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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하던 원고인데 더 이을 것 같지 않아 쓴 부분까지만 공개합니다.
※ 인간과 초능력자가 대립하는 세계관으로, 아포칼립스에 가까운 설정들이 등장합니다.
※ 다소 잔인한 묘사, 등장인물들의 죽음 소재가 있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기둥이 무너져 철근이 콘크리트 사이로 드러났다. 이미 몇 층은 바닥이 기운 상태였다. 무전에서 신속하게 건물 밖으로 대피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천둥이 치는 것처럼 콘크리트가 무너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귓속을 에운다.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엉망으로 엉킨 잡음이 듣기 싫어 트랜시버를 빼낸 카와니시는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달렸다. 떨어지는 콘크리트 천장에 얻어맞아 허벅지가 아프게 부풀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세미가 이곳에 있다. 데리고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폭파로 인한 긴급 상황에 바깥을 지키던 서포터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지원을 바라기도 어려웠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급 무전기를 꺼내 카와니시는 주파수를 맞췄다. 가까스로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무전기 너머에서 시라부가 외쳤다.
―미친놈아, 빨리 빠져나와!
계단을 세 칸씩 올랐다. 건물이 기우뚱하면서 중심을 잃고 카와니시는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헐거워진 뼈가 덜컥거린다. 통증을 인내하려 입술을 악문 채로 카와니시가 시라부에게 물었다.
“시라부, 선배 위치 좀 알려줘.”
―못 구해. 그러다가 너까지 죽어!
“지금 6층이야. 옥상에서 내려왔을 테니 지금쯤 8층에 있지 않을,”
쿠궁, 무거운 게 등 뒤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굉음을 듣고 시라부가 대신 비명을 지른다. 다행이 부딪친 곳은 없다. 이제는 감각조차 무딘 다리를 끌어 달리며 카와니시는 다시 시라부를 재촉했다. 그러나 답이 들리지 않는다. 무전 상태가 좋지 못했다.
바닥이 기운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 부상당한 다리에 무심코 힘을 주다가 잇새로 신음이 터졌다. 무너지고 있는 계단을 건너뛰어 무사히 착지한 카와니시는 그 순간 근처에서 들린 총성에 몸을 굳혔다. 가까이에 있다. 아직까지 건물 안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람은 세미와 카와니시 둘뿐이었다. 세미가 근처에 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건물이 곧 무너질 테니 빨리 찾아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둘 다 매장될 게 분명했다. 카와니시는 먼지더미 속에서 세미를 불렀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카……니시, 당장…….
시라부로부터 무전이 들렸지만 주위의 소음과 불안정한 통신 상태 덕에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카와니시는 무너지고 있는 기둥을 아슬아슬하게 돌았다. 시야가 트이자마자 쏟아지는 햇빛에 줄곧 어두웠던 눈앞이 순간 하얗게 점멸했다. 빛을 차단하던 벽과 전면유리가 통째로 날아가 그대로 드러난 넓은 공동,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건물과 함께 중력을 향해 추락하기 직전 카와니시는 그곳에서 두 명의 그림자를 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바람결에 따라 머리카락이 고정되지 않고 하늘하늘 흔들린다. 기억한다. 본 적 있다. 무기가 없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는 총을 들고 있었다. 카와니시의 시선이 느리게 돌아간다. 그 앞에는 피투성이의 사람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당장 달려가 그를 낚아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물 바깥으로 몸을 던져 낙하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움직임이 느렸다. 저 붉은 머리의 남자 말고도 초능력자가 또 숨어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러면 그저 부상 탓에 다리가 자리에 굳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구해야 한다. 데리고 나가야 한다. 서둘러서 나가지 않으면…….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가기 직전, 바닥이 기울었다. 굉음과 함께 창밖에는 헬기가 나타났다.
생존자 발견
구조 시도■니다.
서둘러―!
건물이 무너져요
당■ 빠져나와야,
그대로 있■면
죽어
카■니시!
카와니시 타이■
카와니시.
