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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일기
카와니시 타이치 × 세미 에이타
w. Ryria
그날따라 새벽 공기가 유난히 매서웠다.
겨우 요 며칠 편안히 잠에 드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와니시는 몸을 뒤채다 결국 이불을 걷어찼다. 바깥에서 바람이 웅웅 우는 소리가 어지간히 시끄러웠던 탓이다. 신력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바깥의 흐름들이 카와니시에게 속삭이는 소리일 리도 없건만 나뭇잎 사이를 헤집은 강풍은 가지에 찢길 때마다 끼익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카와니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 창문을 열었다. 아귀가 뻑뻑한 나무 창틀을 힘주어 밀었더니 그 새로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카와니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단 날카로운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동이 터올 시각의 이슬이 타는 냄새는 아니었다. 카와니시는 활짝 열었던 창문을 황급히 당겼다. 공기 사이에 섞여 이질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알았지만 흔히 맡던 냄새는 아니라 카와니시는 그것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비린내다. 날생선이 펄떡일 때마다 나는 냄새는 아니고, 그것을 구웠을 때 나는 고소한 냄새는 더더욱 아니었다. 간밤에 비가 내려 땅이 젖은 냄새, 아니다. 날짐승의 변, 역시 아니다.
피.
그건 분명 피 냄새였다.
산에서 짐승이 내려와 신궁의 축사를 헤집어놓기라도 했을까? 누군가 신궁에서 불길한 의식이라도 몰래 치룬 것일까? 카와니시는 이미 알고 있는 한 가지 답을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런 카와니시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 냄새는 점차로 진해졌다.
사람의 피다.
카와니시는 단박에 창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 잠갔다. 무릎을 굽히고 자리에 낮은 자세로 주저앉아 가만히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 바깥이 지나치게 고요하다. 대사제의 명령으로 카와니시의 빙문은 하루 종일 수호사제가 번갈아가며 지킬 터였다.
모두가 잠든 시간의 정적은 아니었다. 그보다 불길한 느낌이 훌쩍 카와니시의 코를 타고 넘어왔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카와니시는 문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얇은 창호지를 바른 문 위에 귀를 대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수호사제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늘 묵언했으므로.
카와니시는 볼일을 핑계로 방을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기 전 소리를 내어 바깥을 지키고 있을 수호사제를 부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카와니시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간신히 바깥을 확인할 정도로만 문을 열고 한쪽 눈으로 카와니시는 문 밖을 살폈다.
창문을 열었을 때 맡았던 비린내가 여기서도 밀려들어왔다. 긴장 탓에 숨까지 참고 카와니시는 눈동자만 굴려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달빛에 비친 수호사제들의 그림자가 서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차례로 카와니시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말끔한 원목이 빛을 내고 있었다. 괜히 김이 새서 카와니시는 나지막하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짙은 비린내에 어울리는 핏물로 흥건한 방바닥?
그러다 우연찮게 바깥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성을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사람의 비명? 아니, 그보다 더 짧고 둔탁한 무언가. 사람이 죽을 때 내는 단말마의 목소리 같은 것 말이다.
미처 열린 문틈을 닫지 못하고 카와니시는 어둠 속에서 새파란 안광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있던 것은 검은 천 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었으나 맹금류 같았다. 그가 기척 없이 가볍게 걸어 카와니시에게 다가온다. 마치 유령의 발걸음 같았으므로 카와니시는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발끝을 바라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살수와 시선이 얽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카와니시는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문이 사납게 열린다. 방문 안으로 그제야 역겨울 만큼 짙은 피 냄새가 카와니시의 비강을 자극했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둘러 정체도 알 수 없는 살수가 눈앞에 서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력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눈앞의 자객을 물리치고 이곳을 빠져나가기라도 했을 텐데!
