 권력과 돈에 취한 내 오만이었을 것이다. 에이타는 보란 듯이 샤미센을 쥐고 연주에 몰두했다. 퍽 고운 음색이 창밖을 넘어 내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친다. 초연한 얼굴로 줄을 뜯는 손가락 끝에 자꾸 시선이 걸렸다.
“나머지는 네가 가르치겠느냐.”
대모가 불쑥 꺼낸 말에 나는 다시 미간을 구겼다. 그녀가 말한 ‘나머지’란,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한 실습 같은 것이다. 말이 실습이지 결국 손님에게 몸을 상납하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사내의 몸은 여인과 달라 공을 들여 길을 열어야 한다. 역시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었지만 유곽에 오랜 시간 몸을 담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틈 없이 불어 닥친 폭풍에 나는 넋이 나가버렸다.
“……내가 할게요.”
대모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나갔다. 비스듬히 누워있던 허리를 바로세우고 앉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담뱃대를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간 담뱃대 끝에는 미약하게 연기가 남아있었다. 그 속엔 에이타가 보였다.
수업이 끝난 수련실로 가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전부 물렸다.
“옷 갈아입고 곧장 내 방으로 와.”
“무슨 일로……?”
샤미센을 내려놓고 에이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선진에게 말대답을 하면 곧장 뺨을 얻어맞았을 테지만, 에이타와 나는 조금 특별한 관계였으므로 그는 나에게 거리낌 없이 질문하곤 했다.
“대모에게 못 들었나. 보름 후 연회에 나갈 채비를 해야지.”
에이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련 때문에 흐트러진 그의 옷깃을 정돈해주면서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 교육의 마무리는 내가 맡기로 했으니 굳이 수련실로 갈 필요는,”
“싫습니다.”
“…….”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싶어요.”
의외의 대답에 얼이 빠졌다. 여태까지 어떤 고된 수업도 단 한 번 불만을 표출한 적 없이 묵묵히 해내왔던 에이타는 처음으로 간절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를 데려온 장본인인 나에게. 변명을 기다리는 나에게 에이타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 내가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총명하고 또렷한 대답만을 내놓던 에이타는 묵묵부답이다.
“왜 싫은지 묻잖아.”
“…….”
“에이타.”
에이타는 기어코 고개를 푹 숙여 제 발끝만 바라보았다. 나는 갑갑한 기분이 되어 신경질적으로 그의 양 어깨를 손에 쥐었다. 반항이라도 하듯 에이타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타이치에게 그런 것, 배우고 싶지 않아요.”
들려온 대답에 나는 묵직한 돌덩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두고 에이타는 재빠르게 수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금세 황망해졌다. 저절로 마른 웃음이 다 났다. 나에게 그런 것을 배우고 싶지 않다니, 의미가 도통 불분명한 말이지 않은가.
나는 에이타를 이곳에 데려와선 안 되었다. 이곳에서야말로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음을 이제야 안 것이다.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사내의 몸으로 태어나서, 그것도 한때 양반집의 삼대독자였던 자가 쉽게 쌓아온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마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테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며 연회의 일도 손쉽게 수긍했던 에이타는 내게만 그러지 않았다. 내게만은 무엇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첫 번째로 헤어졌던 그 날로 멈춰있었다. 순수하고 맑은 아이였던 에이타와, 그의 어머니를 손님으로 둔 장래 창창한 게이샤였던 나. 에이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간을 지키고자 했다.
연회 전날의 유곽은 언제나 분주하다. 시비들이 일사분란하게 물품을 옮기고 연회에 참석할 게이샤의 치장을 돕는다. 큰 규모의 연회였으므로 참여하게 될 게이샤의 수도 많을 것이다. 개중에는 에이타도 섞여있었다. 예명을 본명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수단이었겠지.
나는 이번 연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 에이타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그도 그것을 아는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그래서 연회 전날 에이타가 날 찾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에이타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긴장을 한 듯하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선보이는 자리였으니, 이제 막 게이샤가 된 졸업생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문을 닫고 우물쭈물하던 에이타는 천천히 걸어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기초 분장은 대강 끝이 나있었다. 피부보다 좀 더 밝은 분을 바르고 눈꼬리에 먹을 칠해 눈매가 더 또렷해졌다. 연지를 부드럽게 발라 뺨은 봉숭아꽃처럼 발그레하다. 아직 입술엔 아무것도 얹은 게 없어 투명했다. 나는 그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무료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한창 바쁠 텐데, 무슨 일이야.”