이윽고 카와니시는 디디고 설 땅을 잃었다. 건물의 잔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중력을 따라 낙하하기 시작하는 순간 세미는 카와니시를 보았다. 똑바로 눈을 마주보고, 그는 우는 듯 웃는 얼굴로 카와니시의 이름을 불렀다. 절규에 가까운 카와니시의 대답은 함께 낙하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가로막혔다. 파편들에 몸을 두들겨 맞기도 잠시, 카와니시는 무너지던 건물 아래를 비행하는 헬기 안에 내던져지듯 착륙했다. 시라부가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건물의 잔해에 함께 묻혔을 것이다.
“받았어요!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빠져 나갑니다.”
“라져.”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건물의 파편을 피해 헬기는 곡예를 하듯 매끄럽게 잔해 속을 빠져나왔다. 카와니시는 얼이 빠진 얼굴로 거대한 모래폭풍 사이로 순식간에 소멸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소음에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남았다.
작전명 ‘크레이터’, 에덴의 대패였다.
낙원
경상자와 중상자를 합쳐 부상자는 대략 육십 명 남짓, 그리고 열세 명이 사망했다. 그마저도 온전히 찾은 시신은 고작 네 구였다. 나머지는 무너진 건물 잔해 밑에 깔려 팔이라든지 다리라든지, 신체 일부가 떨어져나간 채로 발견되거나 운이 나쁘면 그 신체 일부만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도 아닌 나머지 시신들은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잔해들을 다 치우지 않는 이상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금세 수색작업은 중단되고 요원들은 본부로 복귀했다. 오랫동안 짙은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기에, 사망자들을 위한 조촐한 장례식장이 본부 지하에 마련되었다. 에덴의 문장이 새겨진 관이 열세 개가 있었다. 개중에는 시신을 찾지 못해 빈 것도 있으리라. 다만 그 모습을 지켜볼 동료들과 오열하다 실신까지 하는 유족들의 마음을 배려한 것임을 시라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사실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나도 쉽게 죽어나가고 점차 그 죽음들에 무뎌지게 되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참혹한 광경을 오래도록 눈에 담는 것은, 이 전쟁의 희생자들을 잊지 말자는 시라부 나름대로의 다짐이다.
카와니시는 세미 몫으로 배정된 관 앞에 처량하게 앉아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벽에 기댄 채로 그는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얼굴을 처박은 채 미동도 않았다. 먹으라고 가져다준 샌드위치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함께 둔 물에는 어느새 먼지만 동동 떠있다.
“……카와니시. 일어나봐.”
이곳의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를 잃었을 테니 그 상실감과 좌절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한 고통이었다. 그래서 시라부도 한풀 죽은 목소리로 카와니시를 불렀다. 여전히 그에게선 대답이 없다. 벌써 삼 일째였다. 먹을 것은커녕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으니 이대로 가다간 실신할 것이다.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채근할 생각이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서 시간 낭비만 해봤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를 다그치기에는 시라부도 많이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절차상으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있었다. 이쪽은 시간이 없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달려야 그들의 발끝에 간신히 미칠 정도였으니 한 번의 실패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카와니시에게 그 길에 동행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세미 에이타는 카와니시 타이치의 파트너였다. 시라부나 카와니시보다는 두 기수 위의 선배로, 이곳 에덴에서 꽤 평판이 좋은 요원이었다. 실력을 두루 인정받아 작전에서는 늘 최전방에 서서 아군을 이끌었고, 탁월한 감각과 센스로 전투에서는 ‘그’ 초능력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격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잘 알아서 선후배 요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배려하는 것을 잘하는 주제에 제 고집도 단단히 있어서는 스스로가 결정한 사안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면도 있었다. 여러모로 배울 게 많은 선배였다. 마지막까지, 이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혹여 우리 중 누군가가 초능력자들의 습격에 의해 죽을까봐 스스로 미끼가 된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부장님께는 쉰다고 말씀드릴게.”
카와니시의 연인이었다.