손에 쥔 은빛 섬광이 카와니시를 향해 날아든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카와니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목이 베인다거나 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서서히 눈을 떠보았다. 금방이라도 카와니시를 베어버릴 듯 날카로운 칼날을 치켜들었던 살수는 어느새 칼을 거두고 카와니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안도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얼어 살수를 마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살수는 걸음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카와니시의 입에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긴장으로 얼어붙어있던 기도가 뒤늦게 트인 것이다. 그러나 안도감보다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카와니시의 방문을 지키던 수호사제들의 실종도 방금 카와니시가 마주친 살수들의 등장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체불명의 검은 자객들이 신궁의 누군가를 목표로 잠입했다면, 카와니시도 방금 전 그들 손에 죽었어야 옳다.
왜 살았을까. 그는 왜 카와니시를 살려두었을까. 단순히 카와니시가 그들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그렇다 한들 목격자인 카와니시를 그들이 살려둘 이유가 없다. 카와니시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칼을 거둔 것이다.
카와니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고쳐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꺾여 몇 번이나 휘청거려 겨우 벽을 딛고 섰다. 전문 살수들에게는 어떤 무기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으므로 카와니시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거닐었다. 활짝 열린 숙소 방문 안에는 전부 피가 흥건했다. 카와니시가 종종 마주쳤던 수호사제, 신관, 시종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자리에 널브러져있었다. 카와니시는 끔찍한 광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툇마루로 나와 바깥에 펼쳐진 기괴한 광경을 보고서는 결국 헛구역질을 했다.
시체로 산을 쌓았다는 표현은 책에서나 보았다. 그러나 카와니시의 시야에 펼쳐진 둔덕은 분명 시체로 쌓은 산이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 사이로 언뜻 아는 얼굴들이 보였으므로 아마 이 건물에서 자고 있던 신궁의 사람들은 모조리 저곳에 처박혀있는 듯했다. 그제야 불길한 정적을 머리가 이해하기 시작했다. 카와니시는 한참 마룻바닥 위로 얼굴을 박고 구역질을 했다. 침이 질질 흐른 턱을 소매로 닦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카와니시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신궁에 자객이 들었다. 저 정도로 은밀히,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은 자객의 수가 열 손가락으로 채 세지 못할 만큼 많다는 것을 뜻했다. 가능한 일인가. 신궁의 모든 문은 훈련을 받은 수호사제들이 하루 종일 지키고 있다. 신궁 안에서도 그들은 조를 이뤄 불침번을 섰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불온한 침입이 있을 경우 당장 원조를 요청할 수 있도록 불꽃을 피울 작은 봉화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가능한 일인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니 불가능할 것은 또 없다. 그러나 신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와 겁도 없이 신궁의 모든 이를 베어 죽일 수 있을 만한 자객이, 과연 이 나라에 존재했던가. 존재한다면 과연 이를 명한 이는 누구인가.
카와니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이런 대범한 일을 과감히 저지를 인물이라면 이 나라에서 딱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본당으로 향했다. 신궁을 침입한 자들이 조무래기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다면, 신궁의 핵심 인물들이 거주하고 있는 본당이 위험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스스로를 안심시키긴 너무 늦은 뒤였다. 본당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바닥에 쓰러진 수호사제들의 흰 옷이 울긋불긋 물들어있었다. 최대한 시체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카와니시는 본당 입구에 다다랐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기척 없는 본당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본당 중앙, 대사제를 포함한 고위 사제들이 매일 아침 제를 드리는 공간에는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은 인적들이 와글와글했다. 카와니시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본당의 거대한 원형 기둥 뒤로 몸을 숨겨 움직였다. 공동이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뚜렷해진다.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둘 다 누군지 아직 분간이 가지 않는다. 주위가 소란스러운 탓이었다. 카와니시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척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이었다. 온통 하얗고 까만 무리들 사이 우뚝 솟은 등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단번에 카와니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낯설다. 처음 보는 인물인 것 같았다. 그러나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신궁에 침입해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하라 명령한 주인이 바로 저 자다. 카와니시는 조용히 입 안 쪽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카와니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를 내면 들킬 만큼 가까운 거리에 다다라서야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던 사람은 대사제였고, 그에 편안하게 응수하던 사람은 예의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대충 둘러보니 본당에 머무는 모든 신관들이 전부 끌려나온 것 같다. 주위를 포위하듯 빙 둘러싸고 있는 검은 복색의 자객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공포에 질린 얼굴은 하나 같이 허여멀갰다.