“좀……, 긴장을 해서.”
“긴장을 푸는 것에 나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실수를 하면 곧장 단두대로 간다는 생각으로 임해. 네 손님들은 그다지 다정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연초를 눌러 담아 불을 붙이니 금세 연기가 났다. 딱히 부드럽게 대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답이 없는 에이타가 그리 초조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에이타는 연회에 나가 그를 지명한 사람과 끝내는 하룻밤을 보내게 될 터였다. 부질없는 미련 같은 것은 가지지 않으려 했다.
“……술 한 잔, 하실래요.”
옆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고 에이타가 애틋하게 웃었다. 나는 눈만 돌려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과는 없었지만 그런 것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으므로 술로 적당했다. 잔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다. 연기에 가려 냄새가 진동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꽤 독한 놈이었다.
“어땠어.”
나는 무심코 물었다.
“마지막 수업은.”
연회가 있기 전 필시 거쳤을 일이다. 나는 못된 심보로 그리 물었다. 그러나 에이타는 저번과 다르게 평온했다. 나를 향해 울먹일 정도로 큰일이었을 텐데, 어쩐지 그는 다 포기한 얼굴이다.
“제게 궁금한 건 그것뿐입니까.”
에이타는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것은 없다. 단지 나는 심사가 단단히 꼬여있을 뿐이었다.
대모가 나에게 에이타의 수련을 제의한 것은 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모두 끊어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그동안은 잔인하리만치 독하게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무르게 흔들리는 것을 아니꼽게 본 까닭이다.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었다. 그걸 막은 게 에이타 본인일 줄은, 그녀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한 번 틀어진 내 심기가 돌아올 리 없었다. 고상한 양반집 아들로 있고 싶은 욕심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것보단 나에게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는 에이타의 속내가 야속했다. 역시 들이는 게 아니었다. 굶어 죽든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다가 맞아죽든, 그에게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섣부른 감정에서 비롯된 행위는 언제나 일을 망친다. 수련생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었음에도 멋대로 입이 트이던 그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견고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내일이면 게이샤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겠지.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네가 그리 결정했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나는 숨을 죽였다. 저절로 말꼬리가 어물어물 흐려진다.
“다만……. 네가 그리 된 게, 꼭 내 탓인 것만 같다.”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알싸한 술 냄새가 코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방금 피워낸 담배 연기와 섞여서 매캐한 것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습관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올라오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다.
잠자코 있던 에이타가 고개를 저으며 운을 뗐다.
“처음 카와니시가 나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 손을 붙잡은 건 나였어요. 당신이 몸담고 있는 곳이 정계의 모든 인사가 두루 모이는 유곽임을 뒤늦게 알고서 눈앞이 아득했지만 그래도 앞장선 등이 믿음직해 가만히 따랐습니다. 무엇보다 누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저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 따름입니다.”
“…….”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오히려 두렵고 무섭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속이어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에이타는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그는 빨갛게 물든 눈알에서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곱게 덧바른 백분 위로 물줄기가 생겼다. 나는 멍하니 에이타를 바라보았다.
“그 불길 속에서도 살아야겠다고, 부모도 집도 전부 배반하고서 발버둥친 것도 타이치가 내게 준 서책들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다 타버리고 재가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살아남았어요. 지금도, 눈앞에 놓인 상황에 앞이 캄캄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타이치가 있어서……. 나를 지나치지 않고 돌아봐준 타이치가 있어서…….”
에이타는 마침내 엉망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필요 이상의 감정을 드러낸 적 없었던 그였다. 조그만 입술을 우물거리며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억지로 입 꼬리를 당겨 웃는 광대뼈가 애처로워 나는 뻗은 손으로 에이타의 턱을 쥐고 당겼다. 말문이 막힌다. 연초와 술 냄새로 불쾌하기 짝이 없던 비강 안에 연한 분내가 스며들었다.
그만 말해도 좋다. 책이 다 타버려도 좋았다. 에이타를 이곳에 데려온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후회스럽다고 자책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값싼 동정이나 지리멸렬하게 남은 옛정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했다.
연회 당일 나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본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일종의 스승 자격으로 제자가 발을 들인 첫 번째 연회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러기엔 야단스럽지 않은 편이 좋아서 호위들은 모두 물렸다. 에이타는 이미 연회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걷기조차 불편한 기모노로 몸을 두껍게 감고, 이전보다 더 두껍고 무거운 화장으로 얼굴을 치장한 채로 연회장에서 샤미센을 연주하고 가무를 할 것이었다.