슬퍼할 시간으로 딱 나흘만 주겠다는 본부장의 명령을 차마 카와니시에게 전할 수 없었다. 시라부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세미의 관이 보였다. 아마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관은 비었다. 주인이 없는 관에 대고 시라부는 짧게 묵념하고 돌아섰다.
“카와니시 타이치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작전에서는 제외되기를 요청합니다. 예,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빈자리는 제가…….”
통화는 경직되어있었다. 대규모로 오래 전부터 기획해온 작전이 에덴의 대패로 끝나자 본부의 모두가 긴장상태였다. 한 명의 요원도 아쉬운 판국에 사적인 이유로 제명을 요청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시라부는 그렇게 했다. 본부장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있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일을 처리할 사람이 모자라 복귀한 이후로 잠까지 줄여가며 여기저기 발로 뛰고 있는 시라부도 사실은 휴식이 필요했다.
장례식장을 나와 시라부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뒷목부터 흐른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찬물로 세수를 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온 곳에 죽음의 냄새가 도사렸다. 시라부는 피곤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고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지옥이었다. 마지막 한계선까지 다다라 어쩌면 멸종에 이를지 모를 인류는, 결계 밖의 초능력자와 싸우고 있다.
*
세미는 에덴 소속 하이레벨 전투요원이다. 힘과 기술, 스피드 등 여러 평가요소에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 투입 직후 팀장 자리를 꿰찰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인간인 주제에 괴상한 능력을 가진 외부의 적들과 거리낌 없이 싸우고,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곤 했다. 그랬으니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인인 카와니시를 포함해 한 기수 후배인 시라부, 에덴의 경계 끝까지 몰린 극단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그의 죽음은 에덴의 큰 손실이었다. 숭고한 희생으로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았지만, 차라리 그가 사는 편이 더 희망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희망 같은 건 이미 없었는데 세미가 억지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경계의 바깥에 희망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 작전을 이끌었던 현장 요원인 세미가 죽었기 때문에 상부에 경과를 보고할 사람이 없었다. 카와니시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좀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죄다 현장의 폭발에 휘말려 죽거나 다쳤으므로 멀리서 서포터 역할을 했던 시라부가 그 일을 떠맡게 되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귀찮음을 따질 수는 없었으므로 시라부는 군말 없이 제 임무를 받아들였다.
……사실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미야 워낙 제 몸 챙기지 않기로는 유명했으니 지금도 응급실에서 주치의인 스가와라의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어가며 치료를 받고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끝이 있는 인간이었고, 주위에서 수두룩하게 사람이 죽어나갔음에도 세미는 영영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적어도 시라부나 카와니시에겐 그다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본부 전체가 고요했으니 사령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커다란 책상 앞에 앉은 전술팀 사령관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는 일격에 다수의 초능력자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크레이터’ 작전의 이행을 강력하게 관철하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 이번 작전의 실패를 더 뼈아프게 여길 거였다. 위험 부담이 크다며 작전에 나갈 것을 거부했던 세미는 결국 동료들만 사지로 내몰 수 없다면서 최전선 팀의 우두머리를 맡게 되었지만. 시라부는 속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달랜다. 세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타인을 비난하는 순간 시라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터였다. 그랬으니 인내해야 한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작전이었고, 본 작전을 알고 있는 건 팀장과 저, 그리고 위성 발사를 조절한 컨트롤타워의 사령관뿐이었는데도 작전이 누설되었습니다. 데이터가 빠져나갈 구멍을 며칠 간 조사했음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미래를 예측하는 초능력자가 이브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허. 제일 우려하던 일이로군.”
“하지만 한계는 분명 있을 겁니다, 에너지원이 무한한 것은 아니니.”