두 사람은 싸우고 있었다. 대사제는 이게 대체 무슨 경우 없는 행위냐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내는 귀찮다는 시늉으로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항의에는 조금도 귀 기울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 납작 붙어있는 살수의 손끝, 빨간 피로 물든 칼날이 카와니시에겐 더 걱정이었다. 이유가 있어 이곳에 사람들을 모아둔 것이겠지만, 남자의 뒷모습에선 이곳의 사람들을 살려둘 자비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신력이 돌아온다면.
카와니시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신력을 잘 다루지 못했던 어린 날 손바닥의 여린 피부가 다 까지도록 금빛의 힘을 휘둘렀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에는 마음이 급해서 손이 먼저 나갔다. 지금도 급박한 상황이었으므로 신이 잠시 앗아간 힘을 카와니시에게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서야 한다. 대사제와 다른 신관들이 몰살당할지도 모를 위기였다. 신궁이 무너지고 건국 이래 유지해왔던 두 권력의 경계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월요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카와니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모두를 죽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신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와니시의 몸을 휘감던 금빛 힘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저할 수는 없었으므로, 카와니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대사제의 핏발 선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표정이 일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무어라 말을 하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정적만 흘렀다. 카와니시는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 비스듬히 내려간 입 꼬리 등에서 짙은 비난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놈이구나! 네 놈이 신궁의 모두를 죽음으로 몰았어!”
그녀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본당 공동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카와니시에게 닿았다. 일방적인 힐난의 눈초리였다. 카와니시는 제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일시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등을 돌려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뒤늦게 꾸역꾸역 들어찼다.
“네가 밀고했어! 네 놈이! 이제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그녀는 어린 카와니시를 거뒀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채로 가둬 키웠다.
“어떻게 네가! 짐승만도 못한 놈! 네가 감히 어떻게 이곳을!”
카와니시가 신궁에서 얻은 것들은 끝이 없는 멸시와 비난의 시선들뿐이었다. 이곳에 좀처럼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세미를 만나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했던 것은 아마 여태 자라온 환경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해를 바란 적 없다. 다만, 그저 남들과 똑같이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마침내 카와니시는 귀를 닫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더 이상 카와니시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본당 밖을 향해 달음박질한다. 누구도 뒤를 쫓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카와니시는 그대로 신궁 바깥까지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에서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마침내는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신궁의 두꺼운 담벼락을 지났다. 지나고 나서, 꽉 막혀있던 목구멍이 트이니 드디어 애타는 비명이 터졌다.
새벽 공기는 지나치게 고요한 동시에 맑았다. 그 사이로 스며든 카와니시의 비명은 환희가 아니라 오열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채로 엎드려 카와니시는 소리 내어 울었다. 끈질기게 뒤를 쫓아오는 신궁의 그림자를 떨쳐내려 몇 발자국 더 달리다 결국 다시 멈춰야 했다.
카와니시가 처음으로 신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어느 날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강제로 새장 바깥으로 쫓겨난 작고 어린 새는 날개만 몇 번 퍼덕이다 스러지고 말았다.
*
신궁 참변.