마음이 바뀐 것은 그저 변덕이었다. 에이타가 다른 사람의 곁에서 생글거리는 낯으로 웃는 꼴을 보기 싫었는데, 사람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라 그마저도 보고 싶어 발이 움직였다. 대모는 내 뜻을 듣고서 짧게 혀를 찼지만, 그런 대규모 연회에서 난장을 피울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내 비공식 참석을 손쉽게 허락했다.
에이타를 지명한 사람은 중앙의 고위관계자였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으로 열 살 어린 부인과 삼 년 전 혼인해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정치인이다. 어쩌다 에이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경로는 알 수 없었으나, 에이타야 은근히 눈에 띄는 외모였으므로 언젠가 유곽을 방문했던 때에 한 번 스치듯 보았으려니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된 이후였다. 나는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난간에 앉아 연회를 구경했다. 처음 게이샤로서 무대에 선 아이들도 많을 텐데 고된 훈련이 소용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연주가 수준급이다. 나는 눈으로 에이타를 찾았다. 오른쪽 가에 그는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샤미센 연주도 소질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그의 종목은 검무인 모양이었다.
에이타는 빈틈이 없었다. 날이 무딘 검을 들고서 동료들과 합을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유연했다. 음악에 맞춘 검무가 끝나고 나서도 술을 따르고 손님의 말동무를 하고, 술에 취한 손님의 거칠 것 없는 손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낸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게이샤였다. 나는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하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언뜻 밝은 곳에서 에이타가 이쪽을 본 것 같았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응시하다가, 나는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그는 다시 유곽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늘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상하게 밤이 조용하다 했다. 일찌감치 유곽으로 돌아가긴 싫어 늦은 밤이었음에도 나는 연회장 주위를 서성였다. 에이타가 들어갔을 방이 어디인지 내심 궁금했던 것도 연유였다. 폭풍전야의 고요를 딛고 나는 모래 위를 자박자박 걸었다. 그렇게 한 바퀴 가까이를 돌았을까, 걸음이 멈춘 것은 누군가의 비명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에 소리를 따라 달려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음이 자명한 상황에서 나는 그 비명과 에이타의 안전이 관계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연회장 근처 곧게 뻗은 좁은 길을 부지런히 달려 끝자락에 있는 방에 닿았다. 복도의 가장자리에 있는 방이었다. 내실과 가까웠으므로 아마 높은 사람이 머물렀을 것이다. 방문은 훤히 열려있고, 그 앞에 무언가 끔찍한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하인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나는 서둘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촛불도 꺼진 채라 어두운 방안에서 시야는 캄캄해졌다. 다만 날카롭게 코를 찌르는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이건, 피였다.
바닥을 물들인 걸쭉한 액체는 분명 선홍색이었다. 아직 체온이 남아 따뜻했다.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당장 고개를 돌렸다. 목에 날카로운 것이 꽂힌 채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사체의 모습에 저절로 구역질이 끓어올랐던 탓이다.
곧장 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연회장과 어울리지 않는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가 침착하게 사체를 복도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사체의 얼굴이 보였다. 눈도 감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것은 분명, 에이타의 손님이었다.
그렇다면 에이타는?
방 안에는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촛불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꺼져있는 것으로 보아 에이타는 이미 이곳에 없는 것이다. 창문이 열려있었다. 이곳은 높이가 높지 않았으므로, 만약 에이타가 이 방에 잠시라도 머물렀다면 그가 도망쳤음을 암시하는 증거였다.
사방이 소란해졌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자리에 서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밤일에 열중하던 높으신 양반들, 그들을 모시던 게이샤들 모두가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금세 관군이 몰려왔다. 이번 일로 죽은 사람이 정계에 깊게 관여되어 있는 고위정치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담당하는 게이샤였던 에이타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방에는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열린 창문, 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 바닥에 깔려있는 도톰한 이불, 이곳의 모든 물건이, 범인으로 에이타를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에이타가 사람을 죽일 이유가 대체 무얼까.
방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두 번째 목격자이자 에이타의 보호자로서 유곽에 들이닥친 관군에게 한바탕 취조를 당하고, 대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쳐온 나는 도무지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을 죽였고, 그 길로 도망쳐선 돌아오지도 않는 것일까. 손님은 다정하지 않고, 따라서 손찌검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모욕적인 말도 거리낌 없이 내뱉을 테니 절대 동요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다 내던지고서?