사령관의 표정이 회의적이었다. 간략하게 형식적인 보고를 마친 후 시라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팀장이었던 선배가 죽었고, 그밖에도 큰 희생이 났습니다. 중요한 전력인 S팀이 의욕을 잃어 전투불능상태고, 이러다 초능력자들이 불시에 기습이라도 해오면 결계가 있다한들 지금 인원으로서는 감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다 포기하고 죽자?”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시라부는 조용히 입 안쪽의 연한 살을 질겅거렸다. 최근 초능력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경계의 끝까지 몰린 인간들이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냐는 도발과 무시였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랬으니 에덴 쪽에서 먼저 그들의 신경을 긁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인명피해가 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시라부는 사령관의 명령으로 징계를 받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이번 일로 그도 다시 쉽게 이브를 건드릴 생각 따윈 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나마 불안정한 평화가 지속되겠지. 그동안 요원들의 사기가 오른다면 다행이겠지만…….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지.”
“……예?”
“아니, 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초능력자에게 그런 능력까진 없을 테지.”
사령관의 말은 꽤 꺼림칙한 것이었다. 목소리도 음험해서 듣기에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딱히 시라부의 대답을 기대한 것 같진 않았으므로 시라부는 침묵했다. 짧은 보고를 끝내고 사령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라부는 갈 곳을 잃고 헤맨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카와니시는 주인 없는 세미의 관 앞에서 꼬박 일주일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 길로 병원에 입원했으니 지금쯤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시라부는 혼자 있기 싫었다.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스가와라 씨.”
“어, 시라부. 카와니시 병문안?”
복도에서 스가와라와 마주쳤다. 눈가가 붉었다. 잘 울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시라부는 여전히 세미의 죽음을 들은 직후 스가와라의 일그러진 얼굴을 잊지 못한다. 시신도 없는 죽음을 두고 스가와라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오열했다. 든 사람은 알아도 난 사람은 모른다고, 그에게도 세미의 빈자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지 않았을까.
“끼니 거르지 말고. 얼굴에 살이 쏙 빠졌는데.”
“카와니시는 좀 어때요.”
“경과는 괜찮아. 단지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던 것뿐이니까. 지금 자고 있어서 얼굴만 봐야겠네.”
“괜찮아요. 별로 할 말도 없고.”
시라부에게 살이 빠졌다며 잔소리를 했지만 스가와라도 만만치는 않았다. 이곳에서 의사는 굉장히 바쁜 직업이다. 철야가 일상이었으니 눈 밑이 퀭한 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바쁜 일이 있다며 곧장 자리를 떴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라부는 천천히 병실 앞에 섰다.
카와니시는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유일한 생존자였다. 발판이 무너지면서 중심을 잃었지만, 시라부가 타고 있던 헬기의 조종사가 기가 막힌 운전으로 떨어지는 카와니시를 타이밍 좋게 받아낸 덕에 살아남았다. 꼴은 엉망이었지만, 물리적인 충격은 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세미가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극에 달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자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시라부는 위로하는 것엔 서툴렀으므로 카와니시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위로하는 것도 우습다. 늘 같이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무슨 말이라고 그에게 위로가 될까. 차라리 침묵이 어울렸다.
카와니시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링거를 꽂고 창백한 얼굴로 잠에 든 채였다. 시라부는 가져온 봉투에서 과일을 꺼내 쟁반에 담았다. 그냥 그렇게 나오기는 좀 그래서, 이미 잠든 사람이니 무슨 말이라도 해보자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시라부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시라부는 카와니시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병실을 나오고 난 이후에야 시라부는 홀린 듯 뱉었던 그 말이, 정말이지 그보다 더 우스울 수 없음을 자각한다.