해가 오르고 콧속을 후벼 파던 피 냄새가 조금 가시고 나서야 수도의 장에는 호외가 뿌려졌다. 월요의 백성들에게 신궁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졌으므로 무리가 속속들이 모여 수런거리는 소리 때문에 수도는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왕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신궁이란 신의 뜻을 대변하는 신성한 공간이며, 그곳의 사제들은 신으로부터 받은 기이한 능력으로 앞날을 예지하고 자연재해를 막는다.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실제로 그들이 재해를 막은 적은 없지만, 신궁은 그 자체로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신궁의 모든 사람들이 변을 당했다. 사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신궁에서 일하던 급 낮은 시비들까지 모조리 죽었다. 궁에서 직접 발행한 호외에는 긴장 상태의 옆 나라가 월요를 견제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낸 것 같다는 꽤 치밀한 원인도 적혀있었다. 바닥에 처량히 떨어진 호외를 주워들고 카와니시는 비죽 마른 웃음을 짓는다. 이게 거짓인 걸 알지만 카와니시에겐 거짓을 고칠 힘이 없었다.
아마 이 거짓은 며칠을 못 갈 것이다. 월요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신하들이 눈 닫고 입 닫은 장승들도 아니고, 분명 꺼림칙한 무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달라질 건 없다. 지금 월요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널리 떨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인물이었으니 누군들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목이 날아갈 것이었다.
머지않아 소문이 돌 것이다. 신궁은 잘못된 신앙에 뿌리를 둠으로써 왕실과 백성을 기만했다고 은밀한 풍문이 수도의 장을 타고 흘러 전국으로 퍼질 것이었다. 신궁의 참변을 얼버무릴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역시, 신력을 가진 ‘남자’의 존재와, 사제들이 가졌다는 기이한 힘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진실밖에 없다.
카와니시는 터덜터덜 걸어 후미진 골목길 언저리에 주저앉았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해 신고 있던 버선이 흙먼지로 너덜너덜해졌다. 기운 없이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호외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대충 먹으로 휘갈겨 쓴 글자들이 흙먼지를 부둥켜안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카와니시는 마른 세수를 했다. 신력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갑갑한 곳이었으나 집이었던 곳을 잃고, 심지어는 늘 곁을 지켜주던 사람마저 없다.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카와니시는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눈을 열어본다. 열리지 않았다. 카와니시의 눈에는 오랜만에 선명한 세상만이 보였다.
에이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의 명령으로 신궁의 모두가 몰살당했다면 왕은 이미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왕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을 만한 핏줄인 둘째 왕자는 이미 죽었고, 사사건건 예지를 들먹이며 왕의 결정권에 제재를 걸던 신궁의 사제들도 모조리 살해당했다. 남은 사람은 에이타와, 왕의 뜻에 적의를 품은 예비 반란분자들뿐. 세미 에이타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엮여 죽을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카와니시에겐 더 뜸을 들일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한다. 신력도 없이 저 높은 왕궁의 벽을 넘을 수 있을 리 만무했건만 당장 에이타를 만나러 가야 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전생의 그를 그리 허무하게 보내놓고, 이번에도 그가 홀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도록 놔둘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흐름을 불러보았다. 시퍼렇게 뜬 눈이 가장자리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다, 이내 눈가에 눈물처럼 피가 고였다. 눈알이 있는 자리부터 뒤통수까지 열이 오르고 곧 관자놀이까지 지끈거렸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니 간신히 뿌연 윤곽은 보인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기력이 엉망이 되어 일시적으로 사라진 신력은 분명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지만, 카와니시에겐 완쾌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윽…….”
더 견디지 못하고 카와니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와락 가린 채였다. 더 이상 눈을 뜰 수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카와니시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무력하다 느꼈다. 소중하다 여긴 사람을 지킬 수 없음에 절망했다.
“……겨우 찾았다.”
그러나 나락에 떨어지기 직전, 잿빛 그림자가 카와니시의 머리 위를 감싼다.
“카와니시 타이치.”
카와니시는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등진 그림자에 가려 눈을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통 캄캄했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나 달렸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한 발 앞선 곳에 시라부가 서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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