에이타가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힘껏 머리를 썼다. 그토록 무던한 에이타가 사람을 죽여야 했던 이유, 무리해서 모든 교육을 수료하고 이번 연회에 나와야 했던 이유, 내 앞에서 울었던 이유…….
불현 듯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친다.
에이타는 정계의 암투로 부모와 집을 잃었다. 사 년 전 화재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그가 사람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 고민할 것도 없이 답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나는 당장 방문을 열고 유곽을 나섰다.
에이타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주막이 하나 들어섰다. 꼭두새벽이었으므로 영업을 할 리 없는 주막은 문이 굳게 닫혀 적막했다. 사위가 고요해 걸을 때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나는 긴장했으나 차분한 발걸음으로 주막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기어코, 그토록 찾길 원했던 이를 발견하고야 만다.
벽돌담 아래 웅크리고 앉은 머리꼭지는 분명 에이타의 것이었다. 기척에 놀라 도망갈까 나는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었다. 죽은 듯이 앉아 에이타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혹여 어디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어 나는 두 보 떨어진 거리에 따라서 주저앉았다.
“……속여서 미안해요.”
한참 말이 없다가 에이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꽉 막힌 소리라서 발음이 분명하진 않았지만 그는 나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속이다니 무엇을. 나는 무엇에도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걱정 많이 해줬는데, 이렇게밖에 갚을 도리가 없었어요.”
겨우 에이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말간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는 에이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가 진실로 사람을 죽였고 그 이유가 복수라는 가당치도 않을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적어도 내 몫이 아니다. 에이타를 쫓을 관군들의 몫이었다. 어차피 이 왕도의 모두를 적으로 돌린 그에게, 나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친 데는 없어?”
“……일격으로 죽였으니까. 다만 창밖으로 뛰어내리다 다리를 조금 삐었어요.”
“다행이네.”
“나를 잡으러 왔어요?”
“…….”
“관군에게 넘길 건가요?”
에이타는 슬픈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왕도를 빠져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은, 혹시 내가 찾아오길 기다린 게 아닐까. 관군에 잡혀 사형을 면치 못할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내 손에 붙잡히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에이타가 내 뒤를 따라온 것부터 역시 잘못되었다. 어렸던 아이는 자라서 마음속에 독기를 품었다. 죽을 각오로 수업을 받았고, 무엇이든 배웠고, 어떻게든 제 부모의 죽음과 연관된 자들의 눈에 띄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가 죽인 것은 고작 일부에 불과했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게이샤 하나가 저지를 수 있는 일 치고는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는 성공한 것인가.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자에게 잔혹한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여태까지 걸어온 가시밭길의 의미를 찾은 것일까.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에이타.”
그랬으니, 살면서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너에게 제안한다.
“같이 도망칠까.”
그는 복수를 위해서 나를 따라 유곽에 발을 들였다. 에이타가 그렇게 열심히 나를 밀어냈던 것은 그 어린 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음과 동시에 이번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참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일이다. 어차피 나에게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산길은 밤중에 오르기에 험했다. 하지만 왕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길이 관군에 삼엄한 감시 하에 막혀있었으므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디에 숨어있든 그게 왕도라면 금세 덜미가 잡힐 것이었으므로, 무사히 성 밖으로 나서는 게 우선이었다.
대모가 나에게 미행을 붙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산길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몰려오는 관군의 걸음소리를 듣고 초조해야 했다. 나는 에이타를 붙잡아 끌었다. 잘 닦인 길은 잡히기 십상이었으니 최대한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바쁘게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찢긴 듯 아팠다. 에이타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숨소리가 관군들의 우렁찬 발걸음 소리에 묻히기 직전, 코앞에 놓인 얕은 낭떠러지를 보지 못해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에이타가 다칠까 폭이 넓은 소매로 그를 감싼 채로 몇 바퀴를 굴러 내리다가 단단한 나무 밑동에 부딪쳐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옆구리와 어깨가 욱신거린다. 그러나 아파할 새가 없었다.
금세 잡힐 것이었다. 당장 다른 길을 찾기에 이미 산길은 포위되었을 게 분명하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나를 관군에게 넘겨요.”
에이타가 내 허리를 부둥켜안고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그럴 수 없어.”
“둘 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카와니시는 살아야 해요.”
“이제 와서……?”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절박한 에이타의 목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를 품에 안았다. 오래 달려서 목덜미의 맥이 크게 뛰고 있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그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거친 숨을 가쁘게 내쉬고 뱉던 에이타는 주름이 지도록 내 옷깃을 세게 쥐었다.