지금 살아서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본부는 한동안 초상집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또 조용하기는 쉽지 않아 응급실이며 복도며 다들 수군수군했다. 작전의 실패로 환자가 급격하게 늘어나 병원이 복작복작해진 만큼 여기저기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의사나 간호사를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응급실 담당의들은 언제나 바빴지만, 특히 요 근래에는 밥 먹듯 철야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스가와라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야마가타는 의료 면허를 가진 의사였지만 병원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 어서 낫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한데 뭉쳐서 영 꿉꿉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직업 특성상 병원을 아예 가지 않을 수는 없어 필요할 때에는 서둘러 다녀오곤 한다.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야마가타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병원 복도를 지나쳤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초능력자가 현실에 나타난 것은 열다섯 해 전이었다. 당시 인간 밖의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련된 영화나 문학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유명 회사의 영화에서 주로 초능력자는 아주 위험한 존재로 지구 밖의 위협을 몰고 오기도 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대상을 부수기도 했다. 그 속에서 초능력자는 아주 온건한 존재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했는데, 안타깝게도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인류는 초능력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한 초능력자들도 그들의 통제를 받아들였지만 실상은 아주 달랐다. 인간은 나약하다. 무기가 없으면 그들과 대치해 싸울 수도 없을 만큼 가녀렸다.
홀연히 인간들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초능력자들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공할 능력을 지녔지만 인간에 비해 극소수였던 그들이 ‘이브’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뭉치고, 자신들을 억압하려는 인류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명 소수였지만 강자였다. 능력마다 강함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정도는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수치였다. 탄도 미사일이 먹히지 않고, 총알도 빗겨내는 그들의 능력 앞에서 인류의 문명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도 채우지 못해 인류는 최후의 경계선까지 밀렸다. 5년 전 개발된 리미테이션 건의 활약으로 더 이상의 후퇴는 막을 수 있었지만, 반격조차 할 수 없었던 그간의 패퇴로 인류에게는 온통 아픈 상처만 남았다. 살아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인구 역시 눈에 띌 만큼 줄었다. 그렇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땅이 아니게 되었다.
초능력자들의 습격이 주춤한 틈을 타 인간은 최후의 방위시설인 ‘에덴’을 설립한다. 유일하게 초능력자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무기인 리미테이션 건의 스페셜리스트를 양성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기 위해서였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야마가타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손에 든 차트를 대충 책상 위에 던져두고 의자에 앉아 불투명한 실험실 너머를 바라보았다. 야마가타만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고요하다. 시체 안치실이나 다름이 없어 기온도 다른 곳보다 낮아 퍽 을씨년스러웠다.
야마가타는 생명공학을 전공한 연구원이다. 가까스로 전쟁에서 살아남아 에덴 생체기술연구부에 소속되었다. 워낙 머리가 비상한 덕분에 일찌감치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시킬 수준에 이르렀지만 정작 야마가타는 그 일에 환멸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시대에서는 교수였고, 전쟁 중에는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였다. 생명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야마가타는 일찍이 지금보다 더 지옥 같은 일을 겪은 바가 없었다.
인간이 초능력자들보다 나은 것은 수가 많다는 것뿐이었다. 하나뿐인 그 장점을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초능력자들은 빠른 속도로 인구를 줄여나갔다. 아직까지 그들보다 인간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전 세계 인구가 멸종하다시피 줄어들었으니 사실상 에덴은 최후 인류의 무덤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에덴에서는 초능력자에 대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열쇠를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야마가타의 주요 업무였다. 매번 같은 환경에서 조건만 조금 바꾸어 다른 실험을 지속하면서 쉽게 성과를 보여주지 않는 것에 염증을 느낄 법도 했으나, 야마가타는 차라리 이대로 초능력자가 인류를 멸종시킬 때까지 아무것도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비인도적이고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라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는 일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팀장님!”
노크 소리가 다급했다. 차트를 천천히 살피던 야마가타는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숨이 벅차다. 복도까지 에어컨을 틀어놓아 선선한 이곳에서 관자놀이에 땀까지 흘렸다. 얼마나 급박하고 심각한 일일까, 야마가타는 내심 궁금한 표정을 했다.
“성공이에요! 깨어났다고요!”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야마가타는 험악하게 미간을 구겼다.
왜 깨어났을까, 대체 무엇에 그리 미련이 남아서. 그 꼴을 하고 죽었으면 차라리 끝까지 죽어있지 멸망이 가까워진 이 세상에 도대체 바랄 게 무엇이 더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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