“네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든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이용하려거든 끝까지 이용해.”
“……카와니시.”
“나는 네가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너는 내가 만난 이 세상의 것들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었으니까. 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들 중 하나가 사람이 되어 지상에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는 내게 눈부신 존재였으니까. 에이타 너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내가, 치기 어린 사랑 같은 감정에 휘둘리게 된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렇게 치장을 하더니만 사실은 별 것도 아닌데. 안 그래?”
나는 그렇게 자랐기에 더욱 그랬다. 사람을 향한 감정이란 것은 순도에 관계없이 어렵고 힘겨운 것으로만 여겼다. 내가 벌어먹고 사는 데에는 그런 게 하등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일부는 그랬으니까. 직업상 사람을 대하고 대화하는 모든 과정에서조차 건조하리만큼 내 감정을 모조리 빼내야 했다.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내가 마음 편히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마음을 여는 것에 필요한 준비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 낯선 감정으로 인한 내 혼란을 스스로 마음 편히 인정하는 것, 그 용기 있는 한 발만이 내가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사람이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에이타, 너였다.
“에이타.”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한다. 나와는 다르게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니 어딜 가든 분명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좀 가파르지만 절벽을 따라 내려가면 좁은 협곡이 있어. 비가 많이 오지 않았으니 물이 적어서 돌다리가 드러나 있을 거야. 거길 건너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그러면 수도를 벗어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대모는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내가 에이타를 만날 것이라고 믿고 미행을 붙였다. 에이타가 살인범으로 몰린 이상 그를 거둔 장본인인 내가 멀쩡히 빠져나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나는, 버려진 패라는 뜻이다.
옥살이를 하게 되든 처형을 당하든, 어차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거라면 차라리 에이타라도 무사했으면 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이별이다.
“수도를 벗어나면 마을에서 말을 빌려 남쪽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어디든 섬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여기서도 너를 쫓지 않을 테니.”
에이타는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머리카락이며 옷깃에 묻은 나뭇잎들을 떼어주고 나는 그의 등을 툭 밀었다. 한 발자국 밀려난 에이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러기에,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왜.”
에이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울분으로 점철된 얼굴이 보기 힘들어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렸다. 안타까운 손길이 내 소매를 붙들었다. 내치기 힘들었다. 그러나 내쳐야 한다. 에이타가 살 길은 이뿐이었다.
“혼자서는 가지 않을 거예요.”
“…….”
“카와니시, 제발.”
둘이 함께 도망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수도를 벗어나는 것조차 무리일 테다. 내가 잡히고 에이타의 범행을 뒤집어쓰면 적어도 이미 수도를 떠난 그에겐 추적이 붙지 않을 것이었다. 그걸로 족하다. 내가 살아온 인생 모두를 걸어서라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예전에, 너를 그 집에 내버려두고 나온 걸 늘 후회하고 있었어.”
“…….”
“그러니 괜찮다. 어서 가.”
나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내 소매를 붙든 작은 손도 걷어내고 나뭇잎이 그득 쌓인 언덕길을 밟아 올랐다. 관군의 발소리로 귀가 따갑다. 에이타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을 참았다. 애처로운 속울음을 들으며, 나는 한 발자국씩 그에게서 멀어졌다.
횃불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관군이 떼로 몰려온다. 그 찰나의 시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에이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괜히 웃음이 났다. 죽을 때가 되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내가 준 책이 그 불 속에서 너를 살렸다고 했지. 이번엔 내 목숨이 너를 살려낼 것이다.
포박은 순식간이었다. 무릎 안쪽을 후려쳐 바닥에 꿇린 뒤 손목을 뒤로 해 오라를 묶는 것까지 쉴 틈 없는 공세였다. 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에이타의 행방을 물으며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으름장을 놓는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거짓으로 자백했다.
“감히 내가 거둔 아이에게 추근거리기에 내 콱 죽여 버린 것뿐이니 더 이상 놀라 도망친 아이를 찾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희열. 한때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자가 느꼈을 희열을 안다. 그가 나 없이 살아갈 이 세상이, 그의 길이 나를 거름으로 보다 행복해질 것임을 믿었다.
에이타.
모든 게 거짓뿐이었던 이 삶에 유일하게 진실이었던 사람, 부디 살아서, 백발이 하얗게 세고 이가 다 빠진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서, 그저 그렇게 천수를 누려주길.
언제까지고 행복해주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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